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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히틀러의 마지막 기회, 모스크바 전투 (4부) - 회프너의 뱌즈마 봉쇄

by uesgi2003 2016. 1. 2.



오늘 일본대사관 기습시위로 풀려난 학생을 김복동 할머님이 안아주고 있습니다. 


연초부터 욕설을 퍼부을 수도 없고... 닭정부가 과연 어디까지 추락할까요.



회프너의 뱌즈마 봉쇄, 102~12

 

에리히 회프너Erich Hopner의 전차집단 4는 태풍작전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고 모스크바를 입성할 전력으로 기대를 모았다. 북부집단군 당시보다 크게 보강되어 3개의 기계화군단을 보유했다.



회프너는 1941년 겨울의 소련 대반격에서 병력을 구하기 위해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하고 철수했다가 19421월에 해임당했고 연금도 몰수당했습니다. 연금은 소송으로 되찾았지만 1944720일의 히틀러 암살계획에 가담해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습니다.

재판장에서 그는 일부러 맞지 않는 옷을 입고 틀니를 빼앗겨 모욕을 당했습니다.

그는 러시아 민족에 대해 반감이 무척 심해서 가혹한 대처를 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40군군단 게오르그 슈툼메Georg Stumme

2전차사단

10전차사단

258보병사단


46군군단 하인리히 폰 비팅호프 셸Heinrich von Viettinghoff-Scheel

5전차사단

11전차사단

252보병사단


57군군단 아돌프 쿤첸Adolf Kuntzen

20전차사단

3기계화보병사단

SS사단 라이히Reich

 

전차집단 4는 완편된 25전차사단, SS사단 라이히Reich, 3기계화보병사단, 일반보병사단 2, 돌격포 대대 1개를 받았다. 모두 합쳐서 3호전차 300, 4호전차 75대를 포함해 765대의 전차를 보유했는데 그 중에서도 335대의 슈툼메 군단이 주공을 맡기로 했다. 회프너의 집결지가 주보급창인 로슬라블Roslavl에서 겨우 25km 떨어진 점을 보면 어느 정도의 보급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회프너는 부됸니Budyonny의 예비전선군을 강행돌파한 후에 뱌즈마의 남쪽 포위망을 완성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슈툼메와 셸이 25km 너비의 구멍을 내고 쿤첸이 그 뒤에서 지원한다는 계획이었다.

반대편의 소련 43군은 85km 방어선에 보병사단 4개를 배치했는데 km당 보병 200명과 대전차포 0.8문일 정도로 허술했다. 10전차사단은 겨우 4~5문의 45mm 대전차포를 갖춘 1개 보병여단을 상대했다. 그리고 43군은 145148전차여단의 88대가 전부였다.

 

회프너는 네벨베퍼 로켓포와 슈투카의 맹폭 후에 호트와 같은 시간에 작전을 시작했다. 슈툼과 셸군단은 데스나Desna강에 교두보를 만들고 소련군의 얇은 방어선을 돌파했다. 데스나강은 워낙 얕아서 11전차사단이 단독으로 도강할 수 있었고 소련군은 도강지점에 지뢰도 설치하지 않았다.

43군은 전차여단으로 반격하지 않고 스파스-데멘스크Spas-Demensk 철도교통로를 방어하기로 했기 때문에 회프너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도강했다. 33군의 보병사단 5개가 독일전차부대를 조금이라도 지연시켰어야 했지만 서로의 거리가 멀었고 슈툼메군단은 보병사단을 차례로 공격하며 밀고 나갔다.

예비전선군이라는 명칭대로 민병대 수준의 전력이었고 중화기도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독일군 전차부대를 막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공격 3일 만에 33군과 43군 대부분이 패주했고 소련 방어선에는 거대한 구멍이 생겼다. 부됸니는 43군 사령부를 방문했다가 패주하는 병력에 휩쓸리면서 위기의 순간에 지휘체계까지 무너졌다.

104, 셸군단은 스파스-데멘스크를 점령하고 145148전차여단을 포위했다.


