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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독일군의 동부전선의 몰락 (14) - 목표는 키에프

by uesgi2003 2011. 1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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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킨 교두보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제 블로그에 처음 오시는 분은 독일군의 동부전선 배경과 이전 이야기를 먼저 읽으셔야 이해하기 쉽습니다. 

 

목표는 키에프 

 

페트로브치 학교 지하실-근위군 돌격-북해와 브란덴브루그 병력 투입-사이렌을 울리는 전차-키에프를 포기한다-88 보병사단의 와해-25 전차사단의 비극-실패한 독일군의 반격-밀려난 호트

 

 

 

러시아군이 전선을 구축한 류테즈 교두보에는 노보-페트로브치(Novo-Petrovtsy)라는 마을이 있었다. 바투틴은 폐허가 된 학교 지하실에 지휘소를 차렸고 바로 옆에는 제3 근위전차군과 제38군의 사령부도 마련되었다. 군 지휘관 리발코와 모스칼렌코(Moskalenko) 장군도 다른 참모와 함께 최전선에 참여했다. 다른 군단과 사단 지휘관들도 근처에 지휘소를 마련했으니까 아마도 이렇게 많은 최고 지휘관들이 한 곳에 모인 것도 역사상 처음일 것이다.

최전선에 이렇게 많은 지휘소가 몰린 것을 실수라고 생각하겠지만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었다. 정말로 중요한 작전은 병사들에게 까지 그 중요성이 전달되어야 하지만 러시아군은 그 동안 그렇게 하지 못했었고 당연히 작전은 참담한 결과만 가져왔었다. 이번에는 무수한 장군들 뿐만 아니라 정치위원, 고참병사들까지 나서서 곳곳에서 연설을 하며 승리에 대한 확신을 불러 넣었다.

 

그림 설명: 패전의 기색이 짙어진 1943년 중반부터 독일군 병사들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합니다. 우리가 영화나 사진에서 보던 휴고보스 군복의 조각상 이미지와 달리 매우 혼잡한 사진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진의 병사들은 독일 최정예 사단 중 하나인 라이스탄다르테 사단이라는 것이 충격적입니다. SS Leibstandarte Adolf Hitler는 그렇지 않아도 보급이 우선되는 무장친위대에, 히틀러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독일군 전체에서 2개 밖에 안되는 말그대로의 히틀러 근위부대인데, 러시아의 공세에 몰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모습일 것입니다.

클릭해서 큰 이미지로 보세요. 좋은 화질로 보여드리려고 욕심냈더니 너무 크기는 합니다.

 

공을 세운 병사는 공산당원으로 특별한 대접을 받았는데 10월에만 집단군 전체에서 13,000명이 명단에 올랐다. 그리고 승리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이고, 키에프를 혁명 26주년에 반드시 탈환하겠다는 맹세가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다. 발렌틴 하사의 "혈관에 피가 남아 있는 한, 눈이 보이는 한, 소총을 쥘 수 있는 한 물러서지 않겠다."라는 맹세는 전국에 보도되었다.

11 1, 학교 지하실에서는 흐루시체프가 작전계획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키에프는 10월 혁명을 기념해 탈환해야 합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현장에 배석하고 있던 바투틴 역시 희생은 전혀 감안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지옥을 만들 생각이었다.

 

11 3일 동이 트자, 2천 문의 포와 5백 문의 로켓 발사대가 류테즈 지역의 독일군 전선을 불지옥으로 만들었다. 아침 안개를 뚫고 40분 동안 포탄이 쏟아졌다. 안개가 걷히자 마자 러시아군의 제2 공군이 독일군 전선을 폭격했다. 그리고는 제38군의 보병들이 제5 근위전차군단의 지원을 받아 돌격했다.

 

그림 설명: 원래 포병을 중시했던 러시아군이었고, 독일군의 지연전술에 말려 막대한 희생을 치룬 러시아군은 공격에 앞서 상상을 초월하는 포격으로 작전을 시작하는 것이 정석이 되었습니다.

