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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러일전쟁

러일전쟁 뤼순항 전투 - 개전 (1부)

by uesgi2003 2016. 1. 16.


쯔위라는 대만출신 연예인이 우리나라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대만 자국기와 테극기를 흔들었다고 소속사에서 별 희한한 짓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도대체 외국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자국기와 태극기를 잠깐 흔들었다고 CF 모두 내리고 사과 동영상까지 공개하다니요 

아무리 중국의 위세가 하늘을 찌른다고 해도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아무래도 제가 평행우주에 와 있는 모양입니다. 


자고나면 상식이 조금이라도 있던 원래 우주로 돌아가있기를 바랍니다.

 


아! 러시아판 사도세자는 내일 마무리될 예정입니다.


러일전쟁 - 뤼순항 전투 (1부)


러시아정부는 오랜 동안 투르키스탄Turkestan합병과 시베리아 개발에 몰두했기 때문에 극동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19세기 중반부터 중국의 2차 아편전쟁을 틈타 청에게서 아무르Amur (헤이룽, 흑룡)강 왼쪽 강변(1858년 아이훈Aigun조약)을 받아내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청이 3차 아편전쟁에서 패배하면서 1860년 베이징Peking조약으로 다시 우수리크라이Ussurikrai(현재의 프로모례Primorye, 연해주)을 내주었다. 러시아는 즉시 니볼라엡스크나아무레Nikolaevsk-on-Amur와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 항을 만들고 극동에 발판을 마련했다.



러시아와 중국의 오랜 분쟁지역으로 서로 주고 받았던 아무르강 일대입니다.



화살표가 블라디보스토크, 붉은 원이 뤼순항입니다. 러시아함대는 두 곳으로 나뉘어 오도 가도 못했으니 참 난감한 처지였습니다. 

 

새로 합병한 지역은 상당한 경제적 가치가 있었고 시베리아횡단철도를 놓기로 결정했다. 최종 도착역이 블라디보스토크인 횡단열차는 1891년에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만주로 진출하는 기반도 되어서 중국과 일본의 심한 반발을 샀다.

청일전쟁 후에 1895년 시모노세키Simonoseki조약에 따라 청은 일본에게 랴오둥Liaotung(요동)반도와 함께 전략요충지인 뤼순항Port Arthur(여순)와 다롄Talien을 넘겨주었다.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을 지지와 함께 강력하게 항의해 일본이 랴오둥을 포기하게 만들고 만주와 중국북부에 확고한 입지를 만들었다.



지금이나 그 때나 다를 바가 없죠. 남의 전장이었던 한반도입니다.



 

러시아는 한동안 경제침투에 주력했고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청은 1986년에 러시아에게서 전쟁배상금을 빌렸고 리-로바놉Li-Lobanov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는 전시에 중국항구를 사용하고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중국동부철도와 연결시킨다는 내용으로 막대한 이익을 주는 불평등조약이었다.

1898, 러시아는 다시 랴오둥반도의 남쪽끝 지역을 강제임차했고 뤼순항과 하얼빈Harbin 연결철도 허가도 받아냈다.

그렇지만 중국북부로 확장하는 정책은 일본과 충돌을 빚었다.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포기하면서 조선은 자신이 점령하겠다는 양보를 받아냈다. 만주를 확보한 러시아는 1895년 이후 조선도 탐내기 시작했다. 1898, 두 나라는 조선의 자주를 보장하겠다고 합의했지만 누가 봐도 믿기지 않는 약속이었다.

 

일본은 한 발 물러선 후에 본격적인 준비를 했다. 중국의 전쟁배상금을 바탕으로 대대적인 군사개혁을 단행하고 1902년에는 영국과의 동맹관계도 성공시켜 러시아의 동맹인 프랑스를 견제했다.

반대로 러시아는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영일동맹에 자극받아 1902년에 맺은 청과의 조약에 따라 18개월내에 만주에서 러시아군을 철수하기로 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러시아 정부 자체가 문제거리였다.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고 만주에 평화적으로 접근하자는 외무상 람즈도르프Lamzdorf와 일본과 충돌하더라도 조선(삼림개간)까지 확장하자는 사업가 베조브라좁Bezobrazov이 맞섰고 황궁의 많은 사람이 후자를 지지했다.

베조브라좁은 차르를 설득한 후에 외무상을 물러나게 만들고 1903년에는 극동총독으로 가까운 관계의 알렉세엡Alekseev제독을 앉혔다.

