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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히틀러의 마지막 기회, 모스크바 전투 (6부) - 구데리안의 툴라공격

by uesgi2003 2016. 1. 9.



효녀연합 홍승희씨가 재미있는 퍼포먼스를 많이 했었군요.


5부 주콥의 시간싸움에서 이어집니다.


모자이스크 방어선 북쪽의 로코솝스키Rokossovsky16군은 독일 46군군단을 상대로 볼로콜람스크Volokolamsk 방어전을 벌였다. 독일 211전차사단 선봉대가 도착하기 며칠 전에 소련 316보병사단이 중앙아시아에서 도착했다. 이밖에도 27, 28전차여단과 대전차포연대 2개를 지원받았다.



2차대전 소련은 마치 마르지 않는 샘처럼 병력을 보충했는데 초중반에는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에서 중후반에는 탈환지역에서 병력을 대거 보충했습니다. 영화 에너미 엣더 게이트가 병력동원을 잘 재현했습니다.

전쟁초반 러시아와 스탈린에게 반감을 가진 지역이 많았기 때문에 독일이 해방자 역할을 했다면 상당한 병력을 모아 전쟁의 양상이 크게 달라질 수 있었겠지만 점령군으로 슬라브민족을 열등민족으로 차별해 오히려 스탈린에게 큰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46군군단은 1020일까지도 준비가 안되어서 로코솝스키에게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2개 전차여단은 T-3476.2mm를 참호에 배치해 독일 전차사단의 공격을 일주일이나 막아냈다. 독일군은 원칙대로 10전차사단을 우회시켰지만 진흙탕이어서 기어가는 속도였다.



T-34 초기형은 실루엣도 낮아서 참호에 틀어박히면 상대하기 곤란했을 겁니다. 


때마침 므텐스크에서 카투콥의 4전차여단이 도착해 16군의 방어선을 지탱해주었다46군군단은 격전 끝에 29일, 볼로콜람스크를 점령했지만 소련군은 이미 빠져나간 후였다.

 

모자이스크 방어선을 돌파한 전차군 4는 턱없이 부족한 보급에 발목을 잡혀 추격에 나서지 못했다. 모자이스크와 볼로콜람스크에서 격전을 치루며 귀중한 연료와 탄약을 거의 소비했고 소련군은 뜻밖의 귀중한 재정비 시간을 가졌다.

중앙집단군은 10월에만 72,870(전사 13,669), 250대의 전차와 돌격포를 잃었다. 폰 보크는 모스크바 100km 앞까지 전차사단 5개를 전진시켰지만 지연전과 보급난 때문에 모스크바 앞에는 50km의 방어선이 다시 만들어졌다.

소련군도 절대절명의 지연전에 11개의 전차여단을 모두 투입했었기 때문에 주콥(주코프)은 상처투성이로 곳곳에 흩어진 전차중대가 전부였는데 독일군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라인하르트와 회프너는 사단과 여단장이 알아서 판단하라고 위임했고 폰 보크는 뱌즈마를 함락시킨 후에 전차전력을 집중시키지 않고 오히려 칼리닌과 같은 이차 목표물에 전력을 분산시켰다.

 

주콥이 10월 내내 악전고투를 벌이며 지연전을 벌이는 동안 최고사령부는 17개 전차여단을 새로 마련해 뱌즈마-브랸스크에서 궤멸당한 전차전력을 대부분 복구했다. 대부분 1~2주만에 편성되었기 때문에 기본훈련이 전부였고 패배를 몰라 사기가 높은 편이었다. 

원래 17개 여단(여단별 67)이면 1,138대의 전차(KV-1 119, T-34 510) 편제였지만 194110월 당시 상황이 워낙 다급했기 때문에 KV-1 91대와 T-34 185대가 전부였고 나머지는 창고나 훈련소에 있던 고물전차이거나 영국제 렌드리스Lend-Lease로 보충했는데 그나마도 부족해서 31대만으로 여단을 편성했다.

아직은 T-34가 독일군 전차에 비해 막강했지만 공장에서 곧바로 전선에 투입되어 기본적인 부품이나 공구도 없었고 트랙이나 로드휠이 망가지면 현장에서 수리할 방법이 없었다.

