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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독일군의 동부전선의 몰락 (10) - 동부장벽(Eastern Wall)

by uesgi2003 2011. 8. 13.


 

동부장벽(Eastern Wall)

운명의 강, 드니에페르-공업지대의 담벼락-자포로즈예(Zaphorozhye) -90줄의 명령서-1,000km 전선의 탈출-초토화작전

 

유럽에서 볼가, 다뉴브 강 다음으로 큰 강, 서 러시아에서는 두 번째로 큰 강, 드니에페르(Dnieper). 발다이 고지대에서 시작되어 2,000km가 넘게 남쪽으로 흘러 북해와 이어지는 우크라이나의 탯줄로, 최대 12m 깊이와 3.4km의 너비를 자랑한다. 거의 모든 러시아 강이 그렇듯이 서쪽 강변은 급경사로 되어 있어서 수비하기에 이상적인 장소다


1943년 여름, 왜 이 강이 독일 남부집단군의 희망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천혜의 장애물 너머에 강력한 수비선을 펼칠 수 있다면 러시아군은 도강을 위해 멈춰야 하고 전투는 중단될 수 밖에 없다.

히틀러에게도 일선 지휘관의 수비진지 구축 의견이 지난 몇 개월 동안 계속 이어졌지만, 그의 눈에는 후퇴란 죽음과도 같은 죄악이었기 때문에 드니에페르 서쪽 강변에 진지와 벙커 공사를 일체 금지시켜왔었다.

"강 너머에 안정적인 요새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병사들은 필사적인 수비를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이 히틀러의 주장이었다. 러시아군이 이미 드니에페르 강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한 8월 중순이 되어서야, 그는 마지못해 드니에페르와 데스나 강변에 "동부장벽"을 설치해도 좋다는 허가를 내렸다. 허가는 했지만 당연히 필요한 노동인력은 지원하지 않았다.


9월 중순이 된 지금, 지난 몇 개월 동안 외면했던 오판의 대가를 단 며칠 아니 몇 시간에 철저하게 치를 판이었다상황은 이전과 비교할 수도 없이 위험해졌다. 만약 러시아군을 드니에페르에서 저지하지 못한다면? 크리미아와 우크라이나를 잃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루마니아 국경이 바로 그 다음이었다. 동부전선의 운명이 드니에페르에 달려있었다.


그림 설명: 독일과 러시아의 공업 생산양 비교입니다. 독일은 동서 두 전선에서 전투를 벌이고, 핀란드, 루마니아, 이탈리아, 스페인 등에 전략물자를 공급해야 하는 부담을 함께 가지고 있어서 러시아에 비해 그렇게 상황이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러시아는 미국과 영국에게서 막대한 양의 군수물자를 공급받았기 때문에 부족한 생산을 충분히 메울 수 있었던 점도 감안해야 합니다. 


스탈린에게 있어서, 드니에페르는 반드시 돌파해야 하는 군사, 정치, 경제적 장애물이었다. 드니에페르 강 너머에는 러시아와 루마니아의 엄청난 광맥이 있다. 우크라이나의 철, 자포로즈예와 니코폴(Nikopol)의 마그네슘, 구리와 니켈 등, 독일의 무기원료 중 30%가 여기에서 생산되었다. 그리고 강 건너에는 러시아의 광맥못지 않게 중요한 루마니아의 유전이 있었고 여기에서 독일의 수요 중 50%를 충족시키고 있었다. 이 유전을 장악하면 독일군은 대규모 기동전과 공군운용을 할 수 없게 되고 종전으로 바로 이어지게 된다. 드니에페르가 전쟁의 운명을 가늠한 강인 셈이다.


1943 6 21, 만슈타인이 최고사령부에게 "도우너 강 일대가 중요합니까? 아니면 드니에페르 강에서 러시아군을 빈사상태로 몰아넣는 것이 중요합니까?"라고 의문을 표시했을 때에 "총통은 둘 다를 원합니다."라는 답변을 받았다. 둘 다라는 것은 어느 것도 아니라는 소리와도 같다.


