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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한국전쟁

가장 참혹했던 전쟁, 한국전쟁 - 인천상륙작전

by uesgi2003 2014. 6. 19.


제가 서론으로 개인의견을 밝히는 것 말고는 역사이야기 본문에서는 가능한 한 외국 역사학자의 시각과 의견을 그대로 전달하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100% 객관성을 가져갈 수는 없어서 개인의견이 들어가는 부분은 파란색으로 표시를 하고 있죠.


어떤 사건이던 만장일치로 의견이 모이는 경우는 드뭅니다. 하다 못해 일본인총리에 대해서도 무려 29%가 동의하고 있으니 오래된 사건에 대해서는 더더욱 의견이 갈립니다. 특히 그 사건을 정리하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의견이 극과 극으로 나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에서 우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원수로 판단하지만 일본은 불세출의 영웅이죠. 제3자는 그냥 우리와 일본이 싸웠다는 정도로만 평가합니다. 


제 역사이야기에서는 앞에서 설명한대로 다양한 시각을 여러분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어떤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설명이 다른 이야기와 상충될 수 있습니다. 이번 이야기 맥아더와 인천상륙작전처럼요. 


(크롬에서 이야기를 정리하고 있는데... 고생이 심합니다. 저장하고 나면 폰트크기는 물론이고 심지어 색깔까지 바뀝니다.)


더글라스 맥아더의 마지막 승리


더글라스 맥아더를 존경하거나 비난하는 사람 모두, 그가 (작전명 크로마이트Chromite) 인천상륙작전처럼 승리를 갈구한 적이 없다는 점에는 의견을 같이 한다. 인천상륙작전은 낙동강 방어선에 두들겨 맞고 있는 UN군을 구원하고 북한인민군(NKPA)에게 치명타를 날려서 한국전쟁을 조기에 끝낼 것처럼 보였다. 

유감스럽게도, 1950~51년의 잔인한 겨울 동안, 중공군의 대대적인 개입으로 UN군의 행운은 불운으로 바뀌었고 맥아더의 바램도 물거품이 되었는데, 조기 종전을 위해 압록강으로 서둘러 달려간 맥아더가 자초한 책임도 있다. 1950년 늦가을, UN군은 마지막 승리를 축하하는 대신에 다시 한 번 생존을 위한 전투를 벌여야했다. 



10군단과 8군이 단거리 경주를 하듯이 북진하다가 중공군에게 퇴로를 차단당해 전멸의 위기까지 몰렸습니다. 장진호 전투는 미국 역사상 진주만 다음의 패전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이 상황을 간신히 모면한 맥아더는 사령관에서 해임되었고, 1950년에 끝낼 수도 있었던 참혹한 전쟁은 1953년 7월까지 수많은 목숨을 빼앗는 교착상태가 이어졌다. 그리고 서로의 체면만 살린 휴전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맥아더는 대중에게 인기가 높은 인물이어서 타임지 표지인물로 여러 차례 등장했습니다. 이 그림은 1944년 10월 30일 판입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남침에 남한과 미국은 무방비상태로 당했고 지도자들은 그 후 몇 개월 동안 북한에 휘둘리는 전투를 벌였다. 그렇지만 맥아더는 북한군의 배후에 상륙할 생각을 하면서부터, 북한군을 섬멸하고 북진해서 한국을 통일시키겠다는 뚜렷한 목표를 가졌다. 문제는 맥아더가 자신의 목표에 대해 워싱턴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 행정부와 어떤 교감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백악관과 펜타곤은 남한의 위기상황 그리고 막강한 북한군에 맞설 충분한 전력을 모으는데 몰두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하루 빨리 미군을 한국에서 빼낸다는 기본목표 외에는 전략적 목표나 큰 그림을 가지지 못했다. 


맥아더의 극동사령부조차도 적의 진격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고 서울을 수복한다는 목표만 가지고 있었다. 그 덕분에 맥아더는 자유롭게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그의 계획이 큰 힘을 얻었다. 워싱턴에서는 북한영토로 진주해서 한반도를 통일시킨다는 목표에 대해 동의하지 않고 의견을 달리했다. 


