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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기타

폴란드 독립을 위한 마지막 투쟁(2부)

by uesgi2003 2014. 4. 25.


바다가 가장 조용하다는 시기가 어제로 끝났습니다. 삼풍백화점의 기적은 없는 모양입니다. 단 한 명이라도 구조되어 실종자 가족과 국민에게 위안을 주었으면 했는데, 이제 그런 기적은 없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뉴스를 보면 더디고 어지러운 구조작업으로 시신이 유실되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시신조차 유실된다면 억울하게 죽어간 고인 그리고 평생 고통을 안고 살아 갈 가족을 두 번 죽이는 일입니다. 


다시 한 번, 이런 세상을 만든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 영문도 모르고 죽어간 아이들에게 용서를 빕니다. 


폴란드 독립을 위한 마지막 투쟁(2부)


5월 24일, 코시치우슈코는 바르샤바로 들어가 질서를 바로 잡았다. 독립군 지도자들은 최고 원로회를 조직해서 정부형태를 갖췄다. 스타니수와프의 안전을 보장하고 원로회의 의결을 알려주기는 했어도 그에게 어떤 권한도 주지 않았다. 코시치우슈코는 도심에서 벌어지는 공개처형을 금지했다. 그는 야신스키에게 즉시 처형을 중단하라고 명령했지만, 야신스키는 "6백만 명을 살리려면 수백 명은 처형해도 된다"라고 대답하자 그를 해임시켰다. 코시치우슈코는 자코뱅주의로 낙인찍히고 싶지도 않았고 왕을 왕정을 수호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정치적 혼란은 계속되었지만 독립움직임은 볼히니아Volhynia,부블린Lublin, 그다인스크Gdansk로 번져나갔다. 


신정부는 러시아군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군수산업을 수용했다. 대포는 생산할 수 있어도 문제는 소화기였다. 어쩔 수 없이 전술은 기병, 대포 그리고 농민군의 인해전술이었다. 18~28세의 남성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징집했고 바르뱌사 유대인은 여단을 만들어 수도방어에 나섰다.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순수 유대인 부대가 만들어졌다. 


6월이 되자, 폴란드 국군Polish National Army은 침략군과 교전하기 시작했다. 6월 5일, 코시치우슈코는 14,000명의 병사와 24문의 대포를 동원해서 슈체코치니Szczekociny에서 바실리 데니솝의 러시아군을 상대했다. 러시아군의 병력이 적어서 승리가 예상되었지만 훈련이 안된 농민군을 전투대형으로 맞추는데만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렇게 귀중한 시간이 흘렀다. 

이튿날 프러시아군이 도착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폴란드군은 이제 27,000명의 병력과 124문의 대포를 상대해야 했고 전투가 벌어지자 마자 폴란드 포대는 순식간에 침묵을 지켰다(그림 참조). 

코시치우슈코는 가벼운 부상을 당했지만 성공적으로 병력을 바르샤바로 빼내 전멸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슈체코치니 전투 직후인 6월 8일에 벌어진 헤움Chelm 전투에서도 농민군으로는 정규군을 상대할 수 없다는 현실이 입증되었다. 대형낫을 든 10,000명이 폴란드군은 패배했고 6월 15일에는 프러시아가 독립저항의 발산지 크로코프를 점령했다. 그렇지만 6월 20일에는 리투아니아의 폴란드군이 러시아군에게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프러시아가 크라코프를 점령하자 오스트리아의 카이저 프란츠Francis 황제는 점점 커져가는 프러시아의 힘을 염려했다. 오스트리아는 이미 네덜란드를 잃었기 때문에 폴란드로 진출하는 프러시아를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그리고 예카테리나도 프러시아의 확장을 우려해서 오스트리아의 참전을 종용했다. 프란츠는 폴란드로 군대를 보내 루블린과 산도미에시Sandomierz를 점령했다. 


폴란드군은 패전을 거듭한 끝에 바르샤바로 몰렸다. 7월 22일, 40,000명과 대포 235문의 러시아-프러시아 연합군은 바르샤바를 포위했다(그림참조). 위기에 몰린 시민은 다시 매국노 용의자를 처형하기 시작했다. 코시치우슈코는 공개처형을 다시 금지시키며 위반한 사람을 처형했다. 



