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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마

골족의 2차 로마침공 그리고 로마의 복수

by uesgi2003 2015. 5. 19.


골족의 2차 로마침공 그리고 로마의 복수

 

기원전 4세기말, 연회, 춤꾼과 음악가를 새겨 넣던 에트루리아Etruria 무덤(사진 참조)은 지하세계의 악마와 괴물로 바뀌었다. 그 당시 벽화는 미술이 아니라 문학이자 역사기록이었다. 한때 번성했던 에트루리아 문명은 빠르게 성장하는 남부 로마 그리고 약탈을 일삼는 북부 켈트 골Gaul(또는 갈리아)족의 사이에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기원전 390, 골족은 북부군단(알리아Allia전투)을 궤멸시키고 로마를 잿더미로 만들었고 로마역사에서 죽음의 날Dies Ater로 기록되었다. 기원전 284년에는 세노네스Senones부족이 에트루리아 아레티움Arretium을 포위하고 로마구원군을 궤멸시키고 집정관을 죽였다.

로마군은 세노네스 영토를 공격해 철저하게 보복해 아예 50년 동안 황무지로 만들어버렸다.



로마약탈을 그린 1890년대 그림입니다. 


 

로마의 보복에 자극을 받은 보이Boii부족은 다른 켈트족의 합류를 기다렸고 그 당시만 해도 이탈리아 북부를 누가 차지할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였다.

기원전 3세기초, 보이가 남부로 침공했지만 큰 소득없이 로마와 휴전상태를 이어갔다. 50년 후, 보이는 전쟁의 공포를 모르는 젊은 세대로 완전히 교체되었고 자연스럽게 남부를 넘보기 시작했다. 보이족장은 알프스 너머의 갈리아 트란살피나Gallia Transalpina 부족에게 합류할 것을 청했다. 로마군이 급하게 달려갔지만 첩보와 달리 오히려 반가운 상황이 벌어졌다.

골족 사이의 반목과 의심은 격렬한 내분으로 번졌고 트란살피나 왕 아티스Atis와 갈라투스Galatus가 죽었다.


로마는 이미 세노네스 영토까지 합병했기 때문에 보이는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로마는 해안선을 따라 식민지 세나 살라키아Sena Gallacia를 건설했고 이제는 내륙에도 로마 시민이 이주하거나 시민권을 부여했다.

로마는 무력으로 식민지를 확대했다. 로마에서 징집한 식민지건설부대가 군기를 앞세우고 새 정착지에 들어섰다. 의식용 청동쟁기로 국경선을 팠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알프스 남부의 갈리아 키살피나Gallia Cisalpina 모두를 로마가 차지할 것이 분명해졌고 보이는 뜻을 같이한 인수브레스Insubres부족과 연합했다. 많은 연합군을 모으기 위해 론Rhone강과 알프스 부근의 유명한 용병부족 가에사타에Gaesatae에게 사절을 보냈다.

두 부족은 가에사타에왕과 전사에게 많은 금을 보여주며 로마를 점령하면 이 정도는 약과라고 설득했다. 그리고 세 부족이 연합하면 조상이 알리아강에서 로마군단을 궤멸시키고 7개월 동안 로마를 차지했던 영광을 다시 누릴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렇지 않아도 호전적인 가에사타에부족은 바로 전쟁을 선택했다.

골족 역사상 이렇게 호전적인 부족이 갈등을 버리고 연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골족 전사 중 완전나체가 있다면 가에사타에 전사입니다. 다른 부족도 무장상태는 빈약해서 투구정도가 고작이었고 흉갑까지 입었다면 고위지휘관이나 족장입니다. 골족은 호전적이고 체격이 큰 장점이 있는 반면에 개인적인 백병전을 선호했고 원거리 무기가 부족한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기원전 225, 가에사타에는 포Po강 평원으로 내려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목표를 유지한 보이와 인수브레스와 달리 골족은 분열하기 시작했다. 알프스 남부에서 타우리스키Taurisci부족이 합류했지만 베네티Veneti와 케노마니Cenomani는 골족 연합군에 합류하지 않고 오히려 로마에게 친선사절단을 보냈다.

