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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동전

국가를 가질 수 없는 쿠르드족

by uesgi2003 2022. 8. 8.

 

우크라이나전쟁은 이상하리만큼 국내의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심지어 커뮤니티마다 기사인용과 전황분석이 흘러넘치고 있죠.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전세계 곳곳에서 국지전, 분쟁과 테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인종청소범죄가 일어나는데도 무관심 속에 그냥 흘러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크라이나전쟁이 관심을 모은 김에 몇군데의 뿌리깊은 분쟁을 정리해볼까 합니다. 

세르비아의 입에 담을 수 없는 인간말종의 범죄이나 이스라엘의 전쟁범죄는 이미 자료가 많으니까 제외하도록 하겠습니다.

 

며칠 전에도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더군요. 

 

이스라엘군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간 무력 충돌이 이틀째 이어진 가운데, 팔레스타인인 24명이 숨지고 203명이 다쳤다.
6일(현지시간) 로이터·AFP통신 등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은 이날 성명에서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에 있는 '팔레스타인 이슬라믹 지하드(PIJ)' 거점을 전투기와 특수부대를 동원해 공격했다.
이번 공습으로 어린이 6명을 포함해 최소 24명이 숨지고 203명이 다쳤으며, 가자지구 내 건물들이 파손됐다고 보건부는 밝혔다.
사망한 어린이 중 5명은 가자지구 북부 자발라의 난민촌에 있다가 로켓포를 맞고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이야기는 BBC 기사를 인용정리했고, 보다 자세한 역사배경이나 현황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인기를 끌었던 해외드라마 갱스 오브 런던에서, 레일Lale이 쿠르드 동포에게 어떻게든 자금을 보내려고 애쓰는 장면이 나옵니다. 

 

 

국가를 가질 수 없는 쿠르드족

튀르키예, 이라크, 시리아, 이란과 아르메니아에 걸쳐 있는 산악지대에 2,500~3,000만명의쿠르드족이 살고 있다. 그들은 중동지역에서 4번째로 많은 민족이지만 단 한 번도 국가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쿠르드족의 기원은?


쿠르드족은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n 평원과 고산지대, 지금의 튀르키예 남동부, 시리아 북동부, 이라크 북부와 아르메니아 남서부에 사는 원주민 중 하나다.
현재 쿠르드족은 쿠르드 표준언어가 없지만 다양한 인종, 문화와 언어 속에서도 독특한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다양한 종교와 미신을 믿고 있는데 이슬람최대 종파인 수니Sunni파가 가장 많다. 

 



왜 쿠르드 국가가 없을까?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쿠르드족은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국가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20세기 초에, 많은 투르드인이 쿠르디스탄Kurdistan이라고 부르는 조국을 건국하려고 했다. 1차대전 후 그리고 오스만제국의 패배 후에, 서방동맹국은 1920년 세브르Sevres조약에 쿠르드국가의 조항을 넣었다. 
그렇지만 3년 후, 로잔느Lausanne조약에서 튀르키예의 지금 국경을 정하면서 쿠르드족은 여러 나라에 분산되면서 소수민족이 되었고 쿠르드국의 내용이 사라졌다. 이후 80년 동안, 쿠르드족의 독립국가 건설을 철저하게 봉쇄되었다.

 


왜 쿠르드족이 반IS 전선의 선봉이 되었을까? 


2013년 중반, 무장투쟁jihadist집단인 이슬람국Islamic State (IS)이 시리아 북부접경의 쿠르드 거주지역 3군데를 노리고 2014년 중반까지 계속 공격했지만 시리아쿠르드민주연합당Syrian Kurdish Democratic Union Party (PYD)의 무장조직인 인민보호부대People's Protection Units (YPG)의 방어를 뚫지 못했다.
2014년 6월, 이라크북부에서 IS가 세력을 넓히면서 이 지역의 쿠르드족과 충돌했다. 이라크군이 이 지역을 포기하자, 이라크 쿠르드지자체는 쿠르드민병대 파슈메가르Peshmerga를 파병했다.

 


2014년 8월, IS가 기습했고 파슈메가르는 곳곳에서 밀려났다. 소수종교의 마을이 계속 함락되었고 신자르Sinjar와 같은 곳에서는 IS가 수천명의 야지디Yazidis신도를 죽이거나 노예로 끌고 갔다.

