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이야기는 모처럼 시대와 대륙을 옮겨 이슬람 제국과 기독교 유럽이 충돌한 비엔나 공성전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출장갈 때마다 서점에 들려 전사관련 도서를 구입했는데, 우연히 Military History라는 잡지를 발견했고 마침 눈길을 끄는 기사가 바로 비엔나 공성전이었습니다.
이 때부터 잡지를 모으기 시작했고, 블로그를 만들기로 마음 먹게 된 동기도 바로 이 전투입니다.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자료를 정리하게 되는군요.
그림 설명: Military History 2001년 10월 판입니다. 요즘에는 격월간으로 바뀌었더군요.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지는 것 아시죠?
두더쥐 전투, 비엔나 공성전
최절정기의 오토만 제국, 비엔나를 공략하기 위해 지하갱도를 파다.
John Godwin (Military History 2001년 10월 기사)
오토만(Ottoman) 투르크는 중앙 아시아의 투르키스탄(Turkestan)의 스텝을 점령한 후, 춥고 비가 계속 내린 1529년 여름,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아틸라(Attila)의 훈(Hun)족이 5세기에 동유럽을 유린한 지 1,000년 만의 일이었다. 아틸라의 무리는 야만적인 유목민족이었지만, 오토만 제국은 모든 분야에서 유럽국가보다 훨씬 발전하고 문화적인 국가였기에 공포감은 더했다. 특히 군사력은 압도적이었기에.
건국영웅 오스만(Osman)의 이름을 딴 오토만 투르크는 소 아시아(Aisa Minor)의 아나톨리아(Anatolia) 지방에 정착을 했다. 처음에는 그 지역의 다른 유목민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지만, 투르크는 뛰어난 행정가가 계속 배출된데다가 주변의 문화를 쉽게 흡수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최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탁월한 행정력덕분에 다른 국가와 민족을 통합할 수 있었고, 접촉한 모든 것, 공학, 건축학, 의학, 천문학과 화약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14세기, 투르크는 다르달레스(Dardalles) 해협을 건너 유럽에 침입해 발칸 반도 전체를 점령하기 시작한다.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이라, 루마니아, 알바니아 등 발칸 국가 모두가 투르크의 발 아래 머리를 조아렸고 정복과정에서 세계 역사상 가장 무시무시한 군대(예니체리)를 만들어냈다.
투르크는 무슬림이었지만 기독교와 유대인도 "이교도"에게 부과되는 세를 지불하는 한 자신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게 허용했다. 발칸 반도의 산악에 사는 극빈층은 세금을 낼 수 없었고 대신 인신공물(Blood tribute)을 지불해야만 했다. 세금을 못 낸 마을에서 가장 건장한 청소년을 수도로 끌어가 술탄의 개인 노예로 만들었고, 이렇게 만들어진 군대가 바로 예니체리(Janissaries, 새로운 부대)였다.
그림 설명: 최근에 그려진 예니체리입니다. 그들의 악행과 달리, 나름 탄탄한 팬을 가지고 있습니다.
움막에서 잠자고 마른 빵과 양파로 굶주린 배를 채웠던 소년들은 이제 카펫과 대리석이 깔린 궁전에서 최상의 음식을 즐기게 되었다. 그들의 몸에 걸친 누더기는 실크 옷으로 바뀌었다. 베네치아 여행가 마르쿠스 스티네티는 "내가 만난 아이들은 노예생활 덕분에 천국을 만났다고 믿고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치가 공짜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노예가 된 청소년은 가장 엄격한 규율에 따라 실제전투와 맞먹는 치열한 군사훈련을 받았다. 훈련이 끝날 때마다 사상자가 발생했고 조금이라도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면 바로 처벌되었다. 몇 개월 만에 예니체리 징집병은 명령에 따라 줄지어 절벽이라도 뛰어내릴 군사인형으로 바뀌었다.
예니체리가 된 소년들은 자신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진급에 도움이 되는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실제로 노예에서 지휘관이나 수상이 된 사람들도 많았다. 투르크에서는 노예신분이 종신형을 의미하지 않았다. 유능한 노예는 행정기관에 채용되었고 재미있게도 부유한 노예상이 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기꺼이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투르크인보다도 더 광적인 신도가 되었다.
(우에스기 왈: 국내의 일부 자료는 예니체리를 거세한 환관이나 아무런 자유가 없는 용병으로 잘못 설명한 경우도 있습니다. 예니체리는 전쟁 중에 약탈의 자유가 주어졌고 나이가 들어 은퇴하게 되면 약탈로 모은 재산을 가지고 가정을 꾸릴 수도 있었습니다. 나중에 예니체리가 권력집단이 되면서 노예라는 비극적인 배경보다는 일종의 엘리트 코스로 받아들여져 예니체리이었던 집안의 아들이 입대 우선권을 가지는 일도 생기게 됩니다.)
