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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한국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 (4_2) - 벽제관 참패와 행주대첩

by uesgi2003 2016. 4. 22.


외국학자의 자료를 정리한 것이어서 오류가 있고 시각이 다릅니다. 그리고 이번 이야기부터는 한양에서 한성으로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 (4_2) - 벽제관 참패와 행주대첩


그렇지 않아도 종전을 원하던 고니시가 이여송의 제안을 마다할 리가 없었다. 일본을 떠날 때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든 병력이 첫날의 격전에서 다시 2,300명이 줄어들었고 군량도 대부분 빼앗겼다. 2~3일만 더 공격하면 남은 5천명은 전멸할 판이었다.

고니시는 물러날 길을 비워달라고 부탁했고 이여송은 조선군에게 왜군의 길을 막지 말라고 명령했다. 고니시는 한밤중에 평양성을 빠져나와 대동강을 건너 한성으로 향했다. 부상병은 그대로 버릴 수 밖에 없었는데 죽음을 직감한 부상병은 기어서 따라가려고 했다.

 

조선은 평양성 탈환이 반갑지만은 않았다. 승전의 주역은 이여송이었고 이일 휘하의 조선군은 보조역할로 밀려났다. 더구나 명군은 성안에 몰아 넣은 왜군과 고니시를 그대로 놓아주었다. 이때부터 이여송이 왜군에게서 뇌물을 받았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성으로 들어간 명군은 왜군과 조선인을 가리지 않고 목을 베어 전리품으로 챙겼고 그 내용이 북경까지 들어가 조사를 벌였지만 처벌받지 않았다.

송응창은 만행조사를 위해 평양에 온 관리에게 전투에서 왜군 16,047명을 죽이고 성을 불태워 10,000명을 더 죽였다는 말도 안되는 전과를 자랑했다. 수 많은 포로를 뺀 숫자였다. 겨우 10%만이 달아났다고 덧붙였다.

 

조사관은 주변 조선인을 탐문해 원래 15,000명을 넘지 않는 왜군이 있었고 전과도 1,285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조선의 임진왜란 기록이 사실 그대로는 아니어도 명의 기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다는 증거였다.

중국왕조는 원래 과장을 즐겼고 명제국도 왜군에게 100만 대군을 협박했지만 실제로는 겨우 40,000명만 보낼 수 있었다.

 

고니시군은 9일이 걸려 한성에 도착했다. 굶주리고 탈진한 상태에서 후퇴 중이었고 한성까지는 홀로 살아남아야 했다. 조선군은 이여송에게 추격해 섬멸하자고 간청했지만 이여송은 왜군이 저절로 물러가게 만들고 전과를 챙기면 그만이었다.

고니시군은 217일에 빈사상태로 한성에 들어섰다. “갑옷 아래에 입은 옷이 전부였다. 용맹했던 병사가 이제는 굶주리고 지쳐서 산과 들의 허수아비와 같았고 시체나 다름없었다고 기록했다.

 

이여송도 나름 고충이 심각했다. 4만 명의 병력과 1만마리 이상의 말을 먹일 식량이 부족했다. 가져온 것에 조선이 마련한 것을 보태 평양까지 왔는데 남하하려면 그 이상이 필요했다. 이여송은 평양에서 5일간 머물면서 영의정 류승룡에게 곡식과 마초를 미리 준비하게 했다. 류승룡은 왜군이 방금 지난 곳을 다시 훑으며 식량을 마련했다.

이여송은 219일에 개성도 손쉽게 탈환하자 평양성전투의 패전을 잊고 다시 자신감을 얻었다. 명군을 본 왜군이 마구 달아나고 있다는 착각을 했다. 개성에서 며칠 머무르던 이여송은 조선의 항의를 받자 다시 임진강으로 향했다. 조명연합군은 한성 북쪽 45km의 파주에 진영을 차리고 한성탈환을 준비했다.

