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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히틀러의 마지막 기회, 모스크바 전투 (5부) - 주콥(주코프)의 시간싸움

by uesgi2003 2016. 1. 6.


여러 가지 배경이 있겠지만 우선 사라진 전차보다 훨씬 많은 전차를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공산집단농장과 공장체제였던 소련은 트랙터 생산시설이 무척 많았기 때문에 전차생산량에서 독일을 압도했습니다.

하리코프, 레닌그라드, 스탈린그라드 등의 주요 전차공장이 독일군의 공격을 받아 가동을 멈췄지만 그보다 앞서 주요 중공업시설을 동쪽 깊숙이 옮겨서 전차가 쏟아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딱 필요한 정도만 갖춘 단순무식한 T-34였기에 상대적으로 짧은 시기, 적은 비용으로 양산이 가능했습니다. 



1945년 승전퍼레이드이기는 하지만 저 끝에 안 보이는 곳까지 T-34/85입니다. 



반면에 독일은 1942년 말까지도 국내경제와 국민을 생각하며 총력전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독일의 1941/1942년 전차 생산량과 소련의 전차 생산량을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개전 2년차에도 겨우 1,200대만 더 생산했습니다. 



소련은 2년차에 19,000대를 더 생산했고 주력전차는 독일군전차 전체보다 3배 가까이 생산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차보다 전차병이 부족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독일군은 전차가 턱없이 부족했고 다급한 전선 상황때문에 전차병을 보병으로 돌리는 황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것으로도 부족해서 영미연합군의 랜드리스 물자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1941년 말부터 전장에 영국의 마틸다Matilda와 미국의 M3 Lee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틸다와 리 전차는 T-34에 비해 나을 바가 없었지만 독일의 단포신 3/4호의 상대로는 버거웠는데 아프리카 전선의 롬멜도 무척 고생했던 전차입니다.


두 번째 사진의 리 전차는 많이도 맞았군요.




4부의 주콥의 시간싸움에서 이어집니다. 


독일군의 추격이 멈췄고 소련최고사령부는 귀중한 시간을 잘 활용했다. 기차편으로 도착한 19전차여단은 전선으로 곧바로 투입되었다. 1010일에는 32보병사단 선봉대가 모자이스크에 내리기 시작했다. 시베리아에서 이동한 32사단은 15,000명의 병력과 사단포뿐만 아니라 훈련도 마친 상태였다. 주콥도 부관 코넵과 함께 서부전선군(예비전선군 패잔병을 흡수)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뱌즈마 포위전투를 거의 끝냈고 10전차사단의 전투단이 모자이스크 방면으로 투입되었다. 쿤첸은 1920전차사단을 유코놉으로 보냈지만 도로는 진흙탕으로 변해 기어가는 정도였다. 병력도 병들고 탈진해서 이전의 공격성이 사라졌고 덕분에 소련은 한결 부담을 덜 수 있었다.

 

11, 렐류센코 중장이 모자이스크에 도착해 5군의 지휘를 맡았다. 다시 9전차여단이 도착해 말로야로슬라베츠의 17전차여단에 합류했다. 서부전선군은 이제 200대 이상의 전차(T-34 60)로 모스크바의 길목을 차단했다. 모스크바전투에서 눈, 비와 진흙이 독일군을 막았다는 오해가 많은데 중앙집단군의 돌격포 몇 대로는 도저히 돌파할 수 있는 방어선이 아니었다.

그래도 보병이나 포병지원이 없는 소련 전차부대 단독의 방어선이었기 때문에 독일군의 대규모 기동전술이 제대로 진행된다면 아직은 해볼만한 상황이었다. 10전차사단의 3호전차 대대가 18전차여단을 우회해 기습공격했다. 독일군은 정석대로 강력한 적의 방어선을 만나면 우회하고 공군을 불렀다.

18전차여단은 32대를 잃고 8대만 탈출했다. 19전차여단도 12대를 잃고 후퇴했다. 10전차여단의 7연대는 152대의 전차 중 20대를 잃었지만 5군의 전차부대를 차례로 밀어내며 전진하고 있었다.

