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한국전쟁

가장 참혹했던 전쟁, 한국전쟁 - 낙동강 전투 (2부)

by uesgi2003 2014. 6. 17.


댓글이 달리면 지난 글을 다시 살펴보게 됩니다. 글을 써본 분들은 공감할텐데, 그 때는 안보이던 오타와 비문이 지금은 그렇게 잘 보입니다. 그래서 이야기는 정리하고 며칠 동안 3번 이상은 꼼꼼히 읽어야 하는데, 제가 지루함을 쉽게 느끼는 성격인데다가 여러분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은 조급증때문에 그러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포맷에 대해서는 저도 어쩔 수 없는 것이, 다음 에디터가 크롬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다 보니 편집모드에서는 폰트 등이 정상이었다가 저장하면 뒤바뀌는 오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대놓고 오타와 비문은 양해해달라는 뻔뻔한 주장이 아니라, 실수로 생기는 오타와 비문은 저도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고 노력하겠다는 사과입니다. 


가장 참혹했던 전쟁, 한국전쟁 - 낙동강 전투 (2부)


북한군의 신규 3개 사단이 합류해도, 연합군의 증원속도가 더 빨랐고 8월 첫 주가 되면서 워커의 병력은 북한군(70,000명)에 비해 20,000명 이상이 더 많았다. 그렇지만 북한군 대다수는 전투원이었던 반면에워커의 병력은 일본부터 시작되는 연합군 병참선을 지원하는 비전투원이 상당했다. 

워커의 전략은 기동 방어전이었다. 전방의 거점에는 소규모 병력을 배치했다가 공격을 받으면 후방에 있던 대규모 병력이 급히 구원하거나 반격하는 전략이었다. 지금은 기동 방어전략이 기본 교전원칙이 되었지만 1950년 당시에는 없는 개념이었다. 넓은 전선을 방어하는 이론에 불과한, 검증되지 않은 개념으로 생각앴다. 

당시의 방어전략은 거꾸로 대규모 병력이 거점과 거점을 연결하는 방어선을 지키고 후방의 소규모 병력이 기동력을 살려 위기지점에 투입되는 개념이었다. 


거점방어는 각 사단이 10~15km의 전선을 책임지지만, 워커의 4개 사단은 낙동강을 따라 최소한 30km 이상을 책임져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전력이 온전하지 못한 사단병력으로는 너무 얇은 방어막이었고 기동 예비군을 따로 만들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비교적 조용한 지역과 신규병력으로 임시 반격예비군을 구성하고 북한군이 전선을 돌파할 때마다 투입하기로 했다. 

방어선 내의 잘 만들어진 철도와 도로망 덕분에 워커는 반격예비군을 적절하게 투입할 수 있었다. 



미국본토에서 실리고 있는 M4 셔먼 중전차(포신이 2개인 것을 보면 화염방사전차)입니다. 2차대전 당시에 M4 <- 4호 전차 -> T-34의 전적은 많았지만 M4와 T-34의 전투는 없었기 때문에 한국전쟁에서 많은 관심을 모았었습니다. 그렇지만 M4가 대거 투입될 당시에는 공중폭격 등으로 북한군의 T-34 전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한국의 지형이 워낙 험난해서 대규모 전차전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사진은 원본이 워낙 고화질이라 줄여도 이 정도 크기이군요. 


워커는 휘하 군단사령부와 참모진이 없었기 때문에 원맨 쇼를 벌여야했다. 그는 지프와 L-19 버드독 경비행기를 타고 위기에 몰린 전선을 돌아다니며 반격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그래도 다행히 수석참모 유진 랜드럼Eugene Landrum 대령이 큰 도움이 되어주었다. 

랜드럼은 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게서 알래스카 알루샨 열도를 탈환한 지휘관이었고 1944년 7월 노르망디 전투에서는 제90 보병사단을 지휘한 소장이었다.