 

이 무렵에 가토 기요마사도 함경도에서 한성으로 철수했다. 그는 절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었지만 서쪽 전선이 무너졌고 함경도에서도 드디어 의병과 관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고집을 피우고 그대로 머무르다가는 임진강으로 향하는 명군에게 배후를 끊겨 갇힐 판이었다.

이여송은 가토에게도 항복을 권유했었다. 가토는 조선여성을 나무에 묶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그 직후에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함께 한성으로 향했다. 포로로 잡힌 조선의 두 왕자가 그 뒤를 따랐다.

후퇴길은 고니시의 경우보다 훨씬 힘들었다. 살을 에이는 추위 속에 200km 이상의 산악길을 걸었고 낙오하는 병사에게는 의병이 달려들었다. 부산에 데리고 왔던 병력 22,800명 중 겨우 4,300명만이 한성에 다시 돌아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로 히데요시와 달리 체격이 컸던 가토 기요마사는 일본에서도 손꼽는 무장이었습니다.

조선에서는 삼촌에게 보낼 선물로 호랑이 사냥을 벌였는데 간혹 이런 과장된 히어로 물이 보입니다. 실제로는 아래 그림이 보다 정확하겠죠.

가토 기요마사를 울산왜성에 몰아 넣고도 죽이지 못한 것이 한스럽지만 그가 살아 돌아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놀아나며 히데요시 가문을 멸망시키는 주역이 되니까 조금은 한을 풀 수 있을 겁니다.

이번 지진에 큰 피해를 입은 구마모토성이 그가 임진왜란의 경험을 바탕으로 심혈을 기울여 지는 성입니다. 


 

북쪽으로 진격했던 병력이 모두 한성으로 모이고 있는데도 6진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북쪽 15km에서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그는 전라도 공략을 시도하다가 조선관군과 의병의 결사적인 항전을 뚫지 못했고 10월에 개성으로 들어왔었다. 전세가 역전되자 고바야카와는 개성을 비우고 한성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거부했다.

고니시가 후퇴하면서 모든 병력을 거둬갔는데도 고바야카와군은 그대로 남았다. 감찰관인 오타니 요시츠구가 찾아와 명군과 결전을 벌일 때에 선봉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물러났다. 조명연합군이 개성이 들이닥치기 몇 시간 전이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사후에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숨은 일등공신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입니다.

히데요시의 공격에 곤혹을 치루던 중에 아케치 미쓰히데의 반란이 벌어졌고 히데요시가 바로 등돌려 돌아갈 수 있도록 발목을 잡지 않은 덕분에 히데요시는 반란을 평정하고 정권을 잡았습니다.

이후 히데요시에게 복종해서 하시바라는 성을 받을 정도로 충복이었고 임진왜란에는 60세라는 노령에도 불구하고 참전했습니다.

벽제관에서 보여주었던 집념과 투지를 히데요시와의 전투에서 보여주었다면 역사를 우리에게 좋은 쪽으로 흘러갔을 것입니다. 

 

고바야카와는 임진강을 건넌 후에도 한성에 입성하지 않고 북쪽에 진영을 차렸다. 짜증이 난 아군이 계속 전령을 보내자

여러분은 위대한 태합(히데요시)전하와 함께 승전만 맛보았기 때문에 패전을 승전으로 바꾸는 것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소. 이 늙은이의 경험이 있으니 그대로 맡겨주시오. 적은 워낙 숫자가 많아서 한 두 번 이긴다고 해도 우리 주변을 파리떼처럼 몰려들게요. 죽기살기로 싸우지 않는다면 적은 물러서지 않을 것이오. 충분히 물러났으니 이제는 죽음 속에서 생을 찾아야 할 때이요라며 돌려보냈다.

고바야카와는 자신이 유리한 입지를 선정하고 텐노잔이라고 부르는 결전을 기다렸다.

 

227, 남쪽을 바라보는 이여송은 자신만만했다. 평양성에 이어 개성을 탈환했고 한성도 눈앞에 두었다. 선봉대 3,000을 미리 보내두고 본대는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선봉대는 벽제에서 왜군을 만나 큰 피해를 주었다.

