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대/로마

지중해를 지배한 로마해군의 역사

by uesgi2003 2015. 5. 10.


고대 로마를 생각해보면 막강한 로마군단을 생각하기 쉽지만 그들은 지중해를 지배하면서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습니다. 엄청난 피해를 무릅쓰면서 해군을 양성하지 않았다면 제국건설은 물론이고 존립자체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해군과 해전경험이 없었던 로마가 지중해를 어떻게 지배할 수 있었는 지에 대해 정리해보겠습니다.

 

지중해를 지배한 로마해군의 역사

 

기원전 31, 그리스 앞바다 악티움Actium에서는 전사에서 손꼽는 명장 두 사람이 로마와 세계역사를 놓고 대치하고 있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와 클레오파트라Cleopatra는 몇 개월 동안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의 그리스 봉쇄를 풀려고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여름이 지나가면서 보급품 상황이 심각해진데다가 질병까지 퍼졌다. 92, 그는 200척의 전함에 20,000명의 보병과 2,000명의 궁수를 태우고 해상봉쇄를 돌파하기로 했다. 상대는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Marcus Vipsanius Agrippa 함대로 400척의 전함, 16,000명의 보병과 3,000명의 궁수였다.


 

명작 미드 롬Rome2에서 옥타비아누스의 측근으로 잠깐 등장하는 조연이었지만 실제로는 아그리파가 없었다면 옥타비아누스의 내전승리와 황제즉위가 불가능했을 정도로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카이사르의 내전부터 옥타비아누스의 내전까지 참전했고 안토니우스의 운명을 봉쇄한 명장이었습니다.

사진은 베니스 박물관에 있는 아그리파 석상입니다. 

 

안토니우스 함대는 숫자는 적었어도 5단노선Quinquereme이 주력이어서 보병과 궁수가 높은 위치에서 근접전을 벌일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아그리파 함대는 나폴리에서 2년 전에 만든 2단노선Liburna으로 상대보다 가볍고 빠른 장점이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전통적인 로마식 해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적선에 달라 붙어서 보병이 배에 올라 육박전을 벌이는 전술이었다. 그렇지만 아그리파는 카이사르 다음으로 손꼽히는 로마의 명장으로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안토니우스의 함대가 먼저 공세를 펼쳤다. 4시간 동안 전초전을 벌였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정오가 지나면서 바람이 불자 안토니우스 함대는 간격을 넓히며 숫자가 많은 아그리파 함대에 맞섰다.

아그리파는 안토니우스 함대의 계획을 간파하고 있었고 5단노선의 노와 방향타를 부수며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는 움직임이 크게 둔해진 5단노선에게 여러 척이 달라붙으며 들이받았다. 안토니우스 함대는 제자리에 멈춘 채로 적의 공격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적은 다가오지 않았다. 아그리파의 2단노선은 제자리에 떠있는 5단노선에게 다가가 발리스타Ballista로 화염탄을 날려 보냈다. 불이 붙자 선원과 보병이 그릇으로 물을 떠서 불을 끄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도끼로 불붙은 구역을 잘라내지 못하면 전체로 불길이 번졌다. 수 천 명이 물로 뛰어 들었다가 익사하거나 불에 타죽었다.



17세기의 그림이니 르네상스 느낌이 물씬 풍기는 악티움 해전입니다. 

 

아그리파의 승전으로, 옥타비아누스는 지중해를 호령하게 되었다. 악티움해전 이전까지는 필요할 때마다 함대를 만들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최신전함을 갖춘 제국함대를 창설했다. 그리고 500년 동안 로마제국은 지중해를 지배했고 육군군단만큼이나 귀중한 전력이 되었다


시간을 되돌려 기원전 3세기가 시작될 당시에는 300척의 대함대를 갖춘 카르타고Carthage가 지중해의 절반을 장악한 해상강대국이었다. 로마는 해군도 없었고 일체의 해전경험도 없었다. 기원전 264년에 1차 포에니Punic 전쟁(아래 GIF 지도참조)이 터지면서 로마는 해군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원로원은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Cornelius Scipio(한니발에게 이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할아버지)에게 첫 번째 함대건설을 맡겼다.