알루샨 열도 전투는 지도의 가장 위쪽에 보이는 알래스카 서쪽 끝의 섬들에서 벌어진 전투입니다.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을 앞두고 미국의 전력을 분산시키고 알루샨 열도에서 일본본토로 이어지는 해로를 막을 목적으로 알루샨에 기동대를 보내 점령했지만, 오히려 자신의 전력만 분산시키는 결과가 되었고 무엇보다 미군이 두려워하는 제로기를 온전히 노획하는 동시에 앞으로 있을 태평양전선의 상륙전을 미리 연습하는 귀중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지도는 클릭하면 커집니다.


사단장에서 해임되고 대령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었지만 워커는 늘 그를 랜드럼 장군으로 불러주었다(준장과 소장으로 진급한 것은 임시조치였고 90보병사단의 전과가 형편없어서 전임과 랜드럼 모두 연거푸 해임되었습니다.) 그는 침착하고 전문적이며 협동심이 강한 지휘관으로 알몬드(맥아더의 참모장)와는 완전히 다른 류의 사람이었고 워커는 전적으로 그를 신임했다. 실제로 워커의 부관 역할을 했다. 

그는 한국의 모든 병력을 분석한 후에 예비군으로 긁어모아 구멍을 틀어막는 중요한 임무를 가졌다. 랜드럼 '장군'이 사령부로 복귀할 때마다, 워커는 "랜드럼, 오늘은 얼마나 많은 병력을 발굴했나?"라는 질문부터 했다. 


8월 5일~24일, 북한군은 4개 방향으로 낙동강 전선을 공격해들어왔다. 남서쪽에서는 1개 사간돠 1개 기갑연대가 진주-마산-부산 축을 따라 전진하면서 방어선의 왼쪽을 포위하려고 했다. 워커는 25사단에게 새로 도착한 병력을 보강해주었다. 해병과 육군 혼성부대가 전쟁발발 후 처음으로 진주에서 북한 6사단에게 반격을 시도했다. 다급하게 이루어진 반격이라 전과는 신통치않았지만 북한군의 진격은 멈췄다. 

5일간의 전투에도 성과가 없자, 워커는 작전을 중지시켰다. 훨씬 북쪽의 상황이 매우 안좋았다. 


북한군은 남쪽 공세와 동시에 5개 사단과 105기갑사단의 일부전력으로 워커 방어선의 중앙을 공격해왔다. 상주부근에서 시작된 협공은 북과 남 양쪽에서 대구를 포위할 생각이었다. 대구-부산 철로가 위험하기 때문에, 워커는 낙동 돌출부Bulge라고 부르는 지역의 남쪽 공격에 더 신경을 썼다. 

북한군의 양동작전은 맞아떨어지지 않았고 워커는 다행히도 북과 남을 오가며 반격예비군을 투입할 수 있었다. 8월 17일, 그는 제1 해병여단과 제27 보병여단 중 일부를 북쪽에서 빼서 24사단과 함께 북한 4사단의 공격을 밀어내고 돌출부를 확보했다. 8월 24일, 워커는 새로 도착한 제2 보병사단을 방어선 중앙에 투입하고 24사단은 예비군으로 돌렸다.


 

24보병사단은 가장 힘들었던 초기부터 투입되어 온갖 고생을 다했습니다. 사진은 오산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처형당한 21연대 병사의 시체입니다. 

아래 그림이 부대마크인데 꽤 재미있죠? 하와이의 주식인 타로(토란) 잎이 부대상징입니다. 24사단의 전신이 하와이안 사단이었기 때문에 타로 잎 마크를 변형해서 사용했습니다. 하와이안 사단에서 갈라져나온 25사단도 타로 잎이 부대상징입니다. 




다른 북한군이 중앙과 남쪽 방어선을 공격하는 동안, 대구 북쪽의 2개 사단도 낙동강을 건너 방어선 북서쪽을 무너트렸다. 심한 압박을 받은 한국군 1과 6사단은 미 1기병사단 뒤까지 후퇴했고 워커는 8군 사령부를 대구에서 부산으로 옮길 수 밖에 없었다. 

그는 27보병연대를 북쪽으로 이동시켜 한국군 1사단과 함께 반격했다. 8월 18일, 미군과 한국군은 '볼링 레인'이라고 부르는 좁고 긴 계곡을 앞에 두고 방어선을 다시 펼쳤다. 