그는 미국 사라토가와 웨스트 포인트의 경험을 살려 공성전에 대비했다. 수비병력은 겨우 26,000명의 오합지졸과 230문의 대포가 전부였지만 수도를 요새로 만들었다.

8월 2일, 프러시아는 항복을 권했고 코시치우슈코는 프러시아와 러시아군을 요격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공성전은 계속되었다. 


8월 20일, 비엘코폴스카Wielkopolska 시민이 봉기를 하면서 바르샤바는 함락위기에서 벗어났다. 비엘코폴스카는 바르샤바와 프러시아 중간의 도시로, 배후를 위협받은 빌헬름은 9월 6일에 서둘러 진영을 거두고 비엘코폴스카 봉기부터 진압하려고 물러났다. 

코시치우슈코는 얀 다브로프스키Dabrowski에게 병력을 떼어주고 프러시아군을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9월 23일, 비엘코폴스카에서 프러시아군을 따라잡은 폴란드군은 승리를 거뒀고 10월 2일에는 비드고슈치Bidgoszcz 요새를 탈환했다. 



비엘코스카야 지역에서는 독립을 위한 무장봉기가 꾸준히 일어났습니다. 1794년 수도를 구한 봉기 뿐만 아니라 1846년에도 프러시아를 상대로 봉기를 일으켰고 1919년에는 독일을 상대로 무장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그림 1919년 당시의 봉기입니다. 


다브로우스키는 심지어 프러시아의 포메라니아까지 추격했다. 그는 무려 6주 동안 30,000명의 거대한 적을 상대로 추격전을 펼쳤다. 

바르샤바에서 프러시아군이 물러나자, 러시아군도 포위를 포기하고 물러났다. 폴란드 독립군은 위대한 승리를 거뒀다. 


겉으로 볼 때에는 폴란드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예카테리나는 프러시아의 패배를 은근히 즐기면서 폴란드를 본격적으로 공략하기로 했다. 그녀는 아예 단독으로 바르샤바를 함락시키기로 했다. 

먼저 오스만 제국과 평화조약을 맺어 남쪽의 분쟁을 끝내고 러시아 최고의 정예군을 폴란드로 이동시켰다. 알렉산드르 수보롭Suvorov 장군은 9월 15일 8,000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부그 강을 넘었다. 


폴란드군은 최선을 다해 큰 위기에 저항했다. 10,000명의 폴란드군이 9월 17일과 19일에 수보롭을 가로막으려고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8월 12일에 리투아니아가 러시아 손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뒤늦게 들어왔다. 

코시치우슈코는 다브로우스키를 바르샤바로 급히 호출했다. 두 병력을 합친 후에 바르샤바에서 물러난 러시아군이 수보롭과 합류하기 전에 궤멸시킬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바르샤바를 비우자 마자 거리에서는 공개처형이 시작되었다. 


코시치우슈코는 7,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11시간 만에 120km를 이동했고 마침 비스튤라Vistula 강 너머로 가려는 러시아군을 붙잡았다. 그는 부대에게 전투대형을 갖추라고 명령하고 7km 떨어진 아담 포닌스키Poninski 장군의 부대에게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그렇지만 러시아군이 전령을 먼저 붙잡았고 코시치우슈코가 다시 전령을 보냈을 때에는 결정적인 6시간이 흘러 포닌스키는 제 때에 도착하지 못했다. 


10월 10일, 러시아 프레젠Frezen 장군은 수보롭 군대와 합류하기 전에 폴란드군을 상대해야 했다. 코시치우슈코는 고지대에 자리를 잡았는데 우측의 습지로 배후는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2배 가까운 14,000명을 가진 프레젠은 공격을 선택했고 8시간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프레젠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어차피 소모전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예비병력까지 모두 투입했다. 

러시아군은 폴란드군이 천연장애물이라고 믿었던 습지를 통과해 우익을 강습했다. 폴란드군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용감하게 싸웠고 코시치우슈코는 말을 세 번이나 갈타아야 했다. 우익이 무너지면서 폴란드 기병이 후퇴했다. 그는 말을 달려 기병의 후퇴를 막아보려고 했지만 코사크 기병이 달려들어 그를 칼로 내리쳤다. 



