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까지만 해도 모든 사람의 관심이 북한과의 대치 또는 전쟁이었죠. 평소 제가 북한은 절대로 전쟁에서 이길 수 없으며 독자적으로 개전할 수 없다고 장담했었기 때문에 그 이유에 대한 이야기로 보급(전쟁비용)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북한을 상대로 주변군의 지원없이도 참전하고 승리할 수 있는 경제기반이 있고 교역로가 열려있습니다만 북한은 평소에도 중국의 지원없이는 유지할 수 없는 만신창이의 상태이고 전쟁 중에는 중국이나 러시아를 통해서만 전쟁물자를 수입할 수 있습니다.
전쟁은 인명피해는 물론이고 막대한 경제력을 소진시키기 때문에 순간적인 결정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정리하던 중에 양쪽의 협상단이 합의를 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어오더군요. 그런데 비장한 각오의 협상단과 달리 그 결과는 (예상대로?) 황당해서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있습니다. 더구나 북한의 테러와 도발에 대해 사과나 재발방지약속을 받아내지 못한 상태로 성공적인 협상이었다고 자축하고 있어서 유감입니다.
그렇습니다. 유감이라는 말은 이렇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사과의 뜻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경우에 따라서는 가벼운 질책의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북한은 돌아가자 마자 남한에게 한 수 가르쳤다고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미국의 모 언론이 이렇게 요약했죠. 사과할래? 아니! 그럼 유감은 어때? 좋아!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무력해결은 저도 결사반대입니다. 그렇지만 단호한 태도로 주도권을 잡아가던지, 우월한 경제력으로 꼼짝 못하게 옭아매던지, 일관된 정책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상황변화에 대비한 다양한 비상계획Contingency Plan도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비상계획은 고사하고 일관된 정책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죠? 이명박정부는 절대로 경제를 살릴 수도 없고 최악의 대통령 중 하나로 꼽힐 것이라고 당선직후부터 예언을 했었는데, 3년 후면 박근혜정부가 그 자리를 넘겨받고 이명박씨는 면피는 하겠군요.
전쟁비용, 아마추어는 전술을 말하고 전문가는 보급을 말한다.
전사에는 이런 말이 있다. “아마추어는 전술을 말하고 전문가는 보급을 말한다.” 그런데도 전사에서 보급과 같은 요소는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다가 겨우 몇 십 년 전부터야 중요한 요인으로 검토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아마추어를 제외하고) 어떤 전사가도 보급문제를 제쳐두고 전쟁과 작전만 설명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전히 간과되는 중요한 요소가 남아 있다. 바로 병사의 급여를 포함한 전쟁비용이다.
수천 년이 흘러오는 동안 군자금의 중요성에 대해 제대로 설명한 역사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기원전 5세기 펠로폰네소스Peloponnesian 전쟁에 대한 대단한 기록을 남긴 투키디데스Thucydides도 스파르타가 데켈리아Decelea에 요새를 만들어서 아테네의 자금줄을 끊었다는 설명을 하면서 아테네의 라우리움Laurium 은광산에 대해서는 한 번만 언급했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의 시라쿠사Syracuse원정실패로 전세가 반전되었다고 주장했고 천 년 동안 대부분의 학자는 그의 의견을 그대로 전했다.
델로스동맹(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동맹(스파르타)가 기원전 431~404년에 벌인 그리스 내전입니다. 이 내전에서 스파르타가 승리했지만 다시 테바이에게 패배했고 그 이후에 마케도니아가 그리스의 주요 도시국가를 합병하면서 그리스 최고의 전성기를 열었습니다.
정작 아테네는 의외로 단기간 내에 원정실패의 충격에서 벗어났고 이후 10년 동안 계속 참전했다. 아테네는 경제봉쇄를 당해 패배했다. 아테네가 주도하는 도시국가 연합인 델로스동맹Delian League과 단절되었고 페르시아의 후원으로 흑해에서 식량을 반입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라우리움 은광산의 군자금을 이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필리포스Philip 2세의 그리스 통합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가 있지만 마케도니아Macedonia의 은광에 대해 설명한 역사가는 거의 없다. 필리포스는 그리스를 통합한 후에 주화생산을 시작했고 그리스 경제규모보다 훨씬 많은 양의 은화를 모았다.
