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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타

전쟁비용, 아마추어는 전술을 말하고 전문가는 보급을 말한다 (2부)

by uesgi2003 2015. 8. 27.


기본 예절도 못 갖춘 방문자가 가끔 뜬금포를 마구 작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평소 자신이 알던 진리(?)와 달라서 당황스러운 것은 충분히 이해하는데, 그리고 다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는데, 충격이 심했던지 일체의 반박자료도 없이 마구 뜬금포를 날립니다. 

사실 국내에는 상업성이 있는 극히 일부 자료만 번역되어 출간되는데 그렇게 처음 접한 사실을 마치 종교처럼 믿고있는 사람이 많죠.


역사이야기를 정리하면서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가 인용하는 자료는 외국학자의 출판자료로 학자마다 시각이 다르기 때문에 반박을 할 때에는 근거자료와 함께 반박해달라고요. 그래야 저도 배울 수 있고, 그 자료를 확인해야 의견을 교환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눈과 귀를 열어두면, (실생활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되더라도) 잡상식이라도 얻을 수 있습니다. 난독증, 몰이해와 무례는 배움을 방해하는 3대 장애물입니다. 



전쟁비용, 아마추어는 전술을 말하고 전문가는 보급을 말한다 (2부)


원시적인 금융기관이 유럽전체에 생겨나면서 중세 국왕은 영지 내에서 자금을 모으거나 과도한 징수를 하지 않고 전쟁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승리가 확실해 보이면 이탈리아 은행가에게서 평소에는 엄두도 내지 못했을 금액을 빌렸다.

그렇지만 은행가가 군사목표가 되는 부작용도 있었다. 예를 들어 1291, 프랑스 필리프Philip 4세는 리카르디Riccardi 가문의 자산을 몰수하고 영국 에드워드Edward 1세에게 자금을 대지 못하게 했다. 에드워드는 리카르디의 영국 내 자산을 몰수하고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와의 군자금으로 사용했다.



에드워드 1세의 십자군 원정로입니다. 8차 십자군원정으로 사실상 마지막 원정이었고 그 다음은 역사상 가장 황당한 원정 중 하나였던 어린이십자군이었죠. 지도에 몽골이 나오는데 5차 십자군원정부터 전설 속의 기독교군대가 도우러 온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몽골이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십자군의 침략에 고생하던 이슬람권은 몽골의 약탈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에드워드 3세는 백년전쟁(1337~1453) 초반의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고리대금까지 빌렸다. 그는 플랑드르Flemish 상인에게 왕관보석을 맡기고 돈을 빌릴 정도로 궁핍했는데 나중에 되찾을 때에는 500%의 이자를 지불해야 했다.

그는 프랑스를 상대로 완승을 거뒀지만 부채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결국 지불불이행을 선언했고 자금을 댔던 이탈리아의 바르디Bardi와 페루치Peruzzi가 몰락하면서 유럽전체가 25년 이상 금융위기에 시달리기도 했다.

크고 작은 지불불이행이 벌어지면서 더 이상 돈을 빌릴 수 없었고 결국 에드워드 3세는 전사에 길이 남을 승리에도 불구하고 백년전쟁에서 패하게 되었다.



크레시Crecy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시체를 세는 에드워드 3세입니다. 아들 흑태자와 함께 전사에 남는 크레시와 푸아티에전투에서 대승을 거뒀습니다. 

 

중세 말이 가까워지면서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와 신세계New World의 막대한 은이 발견되었고 전쟁은 한층 더 격화되고 규모도 커졌다. 향후 몇 백 년 동안, 금은괴가 유럽에 계속 유입되면서 중세시대에 비해 재무상태가 좋아졌지만 국력이 강해진 만큼 전쟁도 끊이지 않았고 신무기가 도입되어 군자금도 그만큼 더 필요하게 되었다.