예니체리는 워낙 좋은 보급을 받았기 때문에 솥과 식기를 연대기(깃발)로 사용해서 자랑하기도 했다.. 그리고 드럼과 플루트를 결합한 독특한 형식의 군악대를 사용했는데 나중에 유럽이 모방한 군악대의 시초가 된다. 15세기까지, 예니체리는 점령지의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학대했기 때문에 멀리서 음악이 들려오기만 해도 엄청난 공포심을 일으켰다. 예니체리는 평상시에는 여성 근처에도 못 가고 마치 수도승처럼 생활했지만 원정 중에는 이교도를 마음대로 약탈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원정 중에는 젊은 여성이나 남성을 가리지 않고 성폭행했고 도시 전체를 학살하고 파괴시켰다. 그래서 푸른 색 튜닉과 흰색 모자를 쓴 예니체리가 나타나기만 해도 그들을 피해 달아나기 바빴다.
투르크는 예니체리라는 강력한 정규군을 갖추게 된 반면에 유럽은 군사작전이 있을 때마다 용병이나 봉건영주의 사병을 모병했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무리들이었다. 예니체리는 기병이 없는 보병으로만 구성되었기 때문에 투르크는 이전에는 없었던 규모의 포병을 함께 운용했다.
(우에스기 왈: 예니체리가 보병으로만 구성되었다는 것이지 오토만 제국이 기병이 없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거꾸로 오토만 제국은 약 40,0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있었고 그 무장 상태가 유럽의 기사보다도 훨씬 중무장이었습니다. 그림 참조해주세요.
예니체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화살이나 화승총으로 집단사격을 가해 적의 공격을 무산시킨 후에 돌진하는 경무장 보병이어서, 수비를 하는 적에게는 대포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1453년, 투르크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이자 동로마 제국의 중심지인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을 공격했다. 빗발치던 투르크의 포화에도 필사적인 항전을 펼치던 비잔틴 시민은 기독교 국가에 구원요청을 했지만, 내전에 휩싸인 유럽국가들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술탄은 말을 탄 채로 성 소피아(Sophia) 성당에 들어가 새 수도(현재의 이스탄불)로 정한다고 밝혔다.
그 때부터 오토만 제국은 마치 산불이 난 것처럼 사방으로 확장해나갔다. 남쪽으로는 이집트와 수단까지, 북쪽으로는 크리미아와 우크라이나까지, 동쪽으로는 시리아,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까지, 서쪽으로는 보스이나까지 세력을 뻗었다. 러시아인, 타타르인, 아랍인, 페르시아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누비아인, 달마시아인이 새로운 국민이 되었다. 투루크인은 소수민족이었지만, 새로운 영토를 합병할 때마다 공물과 병사가 수도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 엄청난 영토와 민족의 정점에는 술탄이 있었다.
10대 술탄으로 1520년에 왕위에 오른 술레이만(Suleiman) 2세는 투르크인들 사이에서는 입법자(Lawgiver)로 불렸고, 외부에서는 장엄왕(The Magnificent) 술레이만이라고 불렀다. 그의 정원이었던 세라글리오(Seraglio)는 수도 안의 또 하나의 도시로, 9,000명이 살고 있었으며 음악에 따라 춤추는 분수와 지느러미에 보석을 단 금붕어 연못이 있을 정도였다. 그의 하렘은 모든 인정과 국적을 망라한 300명의 노예 후궁이 있었다.
사진 설명: 인형 모델링으로 재현된 장엄왕 술레이만입니다. 유럽은 이런 인형 모델링이 장기인데, 러시아에서 만든 작품이 주로 팔리고 있습니다. 저도 한 동안 모으다가 너무 많은 돈이 들어가고 이사하면서 계속 파손되어서 더 이상 수집하지 않고 있습니다.
술레이만 자신도 타타르 노예 후궁의 자식으로 8개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취미로 페르시아 시를 짓고 작곡을 즐기는 문관인 동시에 같은 시대의 그 어느 누구보다도 전쟁을 좋아하는 무자비한 전쟁군주였다. 그는 철학논쟁을 하는 것만큼이나 전투를 즐겼고 직접 말을 타고 군대를 이끌었다. 그의 수상은 이브라힘(Ibrahim)이라는 그리스 노예로 뛰어난 바이올린 연주자였고 원정 때마다 술탄과 동행했는데 술탄의 동성애자였다는 소문도 있었다. 술레이만은 로마의 보르지아스(Borgias, 악명높은 교황가문)와 비슷했지만 권력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강력했다.
