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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대북방전쟁

러시아판 사도세자 표르트대제와 알렉세이황태자 (2부)

by uesgi2003 2015. 11. 24.


김영삼 전대통령께서 세상을 떠나셨군요. 그 분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저는 YH무역 투쟁, 신민당사 농성, 강제해산과 여공의 죽음, 김영삼의원 제명, 부마항쟁과 박정희군사정권의 몰락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 당시 고 김영삼 전대통령의 물불안가리는 저항이 있었기에 박정희유신정부도 무너트릴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판 사도세자 표르트대제와 알렉세이황태자 (2부)


1715 가을, 아들을 얻고 아내를 떠나 보낸 알렉세이는 이상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25살이었고 신체도 아버지보다 작을 뿐이었다. 사람은 완전히 달랐다. 알렉세이는 상당히 지적이며 재능을 가지고 자랐다. 신체활동보다는 조용한 생활을 좋아했고 바깥 세상으로 나가거나 실생활에 대한 교육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표트르의 성격이나 교육과 정반대였다. 아버지보다 구세대처럼 보였다.

차르는 정식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고 알렉세이가 신학서적을 탐독하던 나이에 병사를 훈련시키고 배를 만들고 폭죽을 쏘아 올렸었다. 할아버지 알렉세이, 아버지 표도르의 자식이었다면 그의 성격이 오히려 어울렸을 것이고 삶도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쨌든 표트르 대제의 자식으로 태어났고 그의 후계자로는 절대로 맞지 않는 성격이었다.

 

알렉세이는 아버지 앞에서 절대로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의 성격차이가 눈에 띄지 않았지만 사람 모두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어릴 때에는 아버지를 기쁘게 하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했지만 열등감이 앞섰다. 표트르가 그를 꾸짖을 때마다 그는 무능해졌고 아버지, 아버지의 친구, 아버지의 노선을 혐오하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가 소극적일 때마다 아버지는 화를 냈고 그는 더욱 아버지 앞에서 입을 다물었다. 해결책이 없어 보였다.

알렉세이는 폭음으로 공포와 나약함을 잊으려 했다. 감당할 없는 책임을 피하려고 와병을 핑계 댔다.

 

1713년에 독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자, 표트르는 지리학과 요새건축에 대해 질문해 아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아버지가 설계도를 그리라고 하면 그릴까 걱정했다. 알렉세이는 집에 들어가서 총으로 오른손을 쏴서 불구로 만들려고 했다. 심하게 손을 떨어서 총알은 빗나갔지만 오른손은 심한 화상을 입었다. 아버지에게는 사고였다고 변명했다.

이런 일이 계속 벌어졌다. 병사, 선박, 건축, 조선소, 운하 프로젝트나 개혁에 관심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대중 앞에 서지 않거나 임무를 피하려고 일부러 약을 먹고 병을 만들어냈다. 선박진수식에 참석하게 되자 거기에 가느니 갤리선 노예가 되거나 열병에 걸리고 싶소라고 말했다.

 

장모인 볼펜뷔텔 공주는 사위에게 군사관련 행사에 참석시켜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겠소. 아이는 권총보다는 묵주가 어울리지 않소라고 말했다.

알렉세이는 아버지에 대한 공포가 심해지면서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고해신부에게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고백하는 일도 있었다. (표트르의 개혁정책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이그나티엡은 신이 용서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을 원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러시아의 지도, 러시아의 정치상황, 표트르의 양면이 한 눈에 보이는 그림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사진이나 그림이 거의 없습니다. 

 

알렉세이는 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반정부세력의 구심점이 되었다. 표트르에게 반대하는 모든 사람이 알렉세이를 희망으로 여겼다. 성직자는 알렉세이가 차르에 즉위해 교회의 권리와 위치를 회복해주기를 기원했다. 대중은 그가 중노동, 의무와 과세를 낮춰줄 것으로 믿었다. 구세력은 그가 즉위하면 이전의 권력을 되찾아주고 신흥세력을 제거해 주리라 기대했다. 표트르가 믿었던 귀족조차도 왕자에게 심정적인 지지를 보냈다. 골리친, 돌고루키, 보리스 쿠라킨과 보르시 세레메텝 가문이 그랬다.