이탈리아는 전나무가 많았지만 조선술도 없었고 선원이나 함장은 더더욱 구할 수가 없었다. 로마는 노획한 5단노선을 그대로 복제했다. 노획한 전함을 템플리트로 사용해서 100척의 5단노선과 20척의 3단노선을 단 2달 만에 양산했다. 165명의 목수와 20,000명의 인부를 동원한 결과였다.


 

전함건조보다 병력과 훈련비용이 더 큰 문제였다. 다른 나라처럼 노예를 쓸 수 없어서 선원도 값비싼 자유민으로 충당해야 했다. 결국 군병력을 대거 동원하기로 했다. 해변에 훈련용 목선을 올려두고 기본적인 노젓기와 항해술을 익혔다. 그리고는 해상강대국이었던 카르타고를 상대로 바다에 나섰다.

당시 해전술은 능숙한 함장이 솜씨좋게 배를 몰아 적선을 스쳐지나가며 노를 부러트려 움직임을 봉쇄하고 선수 아래에 달려있는 금속제 충각으로 선체를 들이받아 구멍을 내고 침몰시켰다.

 

능숙한 함장과 선원이 너무 부족했던 로마는 육상의 보병전술을 그대로 사용했다. 쇠뇌로 연결줄을 쏘아 적선을 끌어당겨 붙이고 보병이 배에 올라 백병전을 벌였다. 나중에는 아예 까마귀Corvus라는 나무다리를 만들어서 적선으로 건너갔다. 까마귀 아래에는 크고 긴 쇠징이 달려 있어서 적선 갑판에 깊숙이 박히며 쉽게 풀리지 않았고 밧줄을 이용해 내려트리는 방향을 조절할 수도 있었다.

로마의 등선육박전술은 카르타고해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기원전 260년에 벌어진 밀라이Mylae전투에서 카르타고해군을 밀어내고 시칠리아 해안을 확보했다.






기원전 256, 로마는 250척의 전함과 80척의 수송선에 60,000명을 싣고 북아프리카에 상륙했다. 200척의 카르타고 전함이 로마수송선을 노렸지만 해전경험이 쌓인 로마해군이 30척을 침몰시키고 50척을 노획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로마군은 북아프리카에 상륙했지만 지상전에서 패배하고 후퇴했다.

1차 포에니전쟁에서 로마해군은 카르타고해군보다 훨씬 큰 피해를 입었는데 악천후에도 출전하는 로마군의 전통때문이었다. 거친 바다에서는 선수에 달린 커다란 까마귀가 선체를 뒤집는 원인이 되었고 600척의 전함, 1,000척의 수송선과 400,000명의 병력을 잃었다. 이렇게 큰 피해는 전무후무한 일로 이탈리아 성인남성의 15%를 잃은 셈이었다.

로마는 막대한 손실에도 불구하고 전함을 다시 건조하고 해군을 보충했다.

 

기원전 241, 로마는 시칠리 릴리바움Lilybaeum을 봉쇄했고 카르타고는 함대를 보내 봉쇄를 풀려고 했다. 카르타고는 승리를 확신했던지 전함에 보병을 태우지 않았고 봉쇄를 푼 후에 릴리바움 병력을 태운다는 계획이었다.

로마함대는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함대를 막아섰다. 시칠리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200척의 카르타고 전함 중 50척이 침몰하고 70척을 노획되는 궤멸을 당한 카르타고는 이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긁어모은 함대를 잃었고 배를 건조할 예산이나 충원할 병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로마다 드디어 서 지중해의 주인이 되었다.

 

20년 후, 로마와 카르타고는 다시 한 번 전쟁을 벌였다.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린 카르타고는 함대를 만들지 못했다. 2차 포에니전쟁(기원전 218~202) 초기, 220척의 로마함대에 비해 카르타고는 겨우 50척만 보류했다.

