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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킨 교두보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제 블로그에 처음 오시는 분은 독일군의 동부전선 배경과 이전 이야기를 먼저 잃으셔야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림 설명: 오래 전에 동부전선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사용했던 지도입니다. 이렇게 밀려나서 이제 키에프를 위협받고 있는 처지를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러시아군의 규모가 굉장하죠?
독일군의 동부전선의 몰락 (13) - 류테즈(Lyutezh)라는 마을
네페도프와 22명의 병사-드니에페르 강둑의 결정된 운명-크라브첸코의 전차 데스나를 건너다-스타브카 계획수정-밤에 재집결한다
1943년 9월 25일 저녁, 리발코(Rybalko) 장군은 소련군 역사상 처음으로 벌어진 대규모의 낙하산투하 작전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을 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는 투하된 병사들이 그래도 몇 군데만이라도 장악해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부르킨과 발리카(Balyka) 교두보의 좁은 교두보를 밀어붙여 고립된 병사들을 도와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무 교신도 들어오지 않는 무전기를 보니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모양이었다. 그나마 두다리, 샨드라, 부차크 근처에서 숨어서 버티고 있던 소련 낙하병들을 독일 수색대가 가만히 두지 않았다.
독일 지휘관들은 러시아가 이번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 대규모 작전을 시도할 것으로 생각했다. 러시아는 오른쪽 강변에 기갑군이 진출할 수 있도록 막대한 피해를 무릅쓰고라도 전략적 교두보를 만들려고 할 것이 뻔했기때문에 결국 독일 제20 기갑척탄병 사단과 제7 전차사단이 전면배치되었다.
만슈타인은 바투틴(Vatutin)의 목표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뵈흘러(Wohler)에게 제8군이 강을 건너거나 투하되는 적을 반드시 격퇴해서 그들이 기갑군과 연결되는 것을 막으라고 강조했다.
만슈타인이 언급한 적의 기갑군은 바로 리발코의 제3 근위 전차군이었다 (Guards를 방위보다는 근위가 더 정확하다는 조언에 따라 근위로 변경합니다. 언제라도 여러분의 조언을 환영합니다.) 만슈타인의 걱정이 당연했지만 문제는 부르킨이 아니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한 하사관의 과감한 시도로 벌어지게 된다
부르킨에서 러시아군의 시도가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2일이 지나자 북쪽으로 130km 정도 떨어진 키에프 진입로에서 새로운 작전이 시도된다. 이 작전덕분에 드니에페르 중류의 상황은 완전히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하는데, 현대전에서도 한 병사의 과감한 결단이 작전의 성패를 결정지을 수 있다는 것을 잘 말해주는 예다.
네링(Nehring)의 부대가 아직 부르킨의 패잔병을 청소하느라 정신없는 동안, 소련 제38군의 최전위 부대(제240 보병사단을 포함한)가 키에프 위의 스바로미예(Svaromye) 마을까지 진격했다. 강 반대편의 독일군 진지는 류테즈(Lyutezh)라는 마을이 있었고 여기는 하우페(Hauffe) 장군의 8군단이 강둑의 헤션 제88 보병사단과 브란덴브루그 제208 보병사단과 함께 방어하고 있었다. 이 지점의 강폭은 600~700였고 수심은 2m~6m 정도였다.
9월 9일에 내려진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제38군은 강을 건널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렇지만 다른 사단과 마찬가지로 도강을 도와줄 공병이나 장비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근처에 있는 나무를 베어넘겨 뗏목을 만들었다. 9월 26일 날이 저물자 제931 보병여단의 선봉대가 뗏목과 소형 보트를 타고 독일군 진지를 향해 출발했다. 그들이 서쪽 강변에 거의 도착했을 때에 갑자기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독일군 초병이 그들을 발견하고 총을 쏜 것이다. 조명탄이 어두운 밤을 가르고 탐조등이 강을 훑기 시작했다. 독일군 기관총의 예광탄이 적의 보트를 가리켰다. 첫 번째 보트가 뒤집히고 두 번째 보트도 그 뒤를 따랐다. 뗏목에 타고 있던 러시아군은 물에 뛰어들어 기관총 세례를 피했지만 곧 보병포가 뗏목 위로 쏟아졌다. 이렇게 제931 보병여단의 도강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남쪽으로 10KM 정도 아래에서도 제836과 842 보병연대의 몇 개 대대가 비슷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강을 절반도 건너기 전에 독일군의 방어선에 걸려들었다. 836 보병연대 병력은 단 한 명도 강둑에 발을 디디지 못했고 842 보병연대의 제2 대대도 대부분이 물 속에 가라앉았지만 네페도프(Nefedov) 하사의 제2 분대 22명이 강둑에 간신히 도착했다. 바로 참호를 파고 들어앉은 그들의 무장은 8정의 자동소총, 5정의 카빈, 두 자루의 경/중 기관총이 전부였다. 독일군의 분대급 공격에 이어 중대급 공격이 27일에 이어졌지만 유리한 지형덕분에 버틸 수 있었다. 공격에는 서툴었지만 수비에서만큼은 어리석을만큼 맹목적으로 버티는 러시아 민족 특징대로 개인 참호 하나씩 진압해나가야만 했다.
