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을 읽다보면 매끄럽지 않은 문장과 오타가 참 많이도 보입니다. 왜 그 때에는 보이지 않았는지...
매일경제 온라인 기사로 실리는 이야기는 몇 번을 보는데도 여전히 오타와 비문이 보입니다. 이 기회를 빌어 죄송하다는 사과를 드립니다. 전사 역사상 첫 손에 꼽히는 한니발, 그리고 그의 제자 스피키오의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스키피오는 첫 번째 군사작전으로 스페인의 판도를 완전히 뒤흔들어놓았다. 그는 카르타고인의 숨통을 조였을 뿐만 아니라 전선 20척을 노획했고 상당한 군자금도 손에 넣었다.
무엇보다 카르타고군이 스페인 부족에게서 인질로 잡아두었던 300명의 귀족을 포로로 잡았다. 대부분의 인질은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던 부족출신이었지만 명예롭게 대우했고 원하는 사람은 귀향할 수 있게 배려했다. 그렇지 않아도 스키피오의 실력에 놀란 원주민부족은 스키피오의 유화정책을 믿고 화해와 협력의사를 밝히기 시작했다. 스키피오는 원주민을 반겼지만 절대로 믿지는 않았다.
뉴 카르타헤의 혼란을 수습한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동생인 하스드루발Hasdrubal의 군대와 전투를 벌여 기원전 208년 바에쿨라Baecula전투에서 신승을 거뒀다. 하스드루발은 패전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그럴 계획이었는지 불분명하지만, 이탈리아의 한니발과 합류하기 위해 스페인을 떠났다.
그는 이탈리아에 들어섰다가 집정관 네로Nero의 로마군의 공격을 받고 궤멸했다. 한니발은 로마군이 던진 동생의 머리를 보고서야 증원군은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스키피오는 이제 2개 군을 상대하면 되었지만 우려했던 대로 그들은 반목을 버리고 하나의 군대로 합쳐졌다. 기원전 206년, 그는 45,000명(절반 정도만 로마 군단병)을 이끌고 2배가 넘는 하스드루발(동명이인)과 마고Mago(한니발의 동생) 군대와 일전을 벌였다.
두 군대는 세비야Seville 북쪽의 일리파Ilipa에서 대치하며 서로를 자극했다. 스키피오는 중앙에 최정예 2개 군단과 라틴 동맹군을 세웠고 좌우 측면에는 스페인 동맹군을 배치했다. 카르타고군은 중앙에 최정예 카르타고군을 그리고 양쪽 측면에 마찬가지고 스페인 동맹군을 세웠다.
며칠 동안 상대를 견제하던 스키피오는 갑자기 중앙의 군단병을 양쪽으로 보내고 스페인군을 중앙으로 바꿨다. 그리고는 경보병으로 싸움을 걸었다. 카르타고군은 로마군의 갑작스런 도발에 놀라 아침식사도 하지 못한 채로 급하게 무기를 들고 원래 자리에 섰다.
하스드루발과 마고는 로마군의 진형이 정반대로 바뀐 것을 백병전이 시작된 후에야 알았다. 스키피오는 경보병으로 카르타고군을 괴롭히다가 양 측면의 군단과 기병을 전진시켜 전의가 부족한 스페인 동맹군을 압박했고 자신의 스페인 동맹군은 중앙의 제자리를 지키게 했다.
하스드루발은 측면이 무너져 내리는데도 중앙의 정규군을 움직일 수 없었다. 스키피오의 스페인 동맹군이 중앙의 빈틈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로마 군단병의 상대가 될 수 없었던 측면이 완전히 무너졌고 그나마 규율을 지키던 중앙의 카르타고 병사도 살길을 찾아 진지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스드루발의 스페인 동맹군은 완전히 전장을 벗어났고, 밤의 폭풍우를 틈타 진지에서 탈출하려던 카르타고군은 뒤를 좇는 로마군에게 학살을 당했다.
