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니 올리지 않은 글이 있어서 이스라엘과 중동의 1973년 전투를 올리고 1500년대의 오토만 제국의 동유럽 원정사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이스라엘의 저력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그들의 피는 반드시 피로 되갚고, 주먹과 돈이면 다 된다는 정치의식이 싫어서 될 수 있으면 전사 이야기에서는 빼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의 전설적인 이야기는 역사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한 페이지이기 때문에 이번에 올려봅니다.
이번 이야기는 1973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벼르고 별러 덤빈 1973년 욤 키푸르 전투로, 중동이 가장 선전했던 전투입니다.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도하 그리고 시리아의 골란고원 공격, 양동작전으로 시작된 전투로, 여기에서는 시리아군의 골란고원 공격을 정리합니다.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지는 것 아시죠?
40 VS 500, 또 한 번의 다윗과 골리앗 전투
화력도 부족하고 병력도 열세인 상태에서 생존을 위해 싸운 이스라엘은, 1973년 욤 키푸르(Yom Kippur) 전투의 역사상 최대의 전차대결에서 시리아를 눌렀다.
골란 고원(Golan Heights)에 어둠이 내리던 1973년 10월 7일, 이스라엘 수비군의 상황도 밤만큼이나 어두웠다. 전략 요충지 골란 고원의 북쪽 절반을 수비하는 이스라엘 국방군(IDF) 소속의 제7 기갑연대는 겨우 40대의 전차만이 움직일 수 있었던 반면에 시리아는 500대 이상의 전차와 장갑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스라엘은 제공권을 잃은 상태였고 시리아군은 IDF 군이 장착한 것보다도 훨씬 성능이 좋은 야간관측 장비를 장착하고 있었다. 시리아군이 얇게 펼쳐진 이스라엘의 수비를 성공적으로 뚫고 전진해서 고원을 차지한다면 이스라엘은 두 조각으로 나뉠 판이었다.
급하게 전선을 향하는 이스라엘 국방군(IDF). 제공권을 완전 장악한 상태라 이처럼 안전하게 사막을 질주할 수 있습니다.
시리아군이 22시에 재개할 공격을 막아낼 부대는, 29살의 아빅도르 카할라니(Avigdor Kahalani) 중령이 지휘하는 제77 기갑대대 (일명 Oz 77)뿐이었다.
6년 전인 1967년 6일 전쟁은 중동의 전략지도를 크게 바꿔 놓았다. 아랍 연합군은 IDF에게 참패를 당해 상당히 많은 아랍 영토를 이스라엘에게 넘겨주었다.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 수에즈 운하의 강변, 시리아의 골란 고원과 가자의 팔레스타인 영토 전부를 넘겨줬다. 이 전투 한 번으로 IDF는 중동 전투에서 패권을 차지했다.
아랍의 귀족들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1967년 7월,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와 소련의 지원을 받은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 지역에서 일련의 국지전을 펼쳤다. 이집트 대통령이었던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가 죽고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 후임 대통령은 소모전을 끝내기로 합의했지만, 휴전협상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사다트는 다음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사진 설명: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 공군(IAF)에게 처참하게 유린된 이집트군의 차량입니다. 모래폭풍 외에는 어떤 장애물도 없는 사막에서는 제공권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생사가 결정됩니다. 이 정도의 피해라면 일방적인 학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랍권의 엄청난 물자지원과 소련 군사고문단의 조언을 받은 이집트와 시리아는 무기체계를 최신식으로 바꾸고 만신창이가 되는 군대를 재건한다. 반대편의 이스라엘은 “승리자의 병”인 자만에 빠져 6일 전쟁에서 피흘려 얻은 교훈을 잊고 있었다. 6일 전쟁은 제공권 장악과 함께 전광석화와 같은 전차전으로 이겼기 때문에, 독일 국방군이 1939년과 40년 폴란드와 프랑스 침공 후에 전통적인 포병과 기계화 보병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던 것과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다.
아랍권은 공군력을 재건하면서 1대1로 붙어서는 이스라엘 공군(IAF)를 이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소련 고문단은 전선을 따라 대량의 지대공 미사일(SAM)을 배치시켜서 이스라엘의 공군이 활약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면 지상에서 IDF 전차를 처리할 수 있다는 조언을 한다.