베네치아 사절인 오타비아노 본에 따르면 술레이만은 "키가 크고 말랐으며, 메부리코에 축처진 수염을 가졌으며, 손은 매끄러웠지만 강한 힘을 가져 군이 보유한 가장 강력한 활도 당길 수 있었다. 머리에는 공작깃털에 다이아몬드를 꽂은 둥근 터번을 쓰고 있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대화 중에는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술레이만은 분쟁 중인 유럽국가들이 몰래 도움을 요청해왔기 때문에 그들의 사정을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신교도들과의 종교갈등으로 유럽이 분열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슬람의 힘을 서유럽으로 돌릴 시기가 다가왔음을 알았던 것이다.
투르크의 기습부대는 벨그라드(Belgrade)의 중요한 국경요새를 마치 운동 경기하듯이 점령했고 술레이만의 100,000명이 중앙 유럽으로 통하는 관문인 헝가리로 들어섰다. 헝가리의 왕 라조스(Lajos) 2세는 용감하고 잘 생겼지만 100% 멍청한 젊은이였다. 그는 항복을 권유하는 투르크의 사절을 목매달았다. 도움을 요청하는 다른 기독교 군주를 위해 약 25,000명의 군사를 모집했지만, 정작 자신의 가문에서 단 한 명의 병사도 지원받지 못했다. 1526년 8월, 그는 모학스(Mohacs)에서 오토만 병사와 만났고 단어 그대로 전멸했다. 라조스 왕과 24,000명이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헝가리는 오토만 제국의 위성국가가 된다.
그림 설명: 모학스에서 헝가리 병사들을 공격하고 있는 술레이만입니다. 라조스는 병력도 부족한데, 야전이 특기인 투르크 군의 유인작전에 빠져 거의 전부 전멸하게 되고, 헝가리는 완전히 이슬람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술레이만은 자노스 자폴랴(Zanos Zpolya)라는 트란실바니아인을 헝가리의 허수아비 왕으로 임명했는데, 자폴랴와 수 천명의 헝가리 병사가 오토만 제국을 위해 전투에 참전했다고 한다. 그들은 그 동안 헝가리 귀족들에게 워낙 학대를 받고 굶주려 왔기 때문에 숱탄의 지배에 있는 편이 더 나았을 정도였다.
오토만 제국이 헝가리를 완전히 흡수하는데 3년 밖에 안 걸렸고 그 후, 술레이만은 다음 목표물인 오스트리아를 향한 준비를 시작한다. 오스트리아의 왕 페르디난드(Ferdinand) 1세는 자폴랴의 즉위에 대해 항의했지만, 술레이만은 "너희 왕에게 말해라. 모학스의 들판에서 내가 직접 만나겠다고. 만약 나타나지 않으면 비엔나로 가서 끌어내올 것이다"라고 간단한 답변을 보냈다.
1529년 봄, 투르크의 대군이 불가리아에 집결하고 원군이 합류하면서 330,000명의 병력, 500문의 대포와 90,000마리의 낙타로 구성된 유럽 최대의 군대가 모습을 나타낸다. 여기에는 20,000명의 신규 예니체리와 6,000명의 기독교 헝가리부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술레이만은 야전 사령관으로 이브라힘을 임명하고 자신이 직접 군대를 지휘했다. 보통은 수상이 본국에 남아 내정을 했었는데 이 때부터 전쟁에 수상이 참전하게 된다.
술레이만에게는 불행하게도, 봄부터 유례없는 폭우가 계속 쏟아졌다. 매일 쏟아진 비때문에 모든 곳이 진흙밭으로 변했고, 발칸 반도의 도로는 망가지고 다리는 모두 급류에 흽쓸려 내려갔다. 건조한 사막동물인 낙타는 미끄러운 진흙에 쓰러지면서 다리가 부러져 수 천 마리가 도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술레이만이 자랑하는 초대형 화기를 운반할 방법이 없었고, 200문의 공성용 대포를 남겨두고 가벼운 야전포만 가져가기로 결정한다. 이브라힘은 그에게 다음 해 봄까지 원정을 미룰 것을 경고하지만 술레이만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여름이 가기 전에 비엔나를 함락시키기로 마음먹은 그는 "날씨도 내 권력 위에 서지 못한다"는 대답을 한다.
