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가 뒤섞인 바쿠전투(1918)
1918년 8월 26일 오전, 영국 북 스태포드셔North Staffordshire연대 D 중대의 소규모 파견부대는 무드 화산Mud Volcano라고 알려진 분화구를 따라 판 참호에 들어갔다. 카스피Caspian해 바쿠Baku유전을 방어한다는 계획이었고 오스만(터키)군도 러시아혁명의 혼란을 틈타 이곳을 노리고 있었다.
이번 이야기는 여러 나라와 민족이 서로 연합하며 뒤섞이기 때문에 이 지도를 잘 봐두어야 합니다. 바쿠는 아제르바이잔 동쪽 끝 반도에 위치해 있습니다. 터키는 아르메니아에게 참 몹쓸 만행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오전 10시 30분, 약 1,000명의 오스만 보병과 기병이 천천히 전진하다가 속도를 높였고 갑자기 포화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산등성이를 따라 배치된 영국군 기관총도 총탄을 쏟아냈다. 오스만군은 5번이나 달려들었다가 많은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결국 분화구 북쪽으로 우회하자 영국군은 바쿠 북서쪽의 시추기중기로 후퇴했다. 이제 유전도시를 둘러싼 마지막 전투가 벌어질 참이었다. 그렇지만 제정러시아 붕괴가 가져온 대혼란 때문에 누구도 마지막이라고 장담하지 못했다.
1차대전의 주무대는 유럽이었지만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오스만과 일본은 아프리카, 아시아와 태평양에서도 전쟁을 벌였다. 신생 독립국 아르메니아Armenia, 아제르바이잔Azerbaijan과 조지아(이전 그루지아Georgia)의 남캅카스Transcaucasia와 범카스피아Transcapia도 전쟁을 피하지 못했다.
사마르칸트Samarkand(우즈베키스탄의 수도), 카불Kabul(아프가니스탄의 수도), 부하라Bukhara(우즈베키스탄의 도시)와 같은 유서깊은 도시의 거리에는 많은 강대국의 첩보원이 동맹을 모색하거나 분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연합군은 러시아제국에 혁명이 일어나면서 재앙을 겪었다. 1917년 3월 15일, 차르 니콜라스Nicholas 2세가 폐위되었고 독일과의 전쟁을 다짐했던 임시정부도 곧바로 급진파 볼세비키Bolshevik당(소수파였다가 레닌의 귀국과 함께 정권을 획득)으로 교체되었다.
볼세비키당은 1918년 3월에 브레스트-리톱스크Brest-Litovsk조약을 맺고 독일과 휴전하면서 연합군이 걱정하던 최악의 위기가 닥쳤다. 러시아전선에서 병력을 돌린 독일은 이제 서부전선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벌일 수 있었다.
혁명의 여파가 밀려왔다. 러시아가 무정부상태가 되면서 독일은 우크라이나, 조지아, 아르메니아를 흔들어 전쟁에 필요한 천연자원을 수입했고 카스피해의 바쿠 유전에도 눈독을 들였다.
런던은 1차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인도 병력을 페르시아만에 대기시키고 유전과 아바단Abadan(이란)의 정유시설을 지켰다. 전쟁이 터지자 대기시켰던 병력을 상륙시켰고 악전고투 끝에 1917년 3월 11일, 바그다드Baghdad를 점령했다.
그렇지만 러시아가 연합군진영에서 빠져나가면서 이 모든 수고가 수포로 돌아갔고 흑해부터 인도까지의 방대한 국경선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중앙아시아 전역에서 암약하던 영국첩보원은 당황스러운 정보를 보내왔다. 아프가니스탄, 투르키스탄Turkestan, 오스만(터키)의 독일첩보원은 터키계 부족을 자극해서 남캅카스 국경일대를 무너트리려고 했다.
더구나 런던은 독일이 러시아 신정부와 좋은 관계를 맺었다고 오판해서 중앙아시아 일대의 소란 그리고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일대의 독일군 주둔을 러시아가 지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1918년 봄, 오스만의 전쟁상이자 총사령관 엔베르 파샤Enver Pasha(실질적 통치자)는 바쿠를 점령하고 터키계 부족을 오스만의 깃발 아래 통합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엔베르 파샤는 오스만 북동부에 주둔했던 러시아군이 혁명의 여파로 물러나 바쿠로 향하는 길이 열리기를 현명하게 기다렸다
그렇지만 동맹이었던 독일은 그의 계획을 지지하지 않았고 공격을 취소하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러시아에게 오스만을 막는 대신에 바쿠 유전을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제안했다.
영국은 오스만의 침공이 있기 몇 개월 전부터 러시아군이 남캅카스에서 물러날 것에 대비해 조지아에 군대를 보내 독일에 대한 공동전선을 펴기로 했다. 라이오넬 던스터빌Lionel Dusterville장군(사진의 오른쪽)의 원정군이 도착했을 때에는 남캅카스 대부분의 지역이 독일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이제 원정군은 목표를 바꿔 바쿠 일대의 혁명세력의 협조를 얻어 오스만군을 저지하고 범카스피아 서쪽의 작전을 지원하기로 했다.
