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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한국전쟁

(수정)가장 참혹했던 전쟁, 한국전쟁 - 낙동강 전투 (1부)

by uesgi2003 2014. 6. 15.


힌국전쟁은 다들 아는 역사라고 생각하고 손에 잡히는대로 연재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많이 지나다보니 '유교전쟁'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잊혀진 역사가 되었죠. 그래서 이번에는 낙동강 전투 이야기를 정리하려고 합니다. 


한국전쟁에서 민간인까지 우리나라 인구의 10%를 훌쩍 넘는 분들이 돌아가셨는데, 북한대비 44배의 예산을 퍼붓는 국방부는 "미군없이는 북한에 진다"라는 멍멍소리를 하고 있고 일본 극우놈들이 박수를 치며 환영하는 총리후보는 "강제합병은 신의 뜻. 한국전쟁도 미국을 잡으라는 신의 뜻"이라며 악마를 대신하고 있죠. 

고문을 당해 돌아가신 유관순님, 민족의 심지로 살아계신 안중근님, 포항여중전투의 학도병 71분 그리고 수 많은 희생자덕분에 편하게 입놀리고 펜놀리는 놈들이 졸지에 그분들을 테러리스트와 이단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지경까지 만든 것들이 문제인지 그것들을 묻지마 지지 하는 사람들이 문제인지...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참 불행한 일입니다. 


이번 이야기도 외국 역사가의 자료를 인용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한국전쟁 역사가나 저자 모두 맥아더에 대해 냉소적입니다. 보통 역사는 보수적일 수 밖에 없고 전사는 더더욱 보수일 수 밖에 없는데도 맥아더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습니다. 낙동강 전투를 정리한 데이비드 자벡키도 맥아더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하는군요. 

맥아더는 일본에게 있어서 천황과 다름없었고 우리에게는 미국 그 자체였겠지만, 맥아더가 아니라 다른 총사령관이 지휘했다고 가정하면 (가장 낙관적인 경우) 한국은 통일되었을 수도 있고 (가장 비관적인 경우) 지금의 국토분단선이 개성 위였을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미국에서도 맥아더가 정계로 진출하지 못한 것(지나치게 오만하고 탐욕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서 고향에서조차 외면 받았죠)을 무척 다행으로 여깁니다. 


가장 참혹했던 전쟁, 한국전쟁 - 낙동강 전투


키가 작고 뚱뚱하고 병사들이 불독이라고 부를 정도로 호전적이었던 술꾼 월튼 H. 워커Walker 중장은 외모를 중시하는 요즘의 미군기준에 걸맞지 않았다. 1950년 당시기준으로도 그랬지만, 뛰어난 작전 지휘능력으로 전사상 가장 뛰어난 방어전의 대가로 손꼽히게 되었다. 

낙동강 방어전의 승리덕분에 UN군은 병력과 장비를 집중시킬 시간을 벌었고 냉전 후 최초로 시작된 공산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텍사스 출신으로 웨스트 포인트를 졸업한 월큰 워커는 1914년 베라크루스Vera Cruz 원정을 시작으로 1, 2차대전에 참전했고 2차대전에서는 조지 패튼 장군의 휘하 지휘관 중 가장 공격적인 군단장으로 명성을 높였다. 실제로 워커의 20군단은 유령군단이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유럽전장을 너무나도 빨리 돌파해서 얻은 칭찬이다. 



1950년 7월 31일자 타임지 커버입니다. 당시에는 상황이 그렇다 보니 군인이 표지인물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워커의 화려한 경력은 종전과 함께 일본에 주둔한 미 8군을 맡으면서 빛을 잃기 시작했다. 그는 1948년 9월에 일본으로 가서  더글러스 맥아더의 극동사령부 휘하의 부대를 맡았다. 8군의 4개 사단은 점령군의 중추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름만 남았다. 대부분의 연대는 3개 대대에서 2개 대대로 축소되었도 전차 중대는 경전차로 교체되었다. 사단 포병은 포를 제대로 보유하지 못했고 사병은 거의 모두 훈련이 제대로 안되어 말도 아닌 상태였다. 전쟁이 끝난 지 아직 3년도 안되었는데 90%가 신병이었다. 