 

구데리안의 툴라공격 1022~1130

 

구데리안은 2주 동안 므텐스크에서 움직이지 않다가 10월 마지막 주에 다시 전차군 2를 움직였다브랸스크전선군의 26군은 므텐스크 주변에 6근위보병사단과 11전차여단으로 강력한 방어선을 폈지만 24군군단의 2개 전차사단이 툴라방면으로 투입할 수 있는 전부였다. 독일 48군군단이 쿠르스크 방면에서 동진하고 있었고 47군군단은 연료부족으로 오렐과 브랸스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남쪽 오렐에서 툴라방면으로 모스크바를 노리던 구데리안의 전차군 2의 상황입니다.


구데리안은 48군군단으로 26군을 밀어내기로 하고 1022일에 므텐스크 북쪽을 공격했다. 3, 18전차사단의 남은 전차 150대를 모두 에버바흐Eberbach전투단에 모았다. 정면돌파가 실패하자 므텐스크 서쪽의 강을 건너 우회했다.

1021~22, 보병중대가 고무보트를 타고 40m 너비의 강을 건너 교두보를 확보한 후에 공병이 16톤의 다리를 연결하기 시작했다. 3시간 후에야 첫 번째 전차가 강을 건넜다.

 

소련군은 교두보에 포탄을 퍼부었지만 11전차여단으로 독일전차가 넘어오기 전에  반격하지 못하고 오후 1시가 되어서야 7대의 T-34가 선봉대로 향했다. 양측에서 각각 2대씩 파괴되었는데 갑자기 소련전차가 후퇴하며 독일군이 밤을 새울 수 있는 마을을 넘겨주었다.

밤사이에 나머지 전투단이 강을 건넜고 날이 밝자 므텐스크를 뒤에서 공격해들어갔다. 6근위보병사단의 방어선을 무너트리는데 하루가 걸렸지만 24일 오후에는 므텐스크-툴라 도로에 진입해 패주하는 소련군의 전차 5대를 파괴했다.

이번에도 연료가 전투단의 발목을 잡았다. 일반 수송트럭은 강 주변의 진흙탕을 건널 수 없었기 때문에 귀중한 Sd.Kfz.9 반궤도 트럭을 차출해 9,000리터의 연료를 끌고 다니게 했다. 그래봐야 전차 1개 대대분에 불과했다.



중화기와 보병을 수송하거나 전차를 회수해야 할 귀중한 18톤 트럭이 전차대신 연료통을 끌고 다녔습니다.

 

25일 오전, 에버바흐는 남은 연료로 선발대를 만들어 26군을 툴라방면으로 밀어냈다. 26군은 독일군 길목에 강력한 지뢰밭을 만들어 놓고도 우회로를 차단하지 않아 선발대는 체른Chern마을에 쉽게 들어섰다.

에버바흐전투단은 연료를 보급받아 다시 전속력으로 툴라를 향해 진격했다. 보병부대는 내버려두고 전차부대만 상대하며 하루 20km를 전진하면서 드디어 272,000멍의 도시 툴라를 눈앞에 두었다.

툴라에는 민병대와 대공포부대가 고작이었다. 소련군은 37mm85mm 대공포로 전차를 막아보려 했지만 4호전차의 7.5cm 대인탄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30일 새벽 5, 60대의 전차와 보병대대로 툴라 남쪽 끝의 소련 방어선을 공격했는데 예전이라며 바로 무너졌을 민병대가 끈질긴 저항을 하며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탄약이 바닥난데다가 보병이 더 필요했던 에버바흐는 외곽으로 물러나 재정비했지만 그것으로 기회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날 밤, 32전차여단이 34대의 전차(KV-1 5, T-34 7, T-60 22)와 보병대대를 이끌고 먼저 방어선에 합류했고 그 다음에는 3개 보병사단이 더 보강되었다.

32전차여단이 31일 오전에 반격에 나섰다가 7대의 중전차를 잃었고 에버바흐는 방어태세로 전환했다. 구데리안의 선봉대는 모스크바 남쪽 160km에서 못 박혔다.

