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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한국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 (4_1) - 명제국의 참전

by uesgi2003 2016. 4. 13.


오늘은 무척 기분좋게 밤을 새울 수 있겠군요. 내일은 사필귀정의 태양이 한국 하늘에 떠오르기만을 바랍니다.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은 외국학자의 자료를 정리했기 때문에 의견이나 시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오류가 간혹 있기는 합니다.


임진왜란은 여러 면에서 한국전쟁(6.25전쟁)과 흡사한 역사입니다. 전쟁의 기미가 분명했는데도 논쟁만 벌이다가 국민을 제쳐놓고 북쪽 끝으로 남쪽 끝으로 도망간 것도 그렇고 우리나라 영토가 전장이고 우리가 절대 피해자인데도 강대국만 쳐다보며 휴전과 종전을 맞이했죠.

흥미롭게도 두 전쟁 모두 다국적군이 참전했습니다. 한국전쟁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임진왜란에도 명과 왜 양쪽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이 참전했죠.


부총병으로 참전했던 유정은 원래 명제국의 남쪽 국경을 담당했고 그의 군대에는 쓰촨성 병력 외에 태국, 버마, 인도네시아 등에서 뽑은 병력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5,000명이 압록강을 건너 참전했는데 워낙 독특한 모습 때문에 이들은 물고기처럼 자유자재로 헤엄을 치며 배의 바닥에 구멍을 뚫어 침몰 시킨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태국은 훨씬 더 적극적인 참전의지를 보였다고 합니다.

 

1592, 태국 공물사절단이 북경에 와서 나레스바라Naresvara왕의 참전의사를 전했다. 그는 왜군이 조선에 출병했기 때문에 본토가 비었을 것이라며 함대를 보내 본토를 공격하는 놀라운 제안을 했다.

명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고 그 동안 당했던 일본 해적을 처리하려는 목적이었다. 명제국은 1593 2 6일에 제안을 거부하는 대신에 사절단 호위병을 유정과 함께 조선에 파병하여 태국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그래서 그림에 붉은색 피부의 원주민이 등장하는 모양입니다.  



유정은 거대한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유명해 유대도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 (4_1) - 명제국의 참전 


1593년 초가 되자 왜군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선은 경주를 탈환했고 진주를 왜군의 대대적인 공격에서 지켜냈다. 전국에서 의병과 승병의 반격이 일어났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전라도 점령은 실패했고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생명줄을 지키기 위해 강원도에서 철수했다. 황해도의 구로다 나가마사 병력도 서울에서 평양까지의 보급로는 지키기 위해 철수 했다. 가토 기요마사가 완전히 점령한 것 같았던 함경도에서도 관군과 의병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길주 사령부를 공격을 받았고 왜군에 협력하던 조선관리는 살해되었다.

 

식량문제는 매우 심각했다. 지난 7개월은 1592년에 추수한 곡식을 빼앗거나 사들여서 버텼지만 이제는 현지에서 구할 방법이 없었다. 식량을 구하러 나가면 의병의 공격을 받았고 일본에서 보내는 곡식은 조선수군의 차단 때문에 부산에서부터 힘들게 수송해야 했다.

관군과 의병의 공격을 막고 조선을 합병하려면 본국에서 상당한 병력을 추가로 실어 와야 하는데 먹일 식량이 없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는 평양성에 틀어박힌 고니시 유키나가의 신세가 가장 처량했다. 지난 5개월 동안 평양 밖으로 전혀 나가지 못했다. 조선수군만 없다면 대동강으로 식량과 병력을 받을 수 있었을텐데 이제는 완전히 포기했다.

고니시군은 15927월에 평양성을 점령하면서 막대한 양의 곡식을 그대로 손에 넣었지만 15,000명이 7개월을 먹고 나니 이제 바닥이 났다. 서울에서 사람과 말로 실어 나르는 곡식으로 아사를 면할 정도였다. 일본 규슈출신 병사에게 조선의 혹독한 겨울추위는 전투보다 더 무서웠다.

이렇게 배고픔, 추위, 탈진과 병으로 고니시군은 매일 죽어갔다.

 

늦은 봄에 숫자를 세어보니 부산에 상륙했던 18,700명 중 6,626명이 남아 65%를 잃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22,800명 중 13,980명이 남아 39%를 잃었고 왜군 전체는 반년 만에 100,000명 정도가 남았다.

한양에 있던 사령부는 가토 기요마사에게 함경도를 버리고 급히 남하해달라고 요청했다. 명군이 첫번째 평양전투를 벌이기 전에 보낸 요청인 것을 보면 그만큼 의병의 공격이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요청을 받은 가토 기요마사는 가장 호전적인 무장이었기 때문에 후퇴할 생각이 없었지만 명군의 참전을 계기로 생각을 바꿨다.

