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이야기는 참혹했던 전쟁, 한국전쟁 중에서도 가장 참혹했던 장진호 포위망 돌파이야기입니다. 이 전투에 대해서는 맥아더 등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모두 결과론이어서 그냥 객관적인 이야기만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장진호 전투의 황초령 협곡Funchilin Pass 사건
1950년 12월 7일, 북한 산맥오지의 뼈저리게 추운 날이 밝았다. 고토리 평원 함정에 빠진 14,000명의 UN군은 지옥과 같은 10일을 견디고 있었다. 11월 26일, 중공군 제9 집단군Army Group은 장진호(일본어 초신)의 산악로 몇 km에 걸쳐서 길게 늘어선 미 제1 해병사단의 2개연대, 미 육군연대전투단Regiment Combat Team과 혼성부대를 강습했다.
고해상도의 그림을 못 구하겠군요. 제가 가진 자료에는 2페이지에 걸쳐 큰 그림으로 소개되어서 병사들의 지친 얼굴표정까지 볼 수 있습니다.
장진호 동쪽의 중공군은 이미 육군 31연대를 궤멸시켰고 생존자는 흥남항구까지 살기 위해 달려야했다., 이제 중공군은 해병을 포위했다.
10일 동안 끊임없이 달려드는 중공군과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추위를 견딘 1해병사단은 탈출준비를 마쳤다. 그렇지만 황초령 협곡을 잇는 다리가 날아가버려 북한에서 발이 묶일 위험에 처했다. 콘크리트 다리가 약 9m 정도 끊어져 해병은 부상자, 전사자와 차량을 모두 뒤에 남겨두고 사격을 받아가며 포위망을 돌파해야 할 판이었다.
끊어진 다리를 연결해야 하는데 해병은 고토리에 가교장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미공군에게 가교를 만들 수 있는 철판투하를 급히 요청했다. 다리를 연결하기에는 부족했지만 그것이라도 있어야 했다.
장진호의 물을 보내는 대형 송수관이 있는 지역의 다리가 끊겨있습니다. 건너편의 산악지형을 보면 장진호 전투의 악전고투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돌파하는 연합군뿐만 아니라 빈약한 보급에 공습까지 받아야 했던 중공군도 큰 피해(최소 37,000명의 전상자)를 입었습니다.
12월 7일 오전 9시, 8대의 C-119 플라잉 박스카가 고토리 상공에 나타났다. 각각 1톤이 넘는 가교장비를 싣고 있었다. 해병은 4개만 필요했지만 제대로 회수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2배인 8개를 요청했었다.
한국전쟁 직전인 1949년에 배치된 대형 수송기로 4.5톤의 수하물을 실을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비행기도 수송했군요.
수송기가 저공비행을 시작하자 중공군은 대공사격을 퍼부었지만 승무원이 귀중한 수하물을 조심스럽게 투하하기 시작했다. 흥암 부근 연포공항에서의 시험투하에 실패해서 가교장비 하나에 2중으로 G-5 낙하산을 달았다. 이번마저 실패하더라도 해병 1사단에게 다시 투하할 시간여유가 없었다.
(느닷없이 배경 설명으로 전환하는군요. 제가 그래서 Military Heritage를 안 좋아합니다.)
11월 말, 중공군의 기습을 받은 UN군은 북한에서 버티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기세좋게 UN군을 부산 부근까지 몰아넣었던 북한군은 더들러스 맥아더의 화려한 인천상륙작전으로 배후가 끊겼고 북한군은 포위망을 풀고 중국국경까지 달아났다. UN군이 중국국경 근처까지 진격하자,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은 친미국가와 국경을 맞댈 수 없다고 판단하고 참전을 결정했다.
중공군 전차부대의 모습입니다. 중공군이 극소수의 JS-2 중전차를 투입했다는 설도 있고 사진 2장도 있지만 한국전쟁이라는 확증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JS-2가 한국전쟁에서 사용되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북한 서쪽편의 미 8군은 38선을 향해 후퇴하고 있었고 동쪽에 있던 10군단, 그 중에서도 제1 해병사단은 위험한 상황까지 몰렸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압록강을 건너 몰래 배후에 침투했던 중공군의 강습으로, 이 지역의 UN군은 해안까지 온전히 후퇴한 후에 흥남항구를 통해 남한으로 빠져나가는 방법 밖에 없었다.