친로마 부족을 등뒤에 두고 나설 수 없었던 보이와 인수브레스는 상당한 병력을 남겨둘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골족 연합군은 기병 20,000에 보병 50,000이 넘는 사상 최대의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

 

로마는 200년 전의 도시국가가 아니었다. 수 많은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공화국과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고 에트루리아 너머 중앙과 삼니움Samnites를 포함한 남부 이탈리아의 라틴부족을 모두 흡수했다.

기원전 264년이 되자, 로마는 동맹, 정복, 식민지건설과 시민권으로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확보했다. 시칠리Sicily를 둘러싼 이권다툼으로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와 1차 포에니Punic 전쟁(기원전 264~241)을 벌여 승리를 거두면서 시칠리, 사르디니아Sardinia와 코르시카Corsica로 합병했다.

로마는 일리아 해적여왕 테우타Teuta를 정벌해 해상교역로도 확보했다.

 

치욕적인 로마점령 후, 로마군은 경직된 중장보병Hoplite 밀집대형Phalanx를 포기하고 60~120명의 유연한 중대Maple대형으로 전환했다. 삼니움 직사각형방패Scutum와 단검으로 무장했고 백병전을 벌이기 전에 단창을 던지는 전술을 익혔다. 새 편제, 무장과 전술로 수 많은 적과 교전하며 승패를 거듭하는 동안 로마군은 더욱 커지고 강해졌다.

기원전 4세기 말, 1개 군단이던 병력은 4개 군단(늑대, 멧돼지, 말과 미노타우루스)으로 늘어났고 기원전 225년에는 10개 군단 이상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로마는 카르타고와의 전쟁을 끝냈기 때문에 동맹군까지 골족에게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골족의 침입에 놀란 모든 동맹이 로마에게 군대를 보냈고 150,000명의 대군이 모였다. 이렇게 모인 병력은 3개로 나뉘어져 에트루리아, 아드리아해 해안 (마레 하드리아티쿰Mare Hadriaticum), 사르디니아에 주둔했다.

베네티와 케노마니군도 보이 국경에 집결했다.


로마군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골 연합군은 파죽지세로 에트루리아로 들어섰고 마음대로 약탈했다. 조만간 로마도 같은 운명이 될 것처럼 보였다. 골족은 에트루리아 주둔 로마군을 지나쳐 로마 3일 거리까지 접근했고 깜짝놀란 로마군은 급하게 그 뒤를 추격했다.

골족은 우선 로마군부터 상대하고 로마는 그 다음에 처리하기로 했다. 추격해온 로마군 규모가 상당한데다가 로마를 공격하던 중에 뒤에서 적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양측은 화톳불이 서로 보이는 거리에서 밤을 보냈다.

 

로마군 규모가 컸기 때문에 골족은 야전을 피하고 미끼를 던지기로 했다. 기병은 진영에 그대로 두고 보병만 몰래 빠져나가 파에술라에Faesulae 마을에 숨었다. 날이 밝자 골족 보병이 달아났다고 오판한 로마군은 기병에게 접근했는데 골족 기병은 파에술라에 방향으로 달아나면서 로마군을 끌어들였다.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지만, 숨어있던 보병이 추격하는 로마군 대열을 덮쳤고 기병도 말을 돌려 협공했다. 이전의 밀집대형이었다면 로마군은 그대로 전멸했겠지만 숙련된 중대대형으로 명령에 따라 뭉치며 골족의 공격에 맞섰다.

