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했던 일이 잘 안 풀려서 시간이 상당히 여유있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역사이야기는 폭풍연재되겠군요.
대학을 막 졸업한 혁명전사 아다르 포루잔Adar Forouzan, 이란-이라크전의 최전선 전차장의 경험을 이야기하다.
페르시아만 전쟁으로도 불리는 이란-이라크전은 1980년 9월에 시작되어 8년간 수 많은 사람을 죽이고 많은 지역을 황폐하게 만들었지만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아다르 포루잔은 1981년 봄부터 1982년 늦가을까지 이란 전차중대장으로 복무했는데, 그 당시만 해도 기동전을 벌일 때였다. 포루잔은 참호전으로 변하기 전에 복무를 마쳤고 덕분에 이라크의 화학무기 공격을 받지 않았다. 전쟁초반의 이라크 기세는 대단했기 때문에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위험한 전투경험을 했다.
포루잔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경험을 상기했는데 일반적인 참전용사의 인터뷰와 달리 상당히 직설적이었다.
1979년 중동 친미정권이었던 이란 팔레비 정권이 이슬람 혁명으로 붕괴하자 이라크는 이란의 혼란을 틈타 호르무즈 해협 등을 장악하려고 했고, 혁명의 여파가 다른 왕정국가로 파급될 것을 두려워한 미국, 유럽과 중동왕정이 이라크를 지원하면서 1980년 9월 22일, 이라크의 일방적인 침공으로 시작된 이란 이라크 전쟁은 1988년 8월 20일에 종전되었고 2003년에 포로를 교환하면서 실제로 끝이 났습니다.
서방의 무기와 중동의 자금을 받은 이라크의 전력(전차만 5배)이 압도적이었지만 이란 혁명세력의 분전으로 오히려 크게 밀리자
화학무기를 무차별적으로 사용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미국은 이라크의 무장을 도와주고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
사용을 묵인하다가 2003년에는 그것을 빌미로 이라크를 점령하는 이중성을 보였습니다.
8년 동안 양국에서 약 1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전쟁지역은 지도와 같이 극히 제한된 곳에서 벌어졌습니다.
전쟁 초반 기세좋게 이란 영토로 진주하는 이라크 T-55 전차입니다. 냉전시대였기 때문에 소련은 이라크를, 미국은 이란을 지원하며 중동의 균형을 맞췄는데 이란이 반미 반독재 이슬람 혁명으로 무너지자 미국은 이라크를 비공식적으로 지지하게 됩니다.
무하마드 레자 샤 팔레비Muhammad Reza Shah Pahlevi가 1979년 1월 6일에 추축되었을 당시에 대학생이었죠?
포루잔: 그렇습니다. 아랴메르Aryamehr 대학에서 공학 4학년일 대에 혁명이 일어났죠. 대학생 시절에 많은 시위를 벌였는데 그 덕분에 졸업까지 6년이나 걸렸습니다.
군에는 언제 입영했나요?
포루잔: 1980년 가을입니다. 모든 남성은 2년 복무해야 했습니다. 대학재학 중에는 군복무를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졸업 후에는 입영 전까지 약간의 시간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그 시간 동안 로레스탄Lorestan이라는 낙후지역에서 도로와 학교를 건설하고 식수를 공급하는 일을 했습니다. 전쟁발발 후에 입영했습니다.
어떻게 장교가 되었죠?
포루잔: 대학졸업자는 자동으로 장교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학사였기 때문에 소위가 되었죠. 석사나 박사학위자는 중위계급을 달았습니다. 입영 후에는 테란Tehran 군사기지에서 3개월 훈련을 받았습니다.
어떤 훈련을 받았나요?
포루잔: 기본군사훈련이었죠. 규율과 권리에 대해 배웠는데 군대에서는 상관의 명령에 복종할 권리만 있었죠.
고급훈련은 어디에서 받았나요?
