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블로그 사이트 빅스토리에 연재하기 위해 다시 손보고 있는 중입니다. 17세기 후반, 스웨덴과 러시아의 운명을 결정지은 카를과 표트르대제의 맞대결 이야기가 많이 정리되어 있는데, 순서가 좀 뒤바뀌어서 중복되는 내용도 있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특히 전사에서는 하늘이 재미있는 심술을 부립니다. 어떤 천재에게 시간(시대), 땅(주변 상황)과 사람(피아) 모두를 주다가도 어떤 천재에게는 일부러 비슷한 천재를 맞붙여 놓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기생유 하생량 旣生瑜 何生亮 을 한탄하며 죽어간 주유처럼 천재끼리 등을 맞대고 있는 경우에는 두 천재 모두 이름만 남길 뿐, 대업은 달성하지 못하죠.
오늘의 주인공인 스웨덴의 소년 왕 카를Charles 12세도 그렇습니다. 선대에게서 물려받은 경제력과 강력한 군사력으로 감히 주제를 모르고 싸움을 걸어온 러시아와 주변국가를 물리칩니다. 위협의 근원이라고 판단한 러시아 원정에 올라 연전연승으로 몽골 이후에 지금까지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던 눈 앞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기생유 하생량이라고 했죠? 카를 12세가 20년만 더 빨리 왕에 올랐다면 또는 러시아 최고의 위인 표트르 대제가 없었다면 북유럽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의 역사와 지도는 달라졌을 것이고 세계역사도 완전히 달라졌을 겁니다. 그가 러시아 정벌에 나섰을 때에는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 내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개혁하던 중이었고, 표트르도 카를만큼이나 불굴의 의지파라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먼저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은 화두를 던지면서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아래 그림을 보면 스웨덴이 16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인 확장에 나서서 덴마크, 신성로마제국, 리보니아(튜튼 기사단->폴란드), 러시아 영토를 강제로 합병한 내용이 잘 나와 있습니다.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었네!' 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당시 전세계 최강대국이었던 스페인의 공격을 막아내며 이 정도로 확장한 것입니다.
카를 12세가 15살에 왕위에 오르자, 그 동안 스웨덴에 눌려 살았던 덴마크 (프리드리히 4세), 폴란드 (정력왕! 아우구스트), 러시아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가 3국 동맹을 맺고 공격을 합니다.
덴-폴-러 3개국은 스웨덴과 아래와 같이 전쟁에 전쟁을 이어가던 악연이었는데, 원수집안의 대를 어린 아이가 이었다고 하니 치사하게 세 집안의 어른이 달려든 것입니다(링크를 클릭하면 영문자료로 이동합니다. 많은 시간이 지나면 모두 제 이야기로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덴마크-스웨덴 전쟁:
- Dano-Swedish War (1470–1471)
- Swedish War of Secession (1521–23)
- Northern Seven Years' War (1563–70)
- Kalmar War (1611–13)
- Torstenson War (1643–45)
- Scanian War (1675–79)
- Great Northern War (1700–21)
- Theater War (1788–89), Russo-Swedish War 1788–90의 일부
- 나폴레옹전쟁의 일부:
- Dano–Swedish War of 1808–1809
- Dano-Swedish War (1813-1814), Sixth Coalition War의 일부
폴란드–스웨덴전쟁:
- Livonian War (1558–1583)
- War against Sigismund, in 1598
- The Deluge (Northern Wars 1655–1661)
- Great Northern War (1700–1721).
- War of the Fourth Coalition (1806–1807)
- War of the Sixth Coalition,
러시아-스웨덴전쟁:
- Swedish–Novgorodian Wars,
- Russo-Swedish War (1495–97),
- Russo-Swedish War (1554–57),
- Livonian War (1558–82),
- Russo-Swedish War (1590–95),
- Ingrian War (1610-17),
- Russo-Swedish War (1656–58),
- Great Northern War (1700–21),
- Russo-Swedish War (1741–43),
- Russo-Swedish War (1788–90),
- Finnish War (1808–1809)
그 발단은 정력왕 아우구스트였습니다.
독립된 이야기에서 뒷담화를 했듯이, 선출왕이라는 명예만 가진 작센 영주 아우구스트는 폴란드 통일왕정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스웨덴이 중앙집권과 절대왕권을 강화시키면서 리보니아의 자치권을 크게 축소시키자, 리보니아 귀족들이 폴란드에 합병을 요청합니다. 어차피 나라는 잃었지만 스웨덴보다는 연립정부형태의 폴란드에서 자치권을 노리겠다는 계산이었죠.
그렇지 않아도 아우구스트는 무한한 정력뿐만 아니라 이름도 알리고 싶었고 리보니아는 한 때 폴란드 땅이었기 때문에 덴마크와 러시아에게 연합공격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폴란드 왕의 이름으로 전쟁에 나서지만 다른 귀족이 잘 되는 꼴을 못보는 경쟁 귀족의 지원없이 작센군만 이끌고 나서게 됩니다. 리보니아 귀족이 내응을 하기로 약속했었고 덴-러가 참전하기로 되어 있어서 크게 상관없었죠. 더구나 이제 겨우 왕관을 쓴 소년이 상대이니 말입니다.
카를 12세가 18살이던 1700년에 폴란드가 14,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리가 요새를 포위합니다. 그리고 몇 주 후에 지도 왼쪽의 덴마크(압도적인 해군력으로 스웨덴의 앞바다를 장악)가 16,000명을 이끌고 홀슈타인-고토르프를 침공합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카를은 나중에 알았습니다만) 러시아가 무려 40,000명과 대포 195문을 이끌고 나르바 요새를 포위합니다.
당시 스웨덴의 보병과 기병은 유럽 최고의 정예 중 하나였고 가용한 병력은 해군까지 총동원하면 77,000명이었지만 앞 바다는 이미 덴마크-노르웨이 해군에게 장악당했고 전함과 수송선이 크게 부족하기 때문에 덴마크 해군이 눈감고 있더라도 한 번의 전투에 나를 수 있는 병력은 10,000명이 고작이었습니다.