600개의 머리를 베었다는 보고가 있었지만 실제 숫자는 훨씬 낮았다. 이 보고를 들은 이여송은 1,000기의 기병을 끌고 앞으로 달려나가 흔들리는 왜군을 상대로 전과를 올리려고 했다.

근처 산 기슭에 왜군무리가 모여 있었고 이여송은 기병을 둘로 나누어 공격했다. 왜군이 달아나자 좁고 긴 계곡을 따라 계속 추격하다가 왜군 본대와 마주쳤다.

 

선두에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있었고 그 뒤에는 20,000명이 4개 집단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우키타 히데이어가 한성에서 보낸 병력까지 합류해서 모두 41,000명까지 불어났다.

이여송은 목숨을 잃을 위기에 몰렸다. 실제로 왜군의 추격을 받아 죽기 직전에 부관의 희생을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20,000명의 명군이 때마침 도착해서 61,000명이 좁은 계곡을 두고 격전을 벌였다.

왜군은 근접전에서 조총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고 명군은 진흙과 좁은 길 때문에 기병을 활용하지 못해 말을 버리고 보병으로 전투를 벌였다. 오전10시부터 정오까지 벌어진 격전에서 숫자와 전력이 우월한 왜군이 명군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파주까지 밀어내면서 거리가 벌어지자 조총을 본격적으로 사용했고 명군의 시체가 쌓여갔다. 날이 저물자 고바야카와는 병력을 물려 한성에 들어갔고 6,000개의 머리를 자랑했다고 한다.







그림자료에 노란색이 누구인지 궁금해하실 테니 설명하겠습니다. 다치바나 무네시게라는 다이묘로 남쪽 지역에서는 손꼽는 무장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임진왜란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랑하는 당시 최고의 다이묘와 무장이 대거 참전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일본에서는 소설이 여러권 출간되었을 정도로 인기가 있는 인물입니다. 


 

이여송은 조선군에게 겨우 몇 백명만 잃고 왜군 대병력을 막아냈다는 거짓을 알렸다. 사실이 무엇이든 이여송은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어졌다. 평양성에서는 성벽이라는 장애물이 있었지만 벽제에서는 자신이 자랑하던 기병을 투입하고도 패전했다.

조선군의 재촉을 받자 날씨 핑계를 댔다. 최근에 온 비로 길이 너무 미끄러우니 후퇴해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다음 전투를 노리자고 했다. 임진강을 거쳐 개성까지 후퇴했다.

본국에 보낸 보고에는 20만이 넘는 왜군이 모여 있어서 가지고 있는 병력만으로는 방법이 없다고 호소했다. 실제 왜군병력은 최대 60,000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자신도 벽제전투에서 낙마한데다가 병까지 걸려 한심스러운 상태였다.

 

그 동안 왜군은 외곽에 불을 질러 명군 기병이 먹일 목초를 없앴다. 목초를 구하지 못한 명군은 며칠 만에 1,000마리의 군마를 잃었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가토 기요마사가 함경도에서 배후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실제로 가토는 한성으로 곧바로 들어갔지만 이여송은 가토의 평양성 공격을 막아야 한다는 핑계를 댔다. 조선군은 그대로 머물러 줄 것을 간청했지만 명군이 한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향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한성은 불타고 있었다. 224일 이른 새벽에 조명연합군을 돕기 위해 여러 군데에서 불을 냈고 위기를 느낀 왜군은 북쪽 벽제로 향하는 길의 조선인을 마구 죽였다. 그리고 대승을 거두고 폐허만 남은 한성으로 되돌아왔다.

왜군 다이묘들 사이에서는 설전이 벌어졌다. 한성에 남아 명군의 두 번째 공격을 막아낼 것인가? 아니면 남쪽으로 후퇴할 것인가?

가토 기요마사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의견에 합세해 전투를 고집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와 다른 다이묘는 무의미한 전투에 목숨을 걸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안전한 한성을 버리고 후퇴길에 올랐다가는 조명연합군의 추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사방에서 조선 관군과 의병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특히 승병의 활약은 눈부셨다.