 

차르직속인 극동총독이 임명되면서 그렇지 않아도 팽팽한 긴장감에 불을 질렀다. 일본은 러시아가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완공하고 극동함대를 보강해 만주를 완전히 차지하기 전에 결전을 각오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국제상황도 전쟁쪽이었다. 영국과 미국은 러시아의 확장을 우려했기 때문에 일본의 결정을 은근히 지지했다. 터키와의 동맹을 욕심 내고 있던 독일도 러-프동맹이 무너지기를 원했다. 결국 프랑스만 러시아의 우방이었는데도 러시아 정가는 심상치 않은 국제사회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일본 정도는 쉽게 누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두 나라의 협상은 진전이 없었다. 러시아는 만주에서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았고 심지어 조선 제물포에 전함을 들여보냈다. 일본은 계속 조선의 후원자역을 주장했지만 러시아는 인정하지 않았다.

1904113, 일본은 최후통첩에 가까운 외교통지문을 러시아 정부에 전달하며 조선의 비무장화와 중국국경보장 조건을 철회했다. 러시아는 아직 전쟁준비가 제대로 안되었기 때문에 시간을 벌기 위해 협상을 벌였지만 조선에 대한 일본의 요구를 처음부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은 러시아의 속내를 알아채고 190424일에 개전을 결정했다. 26, 일본은 러시아와의 외교를 단절하고 선전포고도 없이 제물포와 뤼순항의 러시아전함을 공격했다.

 

시간을 뒤로 돌려, 1885년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 (청과의 텐진조약, 조선과 러시아의 수호통상조약 등)이 벌어지자, 일본정부는 대륙진출은 곧 러시아와의 충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일본은 조선과 중국북부 진출은 기정 사실이라 언제일지 모르는 러시아와의 충돌을 대비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1870년대의 군사개혁덕분에 신식육군과 해군을 보유했고 1894~95 청일전쟁에서 충분한 효과를 확인했다. 그렇지만 러시아는 청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대국이었다. 일본은 병력을 늘리는 동시에 현대화시켜야 했다.

 

청일전쟁에서 해군의 중요성을 확인했고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도 해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 분명했다. 1892년 말까지, 전함 2, 순양함과 경순양함 1척을 건조했다. 청일전쟁 중에 두 번째 순양함을 구입했다. 1896년에는 10개년 해군강화계획을 시작했다. 전함 4, 순양함 9(중순양함 4)을 건조하고 해군기지, 조선소와 군수공장을 마련한다는 야심만만한 계획이었다.

국력을 기울인 계획 끝에 1903년이 되자, 전함 6, 장갑순양함 6, 순양함 6, 경순양함 1, 포함 1, 구축함 20, 어뢰정 63척의 막강한 해군을 보유하게 되었다. 요코스카, 구레와 사세보 해군기지도 확장되었고 새로 마이즈루 기지도 완공되었다.

나가사키의 미츠비시, 고베의 가와사키 등의 사설 조선소나 탄약공장에도 상당한 예산을 투입했다.

해군보강계획은 당시 일본의 경제력에 비해 상당한 예산인 총 21200만엔이 투입되었다. 덕분에 최소한 극동에서는 러시아해군과 맞먹는 전력을 갖췄다.

 

일본해군은 개전직전, 최신전함 6척과 구형전함 1, 최신 무장순양함 8, 다양한 배수량의 순양함 17(대부분이 신형, 2척 추가직전), 경순양함 10(신형 3), 어뢰포함 1, 포함 7, 구축함 19(3척 추가직전), 어뢰정 80(5척 추가직전)을 동원할 수 있었다.

사세보항이 일본함대의 본거지가 되었고 구레, 요코하마, 마이즈루, 하코다테와 타케시키항도 동원되었다. 조선 항구 중에 제물포와 부산이 기지로 사용되었다.

전함뿐만 아니라 수병의 훈련도 완벽에 가까웠고 사기는 그 어느때보다 높았다.

 

(일본 입장의)천황이 총사령관이었지만 실제로는 해군장관에게 위임되었는데 1904년 당시에는 야마모토 곰베이가 맡고 있었다. 해군참모총장인 이토 유코제독과 전략결정을 협의했지만 연합함대Combined Fleet의 지휘는 청일전쟁영웅 도고 헤이하치로Togo Heihachiro부제독의 몫이었다. 그는 경험과 능력 모두에서 뛰어난 지휘관이어서 해군에서는 명망이 높았다.

처음에는 48시간 동안만 60척의 상선을 빌려 3개 사단과 보급품을 대륙으로 수송하다가 병력증원과 보급을 상선단에 맡겼다.


