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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러일전쟁

러일전쟁 뤼순항 전투 - 제물포해전 (2부)

by uesgi2003 2016. 1. 17.


러일전쟁 뤼순항 전투 - 제물포해전 (2부)


극동총독 알렉세엡제독이 극동함대 전체 지휘를 맡았다. 스타르트Stark중장이 뤼순함대를 지휘했는데 평범한데다가 수동적인 사람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소함대는 레디첸슈테인Reytsenshteyn함장은 스타르크의 지휘를 받았다.

러시아군은 일본군에 비해 훈련이 부족하다고 해도 그 차이는 크지 않았다. 오히려 지휘관의 차이가 심각했는데 러시아군은 능력보다 가문과 후원에 따라 진급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나마도 여러 전선을 이동하면서 현지사정에 극히 어두웠다.

 

러시아 극동함대는 복잡한 상황이었고 대대적인 수리가 반드시 필요하거나 사소한 수리 중인 전함이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 가동 중이었다. 뤼순항의 탄약재고는 심각할 정도로 부족했다. 반대로 석탄재고는 양쪽 기지 모두 충분했고 다른 보급품도 부족하지 않았다.


제물포

** 샹하이

 

해군은 그나마 상황이 좋은 편이었다. 1904년 초 러시아육군은 29개 군단 120만 명이었지만 극동에는 겨우 8개 사단 10만 명도 안되는 병력뿐이었다. 일본과 전쟁이 터지면 시베리아군구에서 4개 사단 24,000명을 급히 이동시키기로 했다. 서쪽의 병력을 투입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뤼순항과 랴오둥반도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방어해야 했다. 개전 후 2개월 후에 랴오둥반도에서 65,000명의 병력을 모아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4개월 후에는 시베리아 서부에서 35,000명을, 6개월 후에는 유럽지역에서 최소 60,000명을 증원한다는 계획이었다.

러시아는 이 정도 병력이 모이면 공세로 전환해서 일본군을 압록강 너머로 밀어내고 조선으로 진입할 생각이었다.

 

러시아는 일본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일본이 기껏해야 4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으며 그 중에서 25만 명만 전쟁에 투입하는 것으로 계산했다. 본토에서 조선을 거쳐 만주까지 이어지는 긴 교통로를 방어하려면 10만 명을 남겨두어야 하고 결국 최대 16만 명의 일본군만 상대하면 될 것으로 생각했다.

뤼순항을 육로로는 공격할 수 없다는 결정적인 오판도 했다. 만주전선에 대부분의 병력을 집결시키고 소규모 병력으로만 뤼순항과의 교통로를 차단할 것으로 예상했고 일본육군의 뤼순항 공격은 있을 수 없는 일로 믿었다.



254mm 해안포입니다. 

 

마지막으로 육군은 해군과 손발이 맞지 않았다. 뤼순항함대가 제해권을 갖게 되면 일본군은 조선북부로 바로 상륙하지 못하고 남부부터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벌어줄 수 있었다. 그렇지만 해군은 제해권을 장악할 생각이 없었고 발트해함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일본군은 조선중부의 항구를 통해 러시아군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만주에 진입할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순양함전대는 일본의 보급로를 교란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일본의 가장 중요한 항구(수출입 물동량의 90%를 처리)인 요코하마, 고베와 오사카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완전히 반대편 멀리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소함대가 3항구를 위협하려면 소야와 츠가루해협을 통과하거나 조선해협을 통과해야 하는데 전투보다는 탐색형 순양함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불가능했고 뤼순항으로 향하는 일본함대를 교란하는 정도만 기대할 수 있었다.

이 정도만 제대로 해낸다면 블라디보스토크소함대는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다. 일본연합함대와 러시아함대의 전력차이는 미미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일본함대가 보급로를 지키기 위해 대형전함을 따로 떼어낸다면 그만큼 뤼순항함대가 유리해지기 때문이었다.


건조 중인 전함 (대부분 19059월 이전에 완성)

  

일본은 24일 황실회의에서 러시아와의 전쟁을 결정했다. 구로키장군의 1(212보병사단, 황실근위사단)이 즉시 동원되었고 일본함대 전체에도 비상이 걸렸다. 연합함대는 뤼순항에 정박한 러시아전함을 공격하고 조선 제물포 상륙을 엄호하기로 했다.

항로나 일본항에 있던 13척의 러시아선박(25,000톤 이상)을 나포하고 1, 2, 3전대는 뤼순항으로 4전대는 제물포로 향하는 3,000명의 병력을 엄호했다.



서울에 진입하는 일본군입니다. 이미 우리는 구경꾼에 불과했습니다. 

 

28일 오전, 마침 제물포를 떠나려고 하는 러시아포함 코례츠Koryets와 마주쳤다. 엉겁결에 일본 어뢰정이 공격태세를 갖췄고 코례츠는 바로 항구로 돌아갔지만 어뢰정 츠바메가 좌초되었다. 일본군은 안심하고 제물포에 상륙했고 러시아영사에게 전쟁을 통보하며 제물포항에 있던 순양함바랴그Varyag(첫 번째 사진 참조)와 포함 코례츠의 항복을 요구했는데 이미 구축함전대가 뤼순항을 공격한 후였다.

루드넵함장은 일본의 제의를 거부하고 2 9일 오전에 탈출하기로 했다. 때마침 일본전대는 근처에 정박 중이었기 때문에 러시아함선은 항구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순양함 아사마Asama와 치요다Chiyoda만 달아나려는 러시아함선을 막아 세웠고 7.2km 거리를 두고 포격전을 벌였다.




색을 입힌 순양함 아사마의 사진입니다. 



2차대전에서도 훈련용으로 사용되다가 종전 후에 해체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러시아군에게 불리한 입지였다. 좁은 수로를 따라 나가면서 측면을 노출할 수 밖에 없었고 선미포로만 응사했다. 바랴그는 외해로 빠져나가자 마자 선회하며 측면사격을 하려고 했지만 이미 심각한 피해를 입은데다가 몇 발 직격탄을 더 맞아서 제물포로 다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던 코레츠도 바랴그를 따라 들어갔고 그것으로 제물포해전은 끝났다.

한 시간의 전투에서 일본군 피해는 전혀 없었고 러시아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은 바랴그를 좌초시키고 코례츠를 폭파했다. 제물포항에 있던 순가리Sungari도 좌초시킨 후에 수병과 영사는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순양함을 타고 홍콩과 싱가폴에 내린 후에 유럽으로 돌아갔다



제물포해전 상황입니다. 처음부터 러시아함정의 운명은 결정되었죠.



제물포로 돌아와 좌초되기 직전의 바랴그입니다. 



일본군은 인양해서 소야로 사용하다가 1차대전 동맹인 러시아에게 판매했습니다. 러시아는 바랴그로 다시 개명하고 영국으로 가져가 수리를 하던 중에 10월 혁명이 발생했습니다. 수병이 러시아정부의 명령에 항명하고 농성을 벌이자 영국이 나포하게 됩니다.

몇 차례 우여곡절 끝에 다시 독일에게 고철용으로 판매되었다가 도중에 좌초되어 스코틀랜드에서 해체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