그는 공성무기가 없어도 수 천 명의 루마니아와 세르비아 광부를 동원해 비엔나 성벽을 무너뜨릴 생각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의 첫 번째이자 치명적인 실수였다. 두 번째 실수는 수 많은 영웅들이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오만함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불가능을 모르는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군대가 다뉴브 강의 건너편인 페스트(Pest)에 도달하자, 술탄은 소규모 독일 수비병들에게 요새를 떠나면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독일인들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예니체리가 늘어선 대열 사이로 빠져나가는 동안 문제가 발생했다. 빈정대는 예니체리에 맞서 독일병사들이 욕설을 퍼부으면서 주먹질을 하게 되고 결국에는 전투가 벌어졌다. 30분만에 예니체리는 수비병 전원을 죽이고 도시로 몰려가 모든 시민을 도륙했다.
학살소식을 들은 오스트리아는 술탄의 약속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로 받아들이게 된다. 술레이만에게도 예니체리가 규율을 잃으면 통제할 수 없다는 경고가 주어졌던 것이다. 오토만 군대가 다가오면서 비엔나는 공포에 사로잡히게 된다. 오스트리아의 대공,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이라는 작위를 가진 페르디난드는 독일과 스페인의 왕인 형 챨스(Charles) 5세에게 지원을 요청하지만 챨스는 이미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와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양쪽 전선에 모두 군대를 보낼 여력이 없었다. 라조스 왕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던 페르디난드는 비엔나 시민에게 스스로 목숨을 지키라며 보헤미아의 안전한 곳으로 달아나버린다.
비엔나 시민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작지만 귀중한 지원군이 곳곳에서 도착한다. 그 중에서도 70세의 경험이 풍부한 군인인 니콜라스 그라프 폰 살름(Nicolas Graf von Salm)의 합류가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 지휘관이 되기에는 배경이 너무 낮았지만 페르디난드가 모든 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살름이 독자적인 행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살름과 함께 700명의 란츠크네히트(Landskenchte)와 700명의 스페인 병사가 합류했는데, 스페인 병사들은 투르크 화승총보다 발사속도가 빠른 신형 기어식 격발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우에스기 왈: 란츠크네히트는 아직 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강대국의 영지로 분할된 독일의 쇠락한 귀족, 시민이나 농노로 구성된 용병부대를 말하는데, 무장은 스위스 장창부대와 비슷했지만 스위스 용병이 국가의 정규군 형태로 고용된 반면에, 란츠크네히트는 훨씬 느슨한 계약용병 형식으로 고용되었습니다. 란츠크네히트는 상당히 오랜 동안 용병으로 활약했고 심지어 남미까지 파병되었는데, 영화 슬리피 할로우에 나오는 목없는 살인마가 바로 이 용병출신입니다.)
살름은 23,000명의 보병, 2,000명의 흉갑기병(Cuirassier)과 75문의 대포로 이루어진 수비군의 지휘를 맡았는데, 오토만 제국의 군대에 비하면 상대가 안 되는 전력이었다. 그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비엔나를 점검했지만 너무 당황스러운 상태였다. 그 당시 비엔나는 많은 가로수길로 구획이 나뉘어진 마을이 서로 연결된 크지 않은 도시였다. 도심에는 성 스테판 성당이 있었고 그 주변은 수많은 여관이 늘어선 좁은 골목이 이리 저리 엉켜있었고 화려한 궁전 몇 군데가 그나마 도시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성벽은 300년이나 되었으며 보수가 당장 필요한 상태였다. 4개의 성문은 공격이 집중될 가장 위험한 취약점이었다.
살름은 공성전에 대비해 체계적으로 준비해나가기 시작한다. 그는 방화벽을 세우고, 수비군이 설 수 있는 토대를 쌓았고 도로에 깔린 돌을 파내 제2의 성벽을 만들었다. 불이 붙을 수 있는 지붕은 모두 허물었고 4개의 성벽을 대대적으로 강화시켰다. 오토만 군대가 사용할 수 있는 성벽 밖의 높은 건물은 모두 부쉈고 지휘소로 성 스테판의 첨탑을 골랐다. 오토만의 공격초점이 될 수 있는 위험한 위치였지만 전투를 가장 잘 지켜볼 수 있는 위치이기도 했다.
살름은 공성전에서 중요한 식량소비를 줄이기 위해 4,000명의 여성과 노약자에게 호위를 붙여 도시를 떠나게 했지만, 오스트리아 남부를 유린한 투르크 전위대가 이 행렬을 습격한다. 그들은 성폭행하거나 노예로 팔 수 있는 젊은 여성과 소년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학살했고, 심지어 살아있는 상태에서 창으로 꿰기까지 했다. 그 중에서도 같은 기독교의 헝가리 정찰대가 가장 악랄한 약탈을 저질렀다.
그림 설명: 투르크 군에게 끌려가는 여성들입니다.