결국 (현지 수비군 포함) 15,000명으로 3곳으로 크게 분산된 영토를, 덴마크 16,000명, 폴란드 14,000명, 러시아 40,000명에게서 지켜야 했습니다.
여러분이 왕위에 오른 지 겨우 3년 밖에 안된 18살의 소년 왕이라면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리겠습니까?
1. 당시 공성기술은 크게 부족했기 때문에 견고한 요새로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 병력을 분산해서 3곳의 전략요충지를 방어한다.
2. 리가와 나르바는 경제와 전략요충지다. 덴마크에게 홀슈타인-고토르프를 넘겨주고 평화협상을 해서 배후를 다진 후에 폴란드와 러시아의 공격에서 리가와 나르바를 구원한다.
3. 어차피 승산없는 전쟁이다. 무리하게 방어에 나섰다가 귀중한 전력을 축내기 보다는 그 이후에 벌어질 본토방어에 주력한다.
4. 병사와 요새를 믿는다. 그들은 최대한 버틸 것이다. 우선 급한대로 세 군대 중 하나만 선택해서 반격한다.
이후의 이야기를 즐기기 전에 여러분의 전략을 먼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후에 18살 어린 소년 왕의 결정과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주인공이 이제야 등장하는군요. 요즘 영화는 따로 주절 주절 배경을 떠들지 않는 것이 추세이지만 저는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잔소리를 하겠습니다.
카를 12세의 초상화입니다. 마치 일개 장교의 모습으로 보일 정도로 과장이 일체 없는 그림입니다.
다른 군주의 화려한 치장과 달리 간단한 군복차림 그리고 당시 귀족이라면 (양복에 넥타이가 필수이듯이) 반드시 착용했던 거창한 가발도 없는 짧은 머리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왕이라는 자신감 그리고 실생활이 전장인 실용주의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제가 오래 전에 험담했던 당대 최고의 권력자 태양 왕 루이 14세와 한 번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루이 14세의 모습입니다. 루이 14세도 많은 전투를 치뤘기 때문에 궁전에서 음악과 춤만을 즐기는 문약한 군주는 아니었고, 그 당시의 군주들 모습이 대체로 이렇게 과장되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물론 카를 12세도 다른 군주와 같이 이런 모습이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왕위에 오른 15~18세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는 왕위에 올라 전권을 인정받으면서 전사의 모습으로 돌변합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카를 12세의 상대 역할을 맡은 표트르 대제입니다. 표트르 대제 역시 카를 12세만큼이나 자신의 정체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간단한 군복차림, 그가 좋아했던 대포 그리고 세계지도... 카를과 함께 전장을 누볐던 군주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표트르 대제도 군대를 직접 개혁하고 러시아가 초강대국으로 진입하는 체질로 바꾸었고 목숨을 건 전투를 수없이 치루었습니다. 참패를 거듭하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마지막 반전을 이끌어냈습니다.
표트르 대제의 성장기나 성격을 보면 독특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카를 12세의 경우에는 표트르 대제보다 훨씬 더 독특합니다.
두 사람 모두 아주 어릴 때부터 모두 군대와 전장에 관심을 가졌고, 자신이 전장에서 직접 보고, 진두지휘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표트르 대제가 기계, 시스템, 전략을 중요시하는 광역형 리더였다면 카를 12세는 칼, 백병전, 전술을 즐기는 종심형 리더였습니다.
다시 말해 표트르 대제는 집단군 야전원수형 지휘관이었다면, 카를 12세는 특전단급 사단장형 지휘관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카를 12세의 성향이 독특했습니다.
1. 여성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여성폄하가 아닙니다. 만약 카를 12세가 좋은 반려자를 만났다면 그의 인생 그리고 스웨덴의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겁니다. 예로 든 겐신도 여성을 가까이 하지 않아 결국 양아들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습니다.아우구스트와 같은 여성편력가에 비교한 설명입니다. 오해가 없으시길)
마치 일본 전국시대의 우에스기 겐신처럼 여성을 일체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북유럽 강대국 스웨덴의 왕위 계승자였기 때문에 정략결혼의 블루칩이었고 6명의 공주와 혼담이 오갔습니다. 유력한 결혼 상대자는 덴마크의 소피아 공주였는데, 덴마크가 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혼담이 깨졌고 그 이후에는 아예 여성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평생 할머니, 누나와 여동생이 가까이 한 여성 전부였고 그의 사후에는 누나 울리카 엘레오노라(어머니와 동명이인)가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2. 절대왕권 주의자였습니다.
그 당시 군주라면 모두 신에게서 왕권을 인정받았다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했는데, 카를은 정도가 상당히 심했습니다. 15살의 어린나이였기 때문에 섭정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그 때까지만 해도 섭정들의 말에 경청하며 온순한 후계자인 것 처럼 보였습니다. 섭정들끼리 반목이 생기면서 15살의 카를은 성년으로 인정받는 편법으로 왕좌에 올랐습니다.
즉위식이 결정되는 순간, 불과 15살의 카를은 당돌한 태도를 보이며 절대왕권을 확립합니다.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왕이었기 때문에 즉위식을 거행하지 않을 것이며, 다시 왕관을 받는 예식은 말도 안된다며 거부를 합니다. 그리고 즉위식이 아닌 선왕 추도식으로 변경하고 모든 사람에게 상복을 입힙니다. 자신은 왕관을 머리에 쓰고 말을 탄 채로 교회로 들어섭니다.
그리고는 어떤 조언도 거부합니다. 고령의 대신이나 고문은 몇 시간 동안 기다렸다가 간단한 용건만 말하고 물러나야 했는데, 말이 길어지면 카를 12세는 그만 나가라고 말을 끊었다고 합니다.
마치 오다 노부나가를 보는 것 같죠?
3. 정의를 추구했습니다.