 

황해건너의 명제국은 참전준비를 마쳤다. 동쪽 항구를 모두 폐쇄해서 왜군의 상륙에 대비했고 외국인에게는 감시가 붙었다. 랴오둥반도에 수천 명의 병력이 모여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이었다. 원정군은 병부우시랑 송응창이 맡았지만 실제 지휘관은 이여송이었고 오르도스 원정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명군은 좌(양호), (이여백), 우군(장세작) 35,000명이었는데 병력 대부분의 무장이 부실해서 왜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반면에 기병과 포병은 왜군에 비해 압도적이었지만 불랑기포의 구경이 작아서 공성전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대구경포는 겨울에 랴오둥에서 평양까지 수송하기 어려웠다.

 

이여송의 군대는 상당수가 범죄자나 생존을 위해 입대한 사람들이어서 규율이 무척 문란했고 피아를 가리지 않고 해치고 약탈했다. 목을 베고 처벌해야 간신히 군대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

명군은 조선의 구원보다는 명제국 국경보호가 우선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조선이 바라던 모습이 아니었다. 조선은 왜군을 섬멸하고 보복하기를 바랬지만 명군은 왜군을 남쪽으로 몰아내기만 하면 되었다.

 

왜군은 명군의 원정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의병 때문에 평양성 밖으로 나가지 못했고 현지의 정보원도 이제는 사라졌다. 고니시는 명이 일부러 흘린 심유경과의 협상에 큰 기대를 했다.

명은 15929월에 심유경을 보내 협상을 벌이며 오르도스원정에 투입된 병력을 랴오둥으로 옮겼다. 그 사실에 대해서는 심유경도 몰랐다. 그는 조선에 평화를 가져오면 일확천금을 얻는다는 약속을 믿고 평양으로 향했다. 그리고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본심을 속이는 고니시와 함께 거짓말의 향연으로 협상을 벌였다.

 

50일간의 휴전을 얻어낸 심유경은 명으로 귀국했지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왜군에게 남쪽으로 철수하게 만들라는 명령을 받은 심유경은 12, 휴전기간을 1개월 지나 평양에 다시 왔다.

고니시는 그에게 명군을 데리고 왔다는 소문에 대해 물었고 심유경은 겨우 15명의 수행원만 함께 왔다고 대답했다. 다시 한 번 두 사람 사이에서는 거짓말의 향연이 연출되었고 명제국이 일본선박의 입항을 허락하면 군대를 남쪽으로 물리겠다는 무의미한 합의를 보았다.

 

조선은 심유경의 태도가 미심쩍었다. 그는 명령에 대해 알려주지도 않았고 통역관을 떼어 놓았다. 왜군이 두 왕자를 반환한 후에 협상해야 한다는 조선의 요구에 대해 두 왕자는 가토가 데리고 있으며 고니시는 평양성 반환에 대해서만 권한이 있다고 대답했다. 자신은 평양성에 대해서만 협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조선이 계속 압박하자 심유경은 그렇게 왜군을 죽이고 싶으면 조선군이 알아서 죽이도록 하시오. 조선군만으로는 그럴 수 없을 것이오. 왜군 선봉대는 매우 강력하기 때문에 격퇴시키기 힘드오. 그들이 물러가게 한다면 한양에 10만 명이 있더라도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것이오라고 화를 냈다.

 

귀국길에 오른 심유경은 도중에 원정군을 만났고 이여송은 적과 내통한 죄를 물어 죽이려 했다. 이여송은 왜군이 계속 협상 중이라고 착각하도록 살려 두자는 조언을 받아들여 심유경을 원정에 끌고 갔는데 자신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126일에 압록강을 넘으면서 본격적인 명군의 참전이 시작되었다. 선조는 남쪽 강변에서 명군을 환영했고 이여송은 도적떼를 잡으러 우리가 왔으니 전하는 마음 놓으시라고 화답했다. 선조는 몹시 기뻐하며 참담한 전쟁도 곧 끝날 것으로 기대했다.

 

그렇지만 이제 전쟁의 주도권은 명제국과 일본에게 넘어갔고 조선은 앞으로 있을 수많은 전투에서 조연신세로 전락했다. 사실 심유경이 고니시와 단독으로 협상을 벌일 때부터 조선은 아예 제쳐놓은 상태였다.