그림 설명: 러시아군 특유의 연출사진이지만 네페도프 하사와 끈질긴 생존자들이라고 우겨봅니다. 얼굴이 상당히 여유있는 것이, 전투가 이미 끝난지가 오래인 것 같죠?
27일 저녁이 되자 네페도프의 병력은 겨우 10명만 살아남아 있었다. 그는 연대에 상황을 무전으로 보고했고 27일~28일 양일간 75명이 더 보강되었다. 그리고 독일군의 공격이 멈춰지자 더 많은 병력이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9월 30일, 제240 보병사단의 2개 연대와 중박격포가 도강할 정도로 교두보는 3km 넓이로 확장되었다. 아직은 독일군이나 러시아군 어느 누구도 이 교두보가 드니에페르 전투를 결정지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러시아군의 전략적 교두보가 될 류테즈 마을을 두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결국 러시아군이 장악했다. 이제 문제는 하우페의 제8 군단이 이 마을을 탈환하고 교두보를 틀어막을 병력이 남아 있는지 하는 것이었다.
그림 설명: 일선 영관급이 작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잘면인데 풍채나 복장이 거의 장성급같습니다. 그래서 바투틴 기타 등등의 최고 사령관들이 모인 장면이라고 또 다시 우겨봅니다.
10월 3일 늦은 저녁, 크라브첸코의 지휘소에 전화벨이 울렸다. 바투틴이 그를 급하게 찾고 있었다. 그는 차에 올라 군 사령부로 달려갔다. 이제부터의 몇 시간이 2차대전 동부전선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 중 하나가 된다.
"바투틴과 후르시체프(Khrushchev)가 제240 보병사단이 성공적으로 도강했다고 알려줬다. 후르시체프의 반응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그는 도강한 병력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적의 공격을 간신히 막아내고 있다고 말했다. 아군이 다시 밀려나기 전에 전차를 투입해야 한다."
바투틴은 "안타깝게도 귀관의 전차군단과 드니에페르 강 사이에는 데스나 강이 흐르고 있소. 지금 상황에서는 교각을 건설하려면 10일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데, 아군은 8일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소. 지금 바로 전차지원을 해야만 되는데, 가장 가까운 병력이 귀관의 제5 근위 전차군단이오. 귀관 스스로 데스나를 건너는 수 밖에 없소. 도강할 지점을 지금 찾으시오."라고 덧붙였다.
힘이 넘치는 크라브첸코는 상황을 금방 파악하고 "알겠습니다. 지휘관 동지"라는 답변만 한 후에 군단 지휘소로 바로 돌아왔다.
"데스나의 어부를 통해 제20 여단 전차병들이 레트키 마을 근처의 여울목을 이미 파악해두고 있었다. 콤소몰 병사들이 직접 들어가 강 바닥까지 확인해봤다. 강 바닥이 모래여서 무난했지만 그래도 7m 정도의 깊이였다. T-34가 건너기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에 급하게 잠수기능을 덧붙이기로 했다. 전차의 물이 들어갈 모든 곳을 막고 방수 커버로 씌웠다. 그리고 배기구는 연장 파이프로 길게 뽑아 물에 잠기지 않게 하고 두 줄로 나란히 그리고 아주 천천히 건너게 했다."
위대한 조국해방전의 기록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기갑군이 이런 식으로 도강했다고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지만 2년 전인 1941년 6월 22일 독일 제18 전차사단의 제18 전차연대가 12m 정도의 강을 건넌 적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군 역사상 처음있었던 것 뿐이다.