6,000명의 병력을 잃은 로마군은 방어하기 쉬운 언덕으로 이동했다. 골족도 야간행군에 이어 격렬한 전투를 벌여 힘이 다한 데다가 경사면을 올라 공격하다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물러나 휴식을 취하고 기병으로 로마군이 달아나지 못하게 지키기로 했다. 지금까지 상대한 로마군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루키우스 아에밀리우스 파푸스Lucius Aemilius Papus가 이끄는 아드리아해 병력이 골족의 침입소식을 듣고 강행군으로 늦게나마 전장에 도착해 골족 부근에 진영을 차렸다. 루키우스 군대의 화톳불은 구원군이 왔다는 신호가 되었고 언덕 위에 몰린 로마군 전령하나가 포위망을 뚫고 상황을 알려주었다.

골족도 구원군의 수 많은 화톳불을 확인했고 작전회의 끝에 막대한 약탈물(가축과 노예)을 끌고 후퇴하기로 했다. 일단 고향 땅에 약탈물을 들여 놓은 후에 다시 추격군을 상대하기로 했다. 이날 밤, 골족은 다시 로마군 몰래 빠져나갔다. 

새벽에 루키우스는 전열을 갖추고 기병과 함께 언덕으로 향했다. 골족은 사라졌지만 뒤에 남은 엄청난 발자국이 방향을 알려주고 있었다. 고립된 병력까지 합친 로마군은 에트루리아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달아나는 골족을 추격했다


골족 선봉대는 텔라몬Telamon만 부근에서 남하하는 로마 기병과 갑자기 마주쳤다. 양쪽은 짧은 전투를 벌였고 골족 선봉대가 포로로 잡혔다. 놀랍게도 로마군은 남쪽이 아니라 북쪽으로 끌고 갔는데 로마군 진영은 골족 전방에 있었다. 바로 사르디니아 주둔군으로 피사Pisa에 상륙해 로마로 남하하던 중이었다.

가이우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Gaius Atilius Regulus는 포로를 심문해 골족의 위치를 파악했다. 추격하는 루키우스군과 협공하면 골족을 궤멸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고 행군이 아닌 전투대형으로 전진하라고 명령했다.

 

가이우스는 골족의 행군로 옆에 아퀼로네Aquilone 언덕이 전략요충지라는 것을 알고 기병을 이끌고 언덕으로 달려갔다. 골족은 로마기병이 앞서서 언덕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고는 추격하는 루키우스 기병이 앞지른 것으로 생각했다. 골족 기병과 경보병이 달려나가 로마군을 공격했고 붙잡혀온 포로에게서 레굴루스 군단병력이라는 놀라운 말을 들었다.

 

골족의 상황은 암울했다. 로마군을 피해 빠져나갈 길이 막혔고 이제 살아남기 위해 전투를 벌여야했다. 보이와 타우리스키가 가이우스군을 맡고 가에사타에와 인수브레스가 루키우스군을 맡기로 했다. 골족은 전투마차와 수레를 측면에 배치하고 약탈물은 근처 언덕으로 옮겨 경비병을 배치했다.

로마군과 골족 보병은 언덕에서 벌어지는 기병전을 지켜보았다. 언덕 그리고 기병전에서 전투의 승패가 결정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만큼 가이우스도 뒤로 물러나지 않고 싸우다가 칼을 맞고 목이 잘렸다. 가이우스의 목은 골족의 사기를 잠시 올려주었지만 루키우스의 병력이 도착했다.

그는 가이우스가 그렇게 가까이에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보병에게 전열을 갖추라고 명령한 후에 기병을 몰고 언덕으로 달려갔다. 골족 기병은 결국 밀려났고 로마군이 언덕을 차지했다.


 

이제 보병차례가 되었다. 유리한 로마군도 골족의 기세에 잠시 주춤거렸다. 골족은 뿔나팔을 불고 방패를 두드리며 동시에 악을 써서 로마군을 겁에 질리게 했다. 골족 전사는 불리한 상황인데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골족은 긴창과 단창, 돌팔매와 큰 철제 칼을 가지고 있었는데 칼은 주로 베는 목적이어서 대형을 갖춘 근접전에서는 불리했다. 그리고 주조기술이 원시적이어서 한 두 번 방패를 때리면 휘는 경우가 많았다. 