공군과 마찬가지로 지상전에서도 고도의 훈련을 받은 이스라엘 전차병들을 1대1로 붙어 이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소련으로부터 대전차 유도미사일(ATGM, 일명 Sagger) 수천 개를 이미 손에 넣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전차가 보병의 근접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수 많은 ATGM으로 무장한 아랍보병의 먹이가 될 것이다.
사진 설명: 보병전투차에 장착된 AT-3 Sagger 미사일입니다.
역사에서 항상 반복되듯이, 이스라엘 전략과 정보 담당자들은 적을 무시하고 있었고, 아랍은 절대로 싸우는 방식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은 향후 전쟁이 벌어져도 6일 전쟁 수준의 일방적인 승리를 기대하고 있었으며, 전쟁초기부터 IDF가 공세를 펼치고 이스라엘의 풍부한 예비군이 동원할 충분한 시간이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런 오판으로 둘러 쌓인 이스라엘 정보부는 아랍도 전면전을 펼치면 참패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랍이 보다 광범위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제한된 국지전을 펼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사다트가 노린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집트군은 SAM이 펼친 우산 아래를 벗어나 작전을 펼칠 생각이 없었고, 대공과 대전차 미사일로 잘 무장한 병력이 운하 반대편에 교두보를 마련한 다음, ATGM 보병을 전면 배치시켜 강력한 방어망을 펼칠 계획이었다. 이집트군이 이 계획에 성공한다면, 나머지 아랍국가들도 이스라엘의 무력함을 알게 되는 매우 강력한 정치적 효과를 거둔다. 그리고 이 계획에서 시리아는 동쪽에서 진격해 양동작전으로 이스라엘의 전력을 반으로 나눌 것이다.
전쟁이 임박했다는 징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정보부는 10월 6일인 유대인 속죄의 날 (Day of Atonement) 아랍이 전면전을 펼치기 까지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유대인 기념일 중 가장 엄숙한 종교 휴일인 이 날은 대부분의 이스라엘 인들이 집에 머물러 외출을 삼가한다. 독실한 유대인은 심지어 라디오나 TV를 켜지도 않고 전화를 받지도 않기 때문에 전국적인 총동원령이 내려졌을 때에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
이스라엘 관계자가 새벽 0430시에 공격에 임박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수상인 골다 메이어(Golda Meir)는 성스러운 종교기념일을 망치고 싶지 않아 단지 4개의 예비군 사단만 소집한다. 총동원령은 4시간 후에 발령되기는 했어도 이집트와 시리아군의 총공격이 있기 겨우 6시간 전이다. 또한 메이어는 IAF의 선제공습을 막았다. 그녀는 이스라엘이 선공을 해서 전쟁을 일으키면 소련을 비롯한 정치적 후폭풍이 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을 하게 되면 전쟁기간 내내 가장 막강한 후원자가 되어줄 미국의 입장이 난처해지기 때문이었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그녀의 생각이 옳았다.
이집트군은 1350시에 욤 키푸르 전투의 첫 번째 포문을 열었다. 작전계획에 따라 많은 훈련을 한 그들은 운하를 건너 바-레브(Bar-Lev) 전선을 지키던 소수의 IDF 군을 바로 압도했다. 시나이반도로 17km밖에 전진하지 않은 이집트군은 SAM 우산을 펼치고 ATGM 덫을 놓고 기다린다. 이 때부터 며칠 동안 계속 이어진 이스라엘군의 모든 반격은 방어선을 넘지 못하고 격퇴된다.
시리아는 3개 기계화사단, 2개 기갑사단, 아사드 공화국수비대(Assad Republican Guard) 병력으로 1405시에 공격을 시작한다. 시리아는 6일 전쟁을 치르면서 엄청난 소련군사 원조를 받았던 덕분에 최전위 공격부대는 900대의 전차(주로 T-54/55), 140문의 지원야포를 보유하고 있었고 소련제 T-62 전차 600대가 그 뒤에 대기하고 있었다.
사진 설명: 2차대전 후 최고의 걸작전차인 T-55. 100m 포를 장착하고 시속 55km를 달릴 수 있으며 외부연료탱크를 장착한 경우 600km의 작전범위를 자랑합니다. 약 100,000대가 생산되어 냉전시대 주요 3세계에 주는 선물공세 중 하나였습니다.
