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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한국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 (6) - 죽다 살아난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

by uesgi2003 2016. 5. 3.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 (6) - 죽다 살아난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


159528, 만력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봉신국왕으로 삼는 외교사절로 이종성을 임명했다. 이종성은 태합(히데요시의 일본 직위로 섭정하는 최고권력자)과 주요 다이묘에게 하사할 왕관, 인장과 궁중복을 가지고 긴 여정을 떠났다.

이종성은 5월에 한성에 도착해서는 왜군이 여전히 남해안에서 버티고 있는 것을 알았다. 일본사절 나이토 요한(가톨릭 세례명)3가지 약조가 지켜지지 않았다. 두 번째 약조는 분명히 왜군을 조선뿐만 아니라 쓰시마에서도 물리겠다고 했다.

명과 왜 양국의 사절이 종전을 위해 서로 기분 좋은 거짓약조를 했었고 이를 모르는 명사절은 왜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6개월 동안 한성을 떠나지 않았다.



고니시와 가토는 출정 전부터 경쟁의식이 대단했습니다. 왼쪽이 고니시, 오른쪽이 가토입니다.

어릴 때부터 히데요시 집안출신으로 무용을 자랑했던 가토는 상인출신의 고니시가 못마땅했고 자신을 따돌리고 한성에 먼저 입성하자 분열은 극에 달합니다.

고니시는 히데요시에 대한 충성을 다해 세키가하라전투 후에 처형당했고 가토는 다행히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이용 당하면서 주군집안의 몰락에 한몫합니다. 그 대가로 고니시의 영지를 차지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고 독살당했다는 의문이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고니시 유키나가는 웅천, 서진포와 거제도 병력 일부를 귀국시키며 돌파구를 찾았다. 나머지 병력은 부산 부근에 집결했다. 이종성이 사실확인을 위해 사람을 보내자 김해와 동래 진영을 부수고 부산으로 불러 들이면서 최대한 약조를 지켰고 이종성이 부산으로 와야 나머지 병력도 철수시키겠다고 대답했다. 남은 병력은 명사절을 영접하고 본토까지 호위할 병력이라고 설명했다.

이종성은 159510월에 부산에 도착했는데 지나치게 많은 왜군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는 전면철수를 요구하며 다시 버텼다. 고니시는 다른 다이묘를 마음대로 부릴 수 없었기 때문에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고니시는 15962월에 본토로 넘어가 히데요시를 만났고 심유경도 나고야까지 따라가서 명사절 영접준비를 했다.

 

협상을 좌지우지하던 고니시가 사라지자, 가토 기요마사는 부산의 명사절에게 전령을 보내 고니시가 주군을 속이고 있다고 경고했다. 만약 그대로 일본으로 건너가면 태합의 분노는 당연하고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흉흉한 왜군 분위기를 두려워하던 이종성은 부사 양방형 등을 남겨두고 홀로 한밤중에 경주로 달아났다. 왜군진영을 발칵 뒤집혀 사방으로 그를 찾았지만 따라잡지 못했고 그렇게 달아난 이종성은 결국 북경 감옥에 수감되었다.

 

고니시는 조선으로 오던 길에 이종성의 도주를 들었다. 지난 3년 동안 억지로 짜맞춘 판이 한 번에 뒤집혀버렸다. 그는 즉시 히데요시에게 전령을 보내 가토 기요마사가 명사신을 협박해 달아나게 만들었다고 보고했다.

히데요시는 몹시 화를 내며 가토를 소환해 교토에 대기시키고 처벌을 고민했다. 히데요시의 무장 중 최고이자 조선원정의 영웅이었던 가토는 히데요시를 만나지도 못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고니시에게는 천만다행으로 부사 양방형과 명황실이 보낸 선물 등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명황실은 양방형을 수사로, 심유경을 부사로 올리고 사신임무를 맡겼다. 더러워진 관복대신에 새 관복도 다시 보냈다.

고니시는 교토 후시미성에 있는 히데요시가 명사신단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며 조선에는 상징적인 병력만 주둔할 것이라고 말하며 양방형을 안심시켰다. 그리고는 한가지 수작을 더 부렸다.

조선사신이 함께 가지 않으면 평화조약은 명과 일본 사이에 맺어지고 조선은 제외될 것입니다. 나중에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고니시는 조선의 사신도 억지로 끌어내 히데요시에게 조선도 복종한다고 거짓말할 생각이었다. 1596710, 300여명의 명사신단은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조선은 명의 일본행도 반대하는 판에 조선사신은 절대로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만 조선은 이미 전쟁과 협상에서 조연에 불과했다. 명황제 대리인인 양방형의 요구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직급이 미천한 군관을 보내 히데요시에게 모욕을 주려고 했지만 외교에 미숙한 군관은오히려 화를 부를 수 있었다. 결국 직급은 높지 않으면서 이런 일에 능숙한 황신과 박홍장을 선택했다.

두 사람은 사카이에 있던 명사신단에 합류했고 후시미성으로 향했다.

 

히데요시도 이미 명제국 정벌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원정실패를 인정하기 보다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외교가 차라리 낫다고 판단하고 고니시가 중간에서 조작할 수 있는 권한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조선원정보다는 일본식 연극()과 다도에 심취해 자신이 직접 다이묘 앞에서 연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1593년부터는 측실 차차에게서 아들 히데요리를 얻어 전쟁에서 거의 등을 돌리다시피 했다.