그는 선왕의 가르침에 따라 왕은 공정하고 정의로워야 한다는 가치관을 가졌고 평생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심지어 군사훈련과 사냥에서도 정의를 주장했는데, 어린 나이에 곰사냥(불곰과 같은 큰 곰이 아닌)을 할 때에도 화기를 사용하다가 너무 비겁한 짓이라 여겨 칼과 창만을 사용했고 그것마저도 불공정한 대결이라 여겨서 나무 쇠스랑만으로 곰과 대결을 했을 정도입니다.
기병 모의전투에서는 타격전끝에 이성을 잃고 (반칙인) 얼굴을 때려 상대방에게 부상을 입히자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하며 매일 병문안을 가기도 했습니다.
그가 폴란드의 아우구스트를 반드시 왕좌에서 끌어내리기로 마음을 먹은 동기도 비겁하게 선전포고없이 기습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4. 고대영웅을 꿈꾸며 단련했습니다.
당시에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후계자라면 알렉산드르 또는 카이사르의 위인전은 기본이었습니다. 카를 12세 역시 자신을 알렉산드르의 화신이라고 여기고 그의 업적을 따르려고 했는데, 다른 군주와 달리 어릴 때부터 원정준비를 했습니다.
예를 들면, 나중에 있을 원정에 대비해 침대에서 자다가 상의를 벗고 찬 마루바닥에서 아무 것도 없이 잠을 잤고, 겨울에는 7일 중 3일은 마구간으로 가서 건초만 덮고 잠들었습니다.
스웨덴군의 원정을 보면 다른 군대는 도저히 불가능한 기동(폭우와 폭설을 뚫고)을 하거나 심지어 겨울 숙영지에 들어가지 않고 야지에서 겨울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는데 왕이 진흙 위에서 일개 병사처럼 잠잤기 때문에 그를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카를의 솔선수범으로 스웨덴군의 규율은 유럽 어느 군대보다 엄격했습니다.
지난 이야기에서 먼저 설명했듯이, 카를 12세가 어떤 인물인 지를 모르는 덴마크, 폴란드와 러시아 3개국이 동맹을 맺고 지도의 붉은 화살표 지점을 공격합니다.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기 때문에 존경체를 사용하지 않는 점 양해부탁드립니다.
카를 12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들 중 하나를 먼저 처리하고 나머지를 만나도록 하지"라는 말을 했다. 스웨덴 제국의 영토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던 상관없이, 소년 왕은 하나의 목표에만 전력을 집중시키기로 하고 가장 가까운 덴마크로 향했다. 그는 발트해 건너편에서 리보니아로 향하는 작센군은 리가의 지역 수비대에게 맡기기로 했다. 리가 수비군이 버티지 못한다면 나중에 탈환하고 작센군에게 복수할 계획이었다.
문제는 덴마크 함대였다. 38척의 전열함과 12척의 프리킷함을 보유한 스웨덴 해군도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이었지만 덴마크-노르웨이 함대는 스웨덴 선원을 "바닷물에 적셔진 농부"라고 깔볼 정도로 압도적인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카를은 다행히도 영국과 홀란트의 빌럼William 3세의 개신교 해군을 빌릴 수 있었다.
빌럼은 프랑스의 태양 왕(루이 14세)을 상대하기 위해 평생을 보냈고 이제 겨우 완성된 반 프랑스 동맹이 북유럽의 사소한 전쟁 때문에 위기에 빠지는 꼴을 지켜볼 수 없었다. 더구나 스페인의 왕위가 누구에게 양위될 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30년 전쟁을 치뤘던 독일 등으로 확전되지 않도록 빨리 마무리 지어야 했다(결국 빌럼의 걱정대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벌어졌고 스웨덴 지원은 현명한 결정이었습니다).
영국과 홀란트는 북유럽의 전쟁이 달갑지 않았고 이전 상태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런데 덴마크의 프리드리히가 덴마크 반도의 초입인 홀슈타인-고토르프로 군대를 진주시키면서 분란을 일으켰다. 두 해상강대국은 스웨덴을 지원해서 가능한 한 덴마크를 분쇄하고 원래의 평화상태로 되돌려야 했다. 네덜란드와 영국의 연합함대를 발트해로 급파해서 스웨덴군을 지원했다.
스웨덴 함대도 출정준비를 했다. 전함을 옆으로 기울인 다음에 바닥을 긁어내고 덧대고 타르를 다시 칠한 후에 돛을 손봤다. 대포를 굴려서 갑판에 올린 다음 포가에 앉혔다. 5,000명의 새 선원을 모집해서 함대의 병력을 16,000명까지 늘렸다. 외국 선박을 포함해 스톡홀름의 모든 상선을 수송선으로 징발했다. 병력은 77,000명으로 늘어났고 유럽대륙에서 프랑스, 영국과 네덜란드군이 사용하는 신형 머스킷 소총과 총검으로 무장했다.
1700년 4월 중순이 되자 스톡홀름을 출발할 준비가 되었다. 6월 16일, 그는 바흐트마이스터Wachtmeister 제독의 기함 카를왕 호King Charles에 올랐다. 스웨덴 서쪽에 대기하고 있던 영-네 함대의 전열선 25척은 카를이 항구를 떠나자 스웨덴 함대쪽으로 다가왔다.
40척의 전함으로 불어난 영-네-스 연합함대를 상대하게 된 덴마크 제독은 불리한 전력을 무릅쓰고 싶지 않았고 더누가 영-네를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수도 없어서 스웨덴군의 기동을 지켜만 보았다. 카를은 스웨덴군을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이 있는 질랜드Zealand 섬에 상륙시키려고 했다. 덴마크군 주력은 프리드리히 왕과 함께 홀슈타인-고토로프 공작을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웨덴군은 코펜하겐을 위협하고 함락시킬 수 있다면 덴마크 왕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총사령관 카를 구스타브 렌스쿌드Carl Gustav Rehnskjold이 제안한 이 계획에 카를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네덜란드와 영국 제독은 마지못해 동의했다.