성벽에서는 주변의 모든 마을이 불타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오토만 부대는 진격로에 있는 모든 것을 불태웠고 국민의 절반가량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끌고 갔다. 그러나 본대는 예정보다 2개월이나 지체된 9월 말이 되어서야 비엔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새벽이 오자, 비엔나 성벽에서 볼 수 있는 셈메링(Semmering) 산 꼭대기까지 흰 텐트가 빽빽하게 펼쳐진 광경이 펼쳐졌다. 공포에 질린 수비병은 투르크 군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약 1/3의 병력이 공성전에는 거의 도움이 안 되는 경기병이었고 폭우 속에 강행군을 한 90,000마리의 낙타 중에 20,000마리만 살아 남아있었지만 그마저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상태였다. 몇 개월 동안 물에 젖은 병사들도 낙타보다 나은 상태가 아니어서 캠프를 설치하는 소음보다 기침소리가 더 컸을 정도였다.
술레이만은 항복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다. "9뭘 말일에 시내에서 저녁을 먹고 싶다"는 것이 그의 요구였다.
"비엔나가 항복한다면 행정관들만 진입해 어떤 피해도 입히지 않겠지만, 저항한다면 궁전을 불타고 모든 사람은 처형될 것이다."
살름은 사절을 정중하게 되돌려보내며 어떤 응답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 300문의 대포가 도시를 향해 포문을 열었고 날이 저물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투르크 포병의 엄격한 규율에 따라 폭우에도 화약이 젖지 않게 잘 보관한 덕분에 비엔나 수비군보다도 더 빨리 포를 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성용 대형포는 불가리아에 두고 왔었기 때문에 야전 경포에서 발사되는 돌덩이는 성벽 앞에 무기력했고 높은 각도로 쏘는 포화는 성벽을 넘어 시내의 집만 파괴시킬 뿐이었다. 공격측에서도 보이는 성당 지휘소에 있던 살름은 "저들이 쏘는 조약돌이 내가 먹는 알약처럼 보이네"라고 할 정도로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오토만 군대는 포화와 함께 엄청난 화살도 쏘아댔다. 그들의 반달형 타타르 활은 강철갑옷도 뚫을 정도로 강력했지만 야전용이었고 성벽에 대해서는 소음으로 시끄럽게 하는 효과가 고작이었다.
그림 설명: 기습에 나선 비엔나의 기사들입니다. 수십 만의 적을 앞에 두고 이런 과감한 작전을 펼친 것을 보더라도 살름이 얼마나 대담한 지휘관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술레이만은 이 때까지만 해도 가벼운 코웃음으로 재미있다고 생각했을 지 모르겠습니다.
수비군은 갑자기 100명의 기병대를 보내 오토만 군을 기습하는 것으로 포화에 대한 대답을 했다. 폰 라이샤흐(Eck von Reischach)가 이끄는 기병대는 2개 포대를 부수고 포병들을 베어 넘긴 후에 깔끔하게 성으로 귀환했다. 비엔나는 지금 당장은 전혀 문제가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포화는 며칠 째 계속되었지만 본격적인 공성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10월 1일,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세르비아 공병이 도시로 몰래 들어와 충격적인 소식을 누설했다. 그는 포화가 단순히 위장일 뿐이며 실제로는 지하로 공성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투르크 군은 성문의 양쪽에서 지하갱도를 파서 성문을 폭파시킨 후에 본대를 진입시킬 계획이었던 것이다.
살름은 다행히도 지하갱도 전투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조치를 취했다. 그는 마른 콩을 얹은 드럼을 곳곳에 설치하고 성벽 근처에 있는 집의 지붕에는 물통을 걸어둔 다음에 경비병을 배치했다. 콩이 튀거나 물결이 일면 경비병은 북을 두들겨 위험을 알리고 대응팀이 그 지점을 파내려 갔다. 투르크의 광부들이 마치 두더쥐처럼 6개의 루트를 놀라운 속도로 파오고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림 설명: 공성용 대형화기를 뒤에 두고 온 투르크 군은 성벽을 공략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 때부터 지루한 지하갱도 작전이 진행되지만 비엔나 수비군의 기민한 대응에 효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수비군의 대응팀은 터널을 만날 때까지 파내려 갔다. 몇 개 터널은 이미 화약포대가 잔뜩 싸여서 폭파하기 직전이었는데, 수비군이 화약포대를 노획물로 가져갔다. 아직 공사 중이었던 다른 터널에서는 지하 갱도에서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화약이 쌓여있었기 때문에 어느 쪽도 총을 쏘지 못했고 희미한 등불에 비춰진 그림자에게 칼을 휘둘러댔다. 나체에 가까운 광부들이 삽, 곡갱이, 단검과 곤봉으로 서로를 공격했으며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맨주먹과 이빨로 상대를 죽였다. 땅에 쓰러진 부상자는 밟혀 죽었다. 피아를 구분할 수 없이 어두웠기 때문에 아군을 죽일 때도 많았다. 지하갱도는 워낙 좁아서 몸을 움직일 공간조차 없었기 때문에 누가 먼저 휘두르느냐에 따라 승부가 결정되었다. 생존자들은 흙과 피로 검붉게 물든 몸을 간신히 지상에 드러냈는데, 목격자는 "마치 지옥에서 나온 악마들"과 같았다고 말했다.