포루잔: 시라즈Shiraz입니다. 치프텐Chieftan 전차장 훈련을 3개월 정도 받았는데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훈련 후에는 치프텐 전차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겠더군요. 저 혼자 운전하고 장전하고 발사할 수 있었습니다. 치프텐에는 운전수, 장전수, 포수와 전차장 4명이 탑니다. 처음에는 이론만 배우다가 시뮬레이터로 연습하고 실제 전차에 타게 되죠.
실제 사격훈련은 없고 시뮬레이터로 사격했습니다. 엔진과 무전기 그리고 다른 것들도 배웠죠. 교과목마다 시험을 봤고 그것을 거쳐야 다음 단계인 전술훈련으로 넘어갔습니다. 우리는 모두 최전선에 배치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모든 것에 집중하며 배우려고 했죠. 성적이 우수하면 자신의 부대를 선택할 수 있었고 고향의 부대를 선택하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죠.
저도 열심히 했지만 그래 봐야 소용없다는 낌새가 들었는데 제가 옳았습니다. 우리 모두 전방에 투입되었습니다.
곧바로 전선에 투입되었나요?
아닙니다. 휴가를 받았고 가족을 방문했습니다. 어머니께 전투 중 최전선에 있는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안전한 도시에서 행복하게 지낸다고 말씀 드렸는데 어머니를 슬프게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휴가를 끝내고 1981년 봄에 전선의 전차부대에 합류했습니다.
몇 대의 전차가 있던가요?
전차중대장이었는데 15대 중에 10대만 있었죠 다른 5대는 파손되어서 투입할 수 없었고 부품교체용으로 사용했죠. 중대에는 다른 장교가 3명 더 있어서 순환지휘했습니다. 한 주 전방지휘하고 2주는 휴식을 취하고 다시 한 주는 휴가를 받았죠. 휴식을 취할 때에는 도시로 가서 전화를 하거나 샤워를 했습니다. 전차병이 전차보다 2배는 많아서 장교뿐만 아니라 사병도 여유가 많았죠.
전차병은 개인단위가 아니라 전체를 교체했습니다. 장교 두 명은 직업군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영문학 전공자였습니다. 우리 둘은 제대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죠. 내가 합류한 지 2~3일 만에 전투가 벌어졌는데 진짜 전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니까 빠져 있으라고 하더군요.
점차 전투경험이 늘었지만 큰 전투는 없었습니다. 최전선에 처음 배치되었을 때에는 아예 전투가 없었습니다.
치프텐 전차가 마음에 들던가요?
군입대했을 때에는 전차종류도 몰랐는데 정규군 출신이 치프텐 전차에 대해 안 좋게 말하더군요. 치프텐 전차를 타면 탈수록 그와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더운 날씨에 엔진이 과열되는 점이었습니다. 더운 날에는 엔진을 냉각시켜야 했고 오랜 기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남부 이란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엔진과열은 심각한 단점이었죠. 여름에는 너무 뜨거워져서 차체를 오래 만질 수도 없었습니다. 전차무게에 비해 엔진의 출력은 약했고 제 속도를 내지 못했습니다. 미제 M-60과 같은 다른 전차에 비해 좋지 않았습니다.
이라크군의 무기 중 어떤 것이 가장 무서웠나요?
이라크군은 신형 T-72 전차를 가지고 있었는데 속도나 조준성능이 좋았습니다. 우리 보병이 무장한 RPG(로켓추진 수류탄)에 대한 장갑보호 능력도 있었죠. T-72가 가장 위협적이었습니다.
T-72와 전투를 벌인 적이 있습니까?
예. 첫 번째 전투였습니다. 1982년 봄에 다시트 압바스Dasht Abbas에서 이라크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자정무렵에 이라크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야간탐지장비를 전혀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야간전투는 곤란했죠. 약 5km를 전진했는데 지뢰를 밟았습니다. 다행히 대인지뢰였기 때문에 별 피해가 없었고 아무도 나가지 못하게 한 다음에 계속 움직였죠.