 

아들이 태어나자 히데요시는 태도를 바꿨다. 조카에게 관백의 자리를 주고 자신은 태합으로 물러났고 교토 외곽의 모모야마에 23만 명을 동원해 은퇴용 성을 짓고 있었는데 15958월에 조카 히데츠구의 잔인한 행실을 물어 할복시켰다.

그리고 후환을 없애기 위해 히데츠구의 주요 가신뿐만 아니라 31명의 여성과 3명의 어린아이까지 모두 처형했다. 히데츠구의 머리를 전시해 놓은 처형장에서 이들을 처형한 후에 매장한 후에 반역자의 묘라는 묘비를 세웠다.

이 때부터 히데요시의 관심은 다이묘의 충성과 아들의 미래에 집중되었다.



미천한 가문출신이라 사람을 끔찍이도 아꼈던 히데요시였는데도 아들의 미래를 위해 조카인 히데츠구를 그대로 둘 수 없었습니다.

히데츠구의 인성도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라는 기록이 있는데 본인은 억울할 수도 있을 겁니다. 사람을 재미로 죽였다고 하는데 원래 인성인지, 꼭두각시 관백의 광기였는지 아니면 기록조작이었을지 그 당시 사람들만 알겠죠. 


히데요시는 후시미성을 지을 때에 지진에도 문제가 없다고 자신했지만 15968 30일 저녁에 엄청난 지진이 오사카와 교토 일대를 뒤흔들었다. 히데요시가 압수한 도검을 녹여 만든 거대한 불상도 부숴졌고 쓰나미가 해안가를 휩쓸었다.

후시미성도 피해가 너무 커서 나중에 철거해야 할 정도였다. 히데요시는 아내, 측실 요도미기(차차)와 어린 아들만 끌어안고 밖으로 탈출했다. 성에 있던 4백명은 폐허에 깔려 죽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지진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할복명령이 언제나 떨어질까 노심초사하던 그는 지진이 나자 후시미성으로 달려가 삼촌인 히데요시를 찾았다. 히데요시는 가토를 보자마자 토라(호랑이. 가토의 별명)! 이렇게나 빨리 달려오다니!”라며 반가워했다.

히데요시는 가토의 충성심을 확인했고 별명을 부르며 용서했다.



워낙 극적인 장면이라 그림으로 많이 재현되었습니다. 


 

1022, 무너지지 않은 오사카성에서 양방형을 맞이했다. 히데요시는 명과 조선의 항복으로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질을 데려오지 않은 조선사신을 외면하고 성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양방형이 히데요시를 만나는 순간은 희극의 한 장면이었다.

히데요시는 양방형이 엎드리지 않는 것을 보고 의아해했고 반대로 양방형은 히데요시가 명황제의 서신 앞에 엎드리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고니시는 히데요시에게 양방형이 명의 고관이기 때문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고 설명했고 양방형에게는 히데요시가 고령이라 허리나 무릎을 굽힐 수 없다고 양해를 구했다.

 

양쪽의 사기극이 무사히 넘어가는듯 싶었지만 연회에서 모든 것이 드러났다. 히데요시는 사신이 선물한 왕관와 관복을 입고 나타났다. 이번에도 조선사신은 초대받지 못했다. 히데요시는 중국어 해석에 능통한 승려 사이쇼 쇼타이를 불러 명의 서신내용을 읽게 했다.

고니시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순간이 왔다. 사이쇼에게 서신내용을 순화해서 읽어달라고 미리 부탁했었지만 그는 명이 히데요시를 봉신국왕으로 허락한다는 원래 내용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옮겼다. 심지어 히데요시를 책망하며 명과의 교역은 생각지도 말라는 경고까지 있었다.

히데요시는 마치 미친사람처럼 입에 거품을 물며 왕관을 바닥에 던지고 입고있던 관복을 찢었다.

 

히데요시는 명과 조선사신을 죽이려고 했고 현장에 있던 승려들은 명이 원래 주변국과 봉신관계부터 맺으며 히데요시가 상당한 인정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하며 만류했다. 냉정을 되찾은 히데요시는 사신단에게 맨손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목숨을 건진 양방형은 물론이고 성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를 모르고 있던 황신도 서둘러 짐을 챙겨 떠나야했다.

고니시는 요도기미 등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히데요시도 고니시를 처벌하기가 난감했다. 고니시를 처벌하면 감사역으로 조선에 파견했던 측근 오타니 요시츠구, 마시타 나가모리와 이시다 미츠나리도 처벌해야 했다.

고니시가 명의 계략에 속은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네 사람에게 조선출병을 명령했고 이렇게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요즘 일본에서 방영 중인 사나다마루를 보면 이번 이야기의 주요 인물이 대거 등장합니다.

차차(요도기미)는 당시 일본의 절세미인이라고 했는데 드라마에서는 갸우뚱하게 만드는군요. 히데요시는 미천한 신분인데도 감히 주군 오다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를 사모하다가 인연이 맺어지지 않자 그녀의 딸인 차차를 측실로 맞이합니다.

히데요시 말년에 얻은 히데요리는 연극(노)배우의 아이라는 소문도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드라마에서도 차차의 성격이 보통이 아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