건조 중

** 1904210일에 편성된 전대. 이후 3함대에 편입

*** 19045월에 편성된 전대. 이후 2함대에 편입

 

육군도 증강되어 1894년보다 3배 이상 늘어났다. 1904년 초, 12개 보병사단(사단별 19,000), 황실근위사단, 독립기병여단, 중화기여단, 13개 예비여단(여단별 8,000), 20개 요새수비대대, 식민지군단(주로 대만주둔, 6개 보병대대, 기병과 포병부대 약간), 공병과 군수부대를 갖췄다.

일본은 35만 명 이상의 정규병력, 1,080문의 야포, 120~150문의 중포 뿐만 아니라 언제라도 동원할 수 있는 85만 명의 예비군이 있었다.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발생할 피해를 빼고도 1백만 명은 더 동원할 수 있었다.

청일전쟁의 영웅이자 존경받는 오야마 이와오Oyama Iwao원수가 육군사령관이었다.

 

일본은 청일전쟁 계획을 약간 수정해, 먼저 조선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낸 후에 중국남부로 진출한다는 계획이었다. 랴오둥반도뿐만 아니라 극동에서 러시아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뤼순항을 점령하기로 했고 무엇보다 제해권이 중요했다.

일본은 뤼순항의 러시아함대를 기습공격해 최대한 피해를 입히고 뤼순항에서 나오지 못하게 봉쇄하기로 했다. 기습이 성공하면 조선에 병력을 안전하게 상륙시키고 소수의 러시아군을 밀어낸 후에 압록강을 넘을 수 있었다.

만주에서 결전이 벌어지겠지만 러시아의 병력동원은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사이에 만주 깊숙이 침투하고 해군이 봉쇄한 뤼순항을 점령하기로 했다. 뤼순항을 점령할 때까지 러시아군의 반격을 막기만 하다가 뤼순항 공격군과 함께 공세로 나서 러시아군을 만주에서 완전히 몰아낸다는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시간이 관건이었다. 최대한 많은 병력을 집중시켜 러시아군이 집결하기 전에 하나씩 궤멸시켜야 했다. 해군도 마찬가지였다. 러시아의 발트해함대가 합류하기 전에 뤼순함대를 반신불수로 만들어야 했다.

러시아의 막강한 군사와 경제력에 비해 일본은 아직 경제력이 취약했기 때문에 장기전은 견딜 수 없었다. 최대한 속전속결로 러시아에게 승리를 거둬야 했다.

 

일본이 막강한 러시아제국에게 덤빈다는 것은 누가 봐도 정신나간 짓이었다. 그렇지만 러시아군은 유럽과 극동에 분산되어 있었고 시베리아횡단철도가 완공되지 않은데다가 수송능력이 턱없이 부족해서 주력을 제 시간 안에 극동으로 실어 나를 수 없었다.

러시아 해군도 발트해, 흑해, 태평양 세 군데로 나뉘어져 있었고 그나마 태평양함대는 동해와 황해전력을 합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1881년 보강계획에 따라 빠르게 증강된 흑해함대 국제조약에 따라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지구 반대편의 발트해함대를 투입하기로 했다.



그래서 벌어진 황당무계한 지구 반바퀴 운항이었습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일본해군의 유령에 쫓겨 스스로 고난을 자초했습니다.

 

러시아도 무능하게 손 놓고 있지는 않았다. 극동에는 시베리아소함대만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의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된 1895년 이후 발트해함대의 상당부분을 극동으로 옮겨 두었다. 그리고 7개년 해군강화계획도 수립해서 극동에 충분한 전함을 배치하기로 했다.

좀 더 강력한 1898년 계획을 수립했지만 독일이 해군을 크게 증강시켰기 때문에 극동 대신에 발트해에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독일과 전쟁을 할 경우 극동함대를 발트해로 이동시킬 수 없지만 일본과의 전쟁에서는 반대로 극동으로 보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론상으로는 그럴 듯했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했다. 중간에 러시아의 기지가 없어서 보급을 받으려면 다른 국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고 지구 반바퀴를 항해한 함대가 제 시간에 도착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세계 3위의 해군전력을 갖춘 러시아는 발트해와 태평양 모두에서 겨우 적대국을 상대할 수준만 보유하게 되었다.

항구도 큰 문제거리였다. 러시아는 극동에 블라디보스토크와 뤼순을 가지고 있었지만 블라디보스토크는 겨울 4개월 동안 얼어붙었고 1898년에 청에게서 임차한 뤼순은 조선소가 없었다. 러시아전함을 간신히 수리할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건조선창Dry Dock만 있었다.

뤼순항의 요새도 아직 미완성이었다.


19042월 당시 뤼순항의 포대에는 아직 포가 설치되지 않았다. 포대 8, 10, 1122는 계획만 있었고 공사를 시작하지도 않았다.

BL-후장포

BLM-후장박격포

QF-속사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