그림 설명: 드니에페르 강 일대의 독일군 전선과 이를 돌파하는 러시아군을 잘 보여주는 지도로, 앞에서 이미 올렸었지만 여기에 다시 올립니다. 아주 작은 교두보 하나부터 시작된 구멍은 천혜의 장애물이 순식간에 무너지게 만듭니다. 


이 강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던 스탈린은 히틀러도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수비선을 드니에페르 강 너머로 옮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봄부터 지휘관들에게 "드니에페르 강 건너에 독일군이 수비선을 펼치는 것을 막아라. 희생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아도 독일군을 강건너로 가게 놔두는 것은 책임을 묻겠다."라고 재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선 지휘관의 머리 속에는 드니에페르로의 경주만이 최우선 목표였다.

독일군을 저지하기 위해, 스탈린은 가능한 모든 전력을 동원했다. 소총사단 병력 중 40%, 기갑사단 중 84%를 남부전선에 집중시켰다.

력과 물자 면에서 러시아군은 독일 수비군에 6배나 많이 집중시킬 수 있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후방의 파르티잔(빨치산, Partizan), 스파이, 선전책동도 최대로 가동시켰다. 드니에페르 강의 점령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앞당기기 때문에 일선 병사들의 사기도 치솟았다. 스탈린은 드니에페르와 데스나 돌파작전에 공을 세우는 병사는 계급을 막론하고 최고훈장이나 영웅칭호를 주겠다고 해 그들을 부추겼다.


그림 설명: 최전선에서 밀려오는 적을 막기에도 부족한 판에 후방의 파르티잔은 곳곳에서 독일군의 발목을 잡습니다. 전쟁초기부터 독일군의 약탈에서 도망간 시민이나 러시아군 포로가 숲이나 습지대에 숨어지냈고, 모스크바에서는 정치위원이나 특수부대를 침투시켜 조직적인 저항을 시작했습니다. 

독일군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파르티잔을 부대로 편제시켜 본격적인 전투를 벌입니다. 독일군의 전선에 구멍을 내는 일은 못했지만, 철로를 파괴해 후퇴를 지연시키고, 패잔병을 사냥하는 정도만으로도 독일군에게는 큰 피해였습니다.

 

자포르즈예의 댐은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로 철로와 마차길이 양방향으로 나 있을 정도로 웅장한 크기와 550,000KW의 엄청난 화력발전용량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댐의 발전소가 서 우크라이나 공업지대 모두에 전력을 공급하고 있었다.

1941년 러시아군은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댐을 파괴시켰었기 때문에 고스란히 독일군의 손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전투 중에 우연히 맞은 포탄에 화재가 나서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독일군은 3년 간의 수리를 거쳐 1943년에 발전량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렸다.

그 이후 키텔(Kittel) 중장이 이 산업의 심장을 지켜왔다. 2개 대공포 연대가 공습에 대비했고 러시아군 해병대, 어뢰투하 공격을 막기 위해 물속에는 그물망이 처졌다. 최전선이 뒤로 밀리면서, 키텔은 자포로즈예 근처를 패잔병이 지나갈 때마다 징집해 자신의 전투단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6개 사단에 맞먹는 혼성부대가 생겨났다.

 

9 15, 히틀러와의 회담에서 돌아온 만슈타인은 참모들과 함께 명령문을 읽었다. “남부집단군은 드니에페르의 튜턴선으로 후퇴한다. 각 부대는 전력에 따라 후퇴시간을 결정한다.” 만슈타인이 가장 걱정하는 것이 바로 전력이었다. 모든 작전의 조율을 책임지는 참모장 부세(Busse)일선 병사들에게는 전차전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한 두 명의 장군이 필요한데,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아군이 다리로 몰리면서 생긴 구멍으로 적이 밀고 들어오면 우리보다 먼저 다리에 도달할 수도 있습니다. 구데리안만한 인물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좋을 텐데요!”라고 안타까워했다.