7월 23일, 4,000명의 공격군이 수송선을 타고 비바람을 맞으며 다가갔다. 질랜드 수비군 5,000명보다 적은 병력이었지만 스웨덴군은 상륙지점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수비군을 교란시킨 스웨덴군은 작은 배를 타고 상륙했고 겨우 800명의 덴마크군이 이들을 막았다. 함대의 맹렬한 포사격 지원을 받은 스웨덴군은 교두보를 쉽게 확보했다. 카를도 작은 배를 타고 합류했지만 덴마크 수비병은 이미 후퇴한 후였다.
스웨덴군의 상륙은 신속했다. 10일 동안 기병과 포병을 포함한 10,000명의 병력이 해협을 건너왔다. 중과부적의 덴마크군은 코펜하겐 안으로 후퇴했고 스웨덴군은 도시 주변에 공성진을 펴고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덴마크 왕이 급히 달려왔을 때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그의 함대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수도는 포위되었고, 주력은 아직 원정지에서 교전 중이었다.
프리드리히는 연합조약보다 국토보존이 더 시급했고 대열에서 이탈하기로 결정했다. 1700년 8월 18일, 그는 빼앗은 홀슈타인-고토르프 지역을 다시 돌려주고 반 스웨덴 동맹에서 탈퇴하는 트라벤달Travendal 조약에 서명했다. 카를은 덴마크를 정복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조약조건에 만족하고 문제의 근원인 폴란드 아우구스트에게로 병력을 돌렸다. 영국과 네덜란드도 북유럽 전쟁이 독일과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번지지 않게 된 것에 만족했다.
스웨덴군의 기병과 보병 모습입니다. 바이킹의 후손답게 인명은 재천이라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고 전투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바이킹 선조가 전장에서 죽어야 발할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처럼, 이들도 '신이 죽을 자리를 정해 놓으셨다. 내가 두려워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신조로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더라도 공격에 나섰습니다. 더구나 왕이 선두에 서서 적진에 뛰어드니말입니다.
창병이 시대착오처럼 보일텐데, 당시에도 기병은 무서운 상대였습니다. 그리고 스웨덴군은 총격전보다 백병전을 선호했기 때문에 창병은 중요한 방어병력이자 공격병력이었습니다.
카를 12세 당시의 스웨덴군은 머스킷 소총병이라고 해도 칼을 무장했고 일제사격 후에는 돌격하는 백병전을 장기로 삼았습니다. 다른 나라의 경우에는 이미 총검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링으로 장착하는 총검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카를의 첫 번째 원정은 신속했고 성공적이었으며 손실이 거의 없었다. 2주 만에 스웨덴 함대로 소해협을 무력통과하고 프리드리히의 등뒤에 상륙하는 대담한 작전으로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령을 회복했고 적의 한 축을 무너뜨렸다. 영-네 함대의 지원때문에 가능한 작전이었다고 해도 카를의 과감한 판단이 결정적이었다. 이렇게 해서 덴마크가 전선에서 이탈했다.
트라벤달 조약의 서명을 받은 스웨덴군은 즉시 질랜드에서 철수했다. 목적을 달성한 네덜란드와 영국 함대가 본국으로 철수했기 때문에 덴마크 섬에 병력을 남겨둘 필요가 없었다. 스웨덴의 소규모 병력만 따로 떨어져 고립된다면 덴마크가 평화조약을 폐기하고 다른 마음을 먹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카를도 가능한 한 빨리 병력을 이동시켜서 겨울이 오기 전에 두 번째 원정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8월 24일이 되자, 마지막 스웨덴 병사가 배에 올라 스웨덴 남부로 향했다. 카를은 어떤 평화협상 제안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아우구스트 정벌만 생각했다. 병력을 리보니아로 수송해서 리가를 구원하고 작센군을 몰아낼 계획이었다. 그러나 러시아군이 잉그리아 부근에 집결하고 있으며 전면전이 예상되는 규모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실제로 카를은 9월 말이 되기 전에 표트르의 선전포고와 러시아군이 국경을 넘어 나르바의 성벽 아래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동시에 받았다.
카를은 발트해의 폭풍과 얼음으로 바닷길이 막히기 전에 전력을 다해 병력을 이동시키려고 했다. 스웨덴 사령부의 한 장교가 보낸 편지는 "폐하는 리보니아로 방향을 결정하셨다. 프랑스와 브란덴부르크 대사의 평화협상 제안을 모두 거절하셨다. 폐하는 아우구스트와의 일전을 바라고 계시며 앞을 가로 막고 있는 모든 것에 분노하고 계시다"라고 썼다.
10월 1일, 카를은 발트해의 가을 폭풍경고를 무시하고 리보니아로 출항했다. 갑판까지 빼곡하게 병사를 태웠지만 첫 번째 항해에서 겨우 5,000명만 수송할 수 있었다. 3일째에 발트해 한복판에서 폭풍을 만났고 수송선단은 뿔뿔이 흩어졌다. 일부는 쿠를랜드 해안에 간신히 도착했고 일부는 전복되어 사라졌다. 배가 높은 파도에 요동치면서 많은 군마의 발이 부러졌고 카를은 심한 배멀미에 시달렸다.
10월 6일, 만신창이가 된 스웨덴 함대는 리가만 위에 있는 페르나우 항구에 들어섰다. 시장과 시민이 부두에 나와 왕을 반겼고, 카를이 임시숙소로 향하는 길에는 축포가 울렸다. 함대의 수리가 끝나자 마자 본토에서 4,000명의 병력, 말과 대포를 실어왔다. 카를은 페르나우에 머무는 동안 아우구스트가 리가 포위를 풀고 겨울 숙영지로 철수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아우구스트는 7월 중순에 17,000명의 작센군을 이끌고 리가를 직접 공격했지만 덴마크가 트라벤달 조약을 맺고 전선에서 이탈했다는 소식을 들은데다가 스웨덴군이 리보니아로 상륙할 것이라는 예상에 따라 현명하게 포위망을 풀고 사태추이를 지켜보기로 한 것이었다(그리고 원래 약속따위는 쉽게 저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카를은 비통한 심정으로 보고를 받았다. 그는 아우구스트와 일전을 벌이고 싶었는데 상대는 이미 달아났기 때문에 220km 떨어진 러시아의 나르바 포위군에게 눈을 돌렸다. 문제의 근원은 나중에 처리하기로 하고 러시아 차르에게 진격해서 나르바를 구원하기로 했다.