 

105, 회프너는 쿤첸군단을 투입했다. 다른 두 군단이 뱌즈마를 향해 북쪽으로 선회하는 동안 쿤첸군단은 라이히 사단을 그자츠크Gzhastk, 3보병사단은 유코놉Yukhonov으로 진격시켰다. 이제 회프너의 작전은 공격이 아니라 패잔병 추격에 가까웠다.

유코놉은 크레믈린에서 겨우 200km 거리였기 때문에 스탈린의 공포는 대단했다. 코넵과 부됸니에게 즉시 모자이스크Mozhaisk로 물러나라고 명령했지만 너무 늦었다. 급조사단은 기동력이 없었고 당연히 전차보다 빠를 수 없었다.

107일 오전 1030, 10전차사단은 뱌즈마의 민병과 대공포부대의 가벼운 저항을 뚫고 들어가 7전차사단과 연결했다. 양쪽의 협공이 완성되면서 뱌즈마 포위망 안에는 볼딘Boldin의 전술그룹을 포함해 소련 4개 군이 갇혔다. 호트의 56군군단과 회프너의 4046군군단이 포위망의 동쪽 끝까지 진격해 봉쇄하는 동안 보병사단 5개가 서쪽에서 압박해 들어갔다.

6~7일 이틀 동안 눈과 비가 왔지만 큰 영향이 없었고 일주일도 안되어서 뱌즈마 포위망 전투가 끝났지만 85,000명이 탈출했다.



모자이스크의 위치입니다. 지금까지의 독일군 기세라면 모스크바 입성은 기정사실로 보입니다.

 

10일 만에 독일군 전차군 2개가 뱌즈마-브랸스크(뱌즈마 남서쪽 지역) 포위망을 연거푸 완성했고 서부와 예비전선군은 궤멸되었고 브랸스크전선군도 토막나면서 855,000, 830대의 전차, 6,000문의 포를 잃었다. 보병사단 30개와 전차여단 8개 이상이 전멸했다. 폰 클라이스트가 동시에 남부전선군 대부분을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군은 단 10일 만에 100만명 정도를 잃어서 전체전력의 1/3이 사라졌다.

독일군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지만 호트나 회프너의 전차전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태풍작전 초기 10일 동안 6,000(전사는 1/5)을 잃었고 뱌즈마-브랸스크전투에서 33,000명을 잃었지만 소련군은 25배가 넘는 병력을 잃었다. 3개 전차군의 손실은 겨우 전차 60대와 돌격포 5대가 전부여서 5%만 잃었다.

스탈린은 다급한 나머지 레닌그라드에서 주콥을 불러들인 후에 코넵과 부됸니와 함께 상황을 점검하고 독일군의 다음 움직임을 예측하라고 지시했다. 주콥은 황당한 명령과 함께 전선으로 달려갔다.



 

주콥(주코프)의 시간싸움, 107~31

 

아무리 멍청해도 모스크바는 예비군만으로도 방어할 수 있다. 아이소프 스탈린 194110

 

107일 오전, 독일폭격기가 역을 폭격했기 때문에 18전차여단이 1km 밖에서 전차를 하역하기 시작했다. 18전차여단은 모스크바 동쪽 185km의 블라디미르Vladimir에서 편성된 전차여단 3개 중 하나로 아직 부족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8월에 다급하게 투입했던 여단에 비해 편성이나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 63대의 전차 중 29대의 T-34는 신형이었고 34대의 경전차는 수리창에서 끌고 나온 구형이었다.

이밖에도 전차는 더 많았다. 스탈린은 8월에 전차예비부대를 모스크바 부근에 배치하고 아무에게도 내주지 않았었다. 일선 지휘관이 간청할 때마다 조금씩 내준 후에 다시 채워 넣었다. 히틀러도 이상할 정도로 자신의 전차부대를 간직하고 싶어했는데 절대로 올바른 판단이 아니었다.