 

국왕은 더 늘어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상인영주Merchant Princes(상인출신으로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며 귀족작위를 얻어낸 신생권력층)’에게 눈을 돌렸다. 전사가들은 일체의 관심을 갖지 않지만, 그 중에는 푸거Fugger가문도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광산과 금융서비스를 장악한 독일의 푸거가문은 먼저 카를Charles 5세의 황제즉위를 도왔고 그 이후에도 전쟁자금을 계속 지원했다. 푸거는 스페인의 펠리페Philip 2세 등에게도 대출을 해주었는데 전쟁은 위험한 사업이었고 왕족의 파산선언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스페인은 신세계에서 막대한 금은을 들여왔지만 영국의 해적질에 큰 피해를 보고 있었고 유럽전체의 가톨릭 세력을 후원하느라 결국에는 파산선언을 했고 푸거가문도 스페인과 함께 몰락하고 말았다.



푸거가문에서도 가장 부자였던 야코프 푸거Jacob Fugger입니다. 일반 경제인으로 이 사람의 부를 능가한 사람은 아직도 없다고 하죠. 

 

스페인은 최절정기였을 때에도 군자금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대부분의 역사가는 프란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1587년 카디스Cadiz 기습 때문에 스페인 무적함대의 영국침공이 1년이나 지연되었다고 설명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드레이크의 기습이 결정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펠리페 2세는 피해를 복구할 자금을 구하지 못했다. 푸거의 자리를 대신한 제노바 은행가는 영국이 동원한 무장상선의 봉쇄에 큰 압박을 받고 있었다.

영국은 제노바 금융가에게 펠리페 2세를 지원하지 말라고 비밀리에 압력을 행사했고 무적함대의 출항이 1년 지연되는 동안 영국은 귀중한 시간을 벌어 함대를 끌어모았다.



감히(?) 스페인 무적함대의 본진을 기습해서 세계역사를 바꾼 프란시스 드레이크입니다. 스페인에 우호적인 저는 무척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그의 결정적인 기습이 아니었다면 영국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을 겁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무적함대의 영국원정에서 자세하게 설명해두었습니다. 


여기에서는 간단하게만 설명하면 예정대로 원정이 시작되었으면 알바로 데 바산Alvaro de Bazan이 지휘했을 것이고 전쟁의 양상은 완전히 달라졌을 겁니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스페인은 유럽전체를 상대하고 있었고 무적함대가 출항할 당시에도 네덜란드 개신교를 상대로 80년 동안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네덜란드와의 종교전쟁에서도 군사력만큼이나 신용과 경제력이 큰 힘을 발휘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보다 훨씬 많은 부채를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독립을 쟁취했다. 부채에 견디기 힘든 국왕은 고통을 감내하며 부채를 갚기 보다는 은행가를 위협해서 부채를 탕감받으려고 했고 네덜란드 금융가도 수십 년의 경험으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스페인 최절정기 당시의 네덜란드 상황입니다. 남부는 거의 모두 스페인 식민지였다가 프랑스로 다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제국으로 합병됩니다.  

 

다행히도 네덜란드는 공화국으로 출범했고 세대가 바뀌어도 조직과 제도는 그대로였다. 네덜란드는 독특하게 상인과 은행가가 행정관료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정부가 부채를 상환할 수 있게 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리고 특정 국왕에게 큰 자금을 빌려주는 것은 큰 모험이었지만 행정조직이나 국가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투자처였다. 영국의 의회가 대표적인 기관이었다.

 

네덜란드가 자본을 군자금으로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현대식으로 발전시킨 것은 아무래도 영국이었다. 17세기, 프랑스 루이Louis 14세에게 맞서느라 막대한 비용이 들었고 네덜란드식 조달방식으로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영국은행을 설립했다.

영국은행은 출범 때부터 분명하게 밝혔듯이 영구적인 대출로 영국의 군자금을 지원했다. 영국은행이 가동되면서 영국정부는 더 이상 세금을 올리지 않아도 되었고 파산걱정에서 벗어났다.

대신에 가끔 펀드를 조성해서 이자부분만 지불하면 그만이었다.

 

첫 번째 수입세를 포함한 여러 가지 금융혁신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영국은 프랑스와 오랜 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승패보다 재무상태가 더 중요했다. 1800년대 초반, 영국은 우수한 재무와 과세체계덕분에 나폴레옹을 상대로 동맹국의 군자금까지 지원해줄 수 있었다.

금융혁신이 산업혁명과 결합되면서 꿈속에서나 가능했던 국민총동원Levee en masse가 실현되었다. 영국산업은 이제 유례가 없는 군수물자를 쏟아내었고 정부는 영국은행의 채권이나 정리채권Consols(채권을 연금형태로 변환)으로 지불했다.