카를은 가용병력을 총동원하기 시작했다. 수중에 있는 병력과 스웨덴에서 오고 있는 병력 외에, 아우구스트의 철수로 여유가 생긴 리가의 수비군까지 합쳐서, 11월까지 7,000명의 보병과 8,000명의 기병을 모을 수 있을 것으로 계산했다. 5주 동안 그는 베젠베르크에서 병사들을 집중훈련시켰고 스웨덴 기병정찰대는 나르바로 향하는 도로를 두고 러시아군 세레메테프의 기병과 신경전을 벌였다.
스웨덴군의 어느 누구도 겨울에 러시아군을 상대로 전투를 하고 싶지 않았다. 당시의 상식으로는 금물이었으며 장교 대부분도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한겨울에 황폐한 지역을 7일 동안 행군한 후에, 무려 4배가 넘는 러시아군(심지어 8배가 많다는 소문도 있었다)의 방어벽을 공격해야 했다. 그리고 이미 스웨덴군 진영에 병이 퍼지면서 빈자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장교와 병사 모두 겨울 숙영지를 바라고 있었다(당시는 첫 눈이 오기 전에 겨울 숙영지로 철수해 겨울을 지내야 했습니다.)
카를은 이런 주장에 대해 적이 기다린다면 기꺼이 싸워주면 된다고 가볍게 무시했다. 스웨덴군이 철수하면 나르바를 손에 넣은 러시아군이 잉그리아, 에스토니아와 리보니아를 점령하면서 발트해 동부지역을 모두 잃을 수도 있었다. 왕의 낙관론과 열정에 일부 장교가 동참하면서 군대의 사기는 다시 올라갔다. 원정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소년 왕이 영광과 책임을 모두 짊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11월 13일 새벽에, 레발에서 출발한 1,000명의 기병은 뒤에 합류하기로 하고, 전 병력이 행군에 나섰다. 청황색 국기를 따라 총 10,537명이 원정에 올랐고, 상황은 예상했던 대로 끔찍했다. 길은 가을비로 진창이 되었고 병사는 끈적거리는 진흙길을 걷고 그 위에서 밤잠을 잤다. 러시아 기병이 약탈한 집이 들판 곳곳에서 불타고 있었다. 어디에서도 사람이 먹을 식량은 고사하고 말이 먹을 건초도 구할 수 없었다. 행군하는 동안 차가운 11월의 비가 병사들의 몸을 적셨다. 밤에 기온이 떨어지면서 눈보라로 변했고 땅은 얼어붙었다. 왕은 노지에서 병사들과 함께 눈과 비를 맞으면 잠들었다.
날씨는 최악이었던 반면에 놀랍게도 러시아군의 교란작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3곳의 협로 중 2곳을 힘들이지 않고 점령했다. 4일째 되는 날에, 스웨덴 기병 전위대가 나르바에서 서쪽으로 30km 떨어진 협로에 진출했다. 세레메테프의 러시아 기병 5,000명이 강 건너 편에서 대기 중이었지만 놀랍게도 다리를 그대로 두었다.
근위대 선봉과 함께 있던 카를은 러시아군 세레메테프의 존재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그는 견인포 8문을 급히 가져오게 한 후에, 겨우 400명의 용기병(필요에 따라 말에서 내리는 보병과 기병의 혼합형태)과 근위기병을 이끌고 계곡을 돌격해 내려갔다. 스웨덴 견인포는 용기병의 돌격 뒤에 숨어 러시아군에게 들키지 않고 아주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한 후에 반대편 강둑에 집결해 있던 러시아 기병에게 갑작스런 포격을 퍼부었다.
러시아군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포격에 놀란데다가 표트르에게서 적의 주력과 교전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말을 돌려 후퇴했고 협로는 무방비 상태로 스웨덴군에게 열렸다(표트르는 자신이 개혁한 유럽식 신식군대를 무척 아꼈고 좀처럼 대회전에 투입하지 않았습니다.) 스웨덴군의 눈에는 한줌의 아군이 러시아의 주력기병을 패주시킨 것으로 보였고 스웨덴군이 가장 필요했던 사기가 크게 올랐다. 러시아군이 제대로 방어했다면 많은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던 협로가 그대로 열리면서 나르바가 눈 앞에 다가왔다.
표트르의 신식 기병입니다. 나르바 전투 당시가 아니라 대북방전쟁의 절정기 당시의 모습이어서 상당히 위력적으로 보입니다.
나르바 전투 때에는 코사크 기병 중심이어서 규율이나 훈련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오합지졸이었습니다.
그 날 밤, 비와 진흙을 온 몸에 뒤집어 쓴 스웨덴군이 피히요기Pyhiijoggi 협로 동쪽편에 진영을 차렸다. 두터운 진흙 때문에 많은 병사들은 눕지 못하고 선채로 밤을 보내야 했다. 19일 오후에 굶주림과 추위에 지친 군대는 나르바에서 12km 떨어진 라게나Lagena 마을에 도착해서 약탈당한 대저택에 잠자리를 마련했다. 카를은 요새가 제대로 버티고 있는 지를 확인하고 싶어 4발의 신호탄을 쏘라고 명령했다. 곧이어 포위당한 요새에서 희미하고 낮게 깔리는 소리가 4번 울려왔다. 나르바는 아직 스웨덴의 수중에 있었다.