야곱 돌고루키는 알렉세이에게 이상 말하지 마십시오.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라고 경고했다. 바실리 돌고루키는 아버지보다 현명하십니다. 아버지도 현명하지만 사람에 대해 모릅니다. 왕자님은 사람에 대해 아실 겁니다라고 말했다.

표트르의 개혁에 대해 반감이 형성되고 알렉세이의 주변에 구세력이 몰려드는데도 불구하고 실제 반역음모는 없었다. 알렉세이의 세력은 그저 그의 즉위까지 기다릴 뿐이었다. 표트르의 건강상태를 보면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같았다.



표트르는 동토의 제국 러시아를 극단적인 방식으로 개혁시켰고 구세력의 반발은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복장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긴 수염도 처음에는 과세로 막다가 아예 잘라버렸습니다.

  

표트르는 아들을 보며 복잡한 심정이었다. 오래 어릴 때에는 그가 전처 예브도키아의 아이였고 갓난 아기에 불과했기 때문에 무시했었다. 점차 자라면서 결점이 눈에 띄자 온정과 이해보다는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교정하려고 했다. 유학을 보내고 독일공주와 결혼시켜 아들을 바꾸려고도 해봤다. 아들이 1713년에 상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자 유학의 결과를 기대했었다. 그렇지만 공부한 내용을 보여달라고 요청하자 아들은 자해로 대답했다.

표트르는 아들의 개인생활을 어느 정도는 보장해주었다. 그의 폭음이나 자신을 흉내 방탕한 놀이에 대해 말리지 않았고 핀란드 정부(예프로시냐) 대해서도 자신의 삶과 비슷하기 때문에 뭐라고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왕자가 해야 당연한 역할과 임무를 계속 거부하는 것만큼은 참을 없었다. 표트르는 자신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의 잘못은 용서했지만 거부하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았다. 25살이나 먹은 아들이 막판에 몰려서야 자신의 임무를 다하고 아버지의 개혁을 따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715~1716 겨울, 표트르는 일을 바로 잡기로 했다. 군사와 조선에 일체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 아들을 완전히 바꿔야 했다.

아들의 인성을 밑바닥부터 뜯어고치기로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시기는 오래 전에 지났고 아들은 아버지만큼이나 성격이 굳어져 있었다.

 

왕자는 아내의 장례식 날에 아버지가 16 전에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바라는 바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바램이 좌절로 변해가는 감정도 적혀있었다.

 

특히 아들이 뒤를 이어 제대로 통치할 있는지에 대한 우려로 마음이 몹시 무거워진다. 너는 마치 신께서 건강한 육체를 주지 않으신 것처럼 무능력을 자초하고 있다. 신체가 강건하지 않다고 해도 약하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어둠에서 벗어날 있었던, 지금의 영광을 가져온 군사훈련은 아예 신경 쓰지도 않는구나.

합당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는 전쟁을 강요하지 않는다. 군사학을 배웠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군사학을 배워야 통치를 있고 국가를 지킬 있다.

왕자는 그럴듯한 장군에게 명령만 내리면 충분하다고 착각하고 있더구나. 모든 사람은 지도자를 따르는 법이다. 지도자의 성향을 보고 그대로 따르는 법이다. 모든 세상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항상 전장에 있지는 않았다고 해도 전쟁을 즐겼고 전쟁에서 위대한 성과를 일궈내서 그의 원정은 세계의 무대라고 불릴 정도였다. 그는 군사학에만 몰두하지 않고 기계와 제조기술에도 심취해서 프랑스 왕국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번성했다.

충분한 예를 들었다고 생각하니 이제 왕자에 대한 이전 내용으로 돌아가도록 하자.

나는 필멸존재이기에 죽을 것이다.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을 누구에게 맡겨야 하겠는가? 역겨운 하인처럼 재능을 숨기는 자에게? 신이 위임한 재능을 일부러 외면하는 자에게?

