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프랑스(나폴레옹), 2차대전 등은 워낙 많은 한글자료가 있기 때문에 제가 피하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제 서재에 놀러 오시는 분이 많다 보니 아무래도 인기관리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로마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로마는 왕정이었던 기원전 753년부터 동서제국의 1453년까지 무려 2,200년을 이어가며 숱한 유물과 역사를 남겼습니다. 로마가 그렇게 오래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시대를 앞선 정치, 경제와 군사체제의 덕분이기도 하지만 위기에 몰릴 때마다 위인을 찾아냈고 그의 능력에 모든 것을 맡긴 이유도 있습니다.
그래서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이 남긴 이야기가 계속 인기를 끌고 그들의 리더십을 배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입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 기억하시죠? 검투사 경기장에서 막시무스가 전차를 상대로 명장면을 만들어냈던, 경기테마가 바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카르타고 정벌이었습니다. 로마군은 전차를 사용하지도 않았고 여성용병을 고용하지도 않았습니다만.
어쨌든, 우리도 위인이 다시 나타나겠죠? 우리가 2,000년 전의 로마시민 수준이 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한니발의 제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는 무섭고 난폭했던 상대 한니발Hannibal을 상대하면서 전략전술을 배웠고 전사역사상 가장 뛰어난 명장으로 이름을 남겼다.
17살 당시, 로마 집정관이었던 아버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를 따라 북부 이탈리아로 가서 티키누스Ticinus강에서 카르타고군과의 첫 번째 전투를 지켜보았다. 로마는 이 전투부터 시작해서 한니발에게 수없이 패하게 되는데, 스키피오는 패전위기에서 카르타고 기병에게 돌격해서 아버지의 목숨을 살려냈다.
그는 향후 3년 동안 스키피오는 트레비아Trebia와 트라시메네Trisimene호수 전투에 참전해서 2개 로마군이 전멸하는 광경을 지켜보았고 칸나에Cannae에서는 로마군 60,000명이 단 하루 만에 학살당하는 최악의 패전도 경험했다.
스키피오는 칸나에전투에서 카르타고군 중앙을 뚫고 몇 km 떨어진 카누시움Canusium까지 살아 돌아간 운좋은 무리에 섞여 있었다. 젊은 로마귀족 자제들이 탈영한다는 정보를 들은 스키피오(당시 20세, 사진참조)는 모의장소에 뛰어들었다. 칼끝으로 한 명씩 위협하며 로마를 절대로 반역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냈다. 그리고는 자신도 로마를 위협하는 모든 적을 말살하겠다는 맹세를 했다.
이래서 인증샷을 공들여 뽀샵하는 모양입니다. 이 모습이 훨씬 보기 좋죠?
로마군 지휘관은 패배를 당하더라도 군대와 함께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거나 항복하지 않았다. 패잔병을 모아 다음을 기약했고 로마도 관용과 인내를 베풀었다. 패배한다고 해서 처벌을 받거나 수치스러워 하지 않았다.
반대로 한니발은 아버지가 포에니 전쟁에서 겪었던 로마의 인내심을 다시 상대해야 했다. 로마는 한니발에게 3번 연속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는데도 항복하거나 협상하지 않았다.
한니발 군대가 10년이 넘게 이탈리아를 약탈하는데도 제대로 저지하지 못했던 로마는 오히려 다른 전장으로 최고 정예군단을 파견하며 멀리 내다보았다. 마케도니아와 시실리로 급히 파병한 군단덕분에 한니발은 이 지역에서 보급품이나 병력을 지원받지 못했다.
한니발은 스페인에서 대부분의 병력을 보급받았고 로마는 전장을 스페인으로 옮겼다. 스페인을 정벌하면 한니발은 새로운 군대는 물론이고 (한니발의 원정을 지켜만 보던) 카르타고도 최대 식민지를 잃게 되는 최고의 전략이었다.
칸나에전투에서 괴멸당했던 로마군은 병력을 쥐어짜내 6년 동안 스페인원정에 나섰지만 기원전 211년 바에티스Upper Baetis 전투 직전에 스페인동맹군이 카르타고로 배반하면서 원정은 끝났다. 압도적인 병력의 카르타고군은 스피키오의 아버지가 지휘하던 로마군을 거의 전멸시켰고 아버지(카스툴로Castulo전투)와 큰아버지(요르카Llorca전투)가 목숨을 잃었다. 8,000명의 패잔병은 스페인 북동부로 간신히 도망쳤다.
