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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중동전

나세르의 오판, 중동전쟁 소모전 (1967-1970)

by uesgi2003 2015. 8. 16.


광복절을 앞두고 독립투사 영화의 주연을 맡았던 여배우가 역사에 일체 관심이 없다는 인터뷰를 해서 당황하게 만들더니 축하콘서트에서는 문제를 많이 일으켰던 모 아이돌 그룹이 대놓고 크게 일본어가 쓰인 옷을 입고 나와 혈압을 올렸습니다. 


이제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말을 할 생각도 없습니다. 지금도 이 지경인데, 그 당시에 온갖 고초를 견뎌내며 우리 세상을 찾으려 했던 분들의 용기와 의지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분을 알게 되면서 참 좋아하는 사진입니다. 일왕을 노리러 가시는 길에도 환하게 웃으시는 저 모습은... 저는 흉내조차 내지 못할 전설의 모습입니다. 


어떤 분이 중동전쟁사를 정리해달라고 요청해서 욤키푸르 전쟁 이전의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건국전쟁 이후에 가장 고전했던 욤키푸르 전쟁은 이미 정리해두었습니다. 


나세르의 오판, 중동전쟁 소모전 (1967-1970)

 

6일 전쟁이 끝난 지 3주 만에 이집트군이 1967 7 1일에 수에즈Suez 운하를 넘어 사이드Said항 남쪽 16km 지점의 이스라엘국방군Israel Defense Forces(IDF) 부대를 공격하면서 3년 소모전Three-year War of Attrition의 서막이 열렸다.

IDF 기계화보병 중대는 서쪽 강변에서 날아오는 맹렬한 포격을 무릅쓰고 이집트군을 격퇴했지만 우리엘 메누힌 소령이 죽고 13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튿날 이스라엘 전폭기가 이집트 포대를 공습했다.

 

수에즈 운하를 둘러싸고 대규모 공습과 포격, 해전, 대규모 병력집결과 기습공격이 감행되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전쟁대신에 3년 소모전이라고 부른다.

1967 6 10, 6일 전쟁이 끝나자 이스라엘은 영토를 2배나 넓혔는데, 골란Golan고원을 장악하면서 시리아 영토를 32km나 깊숙이 파고 들어 수도 다마스쿠스Damascus를 타격할 수 있는 거리에 두었다. 이렇게 확장된 이스라엘의 북서쪽 도시와 농촌은 시리아 포대의 사정거리에 들었다.

동쪽 국경선은 요르단Jordan강 서쪽 강변까지 확장했고 서쪽으로는 수에즈 운하까지 이르는 시나이Sinai 반도를 모두 손에 넣어 이집트의 위협으로부터 충분한 완충지대를 확보했다.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6 8일에 UN의 휴전협상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자국의 패전에 충격을 받은 나세르는 평화협상을 굴욕으로 생각했고 이스라엘에 대해 국지전을 끊임없이 도발해서 전쟁을 유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나중에 카이로 신문 편집장에게 이스라엘이 3,000명을 죽여도 우리는 충분한 병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작전을 계속 벌일 수 있죠. 우리가 10,000명을 죽인다면 이스라엘은 병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휴전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라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소련 서기장 흐루시쳅과 함께 있는 나세르입니다. 1952년에 군사쿠데타로 왕정을 종식시키고 공화정을 시작한 그는 격렬한 권력다툼에서 승리해 2대 대통령이 되었고 이집트의 개혁과 범아랍주의 확산을 추진했습니다. 

서구권에 대해 아랍의 통합을 주장하며 이스라엘과 미국에 강력하게 맞섰지만 1970년에 심장마비로 죽으면서 아랍은 거대한 지도자를 잃게 되었습니다. 

 

1969 3월에 수상이 된 골다 메이어Golda Meir비대칭 대응Asymmetrical Response’이라며 강력한 반격에 나섰다. 이집트의 모든 공격에 대해 이스라엘은 훨씬 강력한 대응을 하겠다는 뜻이고 이후 이스라엘의 군사정책이 되었다. 이제 소모전의 본 무대가 준비되었다.