11월 17일, 세레메테프는 본대에 합류하면서 스웨덴군이 피하요기 협로를 점령했고 조만간 모습을 보일 것이라고 보고했다. 표트르는 장교를 불러 회의를 열었다. 탄약을 추가로 배급하고 정찰도 배로 늘렸지만 그날 밤도, 다음 날도 별 일은 없었다. 러시아군은 카를이 도착하자 마자 바로 공격해올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병력을 더 모으고 러시아군 진영을 파악한 후에 전초전을 벌이면서 기동하다가 일전을 벌일 것으로 예상했다.
11월 17~18일 새벽 3시에, 차르는 드에 두 크로이Due du Croy를 호출했다, 그는 스페인계 네덜란드인으로 아우구스트를 대신해서 고문역으로 합류했었는데, 차르는 그에게 지휘를 맡기고 노브고로드로 가서 추가병력을 모으고 아우구스트와 향후 계획에 대해 협의할 계획이었다. 리가 철수에 실망한 표트르는 아우구스트의 결정을 의심하고 있었고 러시아군 총사령관인 골로빈은 외무대신도 겸했기 때문에 함께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나르바 전투가 있기 바로 전날 밤에 표트르가 갑자기 떠난 것은 겁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린 시절에 트로이츠키로 야반도주했고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면 공황상태가 되었었기 때문에 카를의 병력이 다가오자 겁에 질려 두 크로이에게 강제로 지휘를 맡기는 모습이 그럴 듯 하지만, 표트르는 육지와 바다에서 목숨을 건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표트르는 전권을 가진 단 한 사람이었고 자신이 직접가서 해결해야 시간을 크게 절약할 수 있었다. 단계별로 진행하는 러시아 전투방식에 젖어있던 차르는 카를에 대해 전혀 몰랐고 스웨덴군도 비슷한 계획을 가졌을 것으로 짐작했다. 사실 어느 누구도 굶주림과 추위 속에 오랜 행군을 한 군대가 2.5m의 도랑, 4m의 방벽과 140문의 대포의 진지에 틀어박힌 4배의 적을, 도착즉시 공격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그리고 러시아군에서는 카를 12세의 충동적인 성격을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었다.
20일 아침 동이 트자, 라게나Lagena에 집결해 있던 스웨덴군은 살을 에는 겨울 비를 맞으며 나르바로 향하기 시작했다. 오전 10시가 되자, 러시아군도 전위대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접근했다. 적색 군복 차림으로 회색 말을 타고 멋진 모습으로 아침 사열을 하던 두에 두 크로이는 다급한 총소리를 듣고는 스웨덴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말을 달려 헤르만스베르크Hermannsberg 산등성이 위의 나무에서 스웨덴군이 빗속을 뚫고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다.
보통 요새화된 방어선을 공격할 때에는 천천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공격 준비를 해야 하는데 다가오는 적의 숫자가 너무 적어서 의심을 품었다. 그 뒤에 분명히 본대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15,000명 정도를 보내 스웨덴군의 공격준비를 교란시킬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떤 러시아군 장교도 안전한 방벽 너머로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개혁초기의 러시아 장교는 외국인 혐오증이 심했고 명령을 거부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표트르가 모든 곳에 있어야 했던 이유입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부대에게 방벽을 따라 부대기를 꼽고 완전무장상태로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표트르가 서유럽식으로 개혁한 러시아군의 모습입니다. 물론 당시 사진은 아니고 나르바 전투 재현놀이 중입니다. 표트르가 외국인 장교를 대거 영입하면서 현대화시켰지만 나르바 전투에 투입된 러시아군은 무장, 훈련과 사기 모두 오합지졸에 불과했습니다. 급조된 군대로 너무 강적을 만난 탓에 참패를 하게 됩니다.
카를과 렌스콜드는 헤르만스베르크 산등성이에서 망원경으로 러시아군의 방어선을 샅샅히 훑어보고 있었다. 전장의 가장 왼쪽과 오른쪽은 나르바 강변으로 막혀 있었고 강 건너에는 이반고로드 요새가 보였다. 그리고 나르바 요새 앞에 러시아군의 포위망이 있었다. 러시아 방어선의 북쪽 끝 뒤의 다리가 유일한 보급로이거나 후퇴로로 보였다. 날카로운 목책을 꽂은 방벽과 도랑으로 요새화된 방어선은 난공불락처럼 보였다. 방벽을 따라 포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진영 안의 러시아군은 분명히 많아 보였다. 그렇지만 망원경 너머로 보이는 러시아군은 공격에 나설 태세가 전혀 아니었다.
카를과 렌스콜드는 난감한 상태였고 거의 대부분의 지휘관은 절망적인 상태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궁지에 몰렸기 때문에 전면공격에 나섰다. 4배나 많은 적 앞에서 주저 앉아 있을 수도, 후퇴도 불가능했다. 남은 선택권은 공격뿐이었다. 카를과 렌스콜드는 두 크로이가 표트르에게 지적했던 약점을 찾아냈다. 러시아군은 6km의 방어선에 걸쳐 얇게 분산되어 있었다. 어느 한 지점을 집중공격하면 응원군이 보강되기 전에 돌파할 수 있고, 잘 훈련된 스웨덴군이 일단 방어선 안으로 진입하면 러시아군은 자중지란을 일으킬 것이 보였다.
두 크로이는 러시아 방벽 안에서 심상치않은 스웨덴군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전통적인 전쟁규칙에 따라 스웨덴군이 참호를 파고 진영을 차릴 것으로 예상했었다. 스웨덴군 일부가 (도랑을 넘기 위한) 짚단뭉치를 나르는 것을 보고는 의아해했다. 자신은 상상도 못할 전면공격이 시작될 참이었다.
오전과 이른 오후 내내, 스웨덴군은 침착하게 공격준비를 했다. 오후 2시에 공격준비를 마치자, 비가 그쳤고 기온이 크게 떨어졌다. 먼 하늘에 먹구름이 다시 몰려들 때에, 신호탄이 하늘을 가르며 날아올랐고 스웨덴군은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일부 장교는 폭풍이 그칠 때까지 공격을 연기하는 것이 낫겠다며 주저했지만 카를은 "멈추지 마라. 눈보라가 적을 향해 불고 있다"라고 소리 질렀다.
