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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독일군의 동부전선의 몰락 (8) - 하르코프 4차 공방전

by uesgi2003 2011. 8. 13.

이번 이야기부터는 대책없이 무너지는 동부전선이 펼쳐집니다. 

히틀러의 편집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독일을 구해내기 위한 만슈타인의 노력은 헛수고로 돌아갑니다. 


 

하르코프 4차 공방전

절망적인 11군단-공황상태의 제282 보병사단-러시아 전차 도시에 진입-대활약한 제6 기갑사단-매복에 걸린 로트미스로프(Rotmistrov) T-34-해바라기 밭의 극적인 한 장면-히틀러: "하르코프를 사수하라!"-만슈타인: "군 병력을 살리고 도시를 내주겠다"-"존경하는 총통, 작전권을 요청합니다."

 

슈미트 장군이 전사한 후, 소르겔(Sogel) 대령이 삭소니-베스트팔리아 제19 기갑사단의 지휘를 맡았다. 러시아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으면서 사단의 대부분 병력이 그라이보론(Grayvoron)에 갇혔는데, 이미 이곳에는 제255 보병사단, 57 332 보병사단, 실레시아 제11 기갑사단도 갇혀 있는 상태였다. 포위망에 갇힌 부대 지휘는 포페(Poppe) 장군에게 맡겨졌다.

러시아의 4개 군이 포위망에 든 독일군을 압박했지만 수비선을 뚫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대로 제11, 19 기갑사단은 보유한 모든 돌격포와 전차를 동원해 그로스도이칠란드(Grossdeutschland) 사단의 전위대가 지키고 있던 아크티르카(Akhtyrka) 방면으로 탈출해 새 전선을 펼치는데 성공한다.

독일군 48 기갑군단은 제4 기갑군의 다른 사단들과 연합해 수미(Sumy)와 아크티르카 사이로 들어오는 러시아군의 진격을 막아냈다. 그렇지만 기갑병력이 너무 부족해서 전선의 곳곳은 무방비로 열려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러시아군은 언제라도 뚫고 들어올 수 있었다. 러시아군이 하르코프 북서쪽이나 남쪽의 미우스 강 방면으로 공격해 온다면 드니에페르 강까지 무인지경으로 열리게 된다.


그림 설명: 하르코프 4차 공방전의 지도입니다. 하르코프를 내주지는 않았지만 1943년 8월 22일, 만슈타인은 11군 군단에게 도시에서 후퇴할 것을 명령합니다. 히틀러가 집착하는 하르코프보다 드니에페르 강으로 진격하는 러시아군을 먼저 막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벽에 걸린 지도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고 모든 참모들이 가장 바라지 않는 상황이었다. 러시아군이 드니에페르 강을 건넌다면 남부집단군은 궤멸할 것이다. 러시아군의 돌파를 막으려면 최소한의 예비병력이 필요한데, 단 한치의 땅도 내주지 않고 고수한다면 어디에서 예비병력을 뽑을 수 있을 것인가? 히틀러는 하르코프를 사수하라고 했는데 이 명령을 따른다면 하르코프를 잃는 동시에 11 군단의 6개 사단을 모두 잃게 될 것이다. 하르코프를 포기한다면 그 병력으로 미우스 강 일대를 위협하는 러시아군을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집단군의 북쪽 전선도 강화시킬 수 있겠지만 히틀러는 하르코프를 계속 고집했다.

바투틴의 군대는 호트의 제4 기갑군의 북쪽을 돌파해 이미 폴타바 지역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코네프(Konev)의 스텝(Steppe) 전선(Front)군이 하르코프를 통해 신속하게 진격해온다면 만슈타인의 남부집단군은 궤멸되고 크리미아에 있는 클라이스트(Kleist) A집단군도 완전히 단절될 것이다.

11 군단의 지휘관 라우스(Raus)는 코네프의 돌파를 최대한 지연시켜 호트 장군이 바투틴의 기갑군에 대응할 시간을 벌어주어야 했다. 그는 제168, 198, 106, 320 보병사단, 그리고 최근에 증원된 제167 보병사단과 제6 기갑사단을 하르코프 외곽 수비선으로 천천히 후퇴시키면서 8일의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

"하르코프는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

6개월 전, 독일 최정예 사단인 그로스도이칠란드 기갑 척탄병사단, 다스 라이히(Das Reich)와 라이스탄다르테(Leibstandarte) 무장친위대(SS) 기갑사단도 지켜내지 못한 하르코프였는데, 전력이 크게 약해진 6개 사단만으로 이것을 지켜내라고? 8 11, 히틀러는 베를린 제3 기갑사단을 하르코프로 보내 라우스 장군의 취약한 왼쪽을 보강하게 한다.