고집불통과 나쁜 성격을 되돌아보거라. 내가 얼마나 많이 꾸짖고 심지어 동안 말도 하지 않았지 않느냐? 그렇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시간낭비였고 헛수고였다.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았고 그저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이 전부였다.

 

모든 말이 되는 행위와 여파를 고려하고 개선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편지로 분명하게 뜻을 알리기로 했다. 그렇지만 네가 고칠 있는 지켜보기로 했다. 고치지 못한다면 무용한 자를 해고하듯이 후계자 자리를 박탈할 것이다.

네가 유일한 자식이기 때문에 말로만 위협하는 것이라고 오해하지 않도록 해라. 신의 뜻이라면 분명히 실행에 옮길 것이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았는데 아무런 가치가 없는 너를 그대로 누겠는가? 무능한 아들을 두고 보느니 유능한 다른 사람에게 후계자 자리를 넘길 것이다.”

 

알렉세이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표트르의 소환에 겁을 먹고는 측근에게 달려가서 조언을 구했다. 구세력으로 표트르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알렉세이를 동정하며 편을 들었다.

모든 것을 포기하면 있을 겁니다. 왕자님의 의지로는 견뎌낼 없을 겁니다. 독일에서 돌아온 것이 안타깝습니다.”라는 대답을 얻었다.

알렉세이는 아버지의 선언을 받고 3 후에 답장을 썼다.

 

무능을 이유로 후계자 자격을 박탈하신다면 폐하의 뜻대로 하시라는 대답만 드립니다. 자신이 통치에도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폐하께 간절히 요청 드리는 바입니다. 기억력이 희미해졌고 최근의 병환 때문에 정신력이 많이 약해졌고 체력도 악화되어 많은 일을 관여할 없게 되었습니다. 저보다 정력적인 사람이 필요합니다.

자식을 폐하의 손에 맡기며 자신은 폐하의 처분에 맡기며 여생 동안 최소한의 생활비 외에는 바라지 않습니다.”

 

표트르는 측근의 중재에도 절대로 만족하지 않았다. 왕자에게 보낸 경고는 오히려 반작용을 낳았고 알렉세이의 포기선언은 너무 갑작스럽고 과한 반응이었다. 표트르는 1개월 동안 의문을 심사숙고하면서 어떤 결론도 내리지 않았는데 운명이 문제를 해결했다.

표트르는 술모임에 참석한 후에 격심한 발작을 일으켰고 심각한 상태로 빠져들었다. 2 밤낮 동안, 대신과 의원이 침실 밖에서 대기했고 12 2일에는 마지막 미사를 준비할 정도였다가 기력을 되찾고 천천히 회복하기 시작했다.

 

알렉세이의 측근은 아버지가 아픈척하거나 아프더라도 죽음직전으로 과장해서 구세력의 반응을 점검하려는 속임수일 있으니 조심하라는 주의를 주었다. 알렉세이는 침묵을 지키며 번만 아버지의 병석을 찾았다.

표트르는 회복하면서 다음 행동을 고민했다. 알렉세이는 절대로 후계자격을 주장하지 않겠다고 신에게 맹세했지만 표트르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면 성직자들이 아들 주위에 몰려들 것을 염려했다. 그리고 표트르는 아들이 당당한 후계자로 역할을 해주기를 여전히 바라고 있었다. 알렉세이가 후계자역할로 복귀하거나 영원히 수도원으로 은퇴해야 했다.

1716 1 19, 알렉세이에게 수도승으로 만들겠다는 엄중한 경고편지를 보냈다.

 

건강이 날로 악화되고 있어서 이야기를 이상 들어줄 없다. 편지를 받는 즉시 편지나 구전으로 답신하도록 해라. 그렇지 않고 시간을 지체한다면 범죄자 취급을 것이다.”