왕의 판단이 옳았다. 러시아군은 눈보라를 정면으로 맞으며 머스킷소총과 대포를 쏘았지만 조준이 엉망이어서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다. 스웨덴군은 침착하게 그리고 민첩하게 다가서며 눈보라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다. 방벽 바로 앞에서 멈춘 스웨덴군은 머스킷소총을 견착하고 러시아군 방어선 한 곳에 집중사격을 퍼부었고 러시아군은 풀을 베듯이 쓰러졌다. 짚단을 도랑에 넣고 건넌 스웨덴군은 칼과 총검을 휘두르며 방벽을 넘어 적에게 달려들었다. 15분도 안되어서 방벽 안쪽에서 치열한 백병전이 일어났다. 한 스웨덴 장교는 "칼을 손에 쥔 채로 안으로 들어가서 앞에 있는 적을 모두 베어 넘겼다. 끔찍한 학살이었다"라고 나중에 기록했다.
처음에는 러시아군도 완강하게 저항했다. 집중사격으로 반격해서 스웨덴군을 많이 쓰러뜨렸지만 스웨덴 보병은 계속 방벽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계획에 맞춰 2개 보병사단은 둘로 나뉘어 남과 북으로 러시아군을 양분해 밀어붙였다. 러시아군의 좌익을 맡던 남쪽 사단은 트루베츠코이가 지휘하는 스트렐치 병력(러시아의 구식군대)을 상대했다. 표트르가 스트렐치의 전투력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했듯이 스웨덴군의 공격을 받은 스트렐치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스트렐치가 궤멸된 후에 골로빈이 부재 중이었던 사단이 강하게 버티는 듯 했지만 전투경험이 크게 부족했던 신병연대가 무너지면서 모두 후퇴하기 시작했다.
남쪽에 있던 세레메테프 기병이 스웨덴 보병에게 돌격해서 공격을 격퇴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속도를 늦춰주었어야 했지만 명문가문 자제와 조악한 코사크족으로 구성된 기병은 보병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스웨덴군의 결의에 찬 모습을 보고 공포에 질린 기병은 말을 돌려 강으로 뛰어들었다. 전투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수 천 명의 기병과 말이 물 속에서 사라졌다.
북쪽에 있던 러시아군의 우익상황도 다를 바가 없었다. 방벽 뒤에서 공격을 받은 러시아군은 처음에는 용감하게 맞상대하려고 했지만 장교가 쓰러지면서 대혼란이 일어났다. 심지어 "(연대급 외국인장교)독일놈들이 배신했다"라는 고함까지 질러댔다. 스웨덴군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계속 전진하며 진지와 포대를 차례로 점령하자 러시아군 대부분이 등을 돌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수많은 병사가 유일한 활로인 다리로 몰리면서 서로를 밟고 넘어가는 지경이 되었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다리가 갑자기 무너지면서 병사들이 강물 속으로 사라졌다.
러시아 방어선에서는 오직 한 곳만 버티고 있었다. 북쪽 끝의 무너진 다리 근처에 있던 (표트르가 직접 양성한 최정예병력) 프레오브라젠스코예와 세묜놉스키 근위연대가 부투를린의 지휘를 받으며 물러나지 않았다. 급히 수백 대의 마차를 끌어 모아 임시방책을 만들고 주변에 몰려든 스웨덴군을 향해 소총과 대포로 맹렬히 저항했다.
이곳을 제외한 남과 북의 모든 방어 병력은 겁에 질려 달아나는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수백 명은 방벽을 넘어 도망가려다가 스웨덴 기병에 쫓겨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러시아군을 지휘하던 작센출신 장교는 "그들은 마치 소 떼처럼 쫓겨다녔다. 연대끼리 뒤엉켜서 겨우 20명을 불러 세울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전의를 잃은 러시아군은 더 이상 외국인 장교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두에 두 크로이는 눈 앞에서 일어나는 처참한 광경을 보고는 "저런 병사들은 악마의 말도 듣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할라르트와 랑겐과 함께 스웨덴군에게 다가가 항복했다. 그는 공포에 질린 병사보다 차라리 적의 품이 안전하다고 느꼈다. 그의 항복을 받은 스텐보크Stenbock는 정중히 왕에게로 데려갔다.
카를은 일단 방벽에 대한 일제공격이 시작되자 거의 즐기는 분위기였다. 그는 오후 내내 방벽 밖에서 지내며 일부러 위험에 노출시켰다. 부상자와 전사자 시체더미를 피하다가 말이 도랑 안으로 미끄러졌고, 말과 칼을 도랑에 둔 채로 몸만 빠져 나와야 했다. 다른 말로 갈아탔지만 바로 포탄이 터지면서 이번에는 말없이 다녀야 했다. 기병 한 명이 급하게 달려와 자신의 말을 내밀었고, 왕은 말에 오르면서 쾌활하게 "적이 승마연습을 시키는구먼"이라고 말했다. (카를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이런 버릇을 버리지 못해서 결국 유탄에 맞아 전사합니다.)
날이 어두워지자 카를은 진흙을 잔뜩 뒤집어 쓴 모습으로 방벽 안으로 들어왔다. 두 크로이와 대부분의 외국인 장교가 항복하고 많은 러시아군이 패주했지만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러시아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고 해도 여전히 25,000명의 병력이 남아 있었고 스웨덴군은 8,000명에 불과했다. 골고루키 공, 이레리티아의 알렉산드르 공, 압테몬 골로빈과 이반 부투를린과 같은 러시아인 지휘관은 두 크로이, 할라르트와 랑겐처럼 바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영 북쪽 끝의 마차 장벽 뒤로 후퇴해서 나르바 전투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 동안 러시아 좌익의 바이데 장군의 사단은 아직 전투에 참가하지 않아서 전력이 온전한 상태였다. 바이데의 병력이 갑자기 북으로 이동하고 마차 안의 병력도 남쪽으로 달려 나온다면 카를의 병력은 앞뒤로 협공 당할 위기였다.
