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우스 강 전투
8월 18일, 칼리노프카와 175 고지 사이의 제17 군단 지역에 있던 제294 보병사단이 러시아군 제2 방위군과 제5 강습군의 공격을 받아 무너졌었다. 러시아군은 이제 쿠이비셰포 근처의 좁은 통로를 통해 독일군 수비선을 하나씩 밀어붙이고 있었다. 단지 3.4km의 통로도 이제 막지 못하고 있는 형편에 홀리트가 더 이상 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 좁은 통로에 병력을 밀어 넣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지만 독일군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톨부킨은 사단병력을 마구 밀어 넣었고, 뒤늦게 크리미아에 있던 제3 산악사단과 제13 기갑사단의 일부 병력이 방어에 나섰지만 그 통로는 이제 13km로 넓혀져 있었다. 돌격포 여단 259와 제13 기갑사단의 기갑전투단이 남서쪽에서 반격에 니서 겨우 7km를 막는 것으로 그쳤다. 언제나 그랬듯이 마지막 한 방의 병력이 부족했다.
독일군 제6 군은 러시아군의 돌파를 막아내지 못했고 8월 28일, 러시아군은 남쪽으로 쓸고 내려오면서 타간로그(Taganrog) 해안까지 진출해 독일 제29 군을 포위한다. 삭소니(Lower Saxon) 111과 프랑코니아(Franconian) 17 보병사단이 중부독일 13 기갑사단과 함께 필사적으로 러시아군의 진격을 막아보려고 애썼다. 전선을 돌파 당한 제15 항공야전사단과 빌레펠드(Beilefeld) 336 보병사단의 패잔병도 어쩔 수 없이 포위망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8월 30일, 루델(Rudel)의 수투카 비행단의 초인적인 지원덕분에, 13 기갑사단과 돌격포 여단 259는 페도로프카(Fedorovka)의 러시아군 포위망에 구멍을 내는데 성공한다.
사진 설명: 초췌한 모습의 독일군들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정갈하고 단호한 독일군의 모습과 많이 다르죠? 이때쯤이면 왜 이 의미없는 전쟁을 해야 하는지도 잊어버렸을 겁니다. 다만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면 잔인한 보복을 당하기 때문에 결사적인 항전을 할 뿐이었겠죠. 모든 사진을 클릭하면 커집니다.
이 작은 구멍이 열리자 마자 안에 갇혀있던 병력들이 탈출에 나섰고, 훨씬 남쪽의 아조프 해안에서는 제111과 336 보병사단이 마리우폴과 멜리토폴(Melitopol) 방면으로 탈출에 나섰다.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선이 다시 연결되었다. 러시아 제51 군 사령부가 19 전차군단에게 “정오가 되면 독일군 지휘관이 타간로그 시장에서 내게 항복할 것이다”라고 장담을 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만슈타인은 29 군단과 같은 상황이 계속 벌어지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는 히틀러에게 제6 군을 약 70km 정도 뒤의 거북이(Tortoise) 수비선으로 물리겠다고 요구했다. 스탈리노(Stalino)의 경제 중심지를 방어하기 위해 공병과 노동자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지구축 공사를 벌였지만 버텨낼 수 있을까? 버텨낸다고 해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스탈린은 독일군에게 조금도 숨돌릴 틈을 주고 싶지 않았다. 9월 1일, 말리노프스키(Malinovskiy)는 이지움 지역의 제1 기갑군을 공격했고 동시에 바투틴은 아크티르카 지역에 있는 호트(Hoth)의 제4 기갑군 전선의 전면공격에 나섰다. 코네프(Konev)의 스텝 전선군은 하르코프 방면의 공격에 나서 제8 군의 전선도 무기력하게 뒤로 밀려났다. 전선 곳곳이 구원 요청을 울부짖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만슈타인을 클루게에게 전화를 걸어 동부 독일에 있는 히틀러에게 날아가 특단의 조치를 받아내기로 했다. 이제는 병력뿐만 아니라 히틀러에게 집중된 작전권을 포기하라고 요구했다. 제국의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된 것이 얼마나 큰 재앙을 가져오는 지를 처음으로 문제제기를 한 것이었다.