 

영국정부는 200년이 지난 후에도 나폴레옹전쟁에서 발행했던 채권의 이자만 지불했다. 영국은 미래의 전쟁에 대비해 현금이나 금을 쌓아놓기 보다는 유동성(현금흐름)을 높여 경제규모를 키우는 것이 훨씬 낫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상대출 프로그램을 잘 만들어두고, 평화 시에는 수입을 경제활성화에 다시 투자했고 이렇게 키운 경제규모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에 튼튼한 전쟁자금 역할을 했다.

 

독일은 프랑스가 프랑스-프로이센전쟁에서 배상한 금액 중 상당부분을 베를린 슈판다우Spandau에 그대로 쌓아두었다. 미래의 전쟁에 대비해 7,000만 달러의 금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고 1914, 이 말을 들은 영국수상 데이빗 로이드David Lloyd굉장한 금액이지만 영국이 독일보다 100만 달러를 더 동원할 수 있소라고 대답했다.

영국이 장기전에 버틸 수 있는 능력을 자랑하는 일화인 동시에 영국정부도 전쟁의 결정적인 요소는 바로 자금동원력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일화였다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기 전까지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입니다. 


그런 영국조차도 1914년에 벌어진 세계대전의 규모에 대해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유럽이 근심스럽게 바라보던 슈펜다우의 금도 독일의 일주일치 전쟁비용밖에 안되었다.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 후 150년 동안 재무와 금융체계가 크게 발전했다고 해도 전쟁의 규모는 그 이상으로 진화했고 괴물처럼 성장했다.

미국이 무한한 금융자원을 가지고 적시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연합군의 경제와 금융체제는 완전히 무너졌을 것이다.

 

연합군의 재무체계가 세계대전에 맞춰 다시 한 번 진화하면서 산업도 그에 맞춰 빠르게 진화했다. 초기에는 덜컥거렸던 산업도 완전 가동되었고 미국까지 참전하면서 전쟁물자는 부족하지 않았다.

1차대전 당시 영국내각의 회의록을 보면 더 많은 전쟁비용을 조달하는 문제는 자주 언급되었지만 군수품생산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었다. 자금만 조달할 수 있는 한 군수품을 구입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2차대전부터는 상황이 반전되었다. 역사상 최초로, 전쟁비용보다 생산능력이 더 발목을 잡았다. 미국 전쟁장관 헨리 스팀슨Henry Stimson은 추축군 패전 후에 모든 사람이 충분한 자금이 있어야 한다고 동의했기 때문에 자금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의회는 언제가 즉각적으로 그리고 너그럽게 자금지출을 승인했다. 정작 자금을 무기로 만드는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경제사가와 전사가 모두가 간과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2,500년 전의 마라톤Marathon전투 이후 주요 전쟁의 승패를 갈랐던 경제력은 2차대전부터 힘을 잃기 시작했다.

지난 2천 년 동안 국왕이 자금을 동원할 수만 있다면 시기와 장소를 골라 전쟁을 벌일 수 있었다. 언제나 충분한 물자가 있었고 돈을 받고 기꺼이 목숨을 걸 남자가 많았다. 20세기 중반까지, 영국이 도입한 영국은행과 같은 금융혁신은 그 위력이 대단했다.

그렇지만 2차대전에서는 참전국의 자금동원력이 군수품 생산력을 훨씬 뛰어넘게 되었고 다른 국가의 군수품에 크게 의존할 때에만 자금압박을 받았다. 그나마도 연합군의 경우에는 미국이 영국과 소련에 제공한 렌드-리스Lend-Lease 프로그램으로 부담을 크게 덜었다.



2차대전사에서도 경제력이 무시되곤 합니다. 영국과 소련이 전쟁을 계속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미국의 천문학적인 후원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소련에 제공된 5,000대째 전투기입니다. 그런데 어째 소련측 인사의 표정이 안 좋군요. 전차의 경우에는 일선에서 무척 싫어했다고 합니다. 

 

영국정치가는 연합군이 기름바다 위에서 승리를 향해 항해했다라고 했었다. 실제로는 달러바다 위에서 승리를 향해 항해했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