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중반 명제국은 겉보기와 달리 허약해서 북로남왜에 시달렸고 이를 간파한 필리핀 주둔 스페인총독이 명원정을 본국에 탄원했다가 실패한데 이어 토요토미 히데요시도 명원정을 시도했습니다.
그 배경에 대한 외국학자의 한 시각을 정리해보았습니다. 너무 부정적인 면이 부각되었는데 의견은 당연히 다를 수 있습니다.
명제국의 군사제도
16세기 중순, 중국은 동쪽으로는 태평양, 서쪽으로는 티벳 고원까지, 남쪽으로는 버마와 베트남, 북쪽으로는 만주와 몽골 스텝까지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 베트남, 태국, 자바, 수마트라, 필리핀, 보르네오, 일본에게서 연공을 받았다. 인구는 약 1억 5천만 명이었고 막대한 양의 곡물, 면, 실크, 도자기, 담배, 종이, 땅콩 등을 생산했다. 역사와 철학의 탄생지였고 기술혁신의 발생지였다. 바로 세계의 중심이었다.
최전성기 영락제 당시의 명제국 세력권입니다.
16세기 중순의 명제국은 겉으로 보기에는 세계최강의 제국이었지만 실제로는 탄생부터 200년 후의 멸망까지 계속 삐걱거렸다. 첫 번째 황제인 주원장은 1328년에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원제국에 대한 농민봉기가 대대적으로 일어나며 몽골부족을 스텝으로 몰아냈다.
얼굴에 흉터가 심한 주원장은 홍건적에 들어가 1368년에 순수 한족의 왕조를 다시 세우고 당과 송의 전통을 회복시켰다. 대명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신도 홍무제로 불렀다.
홍무제는 유교사상을 부활시키고 성리학을 국시로 삼고 과거제도로 학자를 관리로 대거 기용했다.
홍무제 얼굴이 흉터가 심한 것으로 아는데, 뽀샵은 기원전부터 권력자에 대한 예의였습니다. 살아야죠...
그는 포악했고 병적으로 의심이 많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대항하는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1380년, 승상 호유용이 모반에 가담한 것을 발견하고는 가족은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알고 지낸 사람은 모두 죽여 그 숫자가 4만 명이었다. 그 후에 승상을 없애고 스스로 국정을 챙기거나 내시를 통해 통치했다.
홍무제는 철저한 중앙집중통치를 유지했고 고통받는 농부의 삶을 겪었기 때문에 극도로 검소한 삶을 살았다. 검소한 자급자족경제는 성리학의 기본원칙이기도 했다. 당시의 각종 세금은 낮을 수 밖에 없었고 지역사회는 스스로 경비하고 세금을 징수하고 정부가 지정한 곳으로 전달했다. 관리는 급여를 거의 받지 못해 알아서 생계를 챙겨야 했다.
주둔군은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했기 때문에 정규군 부담을 크게 줄였다. 공공사업도 지역사회의 노동력과 기구를 이용했다.
홍무제의 개혁과 혁신 덕분에 명제국은 상당히 인상적인 출발을 했다. 농업과 상업이 번성했고 국고는 늘어났다. 만리장성도 수리해서 강화시켰고 15세기 초에는 명함대(정화의 대원정, 그림 참조)를 세계 각국에 보낼 정도로 막강한 해군력을 갖췄다.
그렇지만 모든 일은 변하기 마련이다. 시간이 지나고 황제가 바뀌면서 성리학기반의 관료체제도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황제는 베이징의 자금성을 떠나지 않고 궁정의 예식에 치중했고 제국번성의 한 축이었던 상업도 위축되었다. 유교에서는 이익을 혐오했기 때문에 상업을 무시하고 농업을 권장했다. 함대의 순방도 중단되었고 여행기록은 파기되었으며 대형선박 건조기술은 일부러 전수하지 않았다. 선박건조는 소형의 연안선박에 그쳤고 대외교역도 주변 국가의 연공 정도만 허락했다. 명제국은 성리학 원칙대로 보수적으로 변했고 개발이나 혁신보다는 안정이 최우선이 되었다.