시리아군은 한 시간에 걸친 지원포격 후에 SAM 방공망을 펼치고 전진을 시작한다. 시리아 기계화사단을 소련 자주 대공포 ZSU-23-4 쉴카(Shilka)가 엄호했는데, 이 무기는 분당 4,000발의 기관포를 2km 밖까지 발사할 수 있어서 저공비행으로 공격해오는 전투기에게 치명적이었다. 이집트 군과 달리, 시리아군은 보병과 기갑부대를 결합하지 않았다.
IDF의 북부 사령부관인 이츠학 호파이(Yitzhak Hofi) 중장은 반대편에 있는 시리아군의 무장이 심상치않다는 정보가 여름 내내 계속 들어오자 도저히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국방장관인 모세 다얀(Mose Dayan)과 합참의장 다윗 엘라자르(David Elazar) 소장에게 추가 병력을 배치시켜줄 것을 계속 요청했지만, 총선이 11월 말로 예정되어 있어서 정치 지도자들이 예비군의 동원을 꺼리고 있었다. 마침내 정치 지도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얀은 정예 정규군인 제7 기갑 여단을 골란 고원에 파견했다.
사진 설명: 이스라엘의 건국영웅 모세 다얀 참모총장입니다. 검은 안대가 트레이드 마크였습니다.
공격이 있기 며칠 전, 바락(Barak) 여단으로 알려진 제188 기갑여단 (이츠학 벤-쇼함 Yitzhak Ben-Shoham 대령)만이 골란 고원 전체를 수비하고 있었다. 첫 번째 포탄이 떨어질 때, 이스라엘은 겨우 177대의 전차와 11문의 야포만 배치되어 있었고 그나마 대부분 노후한 영국 센추리온이나 M-48전차들이었다. 두 모델을 업그레이드했다고 해도 여전히 야간전투에는 정확도가 크게 모자랐다.
카할라니(Kahalani)의 제77 기갑대대가 제7 기갑여단 중에서 처음으로 골란 고원에 배치되었다. 9월 26일에 도착한 Oz 77은 바락 연대를 지원하는 반격병력이었다. 아비그도르 벤 갈 대령이 지휘하는 나머지 기갑여단 병력도 10월 4일과 5일 이틀 동안 고원에 배치되기 시작한다.
시리아 전차들이 10월 6일 공격하기 시작할 때, 야이르 나프쉬(Yair Nafshi) 중령이 지휘하는 제74 기갑대대가 높은 지대의 포격위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계곡 바닥은 지뢰와 대전차 장애물로 방어되고 있었다. 첫 번째 공격을 막아낸 나프쉬 대대는 시리아 제7 보병사단(오마르 압라쉬, Omar Abrash 준장)의 전차 60여대를 파괴시켰다.
그림 설명: 시리아군의 공격상황입니다. 그림의 설명은 영어입니다만 이것까지 번역하는 것은 여러분이 너무 무시한다고 기분나빠할 것 같아서 그대로 뒀습니다. 절대로 귀찮은 것이 아닙니다^^;
그날 오후, IDF 북부 사령부는 제7 기갑여단에게 골란고원의 북부를, 바락 여단은 남부를 책임지고 수비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나프쉬의 제74 기갑대대는 바락 여단에서 제7 기갑여단으로 배속된다. 이제 막 전장에 도착하고 있던 제36 기갑사단 (라파엘 에이탄, Rafael Eitan 준장)의 사령부가 두 여단의 사령부가 될 예정이었다. 그렇지만 사령부는 이튿날 오전까지도 제대로 운용되지 않아서, 전투 첫 날은 두 여단이 각각 독립부대로 전투를 치렀다.
사진 설명: 이스라엘군의 공격에 불탄 시리아군 차량입니다. 고지대를 선점하고 있던 이스라엘군의 포화에 많은 피해를 입게 됩니다.
IDF의 전술은 정확한 장거리 사격으로 첫 발에 적의 전력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해를 등지고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군이 유리했지만,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야간장비를 갖춘 시리아군이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IDF는 숫자의 열세를 우수한 공군력으로 메웠는데, 골란 고원 전투가 시작될 때부터 시리아의 근접 대공망에 접근한다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였다. 전투 초기에만 거의 20대 이상의 전투기를 잃었는데, 시나이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는 아군보다 골란 고원이 나았던 한가지는 ATGM으로 무장한 수 천명의 보병이 없었다는 점이다. 골란 고원 전투의 첫 무대는 말 그대로의 전차전이었고 이런 형식의 전투는 당연히 이스라엘군의 최고 장기였다.