크라브첸코는 "데스나를 건너자 마자 바로 드니에페르로 향했지만 같은 방법으로 건너기에는 너무 깊은 강이었다. 마침 독일군이 버린 두 척의 큰 바지선이 있기에 90대의 T-34를 한 번에 6대씩 날랐다. 60대의 전차를 나른 후에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교두보에 합류했다. 이제 교두보는 10km로 크게 확장되었다."라고 기록했다.
그림 설명: 부르킨에서 류테즈로 기동전을 펼치는 러시아군의 작전을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이제부터 크라브첸코의 전차군단이 드니에페르 서쪽 강변의 교두보 전투를 넘겨받고 독일군 보병사단의 반격을 막아내면서 류테즈 교두보를 완전히 구축하게 되었다. 원래 계획에서는 부르킨에서 리발코의 제3 근위 전차군을 선봉대로 내세워 대대적인 공격을 하려고 했었지만 이제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서 류테즈가 초점이 되고 있었다.
리발코가 9월 29일에 받은 명령에 따르면 부르킨 교두보에서 협공을 가해 남쪽에서 키에프를 탈환한 다음에 남서쪽으로 회전기동해서 독일군 남부전선을 완전히 포위하라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만슈타인의 남부집단군을 전멸시키고 싶어하던 스탈린의 오랜 숙원을 다시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바램은 지나친 과욕이었고 이 지역에 급하게 투입된 독일군 2개 전차군단이 스탈린의 욕심을 막아 섰다. 10월 초에 독일군 제7 전차사단이 그리고로브카(Grigorovka) 방면으로 러시아군 교두보를 밀어내는데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교두보가 더 이상 확대되지 않게 막는 효과는 거뒀다. 제112 보병사단은 반격을 가해 그리고로브카의 남쪽 고지대를 탈환하기까지 했다. 재정비된 독일군 수비선은 바투틴이 더 이상 서쪽으로 진격하지 못하게 봉쇄했고 독일군 수비선은 러시아군의 모든 공격을 막아냈다. 10월에 러시아군은 두 번에 걸쳐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러시아 최고사령부는 계획을 변경하게 된다.
10월 18일 그레치코(Grechko) 원수는 러시아 최고사령부로 제38군이 키에프 북쪽의 류테즈 교두보로 진출했다고 보고했다. 이제 이 성공을 더 확대할 기회가 왔지만 집단군은 그럴만한 병력이 없었다. 최고사령부는 이 중요한 의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레치코는 “며칠 후에 집단군이 다시 한번 최고사령부에게 보고했다. 류테즈 교두보에서 결정적인 성공을 거둘 확실한 기회를 잡았는데 그러려면 전차군이 이 지역에 투입되어야 했다.”고 회고한다.
바투틴은 주력이 매달려 있는 부르킨에서 류테즈 교두보로 목표를 바꾸고 싶어했지만 스탈린은 좀처럼 자신의 욕심을 버리지 않았다. 독일군의 상황도 비슷했다. 일선 지휘관은 히틀러와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다.
스탈린이 보로네즈(Voronezh) 전선 (10월 20일에 제1 우크라이나 전선으로 개명)의 의견을 수용했는지 아니면 바투틴, 후루쉬체프, 그레치코가 독단적인 행동을 한 것인지 알 방법이 없다.
그림 설명: 이 때까지만 해도 러시아군의 보병사단 병력이 70% 수준으로 감소한 상당한 피해가 누적된 상태인데도 계속 공세를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사진에서와 같이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물량의 군수품이 공급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아예 전차병의 복장이나 무장까지도 미군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차는 M3 경전차입니다. M4 중전차도 상당히 많이 운용되었습니다.
그레치코는 “집단군은 주 공격목표를 부르킨에서 류테즈로 바꿨다. 제3 근위전차군 전체, 몇 개의 보병군단, 무수한 화포를 부르킨 교두보에서 빼내 200km 떨어진 류테즈 지역에 배치하기로 한 것이다. 드니에페르 강을 두 번, 데스나 강을 한 번 건너야 하는 어려운 작전이었다. 더구나 적의 바로 코 앞을 몰래 지나가야 하는 극비의 작전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결정은 작전규모는 물론이고 러시아군이 처음으로 도중에 작전을 변경하는 놀라운 변화였다. 이전까지 러시아군은 한 번 작전이 결정되면 어떤 피해를 입어도 거기에만 집착을 했었다. 그리고 바투틴과 그레치코는 전장터를 체스판처럼 생각하는 만슈타인의 전술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으로 러시아군의 장기가 될 적을 기만하고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공격을 펼치는 작전의 묘미도 깨닫게 된다. 바투틴과 그레치코는 이 일들을 너무나도 훌륭히 해낸다.