 

베스트호벤(Westhoven) 장군의 연대는 러시아 제5 강습군과 제2 방위군의 공격을 막아냈던 미우스 강을 떠나 북쪽으로 이동했다. 지휘관의 장갑차에 타고 있던 오토 테닝(Otto Tenning) 하사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러시아군의 교두보를 밀어내느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끔찍한 전장을 바라보았다. 태양에 타들어가는 들판 위에는 수 천구의 러시아군 시체가 널려있었는데, 상당수가 여전히 총이나 수류탄을 쥔 채 그대로였다. 시체 썩는 냄새때문에 장갑차에 탄 병사들은 손수건으로 코를 가렸다.

"그래도 우리가 살아남았네."

그들은 하르코프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다시는 잊혀지지 않을 마을인 폴레보예(Polevoye)에 주둔하게 된다. .

3 기갑사단은 하르코프 외곽의 11 군단의 왼쪽에 전개되었다. 3 기갑사단의 왼쪽은 아군이 전혀 없이 무방비로 열려져 바투틴의 병력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고 그 중 일부는 도시를 향해 선회하고 있었다.

하르코프에는 막대한 양의 군수품이 저장되어 있었는데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2개 군이 3달을 버틸 수 있는 군수품이, 보급에 목마른 독일군대신 러시아군의 손에 넘어갈 위험에 처했다. 하르코프 북서쪽 22km 지점의 집단농장에 위치한 남부집단군의 군수저장소 중 하나에는 수 백만 갑의 담배와 크지 않은 도시가 6개월은 먹을 수 있는 통조림이 보관되어 있었다. 3 기갑군단의 병참장교는 엄청난 양의 군수품이 러시아군 손에 넘어간다는 생각에, 근처에 있던 모든 사단에게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라고 허락한다.

일선부대는 행군해서 이동해야 할 만큼 차량이 심각하게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에 병참장교는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 중에는, 먹는 것에 관련된 것이라면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법이다. 놀랍게도 끝이 안 보일 정도의 긴 차량 대열이 꼬리를 물고 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2일만에 거의 10개 사단이 군수품 나르기에 기꺼이 참여했고 차량이 없는 부대에도 군수품을 전달했다. 이들이 건들이지 않은 유일한 군수품은 보드카 박스였는데, 전투 중이어서 술을 피한 것이 아니라 저장고에는 프랑스 꼬냑, 스페인 포도주, 이탈리아 치안티와 같은 고급술이 있는데 누가 보드카를 가져가겠는가?

이렇게 남겨진 보드카가 유용한 비밀무기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저장고를 찾은 러시아군은 보드카에 취해 다시 전열에 나서는데 까지 3일이나 걸렸기 때문이다. 오토 테닝은 일기에 "저쪽 편 동무들이 보드카에 취해 저주받은 전쟁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는 동안, 전선에 도착한 SS '바이킹Viking' 기갑사단은 페스키(Feski) 고지대에 방어진지를 팔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라고 적고 있다. 보드카 덕분에 라우스 부대의 무방비 상태의 왼쪽이 보강되었고 하르코프는 48시간을 벌었다. 만슈타인에게는 너무나도 귀중한 전략물자인 시간을 벌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전쟁의 행운은 변덕스러운 것이어서 어느 한쪽 편만 드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전쟁은 숫자로만 따지는 것도 아니다. 전투는 보통 한 병사와 지휘관의 운이나 결단으로 승패가 갈라지듯이 지휘관의 우유부단함이나 공포는 부대 전체를 공황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바로 하르코프에서와 같이 말이다.