 

아버지의 최후통첩은 알렉세이에게 날벼락과도 같았다. 아버지가 바라는 아들이 되지 않으면 수도승이 되라니! 알렉세이는 지난 25 동안 안간힘을 썼지만 아버지의 아들이 되지 못했다. 정부 예프로시나는 물론이고 바깥 세상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

알렉세이는 이번에도 잘못된 조언을 받아들여 지금 심정으로는 장문의 편지를 없겠습니다. 수도승이 되려니 아버님의 너그러운 승낙을 바랍니다.”라고 답변했다.

 

표트르는 예상하지 못한 아들의 대답에 다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서유럽 순방으로 오랜 기간 러시아를 떠날 참이었고 이렇게 얽힌 난관을 해결하기에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그가 떠나기 2 전에 알렉세이의 집을 방문했는데 아들은 침대에 숨어 떨고 있었다.

표트르는 자신의 최후통첩이 너무 가혹했다고 생각하고 아들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그는 부드럽게 젊은이는 수도승이 되기가 쉽지 않다. 서두르지 말고 생각해보거라. 내게 결정한 바를 편지로 알려라. 승려가 되기 보다는 앞에 열린 길을 따르도록 해라. 어쨌든 6개월의 말미를 주마라고 말했다.

표트르가 떠나자 알렉세이는 크게 기뻐하며 잠옷을 벗고 일어나 축하연을 열었다.

 

6개월이라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알렉세이가 1716 봄부터 여름까지 보낸 시간은 더욱 그랬다. 가을이 되면서 표트르의 6개월 말미는 이미 지나가버렸고 알렉세이는 여전히 대답을 미루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기는 했어도 안부를 묻고 일상생활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결국 10 , 염려하던 아버지의 편지가 왔다. 코펜하겐에서 편지는 연합군의 스웨덴 침공준비가 절정이던 시기로 최후통첩을 담고 있었다.

전령은 알렉세이의 답신을 받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바라는 후계자가 되겠다면 원정에 합류할 날을 정하고 수도승이 경우에는 실행일을 알려라. 어떤 쪽이던 결정을 반드시 것을 거듭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네가 이전의 게으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간만 벌려고 하는 것으로 알겠다.”

 

아버지의 최후통첩을 받은 알렉세이는 결국 마음을 굳혔다. 그는 가지 결정사항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고 아버지의 말과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달아나기로 했다

상페테르부르크의 멘시콥(표트르의 측근)에게 가서 코펜하겐에 있는 아버지에게로 간다면서 여비 1,000두카트(유럽금화) 요구했다. 그는 의회도 찾아가서 자신에게 계속 충성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여비로 2,000루블을 받았다. 리가에서는 5,000금루블과 2,000루블을 빌렸다. 멘시콥이 예프로시냐를 어떻게 것인지에 대해 묻자 알렉세이는 리가까지 함께 갔다가 상페테르부르크로 돌려보내겠다고 대답했다.

 

알렉세이는 리바우 외곽에서 숙모 마리아 알렉세에브나의 마차를 마주쳤다. 그녀는 알렉세이와 구세력에게 공감하고 있었지만 이복동생에게 공공연하게 반대하지 못했다. 알렉세이는 눈물을 터트리며 숙모에게 달아나는 중이라고 고백했다. 경악한 숙모는 어디로 있겠어요? 어디로 가던 아버지가 찾아낼 겁니다라며 참고 견디면 신께서 문제를 해결해주실 거라고 했다가 측근 키킨의 조언을 구하라고 했고 키킨은 합스부르크 황제가 사촌이니까 빈으로 가라고 권했다

알렉세이는 마차를 타고 단치히까지 갔다. 그곳에서 러시아 장교복을 입고 이름도 코칸스키Kokhansky 바꿨고 예프로시냐를 소년시종으로 변장시킨 후에 3명의 하인을 데리고 브레슬라우와 프라하를 거쳐 빈으로 향했다. 키킨은 그가 떠나기 전에 기억하세요. 아버지가 누군가를 보내 돌아오라고 해도 절대로 그러지 마세요. 공개 처형당할 겁니다라며 간곡한 조언을 주었다.



알렉세이는 우유부단한 행동을 계속 벌이다가 결국에는사랑에게 배신당하며 초라한 죽음을 맞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