이스라엘 건국주역 중 한 명으로 진정한 철의 여인이었던 골다 메이어입니다. 욤키푸르 전쟁에서 선제공격을 하면 미국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제대로 예상했지만 욤키푸르 전쟁에서 입은 피해때문에 수상직에서 사임했습니다. 

영국의 대처 수상이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이어 받았지만 그녀와 비교하면 아까운 별명이었습니다. 왜 우리는 이런 여성 정치인이자 리더를 선택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소련은 공들여 무장시키고 훈련시킨 아랍 연합군이 6일 전쟁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하는 것을 보고 이집트를 강력하게 후원했다. 수에즈 운하를 따라 이스라엘에게 압박강도를 높이라고 부추기면서 소련의 최신장비로 재무장시키고 수 천 명의 군사고문단을 파견했다.

미국은 소련의 지원에 대응해서 최신무기와 장비를 이스라엘에 제공했다. 소모전은 소련과 미국이 벌이는 냉전의 축소판이 되었다. 모스크바는 미국보다 훨씬 적극적인 후원을 했다. 정교한 대공 레이더와 미사일 포대에 병력을 배치하고 실제로 이스라엘 전폭기 몇 대를 격추시켰다. 소련 조종사는 이집트 미그기를 몰고 이스라엘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소련이 소모전에 참전했던 병사들에게 준 훈장입니다. 

 

이스라엘 정부는 수에즈 운하 중심이 아니라 자신이 점령한 동쪽 강변을 따라 휴전선을 그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리고는 1967 7 11, 다수의 작은 배를 운하로 진입시켰다. 이집트군은 당연히 총탄을 퍼부었고 양쪽의 전차가 포격을 주고 받았다.

공군까지 참여하면서 며칠 동안 전투가 점점 격화되었다. 7 11일 저녁, 이스라엘 구축함 INS 에일라트Eilat(사진 참조)가 운하 북쪽 끝 부근에서 이집트 어뢰정 두 척을 격침시켰다.


 

운하의 남쪽 수에즈만에는 아주 작은 인공섬(영국이 2차대전 당시에 운하를 보호할 목적으로 만든 섬)이 있었는데 이집트는 이곳에 강력한 요새를 구축해두었다. 9월에는 이집트 수비군이 만에 접근하는 이스라엘 선박에게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포병이 포탄을 주고 받았고 이집트 도시 칸타라, 이스마일리아, 수에즈에도 포탄이 떨어져서 700,000명이 급히 소개되었다.

 

10 21, 에일라트는 사이드항 앞바다에서 작전 중이었는데 이집트 고속정이 소련제 스틱스Styx 미사일 두 발로 구축함을 공격했다. 한 시간 후에 다시 다른 한 척이 미사일 두 발을 발사했고 구축함은 몇 분 만에 침몰했다. 190명 중 47명이 죽었고 90명이 부상당했다.

10 25, 이스라엘군은 수에즈의 이집트 정유시설과 저장고를 포격해서 보복했다. 포격으로 103명의 이집트인이 사상당했고 1억 달러 이상의 손실이 발생했다.



정식명칭은 P-15 페르미트Permit입니다. 사거리 80km로 실전에서 보여준 위력때문에 서방세계가 경악했고 중국은 스틱스를 바탕으로 실크웜을 개발했습니다. 

 

이후 몇 개월 동안은 소련의 신장비, 특히 장사정거리 포가 이집트로 공수되면서 대치국면에 들어섰다. 원래부터 일반 야전무기가 부족했던 이스라엘은 공군을 하늘의 포대로 사용했다.

그렇지만 프랑스가 6일 전쟁 때문에 중동으로의 무기수출을 금지했는데 프랑스 전폭기는 이스라엘 공군의 핵심전력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큰 타격이었다. 결국 미국은 F-4 팬텀과 A-4 스카이호크Skyhawk를 제공했고 공군의 새로운 주축이 되었다.