한니발Hannibal은 이탈리아 본토에 직접 상륙하지 못하고 스페인을 통해 우회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온전한 함대가 있었다면 한니발은 자신이 원하는 전장을 선택하며 로마를 궁지에 몰아넣고 본토에서 보급을 제대로 받아 세계역사를 다시 썼을 수도 있었다.

어쨌든 20년 가까이 벌어진 긴 전쟁동안 큰 해전은 단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다. 204, 로마는 26,000명의 병력과 1,200마리의 군마를 400척의 수송선에 태우고 시칠리에서 북아프리카로 향했다. 서 지중해는 이미 로마의 앞마당이었기 때문에 전함은 겨우 40척밖에 안되었다.

2년 후, 스크피오는 자마Zama에서 한니발을 궤멸시키고 카르타고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제 로마는 셀레우코스Seleucid제국와 동지중해 패권을 두고 싸우게 되었다.


 

로마는 해군만으로는 승리를 가져올 수 없으며 지상작전 지원역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수송선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기원전 192, 동 지중해에서 셀레우코스제국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안티오코스Antiochus 3세는 대함대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에서 에게해를 건너기 힘들었다. 루키우스 스피키오Lucius Scipio(스피키오 아프리카누스의 형제)는 육지로 헬레스폰트Hellespont(지금의 터지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셀레우코스 본토에서 전쟁을 벌였다.

 

수송선은 전함의 엄호를 받으며 병력을 해협건너로 수송했고 몇 주 동안 양측은 해변에서 전초전을 벌였다. 기원전 19012, 로마군이 해안을 따라 내려가 안티오쿠스Antiochus를 공격했고 셀레우코스함대는 로마의 봉쇄를 풀려고 했다.

미오네수스Myonnesus해전에서 로마가 승리를 거뒀다. 몇 주 후에 안티오쿠스의 육군도 마그네시아Magnesia전투에서 패전하면서 로마가 지중해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지중해에서는 로마, 로마의 동맹인 로도스Rhodes 그리고 이집트만이 함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로마는 여전히 육상강대국으로 남았고 이후 100년 동안 세계최강의 해군은 서서히 해체되고 전함도 썩어갔다. 로마함대가 떠난 자리에는 자연스럽게 해적이 스며들었다.

기원전 102, 1,000척 이상의 해적선이 지중해 수송로를 약탈하고 400곳 이상의 해안정착지를 습격해 로마 노예시장에 팔아넘겼다. 로마는 자신의 밀 수입로가 위협받은 후에야 대응에 나섰다. 기원전 67, 원로원은 폼페이우스Pompey에게 해적소탕을 맡겼고 그는 1년도 안되어서 해적소굴을 청소하고 해상교역로를 다시 확보했다. 로마는 다시 해군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비교적 잔잔한 지중해에서만 머물던 로마해군은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시대에 들어서면서 대양항해에 나섰다. 기원전 56, 그는 골Gaul의 베네티Veneti 원정에 나섰는데 비스카이Biscay만에 살고 있던 이들은 뛰어난 해양부족이었다. 카이사르가 육군을 이끄는 동안 데키무스 부루투스Decimus Brutus가 함대를 지휘해 베네티함대를 공격했다




골족 전함(위 사진 참조)은 모든 면에서 로마 5단노선을 압도했다. 오크나무의 선체는 로마전함에 비해 워낙 단단해서 충돌해도 소용이 없었고 평저선으로 수심이 낮은 해안에 적합했다. 갑판도 높아서 로마보병이 올라타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커다란 가죽 돛으로 거친 바람에도 잘 견뎠으며 속도도 더 빨랐다.

그렇지만 장점은 단점이 되기도 한다. 골족 전함은 노없이 돛으로만 추진력을 얻었고 돛대 양쪽에 보조 돛을 달았다. 로마군은 긴 막대 끝에 날카로운 고리를 달고 골 전함 옆을 스쳐지나갈 때에 돛과 보조 돛을 잘라냈다.