지뢰 때문에 속도를 내지 못했고 방향도 잃어버렸습니다. 아침이 되자 상관이 목표지점에 도착하지 못했다고 질책하면서 속도를 내라고 하더군요. 목표지점에 도착하자 마자 후퇴하는 이라크군에게 포격을 가했고 트럭 2대를 맞췄습니다.
모두 기뻐했죠. 갑자기 후퇴하는 이라크군을 추격해서 더 많은 지역을 해방시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2대의 전차에게 좀 더 추격하자고 말했습니다.
모든 전차에게 따라오라고 명령하지는 않았군요?
나는 직업군인도 아니고 혁명 후라 다른 사람에게 명령을 내리는 일도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의견을 제시하고 설득시키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내 전차병과 다른 2대의 전차에게만 전진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한 것입니다.
명령받은 지점에서 5km 정도 전진했을 겁니다. 우리 전차에는 훌륭한 포수가 있었죠. 사냥이 취미인데 사격실력이 대단했습니다. 우리가 전진하는 동안에도 그는 사방을 둘러보았죠. 배울 점이 많았습니다. 나는 경솔했고 위험을 제대로 몰랐으니까요. 그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전차무리를 보고는 아군인지 아니면 적군인지 물었습니다. 나는 그가 말한 곳을 봤는데 상당한 수가 다가오더군요. 망원경으로 작게 보이는 것이 마치 개미군단이 몰려드는 것 같았습니다. 아군이 아니었습니다.
포수에게 적이라고 말했고 그는 위험한 상황이라며 빨리 돌아가자고 하더군요. 다른 전차에게 후퇴해야 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후퇴하는 동안 엔진을 맞았습니다. 얼마나 충격이 심했던지 제 헬멧이 벗겨질 정도였습니다. 다행히 해치가 열려있지 않았다면 내부 충격으로 죽었을 겁니다. 전차가 언제 터질지 몰라서 우리 모두는 밖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땅에 쓰러졌을 때에도 전차는 계속 움직이더군요. 우리는 뛰어서 탈출해야 했는데 굉장히 먼 거리를 그렇게 간 것 같습니다.
이라크군은 우리에게 계속 총을 쐈는데 마치 비가 오는 것처럼 쏟아지더군요. 총을 쏠 때에는 바닥에 엎드려있다가 안 쏘면 다시 움직였습니다.
다른 두 전차도 후퇴했나요?
예. 안전하게 후퇴했습니다.
승무원 중 다친 사람이 있었나요?
아무도 다치지 않았지만 마음대로 전진하고 거기에서 맞서 싸우지 않고 후퇴했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심문을 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상관은 묻지도 않더군요.
한 달 정도 전투를 벌인 후에 고급장교가 우리 부대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다른 부대가 모두 승리를 거두고 있는 동안 우리부대만 패했으니까요. 우리가 다른 전차에 앞서 출발해 적의 T-72 전차공격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적의 공격을 받아내는 동안 다른 부대가 요격하겠다는 생각이었죠.
중대 전차 중 몇 대나 포탄을 맞았나요?
내 전차만 맞았습니다. 그렇지만 전투가 끝났을 때에는 다른 부대의 전차도 많이 파손되었더군요. 마지막 전투를 빼고는 이라크군에게서 우리 영토를 탈환했습니다. 마지막 전투는 이라크 국경을 넘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종전까지 복무연장하지 않았군요?
원래 18개월만 복무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전쟁 때문에 6개월을 더 복무한 것이죠.
당신 전차가 또 파손된 적이 있나요?
예. 1982년 10월 마지막 전투였습니다. 우리는 제이드Zeid라는 이라크 국경요충지를 점령했고 적은 수복하려고 기를 썼죠. 어느 날 오후에 이라크군이 이튿날 공격예정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T-72 전차와 함께 공격해오더군요. 그 중에 한 대를 골라 사격하려고 했는데 적이 먼저 발사했습니다. 내 전차는 모래더미 뒤에 포탑만 내놓고 있었죠.