밤에 시리아군이 압박을 가하면서 IDF 진지 앞 100m까지 전진하기도 했지만 너무나도 큰 희생을 치른 전진이었다. 10월 7일 새벽이 밝아오자, 100대 이상의 처참한 전차잔해가 계곡에 흩어져있었다. 아침에 시리아의 제78 기갑여단이 다시 공격을 해오지만 벤 갈대령은 대대병력을 이리 저리 이동시키면서 공격을 잘 막아냈다. 오후에 카할라니의 제77 기갑대대가 부스터(Booster) 산등성이로 이동한다. 카할라니는 어린 나이에도 6일 전쟁에서 이집트군의 괴멸로 이어진 돌파로 세 번째로 높은 무공훈장을 받았던 만큼 경험많고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사진 설명: 장갑을 뚫고 들어온 포탄에 화재가 발생해 내부폭발을 일으켜 포탑이 날아간 이스라엘의 센추리온 전차입니다. 골란고원 전투에서 이스라엘군 전차 한 대가 1.5발의 포탄을 맞았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전투가 격렬했습니다만, 정비창이 가까이 있었던 덕분에 가벼운 손상은 바로 수리해서 재배치시켜 100대의 전차가 다시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10월 7일 2200시, 시리아가 이번에는 제81 기갑여단(무스타파 샤르바, Mustafa Sharba 준장)으로 보강된 공격을 해왔다. 이제 북부 골란 고원의 이스라엘군은 겨우 40대의 전차로 시리아의 최신형 500대 전차를 상대해야 했다. 다시 한 번 RPG로 무장한 시리아 기갑보병 장갑차들이 어둠을 틈타 이스라엘 방어진지 50m까지 다가왔지만 결국 돌파하지 못했다.
10월 8일 0100시, 시리아는 공세를 멈추고 파괴된 차량들을 수습하려고 했다. IDF는 포격지원을요청하는 동시에 남아있는 전차에 보급을 했다. 0400시에 시리아군이 남은 병력으로 공격을 해왔고 일진일퇴의 혼전을 보인다. 압라쉬(보병사단 사령관)가 밤에 총공세를 펼칠 계획이었지만 그가 탄 전차가 직격탄을 맞아 전사하자 야간공세는 취소된다.
10월 9일 이른 오전, 시리아군이 별 위력이 없는 포격을 퍼붓자, 벤-갈은 카할라니 대대를 500m 뒤로 후퇴시키고 포격이 멎자마자 원위치로 복귀시킨다. 그렇지만 시리아군이 너무 빨리 전진해서 이스라엘군이 수비위치를 갖추기도 전에 부스터 산등성이까지 접근한다. 이스라엘군은 당황하지 않고 바로 돌격해서 백병전을 펼치고 카할라니의 지휘전차도 90초 만에 4대의 T-62 전차를 파괴시킨다. 몇 분밖에 지속되지 않은 치열한 근접전투에서, Oz 77은 아사드 공화국수비대 2개 대대를 전멸시킨다.
부스터 산등성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다른 공화국수비대 병력이 북부지역을 침투해 엘 롬(El Rom, 텔 헤르모니트의 서쪽)으로 향한다. IDF 사령관 에이탄은 제71 기갑여단(메나헴 라테스, Menahem Ratess 중령)이 적의 진격을 막게 했지만, 라테스가 바로 전사하고 만다. 벤-갈은 다시 카할라니에게 71 여단을 흡수해 공화국수비대의 진격을 막도록 명령한다. 겨우 15대의 전차만 가지고 카할라니는 진격하는 수비대를 공격한다.
사진 설명: 인정하기는 싫어도 당시 세계최고의 전투력을 가진 이스라엘 육군입니다.
2일간 말그대로 잠 한 숨 못자고 버틴 그들은 260대의 전차와 500대의 각종 차량을 파괴하거나 노획합니다.
무기는 아랍권이 거의 대등한 수준까지 올렸지만 훈련도와 사기는 절대로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치열한 전투를 치르면서 제7 기갑여단은 원래 가지고 있던 103대의 전차 중에 겨우 7대만 움직일 정도로 피해를 입었고, 설상가상으로 시리아군이 그들을 포위하기 시작할 때에는 한 대의 전차당 4발의 포탄만 남았을 뿐이었다. 벤-갈이 남은 병력에게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라고 명령하려던 차에 요세프 벤-한난(Yosef Ben-Hanan)이 급하게 긁어 모은 잡동사니 지원군이 도착한다. 그는 후방의 수리공장에서 움직일 수 있는 전차 13대를 끌어내 경상자와 신병을 닥치는 대로 태우고 가장 필요한 시기에 나타난 것이다.