11월 첫 주, 비가 계속 내리고 얼음이 얼면서 보급상황은 더 심각해졌고 구데리안은 노획한 말썰매까지 동원했다. 매서운 추위가 닥치자 독일군의 사기도 함께 떨어졌고 오히려 소련군의 중대 또는 대대규모의 반격이 이어졌다.

 

1111, 땅이 완전히 얼어붙자 24군군단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전차군 2는 넓은 지역에 분산되어 툴라 방어선을 돌파할 병력이 크게 모자랐다. 가장 가까운 기차역이 130km 후방인데다가 오렐과 툴라 사이의 도로도 워낙 열악해서 보급상황은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다.

툴라 방어선은 그 동안 더욱 두터워졌다. 50군의 보병사단 6개가 참호에 틀어박혔고 1132전차여단 외에 21대의 영국군 발렌타인Valetine전차가 보강되었다.

구데리안은 폰 클루게von Kluge4군의 지원을 받아 3, 417전차사단으로 마지막 협공을 벌이기로 했다. 3개 사단의 전차 102대를 모아 1118일 새벽에 툴라 남동쪽을 공격했다. 7일에 첫 번째 동계군복이 도착했지만 턱없이 부족해서 25%만 외투와 귀마개를 착용할 수 있었다. 나머지는 영하 25도의 추위에 하계군복만으로 야외에서 버텨야 했다.



전차는 흰색 페인트로 위장했지만 전차병은 여전히 검은색 하계복장입니다.



노획한 발렌타인전차를 검사하고 있군요. 16톤 경전차이지만 40mm 포로 독일군 경전차보다 강력했습니다.

 

독일군의 돌파구에는 시베리아 부대로 유명한 413보병사단이 버티고 있었는데 한꺼번에 밀어닥치는 전차부대를 막지는 못했다. 급하게 달려온 전차도 8.8cm의 포격을 맞고 불탔다. 방어선을 돌파한 3전차사단 50대가 툴라로 선회했고 17전차사단 15대는 북쪽으로, 4전차사단 35대는 스탈리로고르스크Stalinogorsk로 전진해 마을을 점령했다.

이 마을은 원래 우측을 엄호하기 위한 목표물이었지만 소련군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 마을을 탈환했고 결국 격전장이 되었다. 4전차사단 1중대가 공격에 나섰다가 8대 전차와 중대장을 잃고 전멸했다.

17전차사단은 베넵Venev마을을 공격했는데 흥미로운 기록이 남아 있다.


 

이제 신바람이 시작되었다… 52(KV-1)이 불타올랐다. 장관이었다. 더 멀리 2대가 더 주저 앉았다. 13대를 공격해 한 대를 부쉈다. 트럭도 불타올랐고 러시아 보병이 많이 죽었다. 전차로 깔아 뭉갰다. 최고의 순간이 시작되었다. 2대의 52톤을 공격했고 토끼 사냥이 시작되었다.

포탑에 직격탄을 맞고는 달아났다. 전력을 다해 20m 거리로 추격했다. 30분 정도 달리다가 궤도가 벗겨지며 도랑에 빠졌다. 우리는 30발을 퍼부었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날 우리 전차는 110발을 쐈다포탄이 완전히 바닥났다.


 

베넵을 점령했지만 이제 움직일 수 있는 전차는 13대 전부였다. 반면에 소련군은 극동에서 급히 호출한 112전차사단의 T-26 200대가 막 도착했다.

 

122, 4전차사단과 그로스도이칠란트 보병연대가 툴라 뒤로 돌아 도시를 포위하는데 성공했지만 바닥난 전력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4군의 지원병력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3일이 되어서야 마침내 툴라를 포기하고 방어태세로 전환했지만 너무 늦은 결정이었다.

툴라전투가 한창이던 때에 구데리안이 한달 전에 요청했던 최고사령부 전차위원회가 도착해 노획한 T-34를 면밀히 검토했다. 구데리안은 주력전차인 3/4호보다 더 강력한 무장, 방어와 기동력을 갖춘 신형전차를 요구했고 위원회는 베를린으로 돌아가 크룹, 벤츠, 헨셀과 만에게 30톤 무게에 60mm 경사장갑의 신형전차 개발을 의뢰했다. 이렇게 해서 5호전차 판테르Panther가 탄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