갑자기 망원경을 볼 수 없어서 해치 밖으로 머리를 내놓고 무슨 일인지 확인했더니 모래 엄폐물이 사라졌고 뿌연 먼지만 가득하더군요. 천만다행으로 적의 포탄은 우리 장갑까지 뚫지는 못했습니다. 재빨리 후진해서 적의 시야에서 숨었습니다.
그 날 전투에는 많은 지원병이 함께 했는데 대부분 RPG나 자동소총으로 무장했습니다.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지급된 헬멧을 쓰려고 하지도 않았죠. 전장에 스스로 뛰어든 병사들이었기 때문에 매우 용감했습니다. 조국과 혁명을 수호하겠다는 의지가 대단했죠.
몇 년 전에 일어난 혁명의 열기가 아직 남아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혁명을 지켜내려고 했습니다. 거의 모든 전투에서 지원병이 선봉에 섰고 우리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당연히 그들의 희생이 훨씬 컸습니다. 지원병은 우리보다 앞서 지뢰밭을 통과하며 피해를 입었는데도 늘 농담을 던지며 활기찼습니다.
이란 지원병의 모습입니다. 아랍국가와 미국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던 이라크가 고전을 하게 된 가장 큰 원동력이었습니다.
마지막 전투에서 우리와 함께 했던 지원병 중 70%가 목숨을 잃었고 우리 전차 몇 대도 불탔습니다. 매우 슬픈 날이었죠. 전선을 지켜냈지만 피해가 너무 컸습니다. 사방 모든 곳에 죽은 시체가 널려 있었습니다.
전투 중에 얼마나 많은 전차를 잃었나요?
중대전차 중 5대 정도가 파손되었고 다른 전차도 포격을 멈췄죠. 우리가 상대하기에는 적이 너무 많았고 지원군도 없었습니다. T-72가 몰려 다니는 것처럼 보였는데 다행히도 아군의 포지원이 있었습니다. 전방의 관측병이 제대로 포격을 유도했습니다. 얼마나 맹렬하게 퍼부어댔는지 이라크군은 후퇴할 수 밖에 없었죠. 포병덕분에 전투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이란이 북한에서 수입한 170mm 포입니다.
이라크군의 무장은 어땠나요?
이라크군의 T-72 전차는 너무 좋았습니다. 기동성이 좋았는데 숫자도 많았죠.
전방에 있던 18개월 동안 몇 번의 전투를 겪었습니까?
큰 전투는 5번이었죠. 대부분 우리 영토에서 벌어졌는데 빼앗긴 도시를 하나씩 탈환했습니다. 늘 전투가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전투가 전혀 없던 시기도 있었죠.
당신이 필요한 지원은 제대로 받았나요?
지원은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부품과 인력이 늘 충분했죠. 음식과 병력은 정말 좋았습니다. 보급품은 군대와 민간인에게서 동시에 받았습니다. 옷, 음식과 선물이 전방으로 쏟아졌고 보급창에서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침낭, 지갑, 책, 사탕과 같이 전방군인에게 큰 즐거움을 주는 선물이 많았죠. 사람들은 전쟁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전방군인을 돕기 위해 뭐든지 했습니다.
직업군인과 지원병 급여는 어땠나요?
지원병은 급여를 전혀 받지 않았습니다. 그냥 목숨을 버리러 참전했습니다. 의무복무였던 나는 도시에서 몇 가지 물품을 살 정도의 급여를 받았지만 생활비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음식, 옷과 다른 물품을 보급받았기 때문에 돈이 별로 필요 없었죠. 직업군인은 나보다 훨씬 많은 급여를 받았습니다.
이란은 정규군 외에 파스다란과 바시즈 민병대에 크게 의존했습니다. 이들의 헌신적인 희생으로 압도적인 전력의 이라크를 오히려 밀어붙이며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이라크 병사를 많이 봤나요?