알렉산드로스Alexander는 막대한 유산을 바탕으로 마케도니아군의 충성을 샀다. 일반 병사에게 당시 숙련기술공의 급여보다 2~6배를 지급했고 세계최강의 정규군을 모아 훈련할 수 있었다.
밀집대형의 보병으로 인도까지 제국의 영역을 넓혔습니다.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몽골은 폐허만 남긴 후에 그 지역의 문화 속으로 사라졌지만, 카르타고의 원정은 동서양 문화를 융합시키며 헬레니즘을 만들어냈습니다.
페르시아원정에서는 군대유지비용이 하루에만 20탈렌트Talent(은 454kg)가 들었고 광산생산력을 2배로 늘려도 감당할 수 없었다. 다행히 페르시아 도시를 점령할 때마다 막대한 양의 금덩어리가 쏟아져 나왔다. 만약 페르시아왕 다리우스Darius 3세가 황금을 쌓아 놓지만 말고 군자금으로 썼다면 우리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대해 알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알렉산드로스가 병사하자, 장군들은 다시 그의 유산을 사용해서 전쟁을 치렀는데 그 당시로는 보기 드물 정도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
우리는 기원전 3세기에 벌어진 2차 포에니Punic전쟁에서 보여준 카르타고 지휘관 한니발Hannibal의 전설적인 용병술에 감탄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가 조국 카르타고에서 군자금 지원을 받지 않고도 거의 20년 동안 이탈리아를 누빌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는다.
한니발은 스페인에 은광산을 다수 가지고 있었고 천적 스키피오Scipio는 한니발이 본토를 유린하고 있는데도 스페인을 공격해서 자금줄을 한니발의 군자금을 봉쇄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로마의 자금줄로 사용했다.
로마는 1차 포에니전쟁에서 안정적인 군자금확보의 중요성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로마는 카르타고에게 두 번이나 해전에서 참패해 함대를 잃었지만 지도층부터 금은을 내놓아 세 번째 함대를 만들어 카르타고를 지중해에서 몰아냈다.
물론 기꺼이 재산을 내놓은 시민에게는 승전 후에 원금을 그대로 되돌려주겠다는 약속이 있었고 국가가 채무로 전쟁을 치른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카르타고가 로마와 전쟁을 치르기 전에 소유했던 영토입니다. 부실한 지도력때문에 바다뿐만 아니라 북아프리카의 상당부분을 상실했습니다.
카이사르Caesar는 2세기 후에, 폼페이우스Pompey와의 내전을 벌이며 스키피오처럼 스페인의 자금원을 끊었다. 그는 로마국고에서 압수한 금괴 15,000개와 은괴 30,000개를 이미 소진했기 때문에 무척 난감한 상태였다. 카이사르는 매년 군단하나에 150만 은화 데나리Denarii가 들었고 언제라도 병력이 흩어져 버릴 수 있기 때문에 폼페이가 스페인에서 생산해내는 금과 은괴가 필요했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로마제국 동부에 있었는데도 스페인에 가서 폼페이우스의 7개 군단과 전투를 벌였다. 그는 “지휘관이 없는 군대를 정리한 후에 군대가 없는 지휘관을 상대할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카이사르는 스페인을 공격해서 폼페이우스의 자금원을 끊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폼페이우스는 다시 군대를 일으켰지만 소아시아 신전의 재산을 몰수했기 때문에 오히려 배후의 지지기반을 잃어버렸다.
그 후 수백 년 동안 로마의 군사력은 군자금에 따라 오르내렸다. 병사를 의미하는 솔저Soldier도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황제가 만든 금화 솔리두스Solidus에서 유래되었다. 논쟁의 여지가 많기는 하지만, 서로마제국의 재무가 파산상태로 몰렸고 군단을 유지할 수 없게 되면서 몰락했다는 설명도 상당한 힘을 얻고 있다.
서유럽이 암흑기Dark Ages에서 벗어날 때에 새로운 야만족의 재앙이 시작되었다. 바로 바이킹이었다. 알프레드대왕Alfred the Great가 영국최초의 정규군을 양성하고 거점마을Burgh를 요새화하고 소함대까지 만들어서 웨섹스Wessex를 야만족에게서 지켜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그렇지만 알프레드의 위업이 가능했던 배경에 대해 설명한 역사가는 많지 않다. 8개의 은광을 요새화된 지역거점으로 보호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로마제국의 붕괴 후에 영국은 여러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지칠줄 모르고 밀려드는 바이킹의 침략을 견뎌낼 수 없었다.