독일군의 대응사격을 걱정하지 않게 된 시점부터는 1시간 정도, 수만 발에서 수십만 발의 포탄을 퍼붓습니다. 이미 참호 깊숙이 또는 포격지점 후방으로 물러난 독일군의 인적 피해는 그리 크지 않지만, 대인/대전차지뢰 망을 부수고, 철조망과 대전차 방어물을 산산조각내고, 수비선의 통신망을 모조리 끊어서 보병과 전차가 쉽게 전진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는 상당히 큰 효과가 있습니다.

독일군이 러시아군의 포격 패턴을 파악하고 유연하게 대응하자, 후기에는 선제포격 후에 5~10분 정도 기다렸다가 독일군이 수비선에 복귀하면 주포격을 가하는 영리함까지 갖추게 됩니다.

 

이 모든 공격은 독일군 제88, 68, 208 보병사단에게 쏟아졌다. 포격과 폭격이 얼마나 맹렬했던지 러시아군 보병이 500m 거리를 전진하는 동안 단 한 발의 반격도 받지 않았을 정도였다. 오후가 되어서야 독일군 수비선이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지만 러시아군은 전선을 10km 정도 구멍내고 6~8km 후방까지 전진하는데 성공했다.

호트는 급하게 함부르그 제20 기갑척탄병 사단과 브란덴브루그 제8 전차사단 일부를 투입해 러시아군이 더 이상 침투하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지만 6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군단의 공격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함부르그 사단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전투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였다. 러시아군이 곳곳에서 공격을 해왔고 척탄병 여단은 필사적으로 반격했다. 우회기동을 한 후에 다시 반격했고 투린지안(Thuringian) 7 전차사단의 지원을 받아 성공하는 듯이 보였다.

바로 이 때에 바투틴은 지옥 두 편째 편을 펼쳤다. 11 4일 저녁, 그는 제3 근위전차군의 기갑여단을 구멍난 독일군 전선에 진격시켰다. 이 병력은 이미 투입되어 있던 보병을 앞질러 계속 진격했다.

 

어둠이 내리자 재정비하던 독일군의 눈 앞에는 이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공포스러운 장면이 펼쳐졌다. 전장터가 낮처럼 환해지고 지옥의 비명소리처럼 온갖 소음이 울러퍼졌다. 엄청난 수의 러시아군 전차가 전조등을 켜고 사이렌을 울리며 전속력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전차는 마구잡이로 사격을 퍼부으며 돌격하고 있었고 그 위에는 러시아 제167 136 보병사단이 타고 있었다. 리발코는 수투카가 러시아 전선을 폭격할 때에 사이렌을 울리며 급강하해 공포로 몰아넣었던 경험을 그대로 독일군에게 되갚아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독일군 제13 7 군단의 얼마 안되는 병력이 지키고 있던 전선을 돌파했다.

 

그림 설명: 리발코의 전차군은 키에프를 지나 만슈타인의 집단군의 병참선을 노리는 기동전을 펼칩니다. 자로포지예 교두보에서도 러시아군의 공격이 시작되는데, 독일군은 10월 14~15일에 결국 댐을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물론 전조등과 사이렌때문에 전선을 돌파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T-34가 그렇게 무서운 화기가 아니지만 여단급으로 한 번에 투입될 때에는 효과가 상당했다. 7 전차사단이 반격했지만 러시아군은 키에프 근처까지 전진했다. 7 전차사단과 제20 기갑척탄병사단의 반격이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키에프를 양쪽에서 압박하는 러시아군을 막아내지 못했고 결국 11 5일 부상병들을 소개시키기 시작했다.

88 보병사단은 키에프 서쪽으로 후퇴했다. 지휘관인 로트(Roth) 장군은 도망치는 병사들을 불러 모으려고 일선에 나섰다가 러시아군 선봉대에게 죽었다.

호트의 제4 전차군 지휘소에 걸린 지도를 보면 러시아군이 무엇을 노리는 것인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리발코의 전차군은 전략적 보급요충지인 키에프를 지나 만슈타인의 남부집단군을, 모스칼렌코의 제38군은 키에프로 곧바로 진격하고 있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전전선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일이지만, 위기에 대처할 병력이 없었다.