그림 설명: 도우너 강 일대의 남부집단군 전선입니다. 1943년 9월 14일, 러시아군이 집단군의 북쪽 전선을 돌파하면서 전선은 붕괴됩니다.
그러나 히틀러는 세계최고의 전략가들에게 머리를 숙일 생각이 없었다. 클루게는 중앙집단군의 남부전선을 데스나(Desna) 강 뒤로 후퇴시키는데 성공했고 제17 군도 크리미아로 건너가고 만슈타인의 제6 군은 불가항력의 상황에서는 미우스 강에서 거북이전선으로 후퇴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아냈다.
히틀러는 여전히 환상에 사로잡혀 이미 적이 아군을 압도하고 있으며 이제는 승리가 아니라 패배를 모면하기 위한 전쟁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늘 어정쩡한 조치를 취하고 임시방편의 해결책을 선호했다. 도우너 강 일대를 포기한다고? 서부 전선의 병력을 동부 전선으로 이동한다고? 그는 이 모든 제안을 간단하게 거절했다.
아무 것도 얻지 못한 두 원수는 어두운 얼굴로 전선에 복귀하고 바로 그날 밤 연합군은 남부 이탈리아에 상륙한다. 그리고 3일 후, 말리노프스키이(Malinovskiy) 중장의 남서전선군의 제3 방위군은 독일군 제1 기갑군과 제6 군의 중간을 집중 공격해 새로 구축한 거북이전선에 큰 구멍을 내고 돌파해 제9 기갑사단이 이들을 급하게 막아 섰다. 2개 러시아 군단은 독일 제62와 33 보병사단의 저지선을 뚫고 파블로그라드(Pavlograd)로 향한다. 독일 제23 기갑사단과 제16 기갑척탄병사단이 가까스로 이들의 침투를 저지했고 제23 기갑사단의 팬더대대는 반격에 나서 러시아 23 전차군단의 보급로까지 진격했지만 병력부족으로 차단하지는 못했다.
재차 공격에 나선 러시아 전차들은 전선의 곳곳에 구멍을 내며 선봉대는 드니에페르 강을 건널 수 있는 위치까지 접근했고 로코소프스키이(Rokossovskiy) 장군의 중앙전선군은 중앙집단군과 남부집단군 사이를 공격해 제2군의 전선을 돌파했다.
북부전선을 완전히 적에게 내준 만슈타인의 제4 기갑군은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군은 이제 드니에페르 강의 중류까지 진격로를 열었고 키에프(Kiev)도 위험해졌다. 9월 7일, 만슈타인은 히틀러에게 “55개 러시아 사단과 2개 전차군단으로 남부집단군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러시아군은 남부전선에 최우선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수비하기 좋은 지역으로 후퇴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전신을 보냈다.
그의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확고했다. 히틀러는 9월 8일, 콘도르 수송기를 타고 자포로즈예(Zaporozhye)로 가서 만슈타인을 만났다. 이탈리아가 곧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할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상당히 우울한 기분이었다. 만슈타인은 “러시아군이 북부전선을 돌파해 남부집단군의 배후를 찌르면 2개 군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들을 구원할 방법이 없을 겁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지도의 제6 군을 손바닥으로 쓸어 내리며 “여기도 상황이 안 좋습니다. 마리우폴이 위험합니다. 50km나 전선에 구멍이 나있는데도 메우거나 거북이 전선을 메울 병력이 없습니다. 좋던 싫던 간에 후퇴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이요?”
“남부집단군을 드니에페르 강 건너로 후퇴시켜서 전선을 1/3으로 줄여 드니에페르 전선을 살리고 크리미아로 이어지는 강 하류도 확보해야 자포로즈예부터 멜리토폴에 이르는 튜턴(Wotan) 전선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남부집단군을 드니에페르 강 건너로 후퇴시킨다고? 히틀러에게 그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시간이 너무 걸릴 뿐만 아니라 너무 많은 전략물자를 잃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만슈타인이 지난 몇 년 동안 보여주었던 대규모의 기동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나마 남부전선이 무너지지 않고 버텨준 것은 만슈타인의 경험과 결단 덕분이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나마 남부집단군에 급히 구원병력을 투입하지 않으면 전선을 지켜내지 못한다는 것은 공감했으니 다행이었다.