스키피오는 스페인문제를 해결한 후에 로마로 돌아왔지만 정적은 그의 대성공을 질투했고 치열한 정치싸움에 휘말렸다. 그는 간신히 1개 군을 이끌고 아프리카로 가서 카르타고의 본거지를 공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마지못해 그의 계획에 동의힌 원로원은 신병모집에는 반대하며 시실리에 있는 2개 군단만 데리고 가게 했다.
그렇다고 지원병 스스로 원정군에 합류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스키피오는 이미 병사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고 그의 휘하에 들어가려는 병사가 많았다. 그리고 원정 후의 약탈에 대한 기대도 컸다.
원로원이 허락한 5, 6군단은 칸나에전투에서 생존한 병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패전 후에 추방형과 같은 변방복무를 명령받았는데 상원이 칸나에에서 살아 돌아온 귀족집안에게는 명예회복을 시킨 것과 크게 달랐다. 5/6군단병은 심한 모욕감을 느끼며 로마로 돌아가 한니발을 상대하며 명예를 회복한 기회를 달라고 매년 청원했지만 무시당했다.
스키피오는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공감했다. 그들은 단순한 패잔병 무리가 아니었다. 칸나에 대학살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후에 다시 집결해서 로마 공화국을 지키려고 한 군대였다. 스키피오는 그들을 칭찬하며 명예회복을 약속했고 군단병은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했다.
스키피오는 지원병을 훈련시키고 군수품을 모아 군단병을 재무장시키며 1년을 보냈다.
기원전 204년, 스키피오군은 북아프리카로 향하는 수송선에 올랐고 카르타고의 전략요충지 유티카Utica를 포위했다. 수비군은 맹렬히 저항했고 대규모 구원군이 오고 있다는 소문에 큰 힘을 얻었다.
카르타고는 실제로 대규모 구원군을 모아 하스드루발과 시팍스Sypax(스피키오에게 동맹을 약속했던 지역 왕)에게 공동지휘를 맡겼다. 하스드루발은 일리파에서 당했던 참패의 기억 때문이었는지 압도적인 병력차이에도 불구하고 주도권을 가져가려 하지 않았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군의 우유부단한 상태를 보고 휴전을 제의했고 하스드루발은 바로 받아들였다. 며칠 동안 로마 협상단이 노예를 동반하고 카르타고 연합군 진영을 계속 방문했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노예로 가장한 로마 군단병은 진영을 돌아다니며 카르타고군의 전력과 방어상태를 조사했다.
신분을 철저히 속이기 위해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돌아다녔다며 카르타고 병사 앞에서 채찍질을 당하기도 했다.
스키피오는 자세하게 조사한 정보를 바탕으로 매우 위험한 모험을 하기로 결정했다. 압도적인 적, 그것도 진지에 틀어박힌 적을 야습하기로 했다. 스키피오는 명예회복에 칼을 갈아온 군단병을 믿었고 그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단 하룻밤 사이에 2개 군단은 2배가 넘는 40,000명을 죽이고 나머지를 달아나게 만들었다. 하스드루발은 겨우 한 달 만에 군대를 모아 스키피오에게 도전했지만 급하게 모은 군대가 로마 정예군단을 상대할 수 없었다.
두 번의 참패 후에 더 이상 병력을 모을 수 없었던 카르타고는 이탈리아에 있던 한니발을 급하게 불러들였고 이탈리아 전역을 전쟁으로 몰아 넣었던 2차 포에니전쟁은 이렇게 끝났다. 그렇지만 전사역사에 남는 대회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원전 202년, 스키피오와 한니발은 자마Zama에서 다시 마주쳤다. 양쪽 모두 40,000명이었지만 칸나에와 달리 이번에는 로마가 더 우수한 기병전력을 가졌다. 누미디아Numidia왕 마시니사Masinissa가 카르타고 대신에 로마를 선택하며 귀중한 전력을 보태주었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처럼 기병을 측면에, 보병은 3열로 배치했다. 그렇지만 부대간의 공간은 이상할 정도로 크게 벌렸다.
