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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한국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 (5) - 히데요시의 두 번째 협박

by uesgi2003 2016. 5. 1.


가토 기요마사의 소환까지 설명하면 너무 길어져서 오늘은 히데요시의 스페인 협박에 대해서만 짧게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 (5) - 히데요시의 두 번째 협박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침공에 앞서 필리핀의 스페인총독에게도 복종을 요구하는 편지를 하라다 마고시치로 편으로 전했고 이제 3년이 지났다. 중간에서 난처해진 하라다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조선과 명에게 그랬던 것처럼 원래 요구를 부드럽게 바꾸고 자신의 돈으로 선물을 구입해 마닐라 총독에게 선물했다.


총독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Gomez Perez Dasmarinas는 의심을 품었다. 히데요시의 편지가 당시의 국제외교 기준으로 볼 때에 너무나도 불손하고 강경했다. 그렇지만 필리핀 식민지경영이 아직 불안정했기 때문에, 펠리페왕은 세계최강의 군주이며 진정한 우정과 동맹을 환영한다는 답장과 답례품을 보내기로 했다.



왼쪽이 동남아시아 원정을 지휘했던 고메스총독입니다. 인도네시아 원정길에 따로 합류하다가 중국인 선원의 반란으로 살해당했고 스페인의 식민지사업은 잠시 중단되었습니다. 

아들이 식민지사업을 이어받아 필리핀 주변의 탐험을 계속합니다.

 

그는 후안 코보Juan Cobo신부에게 일본으로 가서 편지를 직접 전달하고 히데요시의 의도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했다. 신부는 1592년 여름에 나고야에 도착해 히데요시를 만난 자리에서 지구본으로 스페인의 방대한 식민지를 보여주었다.

신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당시 스페인은 최절정기의 로마보다 방대한 영토와 많은 인구를 보유했다. 유럽의 중국과도 같은 지위였다.

그렇지만 중간의 통역잘못으로 히데요시는 신부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지구본을 복종의 선물로 받아들였다.



최절정기의 스페인 식민지입니다. 

 

히데요시의 두 번째 편지는 더욱 강경하고 위압적이었다. 태양과 자신의 사이에 있는 모든 나라가 머리를 조아리지 않으면 전쟁으로 궤멸시키겠다는 내용이었다.

 

하폰(일본)의 모든 영토와 조선을 정복했으며 많은 장수가 마닐라 원정을 청원하고 있소. 하라다가 이곳과 그곳을 왕복하며 마닐라 사람들이 적대적이지 않다고 하기에 군대를 보내지 않았소. 조선을 도우려던 명의 많은 귀족을 죽였더니 하폰과 영원한 우애를 바란다는 사절을 보내고 있소.

그들이 약조를 어긴다면 친정으로 파멸시킬 것이오. 그 후에는 루손Luzon도 사정권일 것이오. 그러니 영원한 우애를 맺도록 합시다. 그런 취지로 카스티야왕(펠리페2)에게 편지를 보내시오. 그가 멀리 있다고 해서 내 말을 가볍게 듣지 않도록 하시오. 그 멀리까지 가보지 못했지만 어느 나라가 어디에 있는 지는 들은 바가 있소.”

 

후안 코보신부는 마닐라로 귀환하던 중에 난파되어 죽었고 15944월이 되어서야 복사본이 필리핀총독에게 전해졌다. 고메즈도 필리핀 남부의 말루쿠Moluccas제도를 탐험하다가 중국인선원에게 피살되었다.



말루쿠는 필리핀 바로 밑의 섬지역입니다. 해군조차 제대로 없는 일본이 참 멀리도 욕심을 냈습니다. 


아들 루이스가 임시총독을 맡았는데 히데요시의 편지를 받고는 몹시 화를 냈다. 살해당한 아버지가 히데요시에게 머리를 조아렸다는 주장에 대해 확실한 답변을 하기로 했다. 태양이 히데요시의 탄생을 축복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태양은 무생물이며 신만이 그런 힘이 있다고 반박했다. 무지한 사람들의 조작에 놀아나지 말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펠리페 폐하와 기독교 통치 하의 스페인과 영토는 매우 방대하오스페인이 가진 아시아 영토는 모퉁이에 불과하오. 성서와 기독교 법률을 따르지 않는다면 폐하가 유일한 분이시오. 하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폐하는 그런 식으로 권위를 증명하지 않소. 폐하와 그 분을 대리하는 총독은 당신과의 우애를 원하지만 지난 편지보다 친절하고 솔직하기를 바라오.”

 

루이스는 전쟁회의를 열고 이 편지를 읽었다. 장교와 유력인사의 의견을 받아 히데요시의 태양축복에 대한 반박은 삭제했다. 양국은 2년 동안 별 일 없이 지내다가 1596년 가을에 보물운반선인 산 펠리페San Felipe이 난파되면서 완전히 반목하게 되었다.

금과 비단을 실은 갈레온 산 펠리페가 시고쿠 앞바다에 좌초되었는데 그 지역 관리가 수하물 대부분을 갖고 선원을 억류하는 일이 벌어졌다. 억류된 항해사는 스페인이 일본을 중남미처럼 식민지로 만들 수 있으며 종교인을 선봉으로 삼는다고 경고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푸른색은 포르투칼 교역로, 흰색은 스페인의 마닐라 교역로입니다. 


히데요시가 이 말을 전해 듣고는 간사이 일대의 기독교 신자 4,000명 중 지도급 24명을 체포했다. 기독교가 왕성하게 퍼지고 있던 나가사키까지 700km를 걷게 한 후에 처형했는데 그들에게 편의를 제공한 2명이 추가로 처형되어 총 26명의 순교가 일어났다.

159725, 26명이 나가사키 언덕 위에서 십자가형을 당했는데 기독교에 대한 조롱이라기 보다는 당시 전국시대의 일반적인 처형방식이었다.


(우에스기 왈: 스페인은 이미 영국원정에서 무적함대 대부분을 잃은데다가 1596년에 국가파산 선고를 할 정도로 국력이 소진되어서 극동아시아까지 신경쓸 여지가 없었습니다.)




일본 나가사키의 26인의 순교지입니다. 


바다사자(머라이언)는 싱가폴의 상징처럼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마닐라가 500년 전부터 문장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카스티야 성을 진주로 바꾸고 계속 사용하고 있는데 싱가폴로만 알려져서 좀 억울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