 


연합군도 고생했지만 후방의 민간인도 온갖 노무에 차출되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대형포탄을 산 정상으로 옮기고 있는 우리 아버지들입니다. 참고로 이번 한국전쟁 연재에서는 양쪽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설명이나 사진언급을 하지 않고 전사에만 집중할 예정입니다. 


이튿날 워커는 다시 23연대 중 일부를 더 투입했고 6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북한군 13사단은 더 이상 미군을 밀어내지 못했다. 


(낙동간 전선의 왼쪽 아래부터 각 부분을 설명하기 때문에 날짜가 왔다 갔다 합니다.) 8월 9일, 북쪽의 북한군 3개 사단은 대대적인 공격을 해왔다. 북한군은 동해안 방어선을 영덕에서 포항까지 그리고 부산까지 밀어붙이려고 했다. 북쪽 측면의 전선은 한국군 1군단이 배치되었지만 워커는 포병과 기갑부대 일부를 추가로 배치했고 태평양사령부 공군과 해군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해군의 화력지원만으로도 북한군이 해안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낼 수 있었지만 내륙에서는 북한군이 계속 남하했다. 8월 16~17일, 미 해군은 한국군을 소개시킨 후에 포항부근에 다시 배치시켰다. 한국 3사단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낙동강 전선은 이제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반면에 8월 초만 해도 대대적인 공격을 해오던 북한군의 기세도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8월 27일, 북한군은 다시 한 번 전력을 쥐어짜서 동시에 공격을 해왔다. 북한군은 초기 공격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는데도 여전히 98,000명의 병력을 투입하고 있었다. 



우리도 소년병을 징집하기는 했어도 부산 일대에 불과했고, 북한군은 점령지역 전체에서 소년병을 총동원했습니다. 사진은 미군에게 항복한 소년병입니다. 아래 사진을 보면 중학생 정도밖에 안되는 아이입니다. 사격훈련을 받았을 리가 없죠. 



워커는 5개 지역의 공격을 동시에 막아내야만 했다. 3일 후, 북한군은 대구와 서쪽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를 끊었고 한국군 3사단을 포항에서 밀어냈다. 



포항여중전투에서 71명의 학도병과 군경 일부가 물러서지 않고 북한군을 저지한 덕분에 3사단이 후퇴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영화 포화속으로가 포항여중전투 이야기인데... 추천하지 않습니다. 최근에 만들어진 영화 중에는 고지전과 태극기 휘날리며를 강추합니다. 


9월 10일, 중앙의 북한군은 1기병사단을 대구에서 거의 밀어냈고 2사단도 낙동강 돌출부로 밀어내며 영산부근까지 접근했다. 남쪽에서는 25사단의 방어선을 뚫고 마산으로 진격해왔다. 


워커는 점점 줄어드는 방어선 안에서 예비병력을 이리 저리 돌리면서 부산의 안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는 다시 한 번 2사단과 해병 1여단 혼성군으로 낙동강 돌출부를 확보했다. 동시에 24사단 21연대를 중앙에 투입하면서 25사단, 2사단 그리고 한국군까지 모두 지원하게 했다. 결국 후방으로 돌렸던 24사단 모두를 투입할 수 밖에 없었다. 

9월 12일, 워커의 방어선은 간신히 버티고 있었고 북한군의 공격을 최고조에 달했다. 북한군은 여전히 70,000명의 병력이 있었지만 보급로는 공군과 해군의 집중공격을 받아 보급과 통신 모두 제대로 동작하지 않았다.  

방어선 안의 UN군 병력은 이제 84,500명으로 늘었고 한국군 병력도 72,000명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부산항을 통해 500대의 중전차가 들어와 전차전력은 5:1로 압도했다. 



한국전쟁에서 사용된 전차 중 화려한 호랑이 도색한 차량들이 있었습니다. 1951년에 전차를 받은 89전차대대가 호랑이 도색을 한 사진입니다. T-26 퍼싱의 경우에는 아예 차체 절반이상을 호랑이 무늬를 그려넣어 시인성을 높였는데, 이미 공중은 장악했고 공산군의 전차전력은 거의 사라진 상태여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맥아더는 육군과 해병사단을 적진 깊숙한 인천에 상륙시켜 극적인 반전을 노리고 있었고 워커도 이 계획에 대해 알고 있었다. 워커가 미친듯이 전선을 누비며 방어선을 지키는 동안 8군 사령부 참모진은 북쪽으로 반격에 나서 인천상륙군으로 예정된 10군단과 연결할 계획을 고민하고 있었다. 