유명한 문학가 키플링Kipling과 어릴 적 친구인 던스터빌은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했고 인도 북서국경의 제1 보병여단을 지휘했기 때문에 중앙아시아를 잘 알았다. 갑자기 델리Delhi로 호출된 그는 200명의 장교와 부사관을 데리고 바그다드에서 카스피해까지 달려갔다. 조지아 티플리스Tiflis에서 영국군 증원병력과 러시아군을 재정비해서 오스만군을 상대한다는 계획이었는데 현장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엔베르 파샤의 형제 누리Nuri 파샤가 이끄는 병력이 이란 북부의 타브리즈Tabriz에 들어가 캅카스-이슬람군을 조직해 아제르바이잔Azerbaijan을 통합하려고 했다. 무르살Mursal 파샤의 12,000명도 바쿠를 향해 진격 중이었다.
독일과 오스만군이 지역 철도를 장악하고 있었고 미르자 쿠치크 칸(사진 참조)이 이끄는 장갈리스Jangalis라는 페르시아 혁명군이 엔젤리Enzeli 도로를 위협하고 있었다.
바쿠에서는 혁명중앙위원회가 분열되어 한 쪽은 페트로그라드Petrograd의 러시아정부에 충성하고 다른 한 쪽은 오스만과의 통합을 원했다. 반면에 아르메니아국민은 영국에 우호적이었다.
반가운 소식도 있었다. 러시아군이 북쪽으로 물러날 때에 라자르 비체라콥Lazar Bicherakov대령은 수 백 명의 코사크병력(사진참조)과 함께 남기로 했고 나중에 던스터빌 병력에 합류했다.
던스터빌이 3주 만에 간신히 도착하자 러시아계 주민은 종전해야 한다며 영국에 대한 협조를 거부했고 페르시아계 주민까지 영국군에 반감을 표시하며 공공연하게 위협했다. 2,000명의 볼세비키 병력과 5,000명의 페르시아 무장세력을 진압할 수 없었던 던스터빌 병력은 밤에 몰래 빠져나와 엔젤리와 바그다드 중간의 하마단Hamadan으로 들어갔다.
여기에 임시 사령부와 임시 방어선을 편 던스터빌은 비체라콥의 코사크 병력을 반갑게 맞이했는데 정작 비체라콥은 영국군의 전력에 큰 실망을 표시했다. 봄이 오고 다시 여름이 되자 구르카Gurkha병사를 포함한 1,000명의 병력과 2대의 G.100 엘리펀트 폭격기도 도착하면서 분위기는 크게 반전되었다.
던스터빌은 이제 쿠치크 칸의 게릴라를 소탕하고 북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확보할 때가 되었다고 자신했다. 비체라콥도 오스만에 동조하는 지역 무장세력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던스터빌은 비체라콥을 달래며 쿠치크 칸과 대화를 시도했다가 실패하자 쿠치크의 거점인 멘질Menjil을 공격하기로 했다.
1차대전이라 폭격기라고 해도 전투기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비행기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지역 무장세력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을 겁니다.
6월 11일, 비체라콥은 코사크와 제14 경기병 일부를 데리고 먼저 출발해 12일 날이 밝자 멘질 다리를 두고 격전을 벌일 각오를 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쿠치크는 너무나도 중요한 전략요충지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고 비체라콥은 그 자리에 대포를 배치했다.
쿠치크를 돕던 독일 군사고문관은 이미 전투에 졌다고 판단하고 재빨리 휴전을 제의했지만 비체라콥은 공격을 시작했다. 게릴라 수준이었던 장갈리스병력은 공격이 시작되자 마자 곧바로 달아났다.
최고의 전략요충지를 손쉽게 얻은 비체라콥은 던스터군의 기동군의 지원을 받아 엔젤리 남쪽의 지방수도까지 들어가 20일에 쿠치크의 항복을 받아냈다. 던스빌은 그 동안 엔젤리와 하마단 중간지점까지 진출했다.
영국해군특수부대가 4인치 포 여러 문을 가지고 합류했지만 분위기는 다시 반전되었다. 비체라콥이 바쿠에서 오스만군에게 패해서 던스터빌이 빌려준 장갑차와 운전병까지 포로가 되었다.
그런데 승리를 거둔 오스만군이 갑자기 바쿠를 비우고 떠났다. 분명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아마도 바쿠를 노리는 독일군이 측면에 나타났다는 소문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헛소문이었다.
오스만군이 떠난 바쿠에서는 바쿠 소비에트Baku Soviet가 밀려나고 새 정권이 영국과의 협조를 원했는데 던스터빌은 런던에서 바쿠를 점령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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