반면에 북한의 김일성은 매우 단순하고 직설적인 전쟁목표를 공개했다. 미군이 참전하기 전에 꼭두각시 한국군을 궤멸시키고 한반도 전체를 점령해서 적화통일을 하겠다는 목표였다. 속전속결로 승리한 후에 소련과 중국의 후원 그리고 서방세계의 인정을 받을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등뒤를 그대로 드러내면서 그의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미국은 2차대전에 비해 훨씬 적은 병력을 가지고 북한을 상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다. 서류 상으로는 미육군과 해병사단은 3개 대대와 3개 연대, 지원포병과 기갑, 공병과 특수부대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병력이 훨씬 모자랐고 무장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 더 심각한 것은 훈련이 안된 신병들이었다. 다행히 막강한 화력과 기계화 전력으로 낙동강 전선에서 날로 더해가는 북한의 압박을 상쇄시키고 있었다. 


소련은 서방세계에게 공산혁명은 숙명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북한을 무장시켰고, 소련의 T-34는 한국군을 순식간에 궤멸시키고 한반도 남쪽 끝까지 밀어붙였다. 



UN회의에서 미국대표부가 북한군이 보유한 소련무기를 보이며 소련의 개입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낙동강 전투에 대해서는 앞에서 충분히 설명했기 때문에 생략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맥아더는, 자신의 참모와 워싱턴이 패전을 걱정하는 동안에도 인천 서쪽 해안의 대담한 상륙작전을 생각했다. 그는 해병강습 후에 육군사단을 투입하는 작전을 결정하고는 7월 초부터 워싱턴에 병력지원을 요구하고 있었다. 도쿄에 있는 도날드 갤러웨이 대령 팀이 맥아더의 결정을 이어받아 개략적인 블루하트Blueheart작전을 입안했지만 낙동강 방어선의 상황이 너무 급박해서 7월 12일에 취소할 수 밖에 없었다. 

맥아더는 그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고 8월 15일, 새로 부임한 클라크 루프너 소장에게 9월 중순 개시일정으로 작전계획을 수립하라고 명령했다. 인천의 조수 차이를 분석한 후에 9월 15일로 결정되었다.


투입할 부대가 결정되면 바로 훈련에 들어갔다. 7보병사단이 기본적인 상륙훈련을 받는 동안 새로 구성된 10군단 지휘부는 한국행 배를 타기 직전까지 공격과 돌파연습을 했다. 전세계에서 곳곳에서 소집한 해병과 이미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해병은 훈련을 받을 겨를도 없이 작전에 투입되었다.

크로마이트 작전의 가장 큰 문제는 작전을 성공시킬 유능한 병력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 당시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해병군단 전력은 겨우 74,279명이었고 일부 병력이라도 크로마이트작전까지 집결시키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7월 2일, 맥아더는 워싱턴에 해병 연대전투단(RCT)을 요구했다. 3일에는 1,200척의 상륙정을 , 5일에는 공병특수여단을 요구했다. 


맥아더는 워싱턴과의 끈질긴 협상끝에 제1 해병사단의 2개 연대를 얻어냈고 제1 해병연대도 일본행 배에 태웠다. 미국 대사관에 배치된 해병, 지중해의 1개 대대 그리고 해병예비군까지 모두 소집해서 마침내 해병 1개 사단을 구성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제1사단의 3번째 연대는 크로마이트 작전이 개시될 때까지 도착하지 못했다. 


원래 육군의 제1 기병사단은 블루하트작전에 투입될 예정이었지만 작전이 취소되면서 바로 부산에 투입되었다. 제2 보병사단도 크로마이트작전에 투입될 예정이었지만 부산에 투입되었다. 이제 남은 육군병력은 일본에 있는 제7 보병사단이었는데 장교, 하사관과 군무원이 대거 부산으로 차출된 상태였다. 

8월 1일부터 미국에서 도착하는 모든 육군병력은 7사단을 충원하도록 했고 2차대전 참전경험이 있는 장교들이 큰 힘이 되주었다. 아직도 병력이 크게 모자랐기 때문에, 맥아더는 낙동강 방어선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수 만 명의 피난민 중에서 징집한 8,000명의 한국군(물론 사격훈련도 못받은)도 채워넣었다. 


7월 초 전선으로 향하는 군경입니다. 대부분이 군복도 착용하지 못한 다급한 상황입니다. 