8월 말, 8군은 드디어 1군단과 9군단 사령부 구성을 허락받았다. 제대로 충원하고 조직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테지만 그래도 워커의 부담은 훨씬 줄어들었다. 


9월 15일, 10군단이 인천에 상륙했고 8군은 16일에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다른 부대가 방어선을 지키고 북한군의 발목을 잡아두는 동안 1군단이 대구 북쪽으로 밀고 나갔다. 1기병사단이 왜관부근의 교두보를 마련하면 24사단이 먼저 도강하고 한국군 1시단과 영국군 27여단, 그리고 혼성부대가 그 뒤를 다라 김천-대전-수원 축으로 북진해서 10군단과 연결하기로 되어 있었다. 


북한군은 결국 9월 22일에 포위망을 풀고 서둘러 후퇴하기 시작했고 9월 27일에는 오산부근에서 10군단 병력과 연결되었다. 이렇게 낙동강 전투가 끝났다. 북한군 14개 사단병력이 거의 전멸했고 겨우 2~30,000명 만이 북한으로 달아났다. 그렇지만 연합군도 큰 희생을 치뤘다. 7월 5일부터 9월 16일까지, 8군은 전사자 4,280명, 부상자 12,377명, 실종자 2,107명과 포로 401명의 손실을 입었다. 


 

셔먼전차가 파괴된 T-34를 밀어내고 있습니다. 


낙동간 전투는 끝났지만 한국전쟁은 더 오랜기간 계속되었다. 연합군은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10월 말,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개입했고 8군은 다시 38선 아래로 퇴각했다. 1953년 7월 휴전때까지 전쟁은 고착화되었다. 

워커의 낙동강 방어는 대단한 전과였지만 그 이후의 결정에 대해서는 많은 비난을 받았다. 먼저 워커는 반격에 나선 후부터 10군단과의 연결에 최우선 목표를 두어 방어선 부근의 북한군을 섬멸하지 못했다. 그리고 10군단과도 제대로 협력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워커도 중공군의 개입에 무방비상태로 당했다. 


그렇지만 전적으로 워커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는 낙동강 전투에서 적을 상대하는 동안에도 이해할 수 없는 지휘체계와 정치의 이중고를 겪었다. 정상적인 군지휘체계라면 10군단은 8군과 연결되는 즉시 워커의 휘하에 들어가야 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렇게 되지 않았다. 10군단은 계속 독립적으로 극동사령부의 명령에 따랐다. 

설상가상으로 맥아더는 10군단을 알몬드에게 맡기는 동시에 극동사령부 참모장의 직위도 그대로 두었다. 알몬드는 극동사령부 맥아더의 곁에서 10군단을 지휘한 반면에 워커는 부하인 10군단장을 통해 맥아더와 협의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이런 일은 전사역사상 전례가 없는 코미디였다. 


워커는 1950년 12월 23일에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다혈질의 성격대로 얼음판 도로를 지프로 달리다가 일어난 사고였다. 아들 워커 대위에게 은성무공훈장을 직접 주고 부대를 시찰하려던 길이었다. 



패튼이 교통사고로 죽자 워커는 "영웅이 그렇게 죽다니"라는 말을 했었는데 자신도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맥아더는 알몬드에게 별 3개를 달아주었고 그는 1953년에 중장으로 전역했다. 그렇지만 정의가 이기는 때도 있는 법이다. 유진 랜드럼은 1951년 2월에 전역하면서 소장전역 자격을 회복했다. 


워커의 낙동강 방어전략은 1954년 육군교범에 채택되었고 그는 1951년 1월에 4성장군으로 진급했다. 그가 완벽한 장교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미국 전사상 위대한 야전사령관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의 후임으로 제82 공수사단장이었던 매튜 릿지웨이가 8군 지휘를 맡았다. 



미 육군은 워커 대장을 기려, M41 경전차에 워커 불독 이름을 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