유일한 추진장치인 돛이 잘린 골족 전함은 제자리에 멈췄고 로마군은 여유있게 배에 올라타 백병전으로 승부를 냈다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해전 후에 노획한 전함을 프랑스 남부 해안 항구도시로 보내 북부 지중해도 장악했다. 그는 먼저 2개의 중앙함대를 창설했다. 나폴리만의 미세눔Misenum에 미세눔함대Classis Preatoria Misenensis를 배치해서 이탈리아와 남부의 교역로를 지켰고 아드리아해 라벤나Ravenna에 라벤나함대Classis Praetoria Ravennatis를 두어 달마시아Dalmatia와 일리리아Illyria를 견제했다. 로마의 곡창인 이집트를 지키기 위해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알렉산드리아함대를 배치했다.



로마함대의 위치입니다. 

 

독일 라인강 부근의 원정(5~16)을 벌이면서 콜롱Cologne 부근 알텐부르크Altenburg에 게르마니아함대Classis Germanica를 추가했고 43~60년에 영국을 점령하면서 게소라이쿰Gesoraicum(지금의 볼로뉴Bologne)에 브리타니아함대Classis Britanica를 배치해서 해상 보급로를 확보했다. 브리타니아함대는 스코틀랜드를 일주하면서 영국이 거대한 섬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밝혀냈다.

 

네로Nero(54~68)는 아르메니아Armenia전쟁 후에 폰투스Pontica함대를 만들어서 흑해를 장악했다. 제국의 국경이 확장되면서 다뉴브Danube강의 수역도 중요해져서 판노이아Pannonica와 모에시아Moesica함대를 서쪽과 동쪽에 배치했다. 모에시아함대는 트라야누스Trajan의 다키아Dacia 점령(101~106)dp 큰 역할을 했다.

하드리아누스Hadrian(117~138)는 다뉴브강 동서함대를 다시 남북으로 나누어 판노이아가 남부와 헬레스폰트를, 모에시아는 북부와 다뉴브강을 담당했다.

나중에 노바 리비아Nova Libyca함대와 같은 소함대를 만들어서 호수나 해안을 맡기고 시리아Syriaca함대는 파르티아Parthia 국경수비군을 지원했다.

 

함대는 보통 군단과 함께 배치되어 보급선을 확보하고 병력을 수송하고 강과 해안을 경비했다. 해군은 육군의 명령을 받았고 선원이 아닌 병사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묘비명에도 군단병으로 기록되었다. 해군편제는 육군과 같이 편성되었고 배에는 백부장Centurion이 탑승했다. 백부장은 보병전술에 따라 배를 방어하거나 적선을 공격했다.

 

소함대는 10척으로 구성되었으며 귀족가문의 기마병 계급이 지휘했고 함대사령관은 장관계급이었다. 선원은 저유하층민이었다가 나중에는 동 지중해 그리고 속수의 해양민족에서 충원했다. 복무기간은 26년이었고 제대 후에는 로마시민권을 받을 수 있었다.

 

해군의 역할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했는데 대함대의 해전에서 점차 소규모 기동함대로 진화했다. 라인, 다뉴브, 나일강이 안전해지면 강함대는 육군작전을 지원하거나 국경선 경비에 투입되었다. 15, 게르마니쿠스Nero Claudius Drusus Germanicus는 독일원정을 하면서 내륙 수로에 사용할 새로운 선박이 필요했고 선수와 선미는 좁은 대신에 선체는 넓은 평저선을 만들어냈다.

해안과 강 경비가 많아지면서 로마해군은 이런 평저선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로마는 400년 동안 바다를 지배하다가 동쪽의 야만족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무너지면서 해군도 함께 무너지게 되었다. 450, 반달Vandal족이 북아프리카에 왕국을 세우고 강력한 해군력을 가지게 되었는데 가이세리크Gaiseric왕은 지중해 해안을 약탈하다가 로마를 공격했다(그림 참조).

477, 가이세리크가 죽었지만 반달족은 로마를 지중해에서 완전히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었다



자막이 없지만 카이사르 사후의 로마내전과 악티움해전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는 동영상입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