 

1968 9 8, 이집트군이 3주에 걸친 포격으로 28명의 이스라엘 병사를 죽이거나 다치게 하면서 다시 국지전이 일어났다. 이스라엘은 10 30일에 헬리콥터와 특수부대를 동원해 아스완Aswan 북쪽의 발전소를 습격해 카이로 일대를 암흑세상으로 만들었다.

산업근간이 흔들리게 된 이집트는 다시 몇 개월 동안 침묵을 지키며 이스라엘의 공격범위에 있는 주요시설 수 백 개를 요새화했다.

 

IDF는 귀중한 휴식기를 이용해 수에즈 전선에 방어선을 만들었다. 참모총장 차임 바르-Chaim Bar-Lev의 이름을 딴 바르-렙 방어선은 35개의 요새를 갖췄다. 운하를 따라 쌓아 올린 모래언덕 덕분에 이스라엘군의 움직임을 포착하기 힘든 반면에 이집트군의 움직임은 24시간 감시 받았다. 그리고 이집트군의 사정거리 밖에 기갑병력을 대거 배치시켰다.


1973년 지도입니다만 삼각형이 바르-렙 방어선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3주간의 포격을 견뎌낼 정도의 방어시설입니다. 


 

1969, 3 8, 바르-렙 방어선이 완성되자 이집트군은 운하를 따라 맹렬한 포격을 가했다. IDF는 이튿날에 대응포격과 함께 공습으로 대답했다. 이집트 참모총장 압둘 무님 리아드Abdul Munim Riad가 참모와 함께 벙커에서 군사작전을 지켜보다가 이스라엘 박격포탄에 목숨을 잃는 일도 있었다.

 

이집트군은 맹렬한 포격으로 이스라엘군을 약화시키고 운하를 도강할 돌파구를 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바르-렙 방어선은 예상보다 강력했다. 이스라엘군도 포격이 있을 때마다 특수부대를 투입해 발전소를 노렸고 이집트군의 수비는 너무나도 쉽게 뚫렸다. 발전소 파괴는 이집트 국민을 괴롭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7 19, IDF 해군특수부대가 이집트의 그린 아일랜드 요새를 기습해 레이더 시설을 대거 폭파시켰다. 이튿날 IAF(공군)는 박서Boxer작전을 감행해 소련이 제공한 지대공 미사일 포대를 공습했고 7 28일에 작전을 종료할 때까지 500회 출격으로 이집트의 대공망을 완전히 궤멸시켰다.

IAF는 겨우 전폭기 2대만 잃었고 이집트공군은 11기를 잃었다



이스라엘 공군이 사용한 A4 스카이호크입니다. 매라는 별명처럼 작은 기체로 항모탑재용이었는데 강력한 대공과 대지공격 능력으로 3,000대 이상이 제작되었습니다. 

대당 비용이 10억이 안되었기 때문에 돈 없는 나라의 주축기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일주일의 소강상태를 보낸 이스라엘은 수륙작전을 감행해 압박수위를 높였다. 98일 저녁, 이스라엘 해군특수부대는 라스 사다트Ras Sadat항에 있던 두 척의 어뢰정을 침몰시켜 수상통행로를 확보한 후에 이튿날 새벽에 수에즈 남쪽 40km 지점의 아-디르A-Dir에 기계화부대가 상륙했다. 전폭기의 엄호를 받은 상륙부대는 라스 아부-다라즈Ras Abu-Daraj의 이집트군 기지로 남하했다.

 

이집트군은 기습에 대해 너무 느리게 대응했고 이스라엘군은 거의 10시간 동안 무인지경으로 수십 개의 군사지기를 파괴하고 150명을 죽였는데 그 중에는 소련 장성 한 명도 있었다. 상륙부대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 너무나도 쉽게 퇴각했고 이 소식을 들은 나세르는 심한 충격으로 심장발작을 일으켰다.