벤-한난의 한 줌밖에 안 되는 부대는 시리아군의 측면에서 순식간에 30대의 전차를 불태웠고, 기습을 당한 시리아군은 벤-한난을 대규모 지원군의 일부로 착각할 수 밖에 없었다. 시리아군은 눈 앞에 바로 갈릴리(Galilee)를 두고 혼란 속에 전장을 떠났고 그 뒤에는 260대의 전차, 500대의 보병수송 장갑차와 수 많은 수송트럭의 잔재를 남겨두었다
(우에스기 왈: 사막 전차전에서의 잔해는 귀중한 보급물자가 됩니다. 포탄을 맞아 주저앉은 차량도 많지만 사막특유의 잔고장으로 버려진 차량도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전투에 동원된 러시아 전차는 추운 지방의 동구권을 위해 만들어져 공기순환이 제대로 안 되었기 때문에 뜨거운 실내온도를 못 참아서 상처하나 없는 전차를 버리고 간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눈물의 계곡(Valley of Tears)라고 알려진 부스터 산등성이와 텔 헤르모니트 사이의 낮은 지역에는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잔해가 가득했다. 제7 기갑여단의 살아남은 전차병들은 50시간 이상을 잠 한숨 못 자고 필사의 전투를 벌인 것이다.
그림 설명: 반격하는 이스라엘군의 상황입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의 영어실력이 충분하기에 사소한(?) 내용은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ㅡ.ㅡ
골란 고원의 남부에서도, 바락 여단이 생존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하고 있었다. 10월 7일 오전이 되자 겨우 15대의 전차만 움직이고 있었고, 그 날 오후에 현장 지휘관들이 전사하면서 더 이상 공조도 안되고 있었다. 다행히도 다얀과 엘라자르가 늦지 않게 이스라엘의 마지막 예비 사단을 북부 사령부에 배치시켰다.
예비 병력이 골란 고원으로 속속 도착하면서, 이스라엘군이 다시 우위에 서게 된다. 10월 11일, IDF는 드디어 공세에 나서 시리아의 수도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한다. 다마스커스(시리아의 수도)의 절박한 요청에 따라, 시나이 반도의 이집트군이 방어진지를 벗어나 이스라엘군에게 압박을 가해 진격을 늦춰보려 하지만, 이것이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이집트군이 SAM 대공망에서 벗어나면서 즉시 IDF의 먹이가 되어 시나이반도는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의 땅이 된다.
1973년 10월 골란 고원과 시나이 반도에서 있었던 전차전은 2차대전 이후 최대의 전차전이었다. 이집트와 시리아의 기습공격은 이스라엘을 거의 무너뜨릴 뻔 했지만, 초기의 치명적인 전략실수를 극복한 IDF는 병사 한 명 한 명의 처절한 희생 (특히, 전차부대의)으로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는다.
Oz 77의 지휘관 아비그도르 카할라니는 이스라엘 역사상 40명만 받은 최고 무공훈장을 받는다 (욤 키푸르 전투에서는 최고 무공훈장이 8명에게만 주어졌다.) 그는 1992년 준장의 계급으로 IDF에서 전역한 후에 짧은 기간 동안 연합정부의 내무안보 장관을 역임한다.
이 전투에 대한 “용맹의 고원”이라는 책의 소개문에서, 카할라니는 동료 전차병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다음 페이지에도 썼듯이, 나는 항상 동료병사들 앞에 있었고, 그들 옆에서 싸웠다. 내 감정을 독자들이, 특히 아들을 잃은 부모님, 미망인, 고아들에게 제대로 알리고 싶다. 우리가 적을 쫓아냈다는 것을. 그들이 조국과 국민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려 했다는 것을 가족들이 알아주었으면 한다.
1973년 전투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욤키푸르 1973이라는 번역도서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으며 이집트군의 수에즈운하 도하작전이 궁금하신 분은 두 번째 권만 참조하시면 됩니다. 전사 전문출판사인 Osprey의 고증 확실한 원서를 플래닛미디어에서 번역출간한 것이어서 믿을만한 품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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