 

무엇보다 행주산성이 거슬렸다. 권율과 9,000명이 지키는 목책산성은 한강을 내려다 보며 왜군의 움직임을 꿰뚫고 있었다. 권율은 이미 웅치와 이치전투에서 왜군의 공격을 막아냈고 그 공적을 인정받아 전라도 순찰사에 올랐다.

그는 왜군을 야지에서 상대할 수 없으며 공격을 끌어들여 피해를 주어야 한다는 경험을 얻었다. 그리고 1593년 초에 조명연합군의 반격을 예상하며 처영의 승병과 함께 허물어진 행주산성을 다시 보강했다. 행주산성의 뒤는 한강의 가파른 절벽으로 방어하기에 더없이 좋은 천혜의 요충지였다.

 

314, 왜군은 명군의 공격이 있기 전에 눈의 가시 같은 행주산성부터 제거하기로 했다. 그리고 유명 다이묘가 총출동했다.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우키다 히데이에, 이시다 미츠나리가 나섰고 한성주둔군의 절반인 30,000명이 그 뒤를 따랐다.

전투는 날이 밝으면서 시작되었다. 왜군은 숫자가 너무 많아서 한 번에 올라가지 못하고 순번을 정해 차례로 올라갔다. 숫자는 압도적이었지만 왜군의 장기인 조총은 무용지물이었다. 목책 뒤에서 얼굴만 내미는 조선군을 맞출 방법이 없었다. 반대로 조선군은 화살과 돌을 마구 날렸다.

특히 100발의 화약화살을 날릴 수 있는 화차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수차석포(투석기)라는 신무기도 사용했다.


 

고니시 유키나가군이 첫 번째 공격에 섰다. 침착하게 기다리던 조선군의 화살, 돌과 총통이 한 번에 퍼부어 내리며 왜군의 대열을 무너트렸다. 이시다 미츠나리군도 물러섰고 이시다 자신도 부상을 입었다. 구로다 나가마사의 공성탑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지만 3번에 걸친 공격 끝에 행주산성의 외곽 목책을 뚫는데 성공했다. 우키타 히데이에가 4번째로 공격해 외곽 목책을 지나 안쪽 목책까지 접근했다가 부상을 당하고 물러섰다. 깃카와 히로이에가 곧바로 나서 마지막 방어선을 뚫고 행주산성의 조선군을 공격하려고 했다. 이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는 거리에서 조선군은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던졌다. 심지어 잿가루를 왜군의 눈에 뿌리기도 했다. 코바야카와 다카카게의 7번째 공격을 밀어낸 조선군은 바로 목책을 보수했다.

 

이제 화살도 떨어졌고 (일설에 따르면) 여성이 날라준 돌은 왜군을 막아내기 부족한 무기였다. 절망적인 순간에 경기수사 이빈이 요새 뒤에 배 두 척을 대고 10,000발의 화살을 보급했다.

해가 지고 물러난 왜군은 워낙 피해가 컸기 때문에 이튿날 공격을 재개할 수 없었다. 최소 5,000명을 잃었고 다이묘 3명이 부상을 당해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왜군이 조선땅(바다가 아닌)에서 당한 최악의 패전이었다.

시체를 모아 불지르고 한성으로 되돌아갔다. 뒤에 남겨진 모습이 마치 삼도천(三途の川, 저승의 ) 같다는 기록을 남겼다.


 

왜군이 물러가자 조선군은 목책 밖으로 나와 왜군의 목을 잘라 목책에 끼웠다. 전쟁 10개월이 지나면서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던 조선인은 전사로 변했고 처절한 복수를 원했다. 명군의 도움이 없더라도 왜군의 보급로를 끊었고 최소한 공성전에서는 왜군을 상대할 있게 되었다.

행주산성의 참패로 왜군은 이상 한성을 고집할 없게 되었고 결국 남쪽으로 철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