1943 10월 말에 그리스에서 재정비 중이던 제1 전차사단을 키로보그라드(Kirovograd) 지역에 배치시켜서 러시아군의 진격을 막게 했지만 군복이나 장비가 열대용이어서 동계용으로 바꾸는 시간이 걸렸다. 히틀러가 가진 제17군은 크리미아를 잃으면 루마니아의 유전도 잃게 되기 때문에 크리미아를 떠날 수 없었다. 만슈타인은 17군의 일부라도 차출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만수타인과 히틀러는, 집단군이 포위되어 전선이 붕괴되는 것이 먼저인지 아니면 전략물자와 동맹을 유지하는 것이 먼저인지에 대한 설전이 계속 벌어졌다. 결국 히틀러도 이 딜레마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건 감수해야 할 위험이오. 그리고 비난을 받아도 감수하겠소."라고 만슈타인의 요청을 거절했다.

 

호트는 키에프-지토미르 고속도로의 마르카로프(Markarov) 지휘소에서 참모장의 보고를 받으며 지도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키에프를 더 이상 방어할 수 없습니다. 7 전차사단, 20 기계화사단, SS '다스 라이히' 전차사단의 전투단이 키에프에서 밀려났습니다. 도시에 남아있는 제88 보병사단도 어쩔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후방의 통신센터를 노리고 있는 러시아 선봉대를 곧바로 요격해야 할 때입니다. 파스토프와 카자틴의 집결지를 잃게 되면 집단군 전체가 위험에 빠지게 됩니다."

호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전화벨이 울렸다. 도움을 요청하는 7군단의 전화였다. 그런데 어디에서 지원병력을 빼낼 수 있겠는가?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나빠졌다. 러시아 제38군이 키에프에 진입했고 88 보병사단의 대부분 병력이 시내에서 전멸했다. 생존자들도 중화기나 대전차 무기도 없이 남쪽으로 서쪽으로 알아서 탈출하고 있었다.

11 6일 자정, 러시아 혁명기념일이 시작되자 후루시체프의 제5 근위전차군단의 선봉대가 키에프 중심가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반자동소총으로 무장한 제4 정찰중대가 폐허가 된 공산당 건물에 들어가 붉은 기를 게양했다. 공격을 개시한 지 3일 만에 우크라이나의 수도는 다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러시아의 손에 들어갔다.

키에프 북쪽에 있던 독일군 수비선에서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없었다. 기갑병력은 정확한 상황을 판단하지 못한 채 이리 저리 움직였고 제19 전차사단은 부르킨으로 이동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런 지옥 속에서도 독일 철도인력만큼은 제 역할을 다해내고 있었다. 단 한 량의 열차도 키에프에 남기지 않았고 마지막 역을 떠나기 전까지 24,911 량의 열차에 최대한의 부상병과 장비를 싣고 밖으로 이동시켰다.

 

단연 이날의 영웅은 후루시체프였다. 그는 장군복을 입고 해방자와 같은 환영을 받으며 도시에 들어섰다. 진정한 승리자였던 리발코 장군은 축하연에 그리 연연해하지 않았다. 그는 제3 근위전차군 병력과 함께 키에프를 지나 남쪽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독일군 제10 기갑척탄병사단의 반격을 받고 잠시 주춤했지만 바로 공세를 취해 독일군 12군단의 전선에 큰 구멍을 냈다. 그는 키에프에서 아직 저항하고 있던 독일군의 후방을 끊었고 키에프로 들어오는 고속도로를 장악했다. 7일에는 키에프 남서쪽 50km 지점에 있는 파스토프(Fastov) 통신센터 탈환해서 만슈타인의 남부집단군의 북쪽 병참선을 완전히 끊었다. 독일군이 급하게 부상병과 비전투병력으로 꾸린 임시 보병대대 2개로 이 마을을 방어하려고 했지만 리발코의 기갑병력이 순식간에 전멸시켰다. 7 전차사단의 사령부 인력까지 나섰지만 걸어서 탈출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제는 독일 철도인력도 속수무책일 정도로 상황이 너무 빨리 악화되었다. 파스토프의 집결지에는 많은 양의 보급품 뿐만 아니라 45대의 기관차(엔진)가 있었지만 제 시간에 후방으로 빼낼 수가 없었다. 동부전선에서의 기관차는 전차보다도 훨씬 중요한 존재였는데도. 그러나 리발코가 남부집단군의 후방에 모습을 나타내면서 기관차나 보급품에 대해 바로 잊혀졌다.