수비군은 대부분의 지하갱도를 무력화시켰지만 투르크 군은 포기하기 않고 계속 터널을 팠고 그 중에는 들키지 않은 것도 있었다. 10월 5일, 드디어 솔트(Salt) 성문의 터널 두 곳에서 지축을 울리는 폭발이 있었고 중대병력이 진입할 수 있는 큰 구멍이 생겼다. 예니체리는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돌격해 들어갔지만 그 안에는 2m 길이의 창과 도끼창으로 무장한 란츠크네히트가 늘어선 또 다른 성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날카롭지만 짧은 시미터 칼로 무장한 투르크 병사들에게 긴 창과 도끼는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예니체리의 공격은 막대한 인명피해를 내고 실패로 돌아갔다. 투르크 군이 물러나자, 수비군은 모래주머니와 돌덩이로 구멍을 다시 메웠다.
그 날 밤, 검은 옷을 입은 보병들이 성벽을 내려와 투르크 캠프를 기습했다. 그들은 화약과 납덩이로 채워진 폭탄옹기를 두 개씩 들고 캠프에 몰래 다가가 텐트 안으로 폭탄을 집어 던졌다. 생김새는 조잡해도 위력적인 수류탄이 터지면서 납덩이를 사방에 뿌리고, 텐트에 화재가 나면서 2,000명 이상의 투르크 병사가 죽었다.
그림 설명: 좁은 통로에서의 장창부대는 경무장인 예니체리에게는 도저히 뚫을 수 없는 장애물이었습니다. 예니체리는 야전에서는 강력한 힘을 발휘했지만 공성전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지하터널 폭파와 돌격은 연일 계속되었고, 카린티안(Carinthian) 성문 아래에서 터진 터널은 2개의 탑을 부술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살름은 그 뒤의 성벽에 독일 창병, 스페인 화승총병과 보헤미아 도끼보병을 배치시켜 두었다. 특히 보헤미아 도끼병은 적을 두 동강낼 정도로 무서운 위력을 발휘했다. 대열을 지어 침입한 예니체리는 계속 죽어나가면서 쌓인 전우의 시체를 넘어서려고 했지만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투르크 군이 물러나자 그 좁은 공간에는 1,200구의 시체가 겹겹이 쌓여있었다.
지하갱도에서의 전투는 점점 더 비참해져갔다. 수비군의 광부는 삽의 양날을 갈아서 제대로 맞으면 목이 잘릴 정도로 만들었고 투르크 광부는 기병용 철퇴를 사용해서 적의 헬멧과 머리를 모두 부숴버렸다. 무기가 부딪치며 발생한 스파크로 주변에 있던 화약이 폭발하면서 수 백 명의 광부가 모두 죽은 적도 있었다. 지하갱도에서의 전투는 누가 얼마나 죽었는지 알 방법도 없었고 부상자도 끌어내지 못했다.
전투를 지켜보던 술레이만은 자신이 기대했던 지하갱도 작업이 효과가 너무 미미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의 대부분의 터널이 폭파되기 전에 비워져야 했고, 갱도작업을 하는 동안 흙이 쏟아져 내려 완전히 막혀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수비군은 자신들이 무너지면 서유럽은 이슬람의 발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사실에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전투를 벌였다. 수비군이 이제 지붕을 보강해 포대로 사용하기 시작해서, 투르크 캠프를 포격하고 공격해오는 투르크 군의 대열을 무너뜨렸다. 투르크 군은 대구경 화기를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비엔나 수비군의 포대는 안전거리에서 마음껏 포화를 퍼부어댈 수 있었다.
10월 11일, 하늘에서 다시 폭우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얼마 남지 않는 낙타들이 병들어 죽어갔고 물에 잠긴 투르크 캠프에서는 기침소리가 더욱 심해졌다. 부대 전체가 독감에 걸려 전열에서 빠지는 일도 벌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이제 식량도 떨어져가기 시작했다. 투르크 군은 오스트리아 일대를 워낙 철저하게 약탈하고 유린했기 때문에 수십 만 명이 먹을 식량을 구할 곳이 없었다.