그는 중앙집단군에서 4개 사단을 차출해서 가장 위협받고 있는 북부전선에 바로 투입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4개 사단을 더 증원시켜서 드니에페르의 중요한 요충지를 수비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 러시아군이 드니페에르 강에 도착하면 도강을 막을 어떤 장애물도 없었기 때문이다.
1943년 초에 드니에페르 강을 요새화하는 '동부장벽' 공사를 검토해 히틀러에게 제출한 적이 있었다. 8월 12일, 히틀러는 공사를 즉시 시작하라고 지시했지만 보안조치를 취한 것 외에는 어떤 지원도 하지 않아서 공사가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이렇게 몇 개월 지연된 대가는 패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마지막으로 만슈타인이 전선에 꼭 붙어있게 만들기 위해, 쿠반 교두보에서 크리미아로 후퇴하고 있던 제17 군의 일부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동안 번번히 속았던 만슈타인은 지금 즉시 지시를 내려달라고 요구했지만 히틀러는 몹시 화를 내며 무시했다. 콘도르 수송기에 오르기 전에, 만슈타인에게 다가와 “당신은 4개 사단을 받게 될 겁니다. 오늘 밤에 바로 지시를 내리겠소”라고 달랬다.
약속대로 중앙집단군에게 제4와 8 기갑사단 그리고 2개 보병사단을 차출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러시아군의 대규모 공격을 받고 있던 클루게는 일부러 그 명령을 무시했고, 결국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에스기 왈: 다른 집단군의 사령관의 이기주의식 대처가 아쉽게 생각될 텐데 여기에서는 남부집단군의 상황이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어서 그럴 뿐이고 다른 집단군의 상황도 위급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1개 연대가 없어서 전선의 구멍을 못 메우는 판에 4개 사단을 빼낸다는 것은 전선의 붕괴를 가져올 테니까요. 차라리 크리미아로 건너간 제17 군을 모두 남부집단군의 지휘아래 들여보냈다면 좀 더 시간을 끌 수 있었겠죠.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레닌그라드를 점령하지 않고 포위하고, 스탈린그라드에서 철수하지 않고 6군을 비롯한 동맹군 포함 240,000명을 전사 또는 포로로 잃고, 쿠르스크에서 재건된 예비병력을 모두 소진시키는 등의 오판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동부전선 자체가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히틀러는 국내외 정치를 맡고 만슈타인과 같은 천재 전략가를 본국으로 불러 동부전선의 총지휘를 맡겼다면 2차대전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만슈타인이 스탈린그라드에서 엄청난 승리를 거둔 러시아군을 후방 깊숙이 유인한 다음, 진격하는 부대가 공조없이 길게 늘어졌을 때 협공해 섬멸하는 작전을 기회가 있으면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천재인지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저도 전사를 공부하기 전에는 롬멜, 몽고메리, 패튼 정도가 역사에 남을 2차대전의 인물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만, 만슈타인은 히틀러라는 정신병자를 잘못 만난 탓에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해 그렇지 한 차원 확실하게 다른 천재전략가입니다. 생긴 모습만 보면 그냥 중노년의 할아버지입니다만)
만슈타인은 만 하루를 기다린 다음 최고사령부의 자이틀러 상급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총통에게 꼭 전해주시오. 이제 곧 러시아군이 드니에페르 강을 건널 것이라고 반드시 전해주시오”라고 몹시 화를 냈다. 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전신을 보내 “선견지명이 조금이라고 있어서 약간의 병력지원이 있었더라면 동부전선의 종말을 고할 수도 있는 지금의 위기는 피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히틀러에게 책임을 물었다.
사진 설명: 전선으로 행군하는 여성부대입니다. 여성은 주로 전차병이나 조종수로 징집했었지만 승기를 잡아야 하던 이 때에는 무차별적으로 남녀를 가리지 않고 징집해서 전투원으로 내보냈습니다.