적이 아직 기동전을 제대로 깨우치지 않았기 만을 바래야지. 지난 몇 주 동안을 보면 아직은 마스터하지 못한 것 같더군.”

만슈타인은 아크티르카(Akhtyrka)와 스탈리노(Stalino)의 기억을 떠올렸다. 러시아군 전차부대가 북에서 남서쪽으로 맹진격했다면 남부집단군을 아조프 해까지 밀어붙여 드니에페르로 후퇴하는 길을 완전히 막아버릴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러시아군 지휘관들은 독일군 후방 깊숙이 돌파한 다음은 독일군이 개전초기에 그랬던 것처럼 포위섬멸전으로 몰아가지 못했다.

 

4개 군의 생명이 걸린 후퇴명령은 단 90줄로 일선부대에 전달되었다. 7번과 8번 명령은 만슈타인의 리더십을 잘 말해준다. (7) 상기 명령에 따른 모든 의사결정과 부속명령은 충분한 전력을 갖춘 부대에게 내려진 것이다. 전력이나 사기를 완전히 상실한 부대는 어떤 작전도 수행하지 않아도 된다. 각 부대는 위에 명시된 명령을 일방적으로 하달하지 말고 매일 상황을 판단해 수행해야 한다. (8) 각 부대는 지체없이 계획을 보고하고, 사령부는 각 부대의 작전을 조율할 것이다.

 

이번 작전은 만슈타인에게 있어서 가장 어렵고 위험한 작전이었다. 곳곳이 구멍난 1,000km의 전선에서 부대가 압도적인 전력의 적에게 쫓기며 전투를 벌이고 있다. 15개 군단과 63.5개 사단의 4개군 그리고 독일시민까지 합쳐 1백만 명이 천천히 전투를 벌이며 1,100km를 후퇴해야 한다. 집단군 전체 병력이 제대로 후퇴한다고 해도 44.5개 사단이 드니에페르의 6개 다리로 몰려드는 것을 조율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맹추격 중인 적이 서쪽 강변에 도착하기 전에 3개 군이 도강하자 마자 다시 700km의 전선에 수비선을 펼쳐 중앙집단군과 전선을 연결해야 한다. 작전에 성공한다면 큰 위기는 모면할 수 있겠지만, 실패한다면 1백만 명을 잃는 동시에 동부전선의 전쟁도 패전으로 이어질 것이다.

여기에 약 200,000명의 부상병과 독일, 헝가리,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우크라이나 야전병원과 의료진도 함께 철수시켜야 한다. 러시아군이 도시를 탈환할 때마다 거의 모든 청장년을 징집시켜 병력을 늘리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 시민도 소개시켜야 한다. ‘위대한 조국해방전의 기록에 따르면 러시아 제13군은 탈환한 지역에서 30,000명이 넘는 병사를 새로 징집한 후에, 군복과 소총만 지급해 전선으로 이동하면서 훈련을 시켰으며 심지어 부상병이나 전사자의 총을 지급하기도 했다.

 

 

사진 설명: 전차호에 처박힌 T-34입니다. 전투 중에 파괴된 것이 아니라 전차호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고 처박힌 것으로 보입니다. 

드니에페르 강이 천혜의 장애물이더라도 이런 전차호나 포화를 견딜 수 있는 참호 정도는 반드시 공사를 했어야 했지만, 히틀러의 정신나간 판단으로 일체의 수비선 구축이 안된 상태로 러시아군에게 돌파됩니다. 