그는 너무나도 화가 나 해당 지역의 지휘관들을 대거 해임시켰지만 나아질 것은 없었다. 소련식으로 구성된 지휘체계는 엄격한 계층구조로 일선 지휘관이 판단할 수 있는 유연성이 너무 부족했다. 대부분의 지휘관은 상부의 분명한 지시 없이는 병력을 투입하지 않으려고 했다.

 

미국과 소련은 너무 격화되는 무력충돌을 우려해 1017일에 직접 협상에 나섰다. 129, 미국무부장관 윌리암 로저스는 중재안을 제시했지만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동안 IDF는 수에즈운하와 수에즈만 일대에서 수십 차례의 기습공격을 가했다.

 

19691226일 저녁, 이스라엘 전폭기가 운하 남단의 이집트군 거점을 맹폭하기 시작했는데 이집트군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기만작전이었다. 이스라엘은 라스 가립Ras Gharib의 레디어 시설을 노리고 있었다.

이스라엘군은 3대의 슈페르 프렐롱Super Frelon 헬기와 공수부대를 동원해 레이더 기지를 점령하고 소련이 제공한 P-12 레이더장비를 두 대의 CH-53 헬기에 매달았다. 한 대는 통신차와 안테나를 견인하고 다른 한 대는 4톤의 레이더 본체를 견인했다. 이륙하자마자 한 대에 심각한 경고등이 켜졌지만 무시하고 홍해를 낮은 고도로 날아 결국에는 이스라엘까지 견인해갔다.

당시 이 레이더는 북 베트남에서 사용 중이었고 이스라엘은 레이더에 대한 정보를 서방정보원과 공유했다.



걸프전에서 파괴된 헬기를 견인하고 있는 시코르스키 MH-53 페이브 로우Pave Low로 CH53을 개량한 모델입니다. 

중동전 당시의 시 스탤리온Sea Stallion은 1.9톤 정도의 무게만 견딜 수 있는 것으로 아는데 4톤을 견인했다고 나오는군요.


아래는 황당하게 빼앗긴 P-12 레이더입니다. 


 

이집트사령부는 소련이 제공한 SAM 대공망으로는 IAF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2, 소련 고위고문단이 카이로를 방문해 상황을 파악했다. 1월에 나세르가 모스크바로 날아갔고 소련은 신형 SA-3를 제공하고 더 많은 기술고문을 파견하기로 했다.

저고도 전투기용인 SA-3는 여러 발의 미사일 발사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좀 더 강력한 대공망을 형성할 수 있었다. 소련측 인력이 발사대를 운용했고 1970년 초반에는 조종사를 포함해 4,000명까지 불어났다.



SA-3는 나토명칭이고 정식명칭은 S-125 네바/페초라Neva/Pechora입니다. 트럭에는 2발, 거치형 미사일포대는 4발을 장착하며 15km 정도의 사정거리를 가졌습니다. 

 

그렇지만 IAF는 그에 따라 전술을 변경했기 때문에 신형도 신통치 않았다. IAF는 대공망이 펼쳐진 운하를 피해 이집트 내륙을 공습했고 심지어 카이로 40km 지점까지 접근했다.

놀란 이집트군은 예비병력을 대거 후방으로 돌렸고 사기는 말하기 힘들 정도로 떨어졌다. 카이로시민은 수도조차 못 지키는 공군을 보며 두려움과 절망에 빠졌다.


이집트공군(EAF)은 19702~3월 한달 동안 20기를 잃었다. IAF48일 군사시설 근처의 초등학교를 오폭하면서 47명의 어린아이가 죽었고 그 후에 공습을 중단했다.

간신히 숨을 돌린 이집트군은 운하를 따라 SAM을 다시 배치했고 소련 고문단이 대공부대를 직접 지휘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육군은 4~5월에 64명이 전사하고 149명이 부상당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19706, 소련 고문단은 12,000명으로 늘어났고 조종사도 100명이나 되었다. 소련군은 160km의 운하를 모두 방어하기 보다는 남부와 중앙의 수로를 중심으로 SAM을 집중배치 시키고 단거리 대공포로 저고도 침투에 대비했다. 고고도로 침투하면 SAM으로 저고도로 침투하면 대공포로 요격한다는 생각이었다.