술레이만은 작전회의를 열어 마지막으로 전면공격을 펼쳐 비엔나를 함락시키기로 한다. 그는 비엔나에서 겨울을 보낸 후에 다음 해 봄에 도로사정이 좋아지면 대구경 화기와 함께 서유럽으로 진격할 생각이었다. 마지막 공격에서는 대열을 완전히 바꾸기로 했다. 먼저 최전위에 가장 전력이 약한 민병대가 서서 수비군의 반격을 받아낸 후에 예니체리가 도시로 진입하기로 했다. 피해에 상관없이 3차례 공격을 하기로 했다. 술탄은 심지어 예니체리 한 명 당 1,000개의 은화를 약속했는데, 지금까지 예니체리는 전사하면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믿음과 약탈의 즐거움때문에 전투를 기꺼이 벌이는 군대로 현물보상은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최후의 공격은 10월 14일 오전에 시작되었다. 수상 이브라힘이 예니체리를 직접 지휘했고 폐허가 된 카린티안 성문과 베르그(Berg)라는 돌출 성벽에 공격이 집중되었다. 터널 중 하나는 제대로 폭파되지 않았지만 남은 하나가 수비군과 공격군 모두를 쓰러뜨릴 정도로 제대로 폭파되었다. 투르크 군은 마치 악마처럼 몸을 성벽 안으로 던졌지만, 곧 말뚝과 장창에 막혀버렸다. 살름은 지휘소를 떠나 전투에 참여했지만 돌 파편에 맞아 후방으로 실려가야만 했다. 그는 여기에서 입은 상처때문에 결국 죽고 만다.
민병대가 뒤로 물러나면 투르크 감독관들이 채찍을 휘둘러 장창 앞으로 다시 돌격하게 만들었다. 민병대의 시체와 부상자들이 쌓여갔지만 전혀 전진하지 못했고, 예니체리가 나섰지만 양측면에서 발사하는 화승총에 목숨을 잃었을 뿐이다. 스페인 화승총병은 거치대에 소총을 놓고 정확한 사격을 한 반면에, 밀집된 상태에서 마구 쏘아대는 예니체리의 권총은 아군을 맞추기만 했다. 예니체리는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장창부대 하나를 넘어서면 또 다른 장창부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벽 위에서는 불붙은 수류탄이 머리 위로 마구 쏟아졌고 베르그에 배치된 작은 화포는 공격군의 머리를 향해 산탄을 뿜어댔다. 시체가 이리 저리 쌓이면서 공격군의 진로는 완전히 막혀버렸고 그것을 기어 올라도 소총이 바로 쓰러뜨렸다.
예니체리는 결국 후퇴명령이 없는데도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브라힘이 화를 내며 채찍을 휘두르고 칼로 내리쳤지만 그에게는 저주의 말만 돌아올 뿐, 아무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예니체리의 200년 역사상 처음으로 명령불복종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약간씩 주춤거리던 대열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더니 텐트에 이르러서도 멈추지 않았다. 일부 부대는 아예 텐트를 철거하기 시작했다.
그 날 밤, 오토만 군대는 원정캠프를 걷었고 비엔나 수비군은 적에게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음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토만 군은 가져가지 못하는 짐은 불을 질렀고 포로들을 그 불길에 던져 넣었다. 수 백 명이 산채로 화형을 당했지만 혼란을 틈타 많은 포로가 비엔나의 성벽으로 도망쳐왔다. 계략으로 의심한 비엔나는 성벽을 열지 않은 채, 성벽에 온 아군에게 밧줄을 던져 올라오게 했다.
날이 밝자 도시를 둘러싼 수 많은 텐트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술레이만이 씁쓸하게 "알라신이여. 아직 제게 비엔나를 허락하지 않으시는군요"라고 말하면서 투르크 군은 원정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등 뒤에는 때이른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오토만 제국의 손실은 약 18,000~25,000명으로 수비군에 비해 몇 배나 많은 손실을 입었지만 원정군의 규모로 보면 그렇게 큰 피해는 아니었다. 비엔나 공성을 포기한 것은 피해가 컸다기 보다 급격하게 추워진 날씨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의 피해는 너무나도 커서 남부 오스트리아는 거의 황무지로 변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일부 마을에서는 죽은 사람의 머리를 잘라 피라밋을 쌓았고 수 천 명의 여성과 소년이 노예시장으로 팔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림 설명: 투르크 화가가 그린 술레이만과 비엔나 공성전투입니다. 비엔나 성벽 안에 살름의 지휘소였던 성당 첨탑이 보입니다.