마치에요비체Maciejowice 전황도입니다. 무장과 훈련도 안 된 적은 수의 병력으로 러시아 정예군을 상대하는 것이 무리였습니다. 



지휘관이 쓰러지자, 폴란드군은 달아났다. 러시아군은 의식을 잃은 코시치우슈코를 포로로 붙잡았다. 그는 정신을 차린 후에 물을 달라고 했지만 러시아 코사크는 '"폴란드는 끝났다"라고 외쳤다고 왜곡해서 선전했다. 그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폴란드 독립봉기는 어차피 끝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참모장과 좌익 지휘관도 모두 포로가 되었다. 2,000명의 패잔병은 바르샤바로 들어갔고 러시아 장교가 바르샤바로 들어와 코시치우슈코의 체포와 패전을 알렸다. 그리고 페르젠은 스타니수와프 왕에게 왕위를 보장하며 모든 러시아 전쟁포로를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왕은 양쪽의 포로교환을 제안했다. 


바르샤바의 폴란드군은 여전히 왕을 거부했다. 최고원로회는 새 지도자로 토마즈 바브르제키Wawrzecki를 선출했다. 폴란드군이 혼란을 겪고 있는 동안 수보롭은 바르샤바로 전진했다. 그는 겨울숙영지를 찾는 대신에 바르샤바를 바로 공격했다. 왕은 수도방어를 격려했고 수비군은 프라가 외곽의 방어를 보강했지만 수도와 단절된 프라가는 희망이 없었다.


11월 4일 새벽, 러시아 코사크병이 폴란드군을 우익에서 밀어붙였다. 프라가는 함락되었고 20,000명이 학살당했다. 



수보롭은 약탈과 살인을 막았지만 코사크병은 명령을 듣지 않고 여성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학살했습니다. 프라가 학살을 계기로 폴란드의 독립열기는 급속하게 힘을 잃게 됩니다.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러시아군은 폴란드 지도자를 색출하는 동시에 바르샤바 공략에 한 발 더 다가섰다. 

러시아군은 4월에 당했던 패전을 보복할 생각에 학살을 멈추지 않았다. 프라가의 거리는 여성, 아이, 신부와 수녀의 피가 흘렀다. 수보롭은 만행에 놀라 뒤늦게 개입했다. 그는 예카테리나에게 "프라가 만세... 수보롭"이라는 전령을 보냈고 그녀는 "원수만세...예카테리나"라는 간단한 답변을 보냈다. 


11월 8일, 원수로 승진한 수보롭이 바르샤바를 함락시켰고 러시아군은 "예카테리나 여제 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다. 시민은 학살이 벌어질까 싶어 두려워했고 폴란드군은 급히 수도를 떠났다. 수비군이 러시아군과 내통했다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사실은 바르샤바의 학살을 막으려고 유혈충돌을 피한 것이었다. 


11월 16일, 마지막 수비군이 항복했고, 코시치우슈코와 다브로우스키는 항복제안을 받아들였다. 



폴란드군이 프러시아 국경을 다시 넘어 돌아오고 있는 모습입니다. 


왕은 수도에 홀로 남았다가 그로드노Grodno로 옮겨진 후에 폐위당했다. 그리고 폴란드는 오스트리아, 프러시아와 러시아가 완전히 분할합병했다. 



예카테리나가 코시치우슈코에게 칼을 돌려주려고 했지만 거부하고 있습니다. 예카테리나 뒤를 이은 바울 1세가 그를 석방했지만, 돌아갈 조국이 없었습니다. 


폴란드가 사라지고 2년 후에 예카테리나 여제가 사망했고 바울 1세가 코시치우슈코와 다른 지도자를 모두 석방했지만, 러시아 점령지역으로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단서를 달았다. 코시치우슈코는 1797년에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6년을 프랑스에서 살았고 1817년에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폴란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 분할점령되었다. 


코시치우슈코는 폴란드를 독립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자코뱅주의자와 유산계급은 그의 노력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1918년에 폴란드가 다시 봉기하면서 그의 독립의지를 계승했고, 그는 폴란드 최고의 영웅 중 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았다. 크라코프를 방문하면 말을 타고 모자를 흔들며 사기를 올리는 그의 동상을 볼 수 있다. 



당시 폴란드군 그림으로 너무나도 달랐던 (누구와?) 폴란드 독립영웅의 이야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