이스라엘군은 위험을 무릅쓰고 고슴도치처럼 웅크린 포대를 공습해 7월에만 5곳을 파괴했다.



SAM은 대공미사일의 약칭이며 이집트는 SA-2 고고도 미사일을 사용했습니다. 역시 정식명칭은 S-75 드비나Dvina입니다.

 

소련군이 직접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양쪽의 교전은 시간문제였다. 이집트 미그기에는 소련 조종사가 탑승했고 4월부터 이스라엘군에게 대놓고 접근하기 시작했다. 교전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IAF는 미그기가 보이면 교전을 피하고 후퇴했다.

625, 두 대의 미드 21이 한 대의 A-4에게 미사일을 발사해 시나이 반도에 비상착륙하는 일이 벌어졌다.

 

IAF730, 8대의 미라주 3Mirage III4대의 F-4로 같은 수의 미그 21을 기습했다. 소련 조종사의 미그기 4대가 파괴되었고 다섯 번째는 피탄되어 귀환하던 중에 추락하면서 4명이 전사했다. IAF는 한 대가 맞았지만 그나마도 가벼운 손상이었다.

양측은 교전에 대해 일체 발설하지 않았고 소련은 공군고위장교를 카이로로 보내 진상을 파악할 정도로 충격받았다.



프랑스 미라주 시리즈 중에서 가장 많이 팔린 미라주 3입니다. 

아래는 욤키푸르전쟁에서 격추된 미라주입니다. IAF는 이집트와 시리아 대공망에 걸려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미라주 5를 개량해 생산한 크피르Kfir입니다. 


 

3년 소모전은 주로 이집트와 이스라엘군의 충돌이었지만 요르단강 부근에서 요르단군과 충돌했고 골란고원에서는 시리아군과 국지전을 벌였다. 이스라엘은 6일 전쟁 직후에 팔레스타인 자유연합PLO를 추방했다.

PLO는 요르단 국경 내에 기지를 마련하고 몇 차례 공격을 감행했고 요르단군도 포격으로 지원했다.



이스라엘 민족이 1900년 만에 나라를 되찾고 자신들이 당한 설움을 팔레스타인에게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오랜 투쟁 끝에 국가로 인정받고 자치권을 보장받았지만 이스라엘의 압제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도 드물겁니다. 팔레스타인 투쟁을 지휘하던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입니다. 나중에 평화를 선택해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지만 말년의 추문으로 많은 사람을 실망시키기도 했습니다. 




PLO의 문장입니다. 이스라엘의 전국토는 팔레스타인의 영토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이스라엘의 압제에 대해 옹호하는 사람이 있다면, 중국이 한사군 설치를 이유로 우리를 무력공격해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아두기 바랍니다. 

 

1968321, IDF가 요르단 국경을 넘어 카라메흐KaramehPLO 본거지를 공격하면서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카라메흐는 포대가 설치된 요새였는데 IDF3개의 기갑부대로 그 일대를 봉쇄하고 공수부대가 카라메흐를 점령했다.

PLO전사는 마을과 동굴에서 저항했지만 공수부대가 가택수색을 벌이며 추격해 120명을 죽였다. 양측은 서로 승전을 주장했는데 PLO와 요르단군은 이스라엘군의 공격을 피해 국경 안 깊숙이 후퇴했고 이후 PLO의 활동은 급격하게 위축되었다.



소모전 당시는 PLO와 요르단이 동맹관계(요르단 인구의 다수가 팔레스타인인)였지만 1970년 9월에 양측의 내전이 벌어집니다. 검은 9월이라고 부르는데 요르단 후세인왕이 이스라엘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자 국민 다수를 차지하는 팔레스타인인 지지를 기반으로 PLO가 요르단 왕정을 위협하자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벌여 많은 PLO 전사를 죽이고 레바논으로 추방시킵니다. 