스웨덴군은 마차 임시진지를 반드시 무너뜨려야 했다. 카를은 견인포를 앞으로 가져오게 했지만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임시진지 안에서 저항하던 러시아군도 절망적인 상황을 깨닫고 항복의사를 밝혔다. 카를은 마음 속으로 기뻐했다. 이미 어두워지고 있어서 마차 근처에서 피아를 구분할 수 없게되면 아군끼리 전투를 벌일 수 있었다. 러시아군이 때맞춰 항복을 하면서 저녁 8시에 전투가 끝났다. 러시아군은 조건부 항복을 했다. 처음에는 모든 장비를 가지고 물러나겠다고 고집을 피우다가 병사들만 개인화기를 소지한 채로 후퇴하는 대신에 장교는 포로가 되어야 한다는 조건에 항복했다. 카를은 모든 연대기와 포를 노획했다.
대부분의 러시아군을 몰아낸 후에도 스웨덴군의 상황은 여전히 위험했다. 보병은 완전히 탈진한데다가 러시아군 보급품에서 찾아낸 술을 빈 속에 먹고는 완전히 취했다. 카를은 러시아군이 냉정을 되찾으면 얼마 안되는 스웨덴군의 규모를 파악하고 다시 무기를 들 수 있다고 염려했다. 항복한 러시아군을 빨리 후방으로 내보내야 했다. 카를은 러시아군 포로에게 즉시 무너진 다리를 수리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러시아군 남쪽 아래에 여전히 바이데 사단이 위협하고 있었다. 한 스웨덴 장교는 "바이데가 공격할 용기가 있었다면 우리는 분명히 패했을 것이다. 아군은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잠자지도 못했고 모스크바놈들 텐트에서 찾아낸 브랜디로 모두 취해버렸다. 장교 몇 명만으로 병사들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바이데의 위협도 얼마 가지 않았다. 바이데가 부상을 입은데다가 러시아군 우익의 전면항복을 들은 그는 혼자서 공격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동이 트면서 아군이 없는 상태에서 주변에 스웨덴 기병이 모여드는 것을 보자 바로 항복했다. 아침 내내 전장 곳곳에 숨어있던 러시아군이 포로로 잡혀왔다.
다리를 수리한 러시아군이 강 건너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카를은 다리 옆에 서서, 적들이 모자를 벗고 깃발을 내리고 동쪽으로 발을 끌며 이동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스웨덴군의 아침검열에서 장교 31명과 사병 646명 전사, 1,205명 부상이 집계되었다. 러시아군의 피해는 러시아군조차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최소한 8,000명이 죽거나 다쳤는데 부상자는 얼어붙는 날씨에 고향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거의 없으니 8,000명 이상의 전사자 피해를 입었다. 두에 두 크로이를 포함한 10명의 장군, 10명의 대령과 33명의 고급장교가 포로로 잡혔고 차르의 개인 주치의인 카르보나리, 차르의 최측근 표트르 르포르도 포로가 되었다. 포로는 레발로 이송되어 겨울을 보냈고 봄에 발트해가 풀리자 스웨덴의 감옥에 몇 년 동안 수감되었다.
스웨덴군의 진정한 전리품은 러시아 포대였다. 145문의 대포, 32문의 구포, 4문의 유탄포, 10,000발의 포탄과 397통의 화약을 손에 넣었다. 러시아군은 표트르가 가장 아끼는 모든 무기를 잃었다. 패배한 러시아군이 물러가자, 포로와 전리품을 집계하던 마그누스 스텐보크는 전과에 감동하며 "신의 작품이다. 사람이 한 일이 있다면 폐하의 단호한 결심과 렌스콜드 장군의 완벽한 경험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노보고로드로 가던 도중에 패전소식을 들은 차르는 카를의 공격에 대비해 총동원령을 내리고 수도원의 종을 녹여 대포를 새로 제작했다. 그리고 상인과 수도원에 무거운 세금을 매겨 40,000정 이상의 소총을 유럽에서 구입했다.
카를도 표트르를 바로 추격해 러시아를 점령하고 싶었지만, 겨울에 무리한 전투를 벌이고 숙영지로 돌아가지 않은 탓에 전염병이 퍼져서 절반 이상의 병력을 잃게 되고 러시아 원정을 뒤로 미루게 된다. 대신에 항복하지 않고 계속 도발하는 폴란드 아우구스트 정벌에 나선다.
두에 두 크로이는 상당히 재미있는 운명을 겪었습니다. 레발에 남게 된 그는 차르에게 생활비를 보내달라며 편지를 보냈고 표트르는 즉시 6,000루블을 보내주었습니다. 1702년 봄에 죽었는데, 차르는 그 소식을 듣고 "그는 진정으로 능력있는 지휘관이었다. 14일만 더 빨리 지휘를 맡겼다면 나르바에서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죠.
표트르가 많이 도와주었는데도 많은 부채를 남겨서, 채권자가 부채를 남긴 사람은 매장할 수 없다는 고대 법을 들고 나왔고 시신은 교회 저장실에 안치되어 건조한 공기때문에 썩지 않고 미라가 되었습니다. 시신을 꺼내 유리관 속에 넣었고 200년 동안 레발 관광객은 여전히 가발과 군복을 입은 공작을 볼 수 있었습니다. 혁명이 일어나기 몇 년 전에 그의 모습을 불쌍히 여기 제국정부가 매장을 하면서 결국 영면하게 되었습니다.
나르바전투 재현놀이입니다. 외국에서는 매년 주요 전투를 재현하는데 수천 명이 동원되어 실제 전투를 방불케하는 재현놀이도 있습니다. 중간에 스트렐치도 등장하고 그런대로 당시 전투방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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