남부전선에 25개 군이 있었고 모두 이런 식으로 징집시켜 병력을 증원했다독일 제24 기갑군단의 네링(Nehring) 장군은 이런 병사들이 100% 군인은 아니지만 다른 병사들과 함께 뛰면서 전선을 돌파하는 데에는 큰 힘이 된다.”라고 기록했다그렇지 않아도 압도적인 병력차이를 보이고 있는데새로운 부대가 만들어지는 것을 막으려면독일군과 함께 모두 소개시켜야만 했다남부집단군의 지역에는 200,000명의 대상 시민이 있었고 따라나서는 가족도 많았기 때문에 최소한 400,000명의 시민이 이동을 했다우크라이나 경찰부대와 지원부대코카서스의 코삭 자원병투르크 용병과 노동자들이 가재도구와 가축을 가지고 뒤를 따르면서 드니에페르로 이르는 모든 길이 피난행렬로 가득 찼다.


그리고 단순히 사람만 소개시킨 것이 아니었다. 괴링은 히틀러를 대신해 적에게 도움이 되는 모든 것, 기계에서 과일에 이르기까지 어떤 것이라도 모두 소개시키라는 명령을 내려 이번에는 독일군이 초토화작전을 사용하게 된다. 가져갈 수 없는 모든 것, , 다리, 도로, 심지어 나무까지 모두 파괴시키라고 명령한다. 적이 도강에 사용할 물자는 물론 휴식할 여지도 남기지 말라는 것이다. 전쟁발발 후 처음으로 독일군은, 스탈린이 1941년과 42년에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을 불태우고 파괴시켰다.

독일군은 도우너 강과 동 우크라이나에서 초토화작전을 펼치면서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200,000마리의 소, 153,000마리의 말, 270,000마리의 양과 40,000개의 손수레도 함께 가져갔다. 3,000대의 열차가 스탈리노와 키에프를 오가며 망가진 전차, 산업용기계, 농기계, 곡식을 실어 날랐다.

숫자만 놓고 보면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수십만 마리의 가축만으로 전쟁을 이길 수 없으며 지뢰와 부비트랩만으로 적을 막을 수도 없다. 그리고 이런 극단적인 조치는 독일의 이미지를 오랫동안 손상시켰다.

일선 부대는 본능적으로 잘못된 명령이라고 느꼈다. 만슈타인은 군사적인 목적에 부합될 경우에만 조치를 취하라고 엄격히 제한했고, 남부집단군은 그대로 남겠다는 시민에게는 다음 추수까지 먹을 수 있는 곡식과 가축을 남겨두라고 못박았다. 6군의 지역에서는 인도적 차원에서 1/5 정도의 곡식이 남겨졌지만, 러시아군이 들이닥치면서 모든 곡식을 징발했기 때문에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러시아의 위대한 조국해방전의 기록에서는, 시민들이 독일군에게서 식량을 숨겨뒀다가 해방군이 진주했을 때에 기꺼이 제공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리고 맹렬히 추격하는 적을 바로 등뒤에 두고 모든 것을 가져가거나 파괴시킬 시간도 없었다. 23 기갑사단의 일지에 보면 초토화 작전은 불가능한 작전이었기 때문에 사단 단위로 아주 짧은 시간 동안만 수행되었다고 한다. 남부집단군의 중심에서 전투를 벌이던 제24 기갑군단의 네링 장군도 시간이 없기 때문에 초토화작전은 수행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가축과 곡식이 그대로 남겨졌다. 창고는 불태웠지만 마을은 손끝도 대지 않았다.”라고 기록했다.

그렇지만 독일은 지금까지도 도우너 강 일대의 소개와 파괴에 대해 비난을 면치 못했고 관련된 전쟁포로 중 일부는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만슈타인은 1949년 함부르크에서 있었던 군법재판에서 초토화작전의 죄목 중 17개는 군사적 목적이었다고 인정받았고 시민을 납치한 죄목만 유죄를 받았다


사진 설명: 수용소에서 복역 중인 만슈타인(가장 오른쪽)입니다. 마치 식물학 교수와도 같은 모습입니다. 그는 히틀러에게 계속 반박했다가 지휘권을 박탈당한 덕분에 종전 후까지 살아남았고, 전쟁 중의 작전은 조국을 위한 군인의 당연한 의무로 인정받아 다른 고위장성과 달리 사형당하지 않고 여생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