해상수송도 큰 문제였다. 미해군은 2차대전 당시에 엄청난 양의 특수 상륙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 봉인상태였고 유지보수는 물론이고 승무원도 없었다. 맥아더의 재촉을 받은 해군은 다급하게 민간상선 선원과 심지어 일본인까지 동원했다. 47척의 LST가 고베항을 출발했는데 그 중에 37척은 일본인 선원이 몰았다. 상륙정 중에는 무전기나 전기시스템을 갖춘 것이 드물 정도였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상륙군을 지휘할 사령부도 없었다. 8월 21일, 맥아더는 워싱턴의 허가를 받아 10군단을 창설하고 자신의 참모장 알몬드 소장을 군단지휘관으로 임명하고 루프너 소장을 군단 참모장으로 임명했다. 10군단 참모는 모두 극동사령부에서 구성했는데 상륙과 동시에 상당한 능력을 발휘했다(지난 이야기에서도 지적했듯이 알몬드는 10군단장인 동시에 극동사령부 참모장이었고 상륙 후에도 워커의 8군에 흡수되지 않고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하는, 전사가들이 비난하는 기이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부하가 상관 노릇을 했고 장진호 전투 등에서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많은 전사가들은 맥아더의 정치적인 욕심으로 의심하고 있습니다.)


맥아더가 7월 초부터 인천상륙작전을 실행하기로 결정했지만 워싱턴, 도쿄와 한국의 많은 지휘관의 반대와 불만에 직면했다. 워싱턴은 인천이라는 특수성 그리고 촉박한 일정때문에 작전에 반대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기에도 부족한 병력과 자원을 마구 빼내간다는 이유가 더 컸다. 

7월 23일, 워싱턴이 상황을 파악하라고 보낸 육군참모총장은 상륙작전에는 동의했지만 훨씬 남쪽의 군산을 제안했다. 맥아더는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도쿄의 해군과 육군 참모도 한 목소리로 반대를 했다. 인천의 극단적인 조수차, 넓은 뻘밭, 빈약한 병참선, 상륙지점과 도심 간의 지나치게 짧은 거리, 병력부족, 촉박한 일정 등을 이유로 들었다. 

다시 한 번 맥아더는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했다. 그 날 밤에 워싱턴과의 전화회의에서 해병 2개 연대와 제1 해병사단의 동원허가를 받았지만 반대는 계속 이어졌다. 


(지리한 갑론을박은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거의 절대 다수의 지휘관이 군산 등의 대체지를 선호한 반면에 맥아더는 인천이라는 원래 목표를 그대로 밀고 나갔습니다.)


8월 26일, 맥아더는 작전명 크로마이트를 명명하고 28일에는 진행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실제로 받았는 지는 불분명하다.) 9월 7일, 워싱턴 합동참모본부(JCS)는 낙동강 방어선의 상황악화로 워커를 지원해야 한다며 마지막 제동을 걸었다. 크로마이트작전은 워커의 모든 예비군을 동원하는데, 국토방위사단이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의 4개월 동안 전력공백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일촉즉발의 긴장 속에 밤을 지새운 트루먼은 결국 작전을 최종승인했고 합동참모본부도 물러섰다. 



인천상륙작전  2개월 후인 장진호 전투 후에 트루먼 대통령이 국가위기상황 선포에 서명하고 있습니다. 트루먼대통령은 명령불복종 태도를 보인 맥아더와 악화일로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이제 낙동강 방어선 최전선에서 제1 해병임시여단Provisional Brigade를 어떻게 빼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았다. 원래 이 여단은 7월 29일에 부산으로 돌린 후에 일본으로 옮겨 보충을 하고 인천으로 향하기로 했었다. 5주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최전선에서 교전 중이었고 워커는 절대로 내놓으려고 하지 않았다. 

8월 22일부터 도쿄에 있었던 올리버 스미스 해병 1사단장은 맥아더와 알몬드에게 해병임시여단을 그대로 두어달라고 간청했다. 복잡한 협의 끝에 제7 보병사단의 1개 연대가 부산항의 배에 올랐고 워커도 동의했다. 


상륙군이 태풍의 끝자락을 뚫고 비틀거리며 올라가는 동안 해군 전폭기와 함포가 인천상륙지점을 두들겼다. 그리고 전함 미주리가 기만작전으로 동해안의 여러 곳을 포격하면서 북한군을 교란시켰다.



제1 해병임시여단이 낙동강 전투 중에 부상당한 아군을 옮기고 있습니다. 논과 농부 사진이 나온 김에 하나 더 인용하겠습니다. 미군이 포로로 잡은 북한군을 호송하는 장면입니다. 그래도 다행히 논 한가운데로 이동하지 않는군요... 했더니... 몇 명이 논 가운데 들어가 있군요. 



9월 15일에 단행된 실제 상륙작전은, 그 동안 있었던 온갖 난항에 비해, 너무나도 순조로웠다. 정보망이 파악한대로 인천의 방어는 매우 허술했다. 계획대로 오전 6시 25분에 해병 제3 대대가 M26 퍼싱전차 9대의 지원을 받아 월미도에 상륙했다. 오전 7시 50분까지 월미도를 완전히 장악했고 상륙본대는 만조를 기다리며 함선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월미도에 상륙한 해병 제3 대대입니다. 