 

그림 설명: 제1 전차사단의 키에프 일댄의 실제 작전지도입니다. 유럽에 있던 최정예 사단을 불러들여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지만 이제 상황은 몇 개 사단 정도로는 물타기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악화되어 있습니다.

 

파스토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만슈타인은 즉시 비행기를 타고 히틀러를 만나러 갔다. 그는 하루에 남겨둔 3개의 전차사단을 파스토프 지역의 방어와 반격에 즉시 투입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마음 속에는 만슈타인의 북쪽 전선보다 크리미마와 광산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만슈타인은 "총통각하, 이대로 가면 남부집단군은 전멸합니다."라고 강력한 경고를 했다. 히틀러는 여전히 드니에페르 하류의 전차사단은 그대로 두고 키에프에 주둔시키려던 제1 전차사단과 SS '라이스탄다르트 아돌프 히틀러' 전차사단을 사용하라고 허락했지만 이 두 사단은 이동 중이어서 전장터에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 완전히 잘못된 결정으로 드러난, 25 전차사단의 동원도 허락했다. 프랑스에서 오는 열차에서 내리는 즉시 파스토프에 투입하기로 했다.

 

25 전차사단은 여름에 새로 만들어져서, 노르웨이에서 온 제9 전차연대를 통합한 후에 첫 번째 훈련을 하던 도중에 호출을 받고 제4 전차군으로 이동 중이었다. 사령관 슈첼(Schell)은 문제가 없는 군인이었지만 사단으로 훈련되지도 않았고 동부전선의 경험이 아예 전무한 병력이었다. 총의 기름칠도 마르지 않은 신병들을 파스토프의 지옥에 밀어넣어야 하는 호트의 심정은 어지러웠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목표를 이루려는 러시아군과 마찬가지로 독일군도 희생을 무릅쓰고 통신센터와 집결지를 지켜야만 했다.

 

그림 설명: 장갑차를 타고 이동 중입니다. 얼굴에서 격전의 피로가 한 눈에 보입니다.  

 

호트의 결정을 비난할 수도 없는 것이, 25 전차사단은 전차연대(90대의 4호 전차)뿐만 아니라 타이거 509 대대(45대의 타이거 전차)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135대의 전차는 엄청난 전력이었으며 리발코가 가진 T-34와 비교해도 해볼만한 전투였다.

그러나 작전은 엉뚱한 데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법이다. 25 전차사단의 다른 병력은 베르디체프에 도착하고 있었지만 주력이 될 기갑전력이 보이지 않았다. 기갑전력은 24시간 전에 열차를 타고 작전이 변경되기 전의 목적지인 200km나 떨어진 키로보그라드 역에 도착한 것이다. 당연히 기갑전력은 제 시간에 파스토프에 투입되지 못했다.

기갑척탄병, 포병과 공병은 전차나 대전차 화기없이 리발코의 전차여단을 맞서야 했다. 146 기갑척탄병연대는 차에서 내리자 마자 제55 근위전차여단의 T-34 수십 대와 마주쳤고, 그렇지 않아도 미리 기다리고 있던 전차들의 포격을 받아 160명이 전사하면서 와해되고 말았다.