 

IS의 야지디마을 만행은 태양의 여전사들이나 인간의 땅 등의 다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c0fTQrdoKw&ab_channel=Docaviv%7C%D7%93%D7%95%D7%A7%D7%90%D7%91%D7%99%D7%91 


미국 주도하에 국제연합군이 이라크북부를 공습하고 파슈메가르에 군사고문단을 보냈다. 튀르키예에서 30년 동안 쿠르드자치권 투쟁을 벌였던 YPG와 쿠르드노동당Kurdistan Workers' Party (PKK)이 전투에 참전했다.
2014년 9월, IS는 시리아북부 코바니Kobane 지역을 공격해서 수만명이 튀르키예 국경을 넘게 만들었다. 튀르키예는 국경부근에서 전투가 벌어지는데도 IS 진지를 공격하지도 않고 지원하려는 튀르키예 쿠르드족의 월경을 막았다. 
시리아민주군Syrian Democratic Forces (SDF)동맹으로 지역 아랍민병대와 함께 전투를 벌이던 쿠르드족은 서방의 공습과 군사고문단의 도움을 받아 시리아 북동부의 방대한 지역에서 IS를 계속 몰아냈다. 튀르키예 국경선 인접지역의 안정을 되찾았다.

 


2017년 10월, SDF 전사들이 사실상의 IS 수도 라카Raqqa를 점령하고 IS의 마지막 시리아거점인 데이르에조르Deir al-Zour주로 남동진했다. 

 


2019년 3월, 바구즈Baghouz마을을 점령해 시리아에서 IS를 완전히 몰아냈지만 지하세력이 여전히 큰 위협이 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SDF는 2년 간의 전투에서 붙잡은 수천명의 IS 포로뿐만 아니라 IS가 강제로 이주시킨 수만명의 여성과 아이들을 처리해야 했다. 미국은 외국국적자 송환을 조언했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수용을 거부했다.
2019년 10월, 튀르키예대통령이 국경에서 32km 거리까지 YPG전사를 몰아내고 2백만명의 시리아피난민을 수용하겠다고 밝혔고 미군이 국경선에서 철수했다. SDF는 미국에게 배신을 당했다며 더 이상 IS가 최우선이 아니어서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튀르키예군과 시리아반군이 작전개시 초반에 기세를 올렸고 SDF는 시리아정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시리아군이 국경을 따라 배치되었다. 

왜 튀르키예는 쿠르드족에 적대적일까?


쿠르드족은 튀르키예 국민의 15~20%인데 적개심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 
쿠르드족은 수백 년 동안 튀르키예정부의 박해를 받았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저항운동후에, 튀르키예정부는 쿠르드족을 강제이주시키고 쿠르드식 이름과 의복을 금지시키고 쿠르드어 사용도 제한했다. 심지어 쿠르드 민족정체성이 드러나는 모든 것을 통제하면서 고산지대 튀르키예인이라고 불렀다. 
1978년, 압둘라 오칼란Abdullah Ocalan이 튀르키예 국내에 PKK(쿠르디스탄노동당)을 창설하고 독립을 요구했다. 6년 후, PKK는 무장투쟁을 벌였고 4만 명 이상이 죽고 수십만명이 터전을 잃었다. 이후 PKK는 독립요구를 철회하고 더 많은 문화, 정치적 자율권을 요구하면서 계속 투쟁했다. 2013년, 비밀회담이 열렸고 휴전에 합의했다. 
2015년 7월, 시리아국경 부근 쿠르드족의 수루크Suruc마을에 IS 자살폭탄테러가 일어나서 33명이 죽으면서 휴전이 무산되었다. PKK는 튀르키예를 비난하며 군과 경찰을 공격했다. 튀르키예정부는 PKK와 IS 모두를 상대로 테러에 대한 전쟁에 돌입한다고 밝혔다. 

 


그 이후 튀르키예 남동부에서만 민간인을 포함해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2016년 8월, 튀르키예가 IS에 대한 시리아반군의 공세를 지원한다며 병력과 전차를 파병했고 시리아북부에 병력을 배치하고 있다. 국경요충지 자라블루스Jarablus를 점령해 서쪽 쿠르드족 거점 아프린Afrin과 차단시켰다. 
2018년, 튀르키예군과 시리아반군이 아프린에서 YPG군을 몰아내면서 민간인 수십명이 죽고 수만명이 고향을 버렸다. 
튀르키예정부는 YPG와 PYD가 PKK와 내통하고 있으며 무장투쟁을 통한 분리독립이 목적으로 반드시 제거해야 할 테러조직이라고 주장한다. 

 


시리아의 쿠르드족이 원하는 것은? 