 

주콥이 코넵(코네프)을 만났는데 서부전선군은 궤멸했고 코넵은 처형을 각오했을 정도로 심각했다. 실제로 주콥의 만류가 아니었으면 처형되었을 것이다.

라이히 사단은 모스크바-민스크 고속도로를 따라 그자츠크로 접근 중이었고 50보병사단으로는 막아낼 수 없었다. 남쪽에서는 쿤첸의 57군군단이 유코놉뿐만 아니라 우그라Ugra강 다리까지 확보했다. 그 앞에는 만신창이의 모스크바 민병대 사단뿐이었다. 첫눈도 바로 비로 바뀐 데다가 얼어붙어서 독일군의 진격을 막지 못해서 모스크바로 들어오는 두 도로가 무인지경으로 뚫린 셈이었다.

 

세묜 보그다놉Semyon Bogdanov(사진 참조)은 민스크 포위망을 탈출한 후에 새 전차여단을 편성하다가 태풍작전을 맞았다. 서부와 예비전선군이 붕괴될 것이 분명해지자 보그다놉은 모자이스크 지역을 책임지라는 명령을 받았다. 최고사령부는 키에프 포위망에서 전멸한 5군을 재편성하기로 결정하고 보그다놉을 다시 부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블라디미르에서 기차로 2개 전차여단이 도착하자 보그다놉은 모자이스크와 말로야로슬라베츠Maloyaroslavets에 확고한 방어선을 만들기로 했다. 그는 18전차여단에게 그자츠크로 전진하는 라이히사단을 막게 하고 17전차여단은 말로야슬라베츠로 접근하는 쿤첸군단을 지연시키게 했다.

9, 1920전차여단이 더 이동 중이었지만 대령계급에 불과했던 그는 주콥이나 최고사령부에게 알리지 않고 독단적으로 이런 결정을 내렸는데 그의 판단은 적중했다.



많은 지휘관을 숙청했는데도 뛰어난 리더가 위기에서 조국을 구했습니다. 영웅칭호를 받으며 기갑군 원수가 되었습니다.

 

1941108, 1718전차여단은 집결지에 모여서 전투준비를 마쳤다. SS사단 라이히는 뱌즈마-브랸스크 포위전투에 관여하지 않았고 민스크-모스크바 고속도로로 최대한 전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폴 하우저Paul Hausser의 라이히는 강력한 전력을 갖췄지만 전차는 6대의 3호돌격포가 전부였다.

폰 보크는 뱌즈마 포위전투에 집중하느라 하우저에게는 별다른 지원을 하지 않았다. 쿤첸도 바르샤바-모스크바 고속도로를 따라 제 속도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20전차사단은 상당히 뒤쳐져 있었다.

결국 107~12일 기간에 모스크바로 향하는 주력은 2개의 보병사단과 몇 대의 전차 밖에 없었다.

 

109일 오전, SS연대 도이칠란트Deutschland는 모스크바 서쪽 175km 지점의 그자츠크를 점령했고 하우저는 승리에 도취해 SS연대 데어 퓌러Der Fuhrer를 모자이스크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로 보냈다.

18전차여단은 그자츠크 동쪽 10km 지점에 전차를 매복시켰다. 오후 430, 오토바이와 장갑차를 탄 데어 퓌러연대가 접근하자 50대 이상의 소련전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연대는 400명을 잃고 속수무책으로 물러났다. 하우저는 즉시 슈툼메의 40군군단에게 기갑부대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했다.

남쪽의 17전차여단은 쿤첸군단의 선봉대를 공격했다. 러시아-핀란드전쟁에서 훈장을 탔던 니콜라이 클리핀 소령은 T-34 2개 중대를 이끌고 478보병연대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478연대의 3.7cm 포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고 1/2차대전에서 모두 훈장을 받았던 연대장이 전사했다.

태풍작전 시작과 함께 파죽지세로 진격하던 독일군을 처음으로 막아내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도이칠란트 연대의 팔 견장과 군악대 깃발입니다. 


독일군 코스프레를 하더라도 절대로 SS 부대 견장이나 깃발을 사용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전쟁 피해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