포로는 많이 봤죠. 그리고 전방에서 전투를 벌일 때에는 1~2km 밖에서 봤습니다. 전방이 조용할 때가 많았죠. 가끔 서로 너무 가까울 때가 있는데 300m 앞까지 접근한 적이 있었죠. 바람결에 적이 내는 소음을 들을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언젠가는 노래를 불렀더니 3발의 박격포탄이 근처에 떨어지더군요. 너무 위험한 행동이어서 노래를 그만뒀습니다. 3개월 동안 그 곳에 있었는데 아주 어두운 날이면 야간기습이 있을까 봐 제대로 잠을 못 잤죠. 2km 정도 떨어져 있을 때에는 낮은 언덕에서 적의 동태를 관찰했습니다. 내가 언덕 위에서 망원경으로 보고 있으면 총탄이 날아왔죠. 뛰어내려와서 50 기관총으로 놈들을 쏘고 싶었는데 그러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도 가족이 있고 전쟁에 끌려온 것을 알기 때문에 증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른 3번의 전투 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있습니까?
다행히 그 당시에는 전방이 아닌 예비부대에 있었습니다. 탈환한 지역을 지키는 전투였는데 한 번은 내가 휴가를 간 사이에 벌어졌죠. 고향은 사탕이 명물이어서 내가 복귀할 때마다 부대원이 소리를 지르며 사탕선물을 반겼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도 소리를 지르지 않더군요. 한 병사가 나를 잡아채더니 밝은 표정을 짓지 말아달라고 말했습니다. 승무원 중 한 명이 죽어서 침울한 분위기였습니다. 밖의 상황을 좀 더 잘 보려고 전차 밖에 나갔다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전사했습니다.
아군은 적에게서 더 많은 영토를 수복했고 축하 인사말을 했는데 그러지 말라고 하더군요. 동료 중 한 명이 죽었으니까요. 축하도 못하고 위로도 못하는 상황이라 참 난감했습니다.
후방에 있던 2주는 어땠습니까? 별다른 임무가 있었나요?
아닙니다. 그냥 대기시간이었죠. 공부를 했는데 다른 병사는 배구를 하거나 취미활동을 하거나 토론을 벌였죠. 이라크군이 비행기와 포격으로 후방을 공격할 때도 있었습니다. 적은 공군력이 좋죠. 프랑스제 미라쥐Mirage F1s를 자주 봤습니다.
적은 높은 고도에 머무르면서 부정확한 폭격을 했는데 후방이라고 해서 안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휴식주간에도 훈련을 받았습니까?
특별한 훈련은 없었습니다. 공부를 하고 책을 읽으며 보냈는데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더군요. 매일 조용한 곳으로 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1982년 늦가을에 의무복무기간을 마쳤습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습니까?
전쟁은 정말 참혹한 경험입니다. 전쟁에서 다치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모든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고 국가의 큰 피해죠.
나중에 있었던 화학전을 직접 겪어보지 못했지만 병원에서 부상병을 많이 봤습니다. 부상병은 여생을 불구로 지내야 하는데 죽는 사람보다 불구인 사람이 훨씬 많죠. 죽는 사람도 가족에게 평생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그리고 많은 곳이 폐허가 됩니다.
인간의 잔인한 본능 때문에 전쟁을 다시 일어날 겁니다. 많은 나라가 더 위험한 무기를 사들이고 만들고 있죠. 정치가는 전쟁이 아닌 외교로 갈등을 풀어야 합니다. 내가 전방에서 보낸 후에 내린 결론입니다.
미국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한 장면입니다.
레이건 백악관 중동특사 도널드 럼스펠드가 1983년 12월 19~20일 방문 중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과 악수하고 있다. 럼스펠드는 1984년 3월 24일에 다시 방문하는데, 이라크가 이란군을 상대로 화학무기를 사용했다는 UN 보고서가 나온 그 날이다.
뉴욕 타임즈는 1984년 3월 29일, 바그다드에서 "미국 외교관이 이라크와 미국 관계가 만족스럽다며 실질적인 외교관계가 거의 모두 정상화되었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이란군의 탈환작전 영화입니다. 일부는 실제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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