위기에 다시 몰린 로마 원로원은 스페인에 새 지휘관을 파견하기로 했지만, 본토를 유린하는 한니발을 두고 많은 병력을 빼낼 수 없었고 이름있는 지휘관은 절망적인 임무를 마다했다. 결국 원로원은 민회를 소집해서 속주총독Proconsul을 선출하게 했다. 리비우스는 “로마시민은 명망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다가 한심스러운 상황에 씁쓸해했다. 어느 누구도 스페인에 가려고 하지 않았다”라고 기록했다. 스키피오는 위기를 기회라고 생각하고 후보로 나섰다. 당시 나이 24살로 입후보자체가 안되는데도 만장일치로 속주총독에 선출되었다.
스피키오는 이듬 해에 스페인 북부로 도착했고 카르타고 3개군이 다양한 지역을 장악하고 있으며 모두 자신의 군단보다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상대가 모이기 전에 로마군 특유의 규율과 전술로 각개격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기동력이었다. 스키피오가 군대를 움직이면 그들도 갈등을 잠시 멈추고 합류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의 급소인 신 카르타헤New Carthage 항구도시를 노리기로 했다.
지금의 카르타헤나Cartagena인 뉴 카르타헤에는 겨우 1,000명의 카르타고 용병이 주둔하고 있었고 가장 가까운 주둔지가 2주일 거리였을 정도로 방어가 허술했다. 스키피오가 자신의 결정을 들키지만 않는다면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목표였다. 그는 병력을 모으며 겨울을 보냈지만 가장 신뢰하는 부하 라엘리우스Laelius에게만 계획을 알려주었다. 초봄에 행군을 시작할 때에도 행선지를 아무도 몰랐을 정도였다.
하루 55km를 주파하는 강행군 끝에 2,5000명의 보병과 2,500명의 기병이 성벽 앞에 도착해 카르타고 수비군을 경악시켰다. 라엘리우스는 35척의 전선(갤리선)으로 항구의 탈출로를 봉쇄했다.
단단한 성벽을 지켜보던 스키피오는 로마군의 장기인 참호를 파기 시작했고 수비군은 2,000명의 시민을 무장시켜 성벽에 세웠다. 뉴 카르타헤가 3면이 물인 천혜의 요새라고 해도 구원군이 올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했다.
수비군은 로마군의 진지공사를 방해하려고 2,000명이 요격에 나섰다. 스키피오는 정규군을 시민군과 분리시킬 생각으로 신병만 투입해 전투를 벌이며 천천히 물러났다. 신병이 도망치지 않도록 조금씩 예비병력을 투입하다가 트리아리Triarii(최정예인 3번째 줄)를 투입했다.
카르타고군은 기세를 잃고 도망쳤고 로마군은 성문 앞까지 추격해 들어갔다. 군단병은 성벽에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가려고 했지만 시민군은 의외로 분전하며 공격을 번번히 무산시켰다.
오후가 되자 스키피오는 병사를 진영으로 불러들이고 다음을 기약했다.
수비군은 다시 한 번 기세를 올렸다가 로마군이 대거 몰려드는 것을 보고는 절망에 빠졌다. 스키피오는 뉴 카르타헤를 순식간에 무너트릴 약점을 찾아냈다. 간조기가 되면 도시 북쪽의 석호를 건널 수 있을 정도로 수위가 낮아졌다. 본대는 성벽을 공격하는 동안 500명의 선발대가 석호를 건너 아무도 지키지 않는 지역으로 돌아갔다.
500명의 병사가 성벽을 넘어 성문으로 몰려갔고 성문 밖에 있던 본대도 큰 도끼를 가지고 성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앞뒤로 협공당한 수비군은 공황상태가 되었고 뉴 카르타헤는 그렇게 무너졌다.
서두에 설명했던 글래디에이터의 명장면입니다.
잔인한 장면이 나오기 때문에 심약한 분은 피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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