“재배치는 10월 25~26일 저녁에 시작되었다. 제3 근위전차군을 필두로 다른 부대들이 교두보를 떠났다. 때마침 비가 내려 시야를 가리고 소음을 감췄다. 병사들은 낮에 잠자고 밤에 행군했다. 4개의 경로를 통해 나란히 전선으로 향했다. 행군 중에는 어떤 무선교신도 금지되었다. 근위전차군의 무선통신 장비는 모두 교두보에 남겨두어서 엉터리 교신을 쉴새 없이 주고받았고 비워진 자리는 모두 가짜 전차가 들어갔다. 얼마나 잘 만들었던지 10월에만 두 번의 공습을 받았을 정도였다. 그것도 부족해 교두보에서 가끔씩 위장공격을 시도해 독일군이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가 없게 만들었다. 드니에페르 강에 엉터리 교각을 건설해 부르킨 지역에서 주력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신호를 보냈고 여기에 속은 독일군은 병력을 추가배치했다. 위장과 기만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만슈타인은 어떤 병력도 빼내지 않았고 부르킨에만 집중했다.”
이런 기만전술은 몽고메리 원수가 대가였다. 그는 북아프리카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남쪽에 정교한 모형을 배치시켜 북쪽에서의 공격을 롬멜이 알아채지 못하게 했고, 1944년 여름에는 훨씬 큰 규모로 영국의 섬에 모형을 배치해서 히틀러가 두 번째 상륙을 걱정하느라 노르망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크리치코가 인정하듯이, 러시아군의 재배치를 독일군이 완전히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호트의 전투일지에 따르면, 제4 전차군 사령부는 상당한 규모의 기갑전력이 데스나 강을 건너 북서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기상이 악화되어 정찰기를 띄워 확증을 잡지 못했다. 일지는 “적의 목적지를 알 수가 없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독일군의 정찰은 류테즈 지역에 러시아 기계화 전력이 집중되고 있는 것도 포착했다. 호트는 기갑병력을 동원해 러시아군의 집결을 막으려고 했었지만 히틀러가 공격에 반대했다.
독일군이 절반은 모른 채로 절반은 알고도 어쩌지 못하는 동안, 엄청난 병력이 모여든 류테즈는 러시아군의 전략요충지가 된다. 바투틴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3개 군과 1개 전차군단 그리고 1개 기병군단을 배치할 수 있었다. 그는 기록적인 화력도 갖추게 되었는데 그레치코에 따르면 “2천 문의 대포와 박격포 그리고 5백 문의 로켓발사대가 준비되었다. 제38 군의 공격로 7km 넓이에는, 1km 당 100 문이 넘는 화포가 동원되었다. 대포 하나가 10m 범위에만 포탄을 쏟아 붓는 것이다. 지금까지 동부전선에서 이 정도의 화력이 동원된 적이 없었다. 류테즈에 배치된 아군의 전력은 독일군과 비교해, 보병은 3배, 포는 4.5배, 전차는 9배로 압도적이었다.”
러시아군이 들인 정성은 바라던 결과를 가져왔다.
그들은 그 동안 부진했던 남쪽공격을 포기하고 이번에는 북쪽에서 키에프를 탈환하고, 독일군 제4 전차군을 섬멸하고, 독일군 전선의 먼 후방에 있는 지토미르, 베르디체프, 비니챠와 같은 통신 요충지를 점령한 후에 남쪽으로 우회기동해서 남부집단군을 포위섬멸하려는 목표를 세웠다.
스탈린은 결국 스탈린그라드부터 노렸던 대규모의 포위섬멸 작전을 이번에는 성공시키게 되는 것일까?
다음의 이미지는 세계최고의 전사출판사 Osprey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개전 초의 구시대 복장과 무장에서 종전의 정복자 모습까지의 변화가 잘 나타나있습니다. 클릭해서 큰 이미지로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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