명제국 중반까지는 안정을 누렸지만 홍무제가 기초공사한 체제는 원래 문제의 여지가 있었다. 후대 황제와 관료주의가 점차 보수적으로 변하고 더욱 완고해지면서 전국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외부의 위협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먼저 자금문제가 터졌다. 홍무제는 근검절약, 낮은 과세, 자급자족을 강조했고 최소한의 지출만으로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후대에는 갈수록 관료체제가 비대해지고 왕궁지출도 커지면서 점점 많은 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징수기준이나 단위가 지역마다 달라서 혼란을 일으켰고 징수를 할 인원이나 체계가 없어서 체납하거나 중간에서 유용해도 그냥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자급자족도 문제를 일으켰다. 관리의 급여를 워낙 낮은 수준으로 못박아 두어서 가족생계를 챙기느라 본업을 등한시했다. 자연스럽게 자신이 하는 일에 수고료를 붙였고 국고를 갉아먹는 동시에 뇌물과 부패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성리학은 고전에 대한 지식과 개인의 내적 미덕을 강조했기 때문에 명제국 관료는 기술이나 특수지식이 상당히 부족했고 심지어 군사행동에 있어서도 문관의 지식이 우선했기 때문에 재앙을 자초하곤 했다.
개인의 미덕에서도 분명한 기준이 없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관리가 받는 수고료는 성리학 기준으로는 뇌물이었지만 행정체제에서는 생존을 위해 받아야 하는 급여의 일부였다. 극소수의 관리가 성리학의 미덕에 따라 수고료를 받지 않았지만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반대로 자리를 이용해 치부를 누린 사람도 있었다.
모든 관리는 6개월~3년마다 정기감찰을 받아야 했고 부패행위가 드러나면 파면이나 강등당했다. 초기에는 과거응시자가 은퇴자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정기감찰로 자리를 비우게 했는데 반대로 역효과를 가져왔다. 하급관리는 상급관리에게 줄을 대며 보호명목으로 뇌물이나 충성을 약속했고 상급관리는 이렇게 세력을 모아 정적을 제거했다.
16세기 중반이 되자 당파가 공공연하게 형성되었고 권력투쟁은 더욱 은밀하게 그렇지만 더욱 치명적인 형태로 전국을 흔들었다.
명제국은 국고고갈과 당파싸움에 이어 국방력 약화라는 3박자 악재에 시달렸다. 이 문제도 명건국 당시부터 씨앗이 뿌려진 것으로 홍무제는 자급자족 경제를 위해 전국의 전략지점(위소)에 수비군을 주둔시키고 직접 농사를 지어 군량을 마련하게 했다.
백호소(百戶所 112명) 10개가 모여 천호소(千戶所 1,120명)를, 다시 천호소 10개가 모여 1위(衛 5,600명)을 구성했으며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가 위를 통제했다. 홍무제 당시에는 전국에 329위가 설치되어 180만 명의 병력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크게 못 미쳤을 것이다.
1400년대 명군이고 아래는 1500년대 명군입니다. 이미 화약 개인화기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악기처럼 보이는 화약무기는 이런 식으로 사용했습니다.
우리의 화차와 비슷한 대형화기도 사용했습니다.
몽골과 같은 유목민족의 경우에는 자급자족 군대가 효율적이고 위력을 발휘했지만 명제국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농민에 가깝게 변했고 군사훈련은 서서히 잊혀져 갔다. 그렇다고 자급자족이 정착한 것도 아니었고 중앙의 지원에 의존했다. 처음에는 곡식으로 지원받다가 나중에는 아예 은으로 지원을 받았다.
늘 그렇듯이 중앙의 지원을 받더라도 중간에서 사라졌고 위소에서는 겨우 굶어 죽지 않고 버틸 뿐이었다. 결국 성관의 허락을 받거나 뇌물을 써서 외부에서 일을 해 생계를 챙겼고 그렇게 나간 병사는 복귀하지 않았다. 탈영, 병사나 전사, 외부경제활동이 겹치면서 위소의 실제 병력이 크게 줄었는데도 부패와 부정 때문에 지원비용은 오히려 급증했다. 심지어 실제 병력이 2~3%만 남은 경우도 있었다.
위소 지휘관은 자신도 실제 병력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베이징 중앙행정부가 병적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지휘관은 과장된 숫자를 보고하고 그렇게 받은 지원금을 착복했다. 조사가 있을 때마다 이전 명단을 다시 제출했고 명제국은 여전히 180만 명의 막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
위기가 닥치면 숫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예를 들어 1550년대, 몽골의 알탄Altan 칸은 서류에서는 강력한 북부국경을 손쉽게 넘어 마음껏 약탈하고 다녔다. 심지어 베이징 부근까지 접근했는데(경술의 변), 수도 부근의 위소에서 5만 명을 소집하는 것도 힘들었다. 서류에는 107,000명이 주둔하고 있어야 했다.