비엔나의 지휘관들은 하늘이 내려준 행운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오토만 군대의 후퇴가 유인작전으로 곧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탈출한 포로 중에 스파이를 섞어 조만간 수비군을 사보타지할 것으로 의심했다. 심지어 포로들 전부의 옷을 벗겨 포경수술(무슬림이 하는)을 했는지 검사까지 했다. 수술자국이 있는 포로는 무조건 목매달아 처형했고 결백한 포로들조차 고문을 못 이겨 무슬림의 스파이라고 거짓 자백을 하기도 했다. 그들은 시민들이 조롱하는 가운데 광장으로 끌려 나와 목이 잘렸다.
비엔나 수비군이 조심스럽게 오토만 군대의 캠프를 수색하면서 난생 처음 보는 검은 콩이 든 자루를 발견했다. 오토만 포로는 이것이 아라비아에서 수입된 커피라는 것으로 무슬림이 포도주대신에 즐겨 먹는다고 알려주었다. 비엔나 사람들은 포로의 말대로 끓여 먹으려 했지만 너무 써서 우유와 벌꿀을 타서 마시게 되었고 유럽 최초의 커피 가게가 비엔나에 생기게 된다.
비엔나 원정실패는 오토만 제국의 몰락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패배를 모르던 예니체리는 후퇴를 거듭했고 명예와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예니체리와 같은 엘리트 부대가 아군에게도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다. 점점 더 규모가 커지고 권력을 갖게 된 예니체리는 술탄의 명령을 거부하는 일이 잦아졌고 숱탄을 죽이는 일까지 벌어졌다. 예니체리가 술탄의 노예가 되는 대신에 술탄이 그들의 포로가 되고 만 것이다.
슬레이만에게 있어서, 비엔나는 인생의 전환점을 의미하게 된다. 그는 장엄왕이라는 별칭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지만 하렘의 후궁에 빠져들고 만다. 록셀라나(Roxelana, 러시아인)의 간사한 유혹에 빠진 술레이만은 이브라힘을 죽인 다음에 장남인 무스타파까지 죽이고 만다. 록셀라나는 자신의 아들인 셀림(Selim) 2세가 왕좌를 오르게 일을 꾸몄지만, 그는 율법에서 엄격하게 술을 금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술고래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알콜중독자였다.
술레이만이 1566년에 죽고 셀림이 왕위에 오르면서 오토만 제국은 급속하게 기울기 시작한다. 오토만 제국은 현명한 술탄대신에 무능하고 잔인한 술탄을 가지게 된다. 유럽이 군사력과 행정력을 계속 발전시키는 동안 오토만 제국은 반대로 퇴화가 계속되었다. 오토만 제국은 1683년에 다시 한 번 더 비엔나를 공격하지만 재앙으로 끝나게 된다. 유럽 전체를 공포에 떨게 했던 이슬람의 막강한 힘은, 텐트를 걷고 발칸 반도로 되돌아 가던 그 날 밤에 끝났던 것이다.
(우에스기 왈: 장엄왕 술레이만이 첫 번째 비엔나 공격에서 실패한 후에 예전과 같은 정복욕구를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기에서 서둘러 마무리된 것과 같이 완전히 뒤로 물러 앉은 것도 아닙니다.
그는 재임기간 동안 제국을 위협하는 사파비드 왕조를 토벌하고, 헝가리를 탈환하려는 페르디난드를 물리쳤으며 남부 이탈리아까지 원정을 가기도 했습니다.
여기에서는 마치 술레이만이 궁전에서 여자만 탐하다가 죽는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그는 원정 길에서 오토만 제국이 승리하기 직전 자연사하게 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전투를 벌였던 것입니다.
그의 원정 리스트는 다음 편에 설명될 것입니다. 그림은 1565년에 있었던 말타 섬 원정입니다. )
(우에스기 왈: 예니체리의 악행은 민간인을 상대로 한 용서의 여지가 없기는 합니다만, 당시의 전투가 도시 외곽의 모든 것을 초토화시켜 군수품을 현지에서 조달하고 장기전을 대비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오토만 제국이 야만적이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민간인이나 포로를 꼬챙이에 꿰어 적에게 공포감을 주는 행동은 오토만뿐만 아니라 유럽의 용병들도 자주 하던 행동이었습니다.
특히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영주 드라큘라도 워낙 잔인한 행동으로 흡혈귀 전설로 변형되었을 정도입니다.
드라큘라 백작의 본명인 블라드 체페슈는 그림에서와 같이 포로나 농노를 꿰어 죽이는 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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