슈첼은 대대병력을 직접 지휘하며 전투에 나섰지만 도저히 상대할 전력이 아니었다. 2일 후에 키로보그라드에 있던 제9 전차사단의 선봉대가 합류해 러시아군을 밀어내며 철도 역까지 접근했지만 러시아군의 반격에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마을 외곽 2km에서 더 이상 진전이 없었다. 이제 러시아군의 수비선은 완전히 굳혀졌고 10일 전에 프랑스발 열차에 올랐던 240명의 중대 병력 중 75명 만이 전투를 벌이고 있었을 정도로 독일군의 피해도 너무 컸다.

첫 번째 전투에서 거의 와해된 제25 전차사단은 그대로 리발코가 남쪽으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게 막는 데는 성공했다. 그리고 SS'다스 라이히' 사단의 전투단, 10 기갑척탄병사단과 새로 구성된 198 보병사단과 함께 러시아군의 돌파를 막았냈다. 그들의 희생덕분에 만슈타인은 반격에 나설 병력을 모으는 시간을 벌었다.

독일 남부 집단군을 한 번에 섬멸하려는 스탈린의 욕심은 이번에도 채워지지 않았다. 그래도 다른 때와 다르게 러시아군은 서쪽으로 본격적인 진격을 시작했고 지토미르를 탈환하면서 막대한 군수품과 식료품을 노획해 독일 제4 전차군을 더욱 불쌍한 처지로 몰아넣었다. 독일 8군단이 가까스로 러시아군의 진격을 막아서고 북쪽에서도 다른 독일 수비군이 전선을 정비하면서 만슈타인이 걱정하던 최악의 순간은 잠시 넘어가는 듯했다.

 

만슈타인은 6개 전차사단과 몇 개의 기갑척탄병사단을 파스토프에서 지토미르에 이르는 전선에 배치시켜 서진하는 러시아군의 옆을 끊을 준비를 했다. 그리고 히틀러를 설득해 노르웨이,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병력을 빼내올 수 있었다. 새로 구성된 신병들도 있었지만 제1 SS '라이스탄다르테' 전차사단, 1 19 전차사단과 같이 동부전선의 베테랑도 있었다. 그래도 키에프에 벌써 몰려들고 있는 러시아의 4개 군과 2개 독립군단을 막아 드니에페르 강 너머로 되돌려보내려면 수중에 있는 6개 사단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림 설명: 마지막 반격작전 하루 전에 밤을 보내고 있는 제1 전차사단입니다.

 

구데리안도 같은 염려를 하고 있었다. 11 9, 히틀러에게 "다른 곳이 위험해도 남부 집단군과 A 집단군의 가능한 모든 병력을 불러 모아 공격에 대비하십시오."라고 제안했지만 히틀러는 항상 그렇듯이 부족한 병력으로 반격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 때마다 보충될 수 없는 전력이 소진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병력이 소진되기는 했어도, 코로스텐(Korosten)의 전선을 안정화시키고. 지토미르-라도미쉴(Radomyshl)-브루실로프(Brusilov)-파스토프 주변의 지역을 탈환하는데 성공하면서 뛰어난 야전 지휘관이 지휘하는 기동전에서는 독일군이 아직도 우세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러시아군은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움직임이 봉쇄되고 군단 전체가 와해되는 경우도 생겼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키에프는 그대로 러시아군의 수중에 남았고 독일 제4 전차군의 전력은 완전히 소진되어서 더 이상 러시아군을 위협할 수 없게 되었다.

드니에페르 강변의 수 백 미터에 불과했던 교두보는 이제 200km의 넓이에 90km 깊이로 벌어졌고 독일군 전선은 드니에페르 강 중류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그리고 공격을 위한 병력으로 가득찬 러시아군의 돌출전선은 언제라도 서쪽으로 터질 수 있다는 위협을 주고 있었다.

수 많은 전투에서 능력을 입증했던 호트 상급대장은 키에프를 지키지 못했다는 책임을 물어 야전지휘관에서 물러났다. 드니에페르 강 그리고 키에프를 잃은 것은 히틀러의 실수였음에도 호트가 제4 전차군을 떠나고 라우스(Raus) 장군이 지휘권을 넘겨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