 

주콥은 남은 병력을 모스크바 외곽의 요충지 3곳에 집중배치하기로 했다. 뱌즈마 포위망을 탈출한 로콥솝스키Rokossovsky16군은 볼로콜람스크Volokolamsk, 렐류센코의 5군은 그대로 모자이스크를, 3343군 패잔병은 말로야로슬라베츠를 방어하기로 했다.

다른 지역은 포기한다는 의미였고 중앙집단군은 소련군이 일부러 비운 지역으로 계속 전진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진흙도로나 연료와 상관없던 보병사단이 12일에 칼루가Kaluga, 13일에는 르젭Rzhev을 점령했다.



요즘은 구글지도덕분에 전사공부가 너무 편해졌습니다. 이전에는 자료를 읽을 때에 해당 국가 지도를 펼쳐도 어느 지역인지를 알 수가 없었죠.

가운데 원이 모자이스크, 가장 아래가 말로야로슬라베츠입니다. 

 

독일최고사령부는 소련군이 대대적인 후퇴로 판단하고 호트 전차군 341군군단에게 북쪽으로 진격해 서부전선군의 2229군을 섬멸하고 칼리닌Kalinin(지도 검은 화살표)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칼리닌은 다음 작전에서 서부와 북서전선군의 사이를 돌파할 좋은 출발점이었다.

눈과 비가 마르면서 1전차사단(겨우 50대의 전차만 가동) 일부가 216,000명의 도시 칼리닌으로 향했다. 41군군단의 보급사정이 워낙 심각했기 때문에 겨우 몇 개의 부대만 떼어 칼라닌공격을 지원했다. 36기계화보병사단도 2개 대대를 내놓았지만 다른 방향으로 따로 진격했기 때문에 칼리닌공격은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칼리닌에는 전차가 없었고 방어도 허술했지만 14일 오전에 도시에 들어서자 마자 전차 3대를 대전차포에 잃었다. 다행히 지원 온 2호 화염방사전차덕분에 건물에 틀어박힌 소련군을 소탕할 수 있었다. 오후 630분이 되자 칼리닌뿐만 아니라 볼가Volga강의 거대한 철교까지 고스란히 손에 넣었다.

칼리닌은 독일전차부대만으로 점령한 다섯 번째 도시가 되었다. 소련 최고사령부는 칼리닌으로 급히 병력을 이동시켰다. 북서전선군의 참모장 니콜라이 바투틴Nicolai Vatutin 중당은 보병사단 2개와 기병사단 2개의 전술집단을 편성해 칼리닌으로 보냈는데 그 중에는 전차 49대의 8전차여단(KV 1, T-34 10, T-40 32)가 핵심전력이었다.

로트미츠롭Rotmistrov여단은 하루 만에 250km를 달려 칼리닌에 도착했지만 한 발 차이로 1사단에게 도시를 내주었다.

 

로트미츠롭은 칼리닌 북서쪽 칼리키노Kalikino에서 보병 대대 몇 개와 합류한 후, 바부틴의 병력이 도착하는 대로 칼리닌을 탈환하려고 했다. 151145, 전차 17대와 돌격포 몇 대의 지원을 받은 기계화교도Lehr여단 900이 서쪽으로 접근 중이었지만 로트미츠롭 부대의 존재는 모르고 있었다.

로트미츠롭연대는 강행군으로 인한 탈진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양 측면을 기습해 전차 3, 장갑차와 트럭 8대를 파괴하고 독일군을 다시 칼리닌으로 몰아넣었다. 몇 시간 후에 독일군은 전차중대로 다시 공격해왔고 다시 KV-1의 우월한 공격력으로 2대를 파괴했다.

16일 오전, 루프트바페가 폭격한데다가 1전차사단이 우측으로 선회해 여단지휘소를 공격하자 명령에 불복하며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연료가 바닥났거나 손상된 31대의 전차를 버리고 후퇴하자 교도여단이 20km를 진격해 트레르챠Tvertsa강의 다리를 확보했다.