워커는 부임과 동시에 전력회복 프로그램을 시작했지만 더 큰 문제가 닥쳤다. 의회는 예산감축을 결정하고 8군의 군단 사령부와 군단 포병부대를 해체시켰다. 워커는 이제 참모 사령부없이 직접 4개 사단에게 명령을 내리고 지휘하게 되었다. 워커의 상급라인도 한심했다. 

극동사령부(FEC)는 보고와 지원채널을 펜타곤으로 통합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공군과 해군만 그렇게 하고 육군은 그 결정을 따르지 않았다. 맥아더는 주둔지의 모든 일에 대해 자신이 직접 관여하려고 했다. 


맥아더는 일본에서 올림피아의 제우스 수준이었고 1949년 당시 유일한 현역 원수였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자기방식대로 결정했다. 워커에게는 불행하게도 맥아더는 쉽게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상관이었다. 워커는 2차대전 군단장 시절에 군사령관인 패튼을 필요할 때마다 만났고 집단군 사령관인 오마르 브래들리와도 빈번하게 연락했다. 워커는 심지어 지역 사령관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와도 개인적인 친분을 가졌다. 

그렇지만 일본 그리고 나중에 한국에서 맥아더에게 연락을 하려면 극동사령부 참모장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을 거쳐야만 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의 맥아더와 알몬드(오른쪽)입니다. 극동사령부는 맥아더와 함께 정치군인으로 유명했고 콜디스트 윈터의 저자뿐만 아니라 여러 전사가가 많은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알몬드는 동료와 부하들에게 상당히 인심을 잃고 있었고 현대 미군 전사상 가장 논란이 심한 인물이었다. 2차대전 당시 제92 보병사단의 지휘관으로 실패한 경험이 있는 알몬드는 군단장 워커의 뛰어난 활약을 질투했고 맥아더에게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그리고 자신의 기록은 최대한 과장해서 결국에는 중장까지 진급했다.  


워커가 일본의 4개 사단을 가지고 고생하는 동안 1950년 6월 25일, 북한인민군(NKPA) 10만 명이 38선을 넘어 남한을 기습공격했다.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참전을 결정했고 제24 보병사단 중 첫 번째 부대가 7월 2일에 한국땅을 밟았다. 11일 후에 워커는 제8군 사령부(EUSAK)를 대구에 설치했다. 

미군 병력이 조금씩 투입되던 반면에 북한군 주력은 워커의 소규모 병력을 밀어붙였다. 7월 5일, 스미스 부대가 궤멸하면서 미군의 손실이 시작되었다. 



대전에 도착한 스미스부대입니다. 북한군을 가볍게 본 맥아더는 1개대대만으로도 북한군을 저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고 맥아더의 후임으로 연합군 사령관이 된 매튜 릿지웨이는 북한 정예 10개 사단 앞에 빈약한 무장의 1개대대를 투입한 맥아더를 비난했습니다.

스미스부대와 교전한 북한군은 미군의 참전을 확인하고 전선을 재정비했고 그 덕분에 귀중한 10일을 벌 수 있었습니다. 아래는 오산전투의 전황도입니다. 



북한군은 7월 5일 오산, 7월 7~8일 천안, 7월 10일 청주, 7월 11~12일 조치원, 7월 15~16일 금강을 돌파했다. 7월 17일, 워커는 만신창이가 된 대한민국 국군(ROKA)의 지휘권도 이양받았다. 3일 후, 북한군은 대전에서 미 24사단을 밀어내고 사단장 윌리암 딘 소장을 포로로 잡았다. 새로 도착한 제1 기병사단도 영동에서 밀려났다. 