로마군은 서두르지 않았다. 수 천 명의 경보병이 대열 틈으로 나와 골족을 향해 단창을 계속 던졌다. 골족은 상대할 원거리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방패로 막다가 피해를 입었다.

특히 나체로 선두에 서 있던 가에사타에 전사가 큰 피해를 입었다. 로마군에게 채 접근하기도 전에 창을 맞아 쓰러졌고 등을 돌려 달아나다가 뒤와 부딪치며 혼란을 일으켰다.


 

나팔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로마군이 중대단위로 골족에게 다가섰다. 첫 열이 충분히 다가서자 창을 던졌다. 골족은 방패로 투창을 막았지만 그렇게 방패에 박힌 투창은 구부러져 매달리면서 방패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로마군의 찌르는 단검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골족의 크고 둔한 베는 칼은 두터운 방패벽에 막힌 반면, 로마군은 접근하는 골족 전사를 방패 틈사이로 쉴새 없이 찔러 쓰러트렸다. 그렇지만 골족은 물러서지 않고 큰 칼을 휘둘러 방패를 쪼개고 로마군 투구 위로 칼을 내리쳐서 대열을 무너트렸다.

전투를 단 번에 결정지은 것은 역시 기병이었다. 언덕에서 밀려난 골족 기병이 전장을 버리고 달아났고 로마군 기병이 언덕에서 내려와 골족 보병의 옆을 쳤다. 창을 맞은 골족 대열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전투가 끝나자 들판에는 40,000명의 골족 시체가 남았다. 콘솔리타누스Consolitanus왕도 죽었고 나머지 10,000명은 포로가 되어 노예로 끌려갔다. 아네로에스테스Aneroestes왕은 전장에서 달아났지만 패전에 괴로워하다가 숨을 거뒀다.

루키우스는 골족 약탈품을 모아 로마로 보냈고 로마는 원래 소유주에게 돌려주었다. 루키우스는 이 기회에 화근을 없애겠다며 군단을 이끌고 보이 영토로 들어가 마음대로 약탈하고 불태우게 했다. 며칠 후에 골족 깃발과 귀금속 장식품을 앞세우고 로마 거리를 행진했다.

 

텔라몬전투는 북부 이탈리아를 확실하게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향후 3년 동안, 로마군이 북부 이탈리아의 포Po계곡을 공격했는데 기원전 222년 클라스티디움Clastidium에서는 로마장군 클라우드우스 마르켈루스Claudius Marcellu와 인수브레스 족장 비르도마루스Virdomarus의 결투가 벌어졌다.

비르도마루스는 라인강물에서 태어나 로마침략자를 처리하겠다고 장담했는데 마르켈루스의 칼이 그의 목을 꿰뚫었고 골족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달아났다.

 

2년 후, 포 계곡의 골족 대부분은 로마에 항복했고 로마는 플라켄티아Placentia와 크레모나Cremona에 라틴식민지를 세워 입지를 다졌다. 한니발 바르카Hannibal Barca가 이탈리아를 침공해 2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킨 덕분에 골족은 10년 동안 회복기를 가질 수 있었다.

기원전 191, 보이족은 마지막 패전을 하면서도 로마에 항복하지 않았다. 보이족은 동쪽으로 이동해 다뉴브Danube지역에 보헤미아Bohemia라는 이름으로 정착했다.



로마제국이 형성된 후에 골족은 많이도 쫓겨다니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기를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무척 긴 내용입니다. 

 

로마에서 시작된 도로와 식민지가 북부에도 이어졌고 골족의 침공을 기록했던 폴리비우스Polybius50년 후에 여행을 할 때에는 이미 로마화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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