중공군 제9 집단군은 해병 1사단을 섬멸하라는 임무를 받았는데 불가능한 임무는 절대로 아니었다. 미해병과 혼성부대, 약 20,000명은 산악도로를 따라 길게 늘어진 상태였다. 중공군 9개 사단이 6:1의 압도적인 병력으로, 그것도 기습을 했으니 임무를 문제없이 완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해병은 중공군에게 없는 장점이 있었다. 그들은 중공군에 비해 훨씬 무장이 잘 되어 있었고 제공권은 완전히 UN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중공군 포로를 잡은 미군이 멀리 후방을 폭격하는 아군 비행기를 쳐다보고 있습니다.
1950년 10월, 1사단은 원산항에 내렸고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중장에게서 흥남을 거쳐 산맥 깊숙히 진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었다. 최종 목표는 압록강 국경이었다. 1사단 지휘관 올리버 스미스 소장은 알몬드의 명령이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군단과 도쿄 총사령부가 아무런 위험도 느끼지 못하고 있을 때에, 전투경험이 많았던 그는 뭔가 심상치 않은 냄새를 맡고 있었다.
맥아더 오른쪽의 깡마른 체구가 스미스 소장입니다. 그는 10군단장 알몬드 중장과 불화가 상당했는데, 장진호 전투에서는 그의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았습니다. 그의 선견지명이 아니었다면 해병 1사단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그는 해병대 대장으로 전역했습니다. 다른 지휘관과 달리 각반까지 찬 그의 모습을 보면, 그럴만도 하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8군과 10군단 전선에서 지난 10월부터 소규모 중공군 지원병을 자주 만나는 불길한 징조가 있었다. 두 군대 사이에는 120km나 되는 간격이 있었고 중공군의 대규모 병력이 침투하기 충분한 공백이었다.
11월 말에 함정이 드러나면서 스미스의 사단은 끔찍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몬드는 산악지대로 최대한 빠르게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스미스는 연대장들에게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라고 반대명령을 내렸다. 그 덕분에 중공군이 공격을 시작했을 때에, 각 연대는 소규모 단위가 아닌 연대단위로 대응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제1, 제5와 제7 연대가 산개해 있었고 1,500대의 차량이 단 하나의 산악도로에 널려 있었다. 그리고 해병은 유담리부터 하갈우리, 다시 고토리까지 후퇴하는 내내 중공군의 포위공격을 받았다.
아래는 서부전선의 8군과 동부전선의 10군단이 중공군의 기습을 받고 밀려나는 전황을 설명하는 지도입니다. 결국 1.4후퇴로 서울을 다시 내주게 됩니다. 중공군 참전정보가 속속들어오는데도 이미 북한에 있던 중공군이라고 오판했고 병력규모도 겨우 3만 5천 명으로 과소평가했습니다. 결국 본문에서도 간단하게 설명하는 8군과 10군단의 압록강 단거리 경주가 벌어졌고, UN군은 중공군 4개군 500,000명 이상의 병력에게 포위당했습니다.
중공군은 미국과의 공식적인 교전을 피하기 위해 중화인민지원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흔한 오해처럼 무장이나 훈련이 안된 비숙련병이 아니라 중국내전을 겪은 정예병을 투입했습니다. 그렇지만 산악지대를 통해 이동했기 때문에 추위에 더 큰 고생을 했고 병참선이 워낙 늘어져서 아사직전까지 몰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12월 첫 주말이 되자, 사단 전체병력과 잡다한 UN군은 고토리에 집결해 마지막 탈출준비를 했다. 스미스는 고토리에서 진흥리까지의 16km가 마지막 고비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 구간은 협곡을 지나는 좁은 경사로로 양쪽의 절벽에는 중공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공군이 황초령 협록의 다리를 파괴하면서 상황은 매우 심각해졌다. 스미스는 "산 옆은 너무 가파랐기 때문에 우회할 방법이 없었다. 온전한 다리가 관건이었는데, 다리가 없었다면 차량, 전차와 포 어느 것도 가져올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장진호에서 물이 내려오는 4개의 콘크리트 송수관 그리고 바로 옆에 끊겨진 부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다리는 12월 1일과 12월 4일에 폭파된 것을 공병이 수리했었는데 3번째로 다시 끊겼다. 3번째 파괴로 10일 동안 악전고투를 한 14,000명의 병력이 고토리에 발이 묶여버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중공군보다 훨씬 무서운 적을 만나야했다. 바로 무시무시한 시베리아 바람이 쓸고 내려오는 북한의 겨울이었다. 2차대전 당시의 벌지전투는 순해보일 정도로 비교가 안되는 맹추위였다. 계곡의 온도는 영하 30도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해병사단의 장진호에서 흥남까지의 철수 다큐멘터리입니다. 한글번역 자막보다는 영어자막으로 보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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