러시아군이 독일군의 전선을 돌파하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바로 부대를 재편할 수 있었던 것은, 탈환지역에서 무차별적으로 징집을 해 새로운 병력을 수혈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패전이 있었지만 감히 히틀러를 비난한 장군은 없었다. 히틀러는 침묵을 지켜 만슈타인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러시아 최고사령부는 히틀러의 고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히틀러가 바라던 대로 전선을 돌파한 부대에게 휴식을 주는 대신에 피해를 무릅쓴 돌격을 요구했다. “남부집단군을 궤멸시켜라. 그러면 우리가 이긴다”가 스탈린의 구호였다. 러시아군은 탈환한 지역에서 남녀를 가리지 않고 총을 들 수 있는 사람이면 모두 징집해서 새로운 부대를 만들었고 전선으로 이동하는 중에 훈련을 시켰다. 군복 한 벌, 부츠 한 켤레, 소총 한 자루와 헬멧만 지급한 후에 장전과 격발훈련만 시키고 공격에 동원했다. 그리고 청소년과 노인은 후방지원부대에 징집되었다. 이런 식으로 러시아군은 단 3주 만에 아조프 해안 일대에서 80,000명의 새로운 병력을 모아 공격하는 동안 입었던 막대한 피해를 보충할 수 있었다.
9월 14일, 만슈타인이 그렇게도 걱정한, 보로네즈(Voronezh)전선군이 남부집단군의 북부전선을 돌파한 다음 드니에페르 강을 향해 남서진하기 시작했다. 러시아군은 술라와 우다이 강 사이에 있는 오코프(Okop)에 접근해 체르카시(Cherkassy)까지 불과 110km만 남겨두었다. 훨씬 북쪽에서는, 로코소프키이이의 중앙전선군이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에프 80km 지점까지 진격했다. 이제 러시아군은 드니에페르 강을 건너 남부집단군을 포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상황은 돌이킬 수 없게 악화되어 예비병력을 동원해도 적의 도강을 막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만슈타인은 “적이 곧 크레멘츄그(Kremenchug)와 키에프를 건널 것입니다. 내일 아침, 제4 기갑군을 드니에페르 너머로 후퇴시켜 포위되어 전멸하지 않게 할 것입니다. 구원군이 없다면 드니에페르 강 너머까지 갈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라고 총통에서 전신을 보냈다.
심지어 히틀러의 의견을 잘 따르던 클루게조차도 “저희 부대도 거의 대부분 드니에페르 강 너머로 후퇴시켜야 합니다.”라고 보고했다. 히틀러는 이 위급한 상황에서도 결단을 못 내리고 만슈타인에게 “내일 내게 오기 바랍니다”라는 응답을 했다.
사진 설명: 1943년 9월 중순, 역사상 가장 대담한 후퇴작전이 시작됩니다. 1,000km가 넘는 전선에서 1백만 명의 독일군이 드니에페르 강의 6개 다리로 후퇴를 합니다.
두 사람이 대면한 자리에서는 러시아군과의 전투보다도 더 긴장된 분위기가 흘렀다. 먼저 만슈타인이 “지금 위태로운 것은 드니에페르나 경제 요충지 따위가 아니라 동부전선의 운명입니다.”라고 먼저 말을 시작했다. 히틀러는 그의 직설적인 발언과 러시아군의 공격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었다. 그는 제6 군만이 튜턴 수비선에 남아 멜리토폴에서 드니에페르에 이르는 지역을 방어하고 남부집단군이 드니에페르와 데스나 강 너머로 후퇴하는 것을 허가했다. 9월 15일, 만슈타인은 전 병력의 후퇴를 명령하지만 너무 늦은 것은 아니었을까? 러시아군의 맹렬한 추격을 뿌리치고 도강지점과 다리를 먼저 차지할 수 있을까?
드니에페르 강을 향한 두 나라의 경주가 이제 시작된다. 독일군이 드니에페르 강을 먼저 건너 수비선을 제대로 펼친다면 러시아군은 천혜의 장애물을 돌파하느라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며, 러시아군이 드니에페르 강을 먼저 차지한다면 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 등의 독일우방국의 국경까지 내달릴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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