쿠르드족인 시리아국민의 7~10% 정도로 2011년에 바샤르 알 아사드Bashar al-Assad정권에 저항하기 전에는 대부분 다마스커스Damascus, 알레포Aleppo, 코바니, 아프린과 북동부도시 Qamishli카미실리에 분산되어 살았다. 
시리아 쿠르드족은 오랫동안 박해를 받았고 기본적인 권리도 허용되지 않았다. 약 30만명이 시민권이 없었고 쿠르드족 지역을 아랍화하겠다며 부동산을 몰수해 아랍인에게 나누어 주었다. 
저항운동이 내전으로 번지자, 쿠르드족 정당은 표면적으로 중립을 표시했다. 2012년 중반, 정부군이 반군과의 전투에 차출되자 쿠르드족이 되돌아왔다.
2014년 1월, 시리아쿠르드민주연합당 (PYD) 등이 아프린, 코바니, 자지라Jazira 지역에 자치정부를 만든다고 선포했다. 
2016년 3월, IS에게서 탈환한 아랍과 투르크멘Turkmen 지역까지 포함해서 연정시스템을 선포했다. 

 


시리아 정부는 즉각 거부했고 시리아반군, 튀르키예와 미국도 반대했다. 
PYD는 독립이 목적이 아니며 시리아의 무력충돌이 끝나려면 법률로 쿠르드족의 권리와 자치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사드대통령은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시리아의 모든 땅을 되찾겠다고 맹세했다. 시리아정부는 쿠르드족의 자치권요구를 거부하며 시리아의 어느 누구도 독립이나 연방을 주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라크의 쿠르드족은 독립할 수 있을까? 


이라크에서는 쿠르드족이 15~30%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이웃국가의 쿠르드족보다 더 자유로운 편이었지만 마찬가지로 박해를 받았다. 
1946년, 무스타파 바르자니Mustafa Barzani가 쿠르디스탄 민주당Kurdistan Democratic Party (KDP)을 만들고 이라크에서의 자치권을 요구했다. 1961년에 무장투쟁에 돌입한 후에야 요구를 받아들였다.

 


1970년대 말, 이라크정부는 키루쿠크Kirkuk와 같은 유전지대 부근의 쿠르드족 지역에 아랍인을 이주시키면서 쿠르드족을 강제로 분산시켰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전쟁 기간 중에 강제이주 정책을 강화했고 쿠르드족이 이란을 지지했다, 1988년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은 할라브자Halabja에 화학무기공격을 퍼붓고 쿠르드족에게 보복했다. 
1991년, 걸프전쟁에서 이라크가 패전하자, 바르자니의 아들 마수드Massoud와 경쟁파벌 쿠르디스탄애국연합Patriotic Union of Kurdistan (PUK)의 잘랄 탈라바니Jalal Talabani가 쿠르드저항을 이끌었다. 무자비한 진압이 이어지자, 미국과 연합군이 북부에 비행금지지역을 선포했고 쿠르드족은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KDP와 PUK는 공동정권에 합의했지만 분열이 생겨 1994년에 4년간의 내전이 시작되었다.
2003년, 두 파벌은 미국주도의 이라크침공에 협력하며 후세인정권을 무너트렸고 쿠르디스탄 지역정부Kurdistan Regional Government (KRG)를 구성했다. 2년 후에는 도후크Dohuk, 이르빌Irbil과 술라이마니야Sulaimaniya 주에 자치권을 행사했다.

 


마수드 바르자니(사진 왼쪽)가 지역대통령으로, 잘랄 탈라바니(사진 오른쪽)가 이라크 최초의 비 아랍인출신 대통령이 되었다.
2017년 9월, 쿠르디스탄지역과 레슈메르가가 장악한 분쟁지역 모두에서 독립에 대한 전체투표가 벌어졌고 이라크중앙정부는 불법이라며 반대했다.

 


투표한 330만명 중 90% 이상이 분리독립을 지지했다. KRG 관계자는 투표결과에 따라 이라크중앙정부와 협상을 시작할 것이라고 했지만 이라크총리 하이데르 알 아바디Haider al-Abadi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라크친정부군이 쿠르드족 분쟁지역을 점령했고 키르쿠크유전지대와 수입을 잃은 쿠르드족은 독립을 향한 동력을 잃었다.
심각한 타격을 입은 바르자니는 지역대통령을 사임했다. 주요 파벌의 분열로 지역대통령 자리가 2019년 6월까지 공석이었다가 조카인 네치르반Nechirvan이 대통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