1570년대 초에는 북부국경의 주둔지 논밭을 경작하는 병사가 없어서 황량한 황무지만 이어졌는데도 베이징의 군적에는 수 만 명이 주둔하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불교탱화에 그려진 알탄 칸입니다.
정규군 숫자와 함께 전력도 크게 악화되었다. 지역의 징집병, 건달과 용병으로 소위를 채우다보니 명제국 스스로도 군대를 ‘문란한 오합지졸’이라고 불렀다. 전장에서는 상관이 칼을 휘둘러 목을 베어야 달아나지 않았다.
평상시에는 오히려 지역을 약탈하고 착취해서 오히려 적보다 더 심한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다. 1562년 기록을 보면 “돼지와 같은 탐욕, 늑대와 같은 잔인함은 원래 본성이다”고 한탄했다. 낮에는 지역주민을 약탈하고 밤에는 부녀자를 성폭행했다. 저항하면 주저없이 죽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으면 왜구의 앞을 가로 질러라. 그렇지만 명군의 앞은 절대로 가로 지르지 말라. 차라리 왜구 쪽을 택하면 살 수도 있지만 명군은 이미 죽은 목숨이다’라는 경구가 있었다.
1550년대 명군의 규모를 90만 명 정도로 파악한 기록도 있지만 이 경우에도 2/3은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오히려 국가의 부담이 되고 많은 문제의 원천이다. 조금이라도 급여지급이 늦어지면 난동을 부리고 반란을 생각한다. 심지어 관리를 죽이고 주민을 약탈하고 집을 불태운다… 이제는 국고수입의 상당부분이 오히려 나라를 좀먹는 무용지물의 병사에게 낭비되고 있다”는 상태였다.
1592년 3월, 북부국경 일대의 주둔군이 반란을 일으키며 군대의 문란은 절정에 달했다. 반란군은 지방장관을 죽이고 사령관에게 자살을 강요하고 새로 지휘관을 뽑았다. 명제국은 7개월 동안 반란을 진압하지 못했고 몽골침략이 아닌 정규군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군대를 동원해야 했다.
지휘관의 수준은 더 처참했다. 성리학이 국시인 명제국에서는 군경력이 낮은 지위였고 중앙의 대우는 당연히 좋지 않았다. 역전의 고위지휘관조차 황궁의 전쟁회의에서 발언권이 없었고 전장에서의 전술도 전투를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문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무관 스스로도 자신의 역할을 하찮게 여겼고 아들이 그 지위를 상속받으면서 일종의 사업처럼 변질되었다. 위소의 병력을 부풀려 지원금을 더 받아내는 것으로 모자라서 병사들에게도 상납을 받으며 재산을 모았다.
각 지역의 지휘관은 무학력으로 채워졌고 전략전술과 지도력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병사훈련보다는 뇌물을 받고 풀어주거나 자신의 사업에 강제동원했다.
출전명령이 떨어지면 위험한 전투를 벌이지 않고 승리를 조작해 명예와 보상을 받아내려고 했다. 명제국도 전투에서 사살한 적의 머리숫자를 세어 전과를 계산했고 그 전과에 따라 보상을 했다. 부정이 일상생활이니 전과도 황당하게 조작되었다.
16세기 명제국은 끊임없는 외침과 내란에 시달렸는데 병사들은 선량한 주민을 죽여 손쉽게 승리를 조작했다. 심지어 여성의 목을 베고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두들긴 후에 전과로 내밀었다. 얼굴이 크고 입이 작은 만주부족을 상대하는 경우에는 주민의 목을 벤 후에 증기에 쪄서 부풀렸다. 어떤 지휘관은 1급전과에 머리 160개 부족하자 주변의 주민의 목으로 채워 넣었다.
명군의 이런 습성을 알아챈 외적은 전투가 벌어지면 지역주민을 앞세워 명군의 전과를 채워주었고 명군은 더 이상 외적과의 전투에 목숨을 걸지 않았다.
베이징으로는 승전보고가 연이어졌지만 외침과 반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25년전 무협영화 신용문객잔이 명황무제 시절이었군요. 영화에 조폭무리와 같은 국경수비대가 나옵니다. 왜 국경수비대가 그 모양이었는지 그리고 환관의 기세가 대단했는지를 보다 즐겁게 감상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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