1942년 프랑스에서 구성된 제282 보병사단은 전투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제11 48 군단 사이의 교차점에 배치되었다. 전투에 처음으로 배치된 사단답게 말이 끄는 마차, MG-34 3.7cm 대전차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사진 설명: 3.7 대전차포는 독일군이 대전 초기 당시 최대 구경의 대전차로 "Door-Knocker 문 열어주세요"라는 불명예를 가진 녀석입니다. 전쟁 발발 당시의 프랑스와 체코는 말할 것도 없고 러시아의 어떤 전차도 근거리가 아니면 그냥 전차를 노크한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입니다.

장갑이 두터운 영국전차에 놀란 독일군은 어쩔 수 없이 대공포였던 88mm를 사용했는데 워낙 대단한 성능을 발휘해 대전차포로 88mm를 대거 동원합니다. 그래서 중반까지 88mm 대전차포의 자세가 너무 높아 포병이 상대 포화에 매우 취약한 상태가 계속된 것입니다.

물론 중간에 75mm가 나오기는 했지만 일격필살의 88mm에 대한 선호는 계속됩니다. 이미 수비전에 몰린 독일군 부대가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37mm 대전차포를 끌고 왔다는 것을 보면 무장과 훈련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282 보병사단은 도우너 강의 잘 구축된 진지에서 후퇴하던 중에 러시아군 기갑병력의 강력한 공격을 받았다.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후퇴 중에 전차공격을 받게 되면 혼란이 생길 수 밖에 없는데, 282 보병사단에게는 더욱 큰 충격을 줬다특히 제848 척탄병연대는 많은 희생자가 생기면서 공황상태에 빠져들었고 패잔병이 하르코프로 도망을 치면서 가뜩이나 사기가 떨어진 독일군 전선에 연쇄폭발을 일으키게 된다. 282 사단 전체가 무너지면서 러시아 기갑병력은 무인지경으로 독일군을 사냥하고 다녔다


사진 설명: 러시아군의 공격에 4호전차와 75mm 대전차포가 파괴되어 버려져 있습니다. 잘 준비된 수비선도 압도적인 적의 공격 앞에서는 돌파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진을 클릭하면 커집니다. 


 

뢰펠홀즈(Loffelholz) 중령이 도망치는 병사들을 막아 세우려고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지휘의 책임을 느낀 그는 권총을 빼들고 T-34에 맞섰지만 러시아군은 그의 시체 위로 전차를 몰고 하르코프로 진격한다동쪽 수비선을 뚫은 러시아군은 트랙터 공장으로 들이닥쳤다그 순간까지도 공장은 수 만 명의 노동자가 각종 부품을 만드느라 용광로에 철을 녹이고 있던 참이었다이것으로 하르코프는 완전히 러시아군의 손에 넘어가게 되는 것일까?

 

붕괴하는 전선에 놀란 집단군 사령부는 전쟁 중 처음으로 282 보병사단의 10명 당 한 명을 처형하는 엄격한 군법회부까지 심각하게 고려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크리솔리(Crisolli) 대령이 지휘하는 라인랜드-베스트팔리아 제6 기갑사단이 트랙터 공장을 급습해 러시아군을 도시에서 몰아내 전선이 더 이상 붕괴하는 것을 막았다.

러시아군은 이번에는 서쪽을 찔러보기로 했다. 러시아 제5 방위 전차군이 북서쪽에서 도시를 향해 진격했고 독일군 제3 기갑사단이 공격로 한 가운데에 있는 폴레보예에서 맞섰다. 75 기갑 포병연대는 포신이 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화력지원을 했다. 러시아 비행기가 상공을 돌며 전단지를 뿌렸다.

"3 기갑사단 동무 여러분. 여러분은 대단한 전사입니다. 거의 절반이 철십자 훈장을 가지고 있겠죠. 그렇지만 우리는 절반이 박격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항복만이 살 길입니다!"

3 394 기갑사단의 운명은 절망적이었지만 지금까지의 명예를 생각하며 발로 전단지를 밀어냈다.

 

라우스 장군은 해바라기 들판 끝에 대전차 총, 돌격포와 88mm를 바둑판 모양으로 배치시켰다. 하르코프로 향하는 좁은 통로를 80문의 포로 지켜내야 했다. SS "다스 라이히" 기갑사단도 도착하는 즉시 타이거, 팬더, 돌격포를 배치시켰고 2개 척탄병연대는 하르코프-부로두크호프(Bugodukhov) 철로를 따라 매복을 했다.