워커는 우선 충분한 병력을 모을 때까지 최대한 지연작전에 치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떤 수를 써서라도 부산만은 지켜야했다. 그렇지만 7월 말이 되자 조금만 물러나면 반격은 고사하고 바다에 빠질 지경까지 몰렸다.

7월 29일, 절대절명의 상황까지 몰리자, 워커는 사단장들에게 "그 자리에서 죽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우리는 시간싸움을 하고 있다. 소개, 작전상 후퇴, 전선 재구축, 어떤 말을 쓰더라도 더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더 이상 물러날 전선이 없다. 모든 부대는 반격해서 적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반전시켜야 한다. 덩케르크(2차대전 유명한 후퇴작전)도 없고 바탕(필리핀 철수)도 없다. 부산까지 밀리면 역사상 최악의 대학살이 일어날 것이다. 

끝까지 싸워야 한다. 포로가 되느니 전사하는게 낫다. 우리는 팀으로 싸울 것이다. 죽어도 싸우다가 함께 죽을 것이다. 물러나는 사람은 아군 수 천명의 죽음을 책임져야 한다. 사단의 모든 사병에게도 단단히 알리기 바란다. 모든 사병에게 우리는 이 전선을 지켜야 한다고 이해시켜라. 우리는 승리할 것이라고 이해시켜라."



낙동강 전투에서는 전차가 곡사포격도 지원했습니다. 


워커는 단호한 명령을 내렸지만, 그의 휘하에는 난타당한 5개의 한국군 사단, 사단급이라고 할 수 없는 미 24와 25보병사단과 1기병사단이 전부였다. 그 후에 부산항을 통해 제2 보병사단, 제1 해병여단과 영국 제27 보병여단이 증원되었다. 

워커는 포위당한 병력에게 낙동강이라는 천혜의 장애물 뒤로 물러나라고 명령했다. 8월 1일, 그렇게 최후의 보루 낙동강 전선이 형성되었다. 



지도는 클릭하면 커집니다. 낙동강 전선의 북쪽은 돌파당해 축소되었지만 다행히도 서쪽의 전선은 무너지지 않아서 부산에서 대구로 이어지는 철도와 고속도로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형에 대해 잘 아니까 낙동강 전선에 대해 지도만으로 설명을 대체하겠습니다. 


워커는 이 때부터 대단한 방어능력을 보여주었다. 미 제5 공군이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워커는 한 낮에도 방어선 안에서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었고 북한군은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다. 방어선 안에서는 부산, 밀양, 대구와 포항이 철도와 도로로 훌륭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부산항도 대한해협을 건너오는 함선 30척을 한 번에 수용할 수 있었지만 인력과 화물차 부족으로 하루 45,000톤이 아닌 28,000톤만 처리했다. 


워커는 왜관에서 남해안까지 미 3개 사단을 배치했다. 중앙에 24사단, 우익에 기병사단, 좌익에 25사단을 배치했고 기병사단 북쪽에는 한국군 제1 사단을 배치했다. 그리고 북쪽 모서리에서 동해안으로 이어지는 전선에는 한국군 6사단, 수도사단과 3사단을 배치했다. 

북한군은 서쪽 전선에 6개 사단, 북쪽 전선에 4개 사단을 배치했고 제105 기갑사단은 예비군으로 남겨두었다. 105사단은 한국전 초기에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 T-34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오는 동안 많은 손실을 입어 겨우 40대만 전투에 투입할 수 있었다. 


 

왜관에서 공중폭격을 받고 폐기된 T-34 두 대입니다. 큰 상처가 없는 것을 보면 일부러 길가로 몰아넣었던지 아니면 진격하던 미군이 길가로 치운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북한군은 끊임없이 새 병력을 남쪽으로 내려보냈고 3개 사단을 추가로 투입할 수 있었다 (이 병력은 남한에서 강제징집한 병력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