영국 역사상 대왕의 칭호가 붙은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는데 알프레드가 그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웨섹스를 노르만족의 침공에서 지켜냈고 많은 개혁을 이뤄냈습니다.
노르만족의 침공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버러Burh 또는 부르크Burg라는 요새도시를 만들었습니다.
알프레드가 899년에 세상을 떠나자, 영국은 데인겔드Danegeld라는 연공을 지불했다. 막대한 연공을 지불하느라 영국의 국고는 비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영국이 암흑기를 벗어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연공을 지불할 세금을 체계적으로 징수하려고 중앙조직이 만들어졌고 영국이 하나로 통합되며 군사조직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정복왕 윌리암William the Conqueror은 중앙행정부에 봉건체제를 도입했지만 이후 노르만Norman왕조는 중앙행정부의 훌륭한 징수체제를 보호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이렇게 징수한 군자금덕분에 영국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스웨덴에 있는 룬스톤Runestone으로 1051년경 영국에서 두 번째로 받은 연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합니다.
영국은 끊임없이 참전했고 군자금의 압박을 받으면서 은화의 가치가 너무 떨어져서 파산직전까지 자주 몰렸었다. 헨리Henry 1세는 긴축재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장관에게 부정을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180개 주화공장 책임자를 1124년 크리스마스에 윈체스터성으로 불러들여 주화가치를 속였다며 90명에게 오른손을 내놓으라고 명령했다.
영국의 재무체계는 다른 어떤 국가보다도 효율적으로 돌아갔고 국왕은 국민 한 명당 4.6g의 은을 징수해서 훨씬 강력한 프랑스를 오랜 기간동안 상대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한 명 당 겨우 2.4g만 징수할 수 있었는데, 징수 효율성에 대해서는 로마를 상대할 중세국가가 없었다. 로마는 최절정기에 한 명 당 무려 21g을 징수했다.
중세 유럽국왕은 경제력을 키우는 것은 고사하고 필수적인 행정력조차도 등한시했다. 워낙 재무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참전하더라도 고대시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작은 규모로 참전했고 정규군을 유지할 군자금이 없었기 때문에 봉건체제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지역 영주의 눈치를 봐야했다.
서유럽 최대의 원정인 십자군원정을 보면 군자금이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 지를 잘 알 수 있다. 1095년, 교황 우르바노Urban 2세가 주도한 1차 십자군원정은 서유럽의 금고를 바닥나게 만들었다.
비잔틴제국의 막대한 군자금지원과 원정로에서 기독교와 아랍도시를 약탈한 덕분에 결국에는 원정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예루살렘왕국은 재정적자에 시달렸고 서유럽에게 끊임없이 손을 벌렸다.
살라딘이 십자군을 상대로 1187년에 최대의 승리를 거둔 하틴곶Horns of Hattin전투에서도 군자금이 결정적인 요소였다. 영국의 헨리 2세는 교황 그레고리오Gregory 8세의 압력을 못 이기고 은 1톤가량을 중동으로 보내 십자군을 지원했는데 성전Templar과 성요한Hospitaller 기사단의 거점에 분산시켜 보관했다.
헨리는 자신의 비자금이라며 어떤 누구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고 결전을 앞둔 예루살렘왕국은 동맹과 용병을 동원하지 못했다. 하틴에서 십자군이 전멸하고 예루살렘이 다시 함락당하자 헨리도 군자금을 풀었지만 너무 늦은 상태였다.
이제 이야기가 쌓이다보니 이미 설명한 사건이 자주 등장하는군요. 하틴전투도 자세하게 설명해두었습니다.
헨리의 은화를 보관하던 성전기사단은 십자군과 순례자에게 다른 금융서비스를 제공했다. 순례자는 성지로 향하는 위험한 여행길에 돈을 가지고 다니지 않고 유럽의 성전기사단 기지에 입금시키고 증서를 받은 후에 성지의 기지에서 약간의 수수료를 제외한 나머지 금액으로 교환했다.
많은 역사가는 성전기사단의 금융서비스를 현대식 은행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쨌든 성전기사단의 금융장치는 이탈리아에서 상업은행 형태로 발전했고 서유럽 전체로 퍼져나갔다.
상업은행의 발전과 함께 경제활동은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전쟁규모도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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