 

코넵이 군법으로 처형하겠다고 협박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전선으로 돌아가 독일군의 진격을 기다렸다. T-34 한대가 독일 전투단 지휘관의 장갑차를 발견하고 파괴해 선봉대를 막아세웠고 로트미츠롭은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소련군은 남쪽에서도 칼리닌을 탈환하러고 시도했다. 모스크바에 막 도착한 21전차여단은 다시 기차에 올라 칼리닌 탈환전투에 합류했다. 레소보이Lesovoi여단은 T-34/76 19대와 T-34-57 전차킬러 10, BT 20, T-60 10, Zis-30 57mm 자주포 4대로 무장한 정예부대였다. 연대와 대대장도 노몬한과 핀란드침공에서 훈장을 받은 베테랑이었다.

21여단은 자비도노Zavidono에서 내린 후에 칼리닌 남쪽 30km의 투르기노보Turginovo 집결지로 향했다. 레소보이는 아무런 지원 없이 남쪽에서 전차만으로 칼리닌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017일 새벽, 21전차여단이 둘로 나뉘어 칼리닌으로 북진하다가 때마침 칼리닌으로 향하던 독일 36기계화보병사단과 마주치고 격전을 벌였다. 탈환공격 한 축은 연대장이 전사하며 36사단에 막혔지만 다른 한 축은 칼리닌 비행장에 난입해 활주로 있던 Ju-52 몇 기를 파괴했다.

정신을 차린 전차엽병Panzerjager이 반격하고 활주로에서 오른 Bf-109E 전폭기가 소련전차대대를 폭격했다. 전차가 움직이지 않자 대대장은 항복대신에 자살을 선택했다. 9대의 전차가 시내로 진입했지만 연대장과 대대장이 전사했기 때문에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던 독일도 참 한심스러운 처지였습니다. 노획한 프랑스 구형전차 위에 체코 4,7cm를 얹어 전차엽병부대가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전중후반까지도 용도폐기된 1/2/35/38전차에 소련군 대전차포를 얹어 사용했습니다. 




8대의 전차가 파괴되고 T-34 한 대가 그대로 도심을 통과해 북동쪽의 소련군 방어선으로 달려가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21전차여단은 84대의 트럭, 13대의 장갑차, 10문의 포와 몇 대의 전차를 파괴한 대신에 21대를 잃고 전차에 올라타 함께 이동하던 보병대대도 전멸했지만 연료수송트럭을 대부분 부쉈기 때문에 칼리닌 주둔부대는 보급난에 시달렸다.

 

10월 중순까지 러시아 주요 도시를 점령했는데도 태풍작전은 점차 힘을 잃어갔다. 철도수송로는 중앙집단군의 전방에서 한참 뒤에 있었고 진흙탕 길을 따라 고통스러운 보급전쟁을 벌여야 했다. 전방의 전차부대에서 뱌즈마까지 왕복하는데 일주일씩 걸렸다. 설상가상으로 뱌즈마는 필요한 보급량의 1/3만 가지고 있었다. 3전차군의 보급난은 특히 심각했는데 수송트럭이 진흙탕을 오가며 연료를 소비하는 악순환이 벌어졌고 결국 탄약조차 제대로 실어 나르지 못했다.

칼리닌에 있던 1전차사단은 40%의 전차만 탄약을 완충할 수 있을 정도였다. 공군의 공수로 상황이 조금 나아지자 최고사령부는 41군군단에게 서쪽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지만 1018~21일 동안 소련군 보병사단 5개와 로트미츠롭의 전차에 휩싸여 공격을 당했다. 결국 포위망을 뚫고 간신히 칼리닌으로 되돌아 왔는데 1전차사단은 750, 60대의 전차말고도 많은 차량을 잃었는데 연료부족으로 버리고 온 것이 훨씬 많았다.

칼리닌 부근에서 벌어진 격전으로 41군군단은 모스크바로 진격하는데 필요한 보급품을 모두 소진한데다가 극심한 피해까지 입어서 칼리닌 방어로 태세를 전환했다. 

 

최고사령부는 칼리닌과 쿠르스크Kursk 등의 이차 목표에 전력을 소비한 반면에 폰 보크는 처음부터 끝까지 서부전선군이 방어선을 굳히기 전에 얼마 안되는 전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점점 마지막 기회가 멀어지는 것을 느낀 그는 모자이스크에서 모스크바로 바로 돌진하기로 했다.