이제 명군 35,000명을 어떻게 먹일 것인지의 문제도 심각했다. 랴오둥 군대의 수준은 유명했다. 조선을 구원할 천자의 군대일지 아니면 왜군에 이어 조선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 점령군이 될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이여송은 선조를 호위하던 명의 의주병력을 흡수해서 43,000명까지 불렸다. 다시 평양북부에서 대기 중이던 이일의 조선군 10,000명을 더했다. 이일은 15926월 상주전투에서 고니시에게 패했던 장군이었다. 여기에 휴정이 이끄는 승병 4,200명이 더 합류해서 조명연합군은 58,000명까지 불어났다.

평양성의 왜군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오히려 이여송이 보낸 가짜 사신을 명제국의 답신으로 착각했다. 고니시는 심유경과의 협상을 굳게 믿었고 승려 겐소에게 이런 시를 쓰게 했었다.

 

일본은 전투를 중단했고 명은 항복했네.

큐슈와 사해가 이제 한 가족이 되었네.

행복의 기운이 눈을 녹이고

올봄에는 평화의 꽃이 만개하리라.

 

하루라도 빨리 귀국하고 싶었던 고니시는 명의 사신을 환영할 20명을 보냈는데 대부분이 살해당한 후에야 대군의 남하에 대해 알았다. 연회 중 습격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고 가던 길에 기습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는데 3~4명이 간신히 살아 돌아와 공격을 알렸다.



조선의 민관승 연합병력입니다. 

 

159325, 60,000명에 가까운 대군이 평양성 외곽에 도착했다. 왜군은 조선원정 처음으로 대군을 맞아 수세에 몰렸다. 추위와 굶주림에 죽어가던 왜군이었지만 전투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성벽에 올라 함성을 지르고 북을 두드리며 사기를 되찾았다. 고니시는 평양성 4개 문에 2,000명씩을 배치하고 나머지는 예비병력으로 남겨두었다.

평양성 내에는 일반시민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0일전부터 평양성 주변에서 떠나지 않으면 모두 살해당한다고 경고를 했었다. 평양성을 공격하기 전에 다시 한번 떠나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조선인을 죽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26일 휴종의 승병이 평양시 북쪽의 전략요충지인 모란봉을 공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곳은 마츠우라 시네로부의 1,000명이 지키던 곳으로 이곳을 그대로 두면 연합군의 배후가 위험했다.

명군과 조선관군보다는 산악전에 익숙하고 결전의 의지가 훨씬 강한 승병이 선두에 섰다. 모란봉 전투는 이틀 동안 계속되었고 승병 600명 이상이 전사하며 고전하다가 명군이 서쪽에서 합세하면서 왜군을 평양성으로 몰아 넣었다.

 

28, 연합군은 서서히 평양성으로 접근했다. 평양성 성곽에는 왜군이 온갖 깃발을 꽂아두고 칼날을 휘두르며 연합군을 위협했다. 명군이 평양성 북, 서와 남동쪽을 조선군이 남서쪽을 맡았다. 동쪽은 대동강과 맞닿아 있어서 공격할 수 없었다.

연합군은 불화살을 쏘아 성내에 불을 지르고 대포를 성문에 쏘고 성벽에 사다리를 걸쳤지만 왜군의 저항이 워낙 거세서 오전공격은 힘을 잃었다. 이여송은 직접 말을 몰고 나가 도망치는 병사의 목을 베고는 첫번째로 성벽을 넘는 사람에게는 5천량의 은을 주겠다고 소리질렀다.


 

처벌과 상금에 자극을 받은 연합군은 다시 공세에 나섰고 일부가 성벽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거의 비슷한 시간에 포격으로 칠성문에 구멍을 냈고 병사들이 성안으로 밀려들어갔다.

왜군은 이미 시내에 상당한 진지를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평양성 북쪽 구석에 흙과 통나무를 모아 장벽을 쌓았고 다가오는 연합군에게 조총세례를 퍼부었다. 좁은 길목으로 밀려들어가던 연합군은 납탄과 화살을 맞고 수백 명이 쓰러지자 공포에 질려 다시 성밖으로 달아났다.


 

이여송은 어쩔 수 없이 후퇴를 명하며 조선군에게 평양성 감시를 맡기고 북쪽으로 후퇴했다. 다음 공격에서도 막대한 희생은 불가피했다. 이여송은 고니시에게 다시 철수를 제안했다. “내 군대는 너희를 단 한 명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막강하다. 그렇지만 많은 희생을 피하고 싶다. 너희가 물러갈 길을 열어줄 테니 즉시 평양성을 떠나라.”



후손은 명군의 위용을 이렇게 조작(?)하고 싶었겠지만 실제 기록은 참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