위 사진은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이 PLO와 요르단의 휴전을 중재하고 있습니다. 

 

시리아 국경은 6일 전쟁 이후 18개월 정도 조용한 상태였다. 1969년 초, PLO전사가 이스라엘 점령지를 침투하면서 IAF가 시리아 내의 기지를 공습했다. 7월에는 시리아군이 IDF와 포격을 주고받아 이집트의 부담을 덜어주었고 19703월에는 특수부대를 이스라엘로 침투시켰다.

IAF는 보복공격으로 시리아를 폭격했지만 시리아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강도를 더 높였다.

 

IAF와의 공중전에서 소련이 참패한 다음 날, 이스라엘정부는 미국이 제시한 몇 개월 전의 휴전협상에 합의했고 88일부터 3개월 동안 운하 양쪽의 50km 범위 내에서는 어떤 군사행동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휴전이 발효되자 이집트는 즉시 SAM 포대를 100개 배치시켰다. 3년 후에 욤키푸르전투가 벌어질 때까지 수에즈운하의 대공망은 전세계에서 가장 강력할 정도로 증강되었다.

 

나세르는 시나이반도 탈환을 다짐했지만 1970928일에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그 뒤를 이은 안와르 엘 사다트Anwar el Sadat는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이집트군의 개혁에 집중했다. 이렇게 준비한 전력으로 욤키푸르전쟁에서 수에즈운하를 장악하고 IDF를 시나이사막으로 밀어내는데 성공하게 된다.



욤키푸르전쟁에서 만큼은 오래 전 이집트 왕국의 위용을 보여주었던 이집트군입니다. 기발한 전술로 수에즈운하 방벽을 돌파했고 대공망과 대전차미사일로 이스라엘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시리아측의 엇박자로 결국 이집트가 무리한 작전을 벌이게 되었고 욤키푸르전쟁은 양쪽에게 큰 피해를 입힌 채로 끝납니다. 

 

이스라엘은 소모전에서 1,424명의 군인과 127명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약 2,000명의 군인과 700명의 민간인이 부상당한 반면 이집트는 8,000~10,000명과 수 천 명의 민간인이 사상 당했다. IAF12대 정도의 전폭기를 잃었고 이집트공군은 98기를 잃었다. 요르단은 130, PLO250명이 죽었다.

730일에 4명의 조종사를 잃었던 소련은 지상에서도 50명의 고문단이 죽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과 같이, 이집트는 3년간의 참패에서 교훈을 얻고 소련의 후원을 받아 강력한 대공망과 막대한 대전차무기로 무장했다. 이스라엘은 승자의 저주에 걸려 안주했다.

1973106, 이집트와 아랍동맹군은 이스라엘을 기습했고 패전직전까지 몰렸던 이스라엘은 미국의 대대적인 군사원조를 받아 결국에는 반전하는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욤키푸르전쟁은 승자없이 패자만 있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욤키푸르전쟁의 결과입니다. 이집트는 수에즈운하 서쪽을 확보했지만 반대로 국토 깊숙한 곳을 내주었고 시리아는 회복하려고 했던 골란고원보다 더 많은 지역을 내주었습니다. 


아래는 시나이반도에서 파괴된 M60 전차입니다. M48전차가 가솔린엔진으로 불이 잘 붙어서 라이터라는 악명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이 전차는 디젤엔진을 탑재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욤키푸르전쟁에서 대전차미사일에 호되게 당한 후에 다양한 개수작업을 진행했고 반응장갑을 입힌 독특한 마가크Magach와 사브라Sabra를 만들어냈습니다. 



편향되기는 했어도 보기 드물게 이집트의 시각으로 설명하는 욤키푸르전쟁 다큐멘터리입니다. 욤키푸르전쟁에 대해서는 http://blog.naver.com/uesgi2003/220454850523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네이버에 옮겨두면서 좀 더 다듬어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