렐류센코는 4일간의 휴식을 이용해 보로디노Borodino(모자이스크 바로 앞)에 임시 방어선을 만들었다. 보로디노는 1812년 러시아를 침공한 나폴레옹에게 큰 피해를 입혀 결국 침공을 무산시킨 유명한 전장이었다. 전차여단이 12~13일 이틀 동안 기동전으로 라이히사단과 10전차사단을 방해했지만 대부분의 전차를 잃었다.

렐류센코는 32보병사단과 121대전차포연대로 로가체보Rogachevo와 옐냐Yelnya에 이중 방어막을 만들었고 13일에 라이히사단의 선봉대와 만났다. 라이히사단은 두 번에 걸친 무력정찰에서 6대의 전차를 잃고 퇴각했다.

 

하우저는 소련의 단단한 방어에 놀라 이튿날 오전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기로 했다. 렐류센코는 측면을 방어할 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라이히사단은 퓌러연대와 전차대대가 우회하고 수투카와 30문의 네벨베르퍼의 폭격과 함께 여단규모로 정면공격해서 옐냐와 로가체보를 점령했다.

렐류센코는 32보병사단의 나머지 병력, 76.2mm 대전차포 2개 대대와 마지막 남은 20전차여단을 투입해 방어선 붕괴를 막으려고 했다. 여단장 오를렌코Orlenko는 패주하는 병사를 막아세우다가 전사해 소련군의 사기나 규율이 얼마나 약한지를 보여주었다.

 

1015, 독일군은 렐류센코의 지휘소까지 접근했고 렐류센코는 병력을 모아 독일군 전차를 막아냈지만 중상을 입고 레오니드 고보롭Leonid Govoroc으로 교체되었다. 대전차지뢰와 대전차포 덕분에 독일군을 막아낼 수 있었다. 독일군도 카츄샤 로켓포에 하우저가 큰 부상을 입고 빌헬름 비르리히Wilhelm Bittrich로 교체되었다.



명작 멀고 먼 다리에서 너무 멋있게 나왔던 바로 그 인물입니다.


독일군은 라이히사단과 1전차사단으로 더욱 맹공을 가했고 32보병사단의 방어선에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마침 이 때에 20전차여단의 T-34 29대와 57mm 대전차포 8문이 도착해서 무너지는 방어선을 막았다.

17일 오전 630, 10전차사단의 전투단이 합세하면서 결국 방어선이 무너졌다. 5군의 잔여병력이 모자이스크로 후퇴했고 도이칠란트Deutschland연대가 18일에 모자이스크를 점령했다. 이제 모스크바까지의 거리는 겨우 90km였지만 슈툼메의 40군군단은 보로디노전투에서 손실이 컸기 때문에 이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보로디노에서 벌어진 6일간의 전투는 대혈전이었다. 10전차사단은 776명이 사상되고 거의 대부분의 전차가 파괴되거나 손상을 입었다. 1943년에 있을 쿠르스크전투의 축소판으로 독일전차부대가 소련의 대전차지뢰와 대전차포 진지를 공격한 첫 번째 전투였다.

라이히사단은 1,242(전사 270)을 잃고 기계화보병연대 중 하나를 해체해야 했다. 렐류센코는 보로디노에 투입했던 10,000명과 전차를 대부분 잃었지만 주콥이 서부전선군을 재건할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보로디노를 내준 모스크바는 공황에 몰려 정부기관 일부가 쿠이비쉡Kuybyshev으로 이전했다.

 

주콥의 모자이스크 방어선은 10월 말에 모두 무너졌고 독일 57군군단이 느리게 전진했는데도 43군은 말로야로슬라베츠에 단단한 방어선을 마련하지 못했다. 소련은 중앙아시아에서 도착한 312보병사단과 5, 9, 17, 24전차여단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폈고 57군군단은 1920전차사단으로 차례로 무너트렸다.

312보병사단이 포위궤멸당했고 17전차여단장은 중상을 입었다. 20전차사단은 태풍작전 직전 55대의 38전차와 14대의 4호전차를 받은 덕분에 큰 힘을 발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