러시아군은 로트미스트로프(Rotmistrov)의 제5 방위 전차군이 공격준비를 하고 있었고 스탈린은 "도시를 바로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스탈린이 유별나게 조바심을 내게 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그는 트랙터 공장을 점령했을 때에 연합군 군사사절단에게 하르코프를 이미 탈환했다고 성급하게 자랑했었다. 조바심과 체면은 일을 그르치는 법이다. 독일군 제4 비행단이 공중정찰을 통해 러시아군이 집결하고 있는 것을 포착했다. 8 비행군단의 수투카가 러시아 집결지 공습에 나섰는데, 보유하고 있던 폭탄이 하필이면 전함 공격용인 1,800kg 폭탄뿐이어서 이것을 러시아 전차들 한 가운데에 떨어뜨렸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멀리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지진이 일어나면서 러시아의 공격은 스탈린의 체면과 상관없이 24시간 지연될 수 밖에 없었다. 


8 19, 로트미스트로프의 전차군은 독일군의 맹렬한 포격을 무릅쓰고 해바라기 들판을 건너 아크티르카에서 하르코프로 이어지는 도로로 바로 달려들었다. 전차들은 대전차와 대공포 바둑판에 걸려들었고 불과 몇 주전에 쿠르스크에서 독일군 전차가 겪었던 대전차 함정을 이번에는 러시아군이 겪게 된다. 수 많은 전차가 대전차 포화에 걸려 주저앉고 불타올랐고 그나마 숫자로 끝까지 밀고 들어온 전차들도 숨어있던 팬더와 타이거를 만나면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이 한 번의 전투로 184대의 T-34가 해바라기 밭에 주저 앉았지만 스탈린은 여전히 하르코프를 원했다.


사진 설명: 파괴된 T-34 전차. 차체가 주저앉고 포탑이 날아간 것으로 보아, 차내의 포탄이 연쇄폭발을 일으킨 것으로 보입니다. T-34는 차체 정면(47mm)이 경사장갑이고, 포탑(정면 60mm)이 작아 독일군의 3/4호 전차에 비해 방어력이 좋았을 뿐이지 독일군의 50mm 이상의 포를 견뎌낼 정도의 방어력은 아니었습니다. 

러시아군도 독일군의 괴수전차(타이거와 팬더 이후)에 대응해 스탈린과 같은 걸작전차를 계속 양산해냅니다. 


다음 날 로트미스트로프는 방향을 바꿔 200대가 넘는 전차로 철길을 따라 진격했다. 해바라기 밭에 들어간 전차들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반대편에서 기다리던 전차 사냥꾼들도 안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팬더, 타이거, 페르디난드(Ferdinand) 구축전차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전차에게는 공포의 대명사인 88mm가 중간에 잘 배치되어 있었다.

T-34가 해바라기 밭을 빠져 나오자 천둥과 같은 소리와 함께 독일 전차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해바라기 밭을 나오는 러시아 전차는 바로 포격을 받았고 그날 로트미스트로프는 150대가 넘는 전차를 더 잃었다.

아직 그는 160대의 전차가 남아 있었고 스탈린은 하르코프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아직도 해바라기 들판에는 전차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던 밤에 저 멀리에서 전차의 캐터필러 소리가 울려퍼졌다.

"전투 준비! 적 전차다!",

"한 시 방향. 철갑탄 준비. 거리 170미터. 발사!"

T-34 한 대가 직격탄을 맞고 불을 뿜으면서 횃불을 밝힌 것처럼 주변이 환해졌다. 낮은 실루엣의 러시아 전차들이 속속 모습을 나타냈다. 서부의 총잡이들처럼 팬더와 T-34가 마주서서 포격을 주고 받았고 심지어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들이받아 공격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독일군의 대전차포도 맹렬히 불을 뿜었다.

 

(우에스기 왈: 근거리에서 야간 전투가 벌어질 때에는 먼저 동축 기관총을 쏴서 적이 어디에 있는 지를 확인합니다. 기관총탄에 맞아 불꽃이 튀기면 거기에 바로 철갑탄을 발사하는 거죠. 그리고 T-34 76mm의 경우에는 포탑이 워낙 작아 전차장이 장전수 역할까지 해야 했기 때문에 독일군에 비해 대응이 상당히 느렸습니다. 경사장갑과 낮은 실루엣은 상대적으로 유리했지만요..)