한니발은 초반의 탐색전 후에 80마리의 코끼리를 내보냈지만 이번에는 칸나에의 로마군단이 아니었다. 전의에 불타는 병사와 한니발을 너무 잘아는 지휘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군단병 사이를 폭주하며 밟고 들이받아야 할 코끼리가 넓게 벌려 놓은 공간 사이로 그대로 빠져나갔고 로마군도 일부러 옆으로 길을 비켜주었다. 로마군에게 달려들었던 몇 마리는 소음과 투창에 놀라 오히려 카르타고 기병대열로 뛰어들기도 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라엘리우스와 마시니사는 양 측면의 기병에게 카르타고 기병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카르타고 기병은 순식간에 밀려났고 로마 기병이 그 뒤를 추격했다. 로마보병대는 기병이 사라지자 곧바로 선두에 있던 카르타고 용병을 밀어붙여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두 번째 열은 제자리를 지키며 로마군을 기다렸고 용병과 카르타고 정예병이 충돌하며 큰 내분이 일어났다.
결국 로마군의 공격까지 받은 두 번째 열도 등을 돌렸지만 똑 같은 신세가 되어 로마군과 세 번째 열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카르타고 기병, 경보병과 용병이 그대로 무너졌다고 해도 한니발은 이탈리아 원정을 함께 한 막강한 정예병이 아직 남아 있었다. 스키피오는 궁병 사거리에 들어간 부대를 불러들였지만 격전을 치른 부대를 교체하지 않고 밀집대형으로 서게 한 후에 3열의 정예병을 양 측면으로 배치하며 진형을 바꿨다.
잠시 숨을 돌린 로마군단은 방패를 들어올리며 속보로 다가가 창을 던지고 칼을 뽑아 들었다. 카르타고 정예병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로마군과 격전을 벌였다. 누구의 승세인지 알 수 없던 차에, 로마와 누미디아 기병이 돌아와 카르타고군의 배후를 덮쳤다.
카르타고 정예병은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등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 달아났다.
한니발은 목숨을 건졌지만 이제 군대가 사라졌고 카르타고는 로마의 자비를 구할 수 밖에 없었다. 로마는 이제 지중해 서부에 군림하게 되었다. 스키피오는 빛나는 승리로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지만 그만큼 함께 할 수 없는 정적이 생겼다. 그는 결국 로마의 권력층과 멀어졌다. 끊임없는 고발을 당한 끝에 치욕스러운 은퇴를 했고 이른 나이(52세)에 생을 마쳤다.
그의 몰락은 후세 정치인에게 교훈을 남겨주었고 마리우스Marius, 술라Sulla와 카이사르Caesar는 홀몸으로는 로마에 들어서지 않았다. 그들은 충성스러운 군단병을 앞세웠고 그렇게 정권을 잡았다.
한니발은 로마의 압력으로 소아시아로 자발적인 망명길에 올랐다가 64~66세에 자살했습니다. 그의 정확한 사망년도는 기록마다 다릅니다.
한니발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고 분열했던 카르타고는 자마전투 63년 후인 기원전 149년, 로마의 압력으로 3차 포에니전쟁에 끌려 들어갔고 기원전 146년에 멸망했습니다.
로마는 모든 건물을 부수고 소금까지 뿌려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한니발과 스키피오, 칸나에와 자마전투는 전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과 사건인데 이상하리만큼 영화화되지 않았습니다.
허술하게 재현되었지만 자마전투 장면을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고대 > 로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골족의 2차 로마침공 그리고 로마의 복수 (0) | 2015.05.19 |
---|---|
지중해를 지배한 로마해군의 역사 (0) | 2015.05.10 |
한니발의 제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1부) (0) | 2015.02.28 |
로마군단의 무덤 페르시아 – 율리아누스 황제의 메소포타미아 원정 (0) | 2014.10.15 |
로마의 무덤, 파르티아 (2부) (0) | 2014.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