마침내 오후 4시 45분, 상륙본대를 실은 상륙정이 출발했고 5시 33분에 일본인 노무자가 만든 대나무 사다리를 걸치고 인천방파제에 올라섰다. 



너무나도 유명한 사진이죠. 그런데 대나무 사다리로는 안보이는데.. 다른 곳에서 사용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상세한 진행은 아래 지도 3장으로 대체하겠습니다. 




자정까지 상륙군은 인천의 진입고지를 점령했고 자정이 넘어서면서 모든 계획목표를 달성했다. 16일 새벽이 되자 해병의 F4U-4 코세어가 경인 고속도로에 있던 북한군 T-34 6대를 공격해 3대를 부수고 한 대를 잃었다(이 한 대가 인천상륙작전에서 유일하게 발생한 항공기 손실로 알고 있습니다.) 공습을 피해 달아났던 나머지 3대는 해병의 퍼싱전차가 파괴했다. 



미해군과 해병의 주력 전폭기 F4U 코르세어입니다. 2차대전 최고의 걸작기 P-51 머스탱과 맞먹는 성능에 2톤가까운 폭장능력으로 당시 최고의 전폭기였습니다. 지금도 머스탱과 어느 것이 더 우수하냐고 말싸움이 벌어질 정도이니까 전투기로서의 성능도 엄지 손가락 두 개입니다. 

심지어 F18보다도 빠릅니다만... 믿거나 말거나... 믿는 사람이 바보죠. 



16일 정오, 인천동부의 주요 고지대를 점령해서 북한군의 포격관측을 차단했다. 육군의 7사단이 항구에 도착했다. 오후 6시, 제1 해병사단의 전술사령부가 설치되었고 지휘권을 해군에게서 넘겨받았다. 어둠이 내리기 전까지 경인고속도로도 장악했다. 


17일 날이 밝자 해병 제1 대대는 교전을 벌여 6대의 전차를 더 파괴했고 자정이 되기 전에 해병은 서울 전략요충지인 김포공항의 남쪽 부분을 장악했다. 상륙 3일차, 김포공항을 완전히 장악하고 한강까지 접근했다. 이제 코르세어가 김포공항에서 이륙해서 근접지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한국 해병과 합세해 서울진입을 눈 앞에 두게 되었다. 



위 아래 모두 서울 시가전 장면입니다. 북한군은 퇴로차단을 우려해 의정부 북쪽으로 전력을 이동시켜서 예상 외로 북한군의 저항은 미미했고 서울진입 일주일 만에 서울을 완전히 수복할 수 있었습니다. 

두터운 솜이불이 총탄을 막아준다고 해서 피난민들이 솜이불을 뒤집어 쓴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크로마이트작전은 이렇게 대성공으로 끝났다(양쪽 모두 비슷한 전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미군은 약 1,030명, 북한군은 약 1,350명의 손실을 입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먼저 맥아더의 신념, 고집과 재능덕분이었다. 그는 작전의 필요성에 대해 워싱턴뿐만 아니라 내부 지휘관들에게 성공적으로 설명했고 그들의 동의를 받아냈다. 

그리고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에서도 최대한의 전력을 동원한 미국의 시스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50년 당시, 유럽에서는 소련 100개 사단을 상대로 육군 1개 사단만 남겨두고 모든 해병병력을 긁어모아 투입했다. 해군은 방치된 LST를 급히 끌어내 일본인 선원까지 투입했고 공군은 북미 국토방위공군의 F-51D와 2차대전 참전 예비군을 투입해 상륙군을 근접지원했다. 

성공원인을 하나 더 덧붙인다면, 급조된 10군단의 참모진, 공군과 해병의 참모진의 헌신적인 노력도 무대 밖의 주인공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에 모든 전력을 투입했던 북한은 인천상륙작전으로 한반도 적화통일의 꿈을 접어야 했다. 전쟁 전에 보여준 워싱턴의 움직임 그리고 전비태세가 안된 미군을 보며 승산이 높은 도박을 감행했지만, 미국의 단호한 대처 그리고 16개 연합군의 참전으로 북한은 도박에서 졌다. 

크로마이트작전은 전략전술 원칙을 바꿀 정도의 신개념은 아니었다. 오히려 위기상황에 대비해 잘 훈련된 전력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교훈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줬다. 그리고 개인의 의지와 협력, 재능과 혁신이 얼마나 중요한 지도 보여주었다. 



북진을 위해 임진강에 임시가교를 설치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