 

러시아와 독일의 최정예 기갑병력이 맞붙은 3시간의 전투 끝에, 전장에는 더 이상의 포성이 들리지 않았다. 새벽이 밝아오면서 독일군이 승리를 거둔 것이 밝혀졌다. 러시아군은 또 다시 80대의 전차를 전장에 버려두고 도망쳤다. 세 번의 시도 끝에, 314대의 전차를 잃고 3대의 전차만이 가까스로 하르코프 서쪽 외곽에 도착했지만 제106 보병사단의 사령부 병력이 나서 2대를 파괴하고 1대를 노획했다.

가까스로 위기를 막은 제11 군단의 피해도 상당히 컸다. 3 기갑사단의 394 기갑 척탄병연대는 2개 보병중대 수준으로 줄어들었고 예비병력으로 투입되었던 제167 보병사단의 331 척탄병연대는 2백 명만 복귀했다. 6 기갑사단은 50대의 전차만 남았고 타이거 대대 503 80대의 전차 중 9대만 움직일 수 있었다. 그래도 하르코프를 지켰고 러시아 제5 방위 전차군은 참패를 당했다.

남부 집단군 사령부에는 모처럼 승전의 보고가 잇달아 들어왔지만 만슈타인 원수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조만간 하르코프는 포위될 것이고 그 안에 있는 6개 사단의 운명은 둘째치고 드니에페르 강까지 열려 제8 군의 배후가 무너지기 때문이었다. 만슈타인은 참모에게 "군 전체를 잃느니 도시를 잃겠어"라고 말했다. 만슈타인은 적의 작전을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그의 예상이 옳았다. 8 10, 러시아 최고 사령부는 하르코프에서 드니에페르에 이르는 모든 길을 봉쇄하고 제8 군과 제1 기갑군을 다른 독일군 전선과 단절시킬 것을 명령한다.

만슈타인은 히틀러에게 적이 노리는 것은 하르코프가 아니라 군 전체라는 것을 설명했지만 히틀러는 단호하게 하르코프 사수를 고집했다.

"하르코프는 정치적 파장이 큽니다. 터키의 참전여부가 이 도시에 걸려있습니다. 이 도시를 잃으면 불가리아도 우리 편을 들지 않을 겁니다."

"의문이 남는 정치적 고려 때문에 6개 사단을 희생시킬 수는 없습니다."


스탈린그라드의 비극을 기억하고 있는 만슈타인은 8 22, 하르코프를 비울 것을 명령한다. 22개월 동안 양쪽이 엄청난 희생을 내며 4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던 하르코프 공방전이 결국 끝나게 된 것이다. 만슈타인의 지휘가 필요했던 히틀러는 마지못해 그의 결정을 받아들였지만, 이 때부터 그의 마음 속에는 만슈타인에 대한 혐오감이 자리잡게 된다.


사진 설명: 하르코프의 붉은 광장입니다. 하르코프는 우크라이나에서 두 번째로, 소련에서는 네 번째로 큰 도시입니다.


하르코프에서 철수하고 있는 도중에 톨부킨(Tolbukhin) 중장의 러시아 남부전선군이 미우스 강을 건너 홀리트(Hollidt)의 제6 군을 공격해왔다. SS 기갑군단과 제3 기갑사단이 북쪽 전선을 구원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톨부킨의 군대를 막을 병력이 아무도 없었다. 그는 무인지경으로 달려 드니에페르 강의 자포로즈예(Zaphrozhye)까지 진출한다면 크리미아와 쿠반의 제17 군은 고립될 위기였다.

어떻게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까? 만슈타인은 주저하지 않고 히틀러에게 맞서 "총통이 도우너 강 일대를 고수하고 싶다면 6개 기갑사단을 제게 주십시오. 이만한 병력이 없다면 미우스 강의 돌출부는 지킬 수 없으며 전선을 당장 축소해서 훨씬 방어하기 쉬운 곳으로 후퇴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던, 내게 작전권을 일임해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작전권 일임"이라는 단어만큼 히틀러를 화나게 만드는 말이 없었다. 작전권을 달라는 지휘관은 반역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대답은 간단했다.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기다리시오. 내가 거기로 가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