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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한국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 (4_3) - 한성 탈환

by uesgi2003 2016. 4. 25.


진정으로 현명한 사람만이 역사에서 교훈을 얻기 때문에 어리석은 역사는 계속 반복됩니다. 

500년 전이나 50년 전이나 전시작전권을 외국에 바치고 안심하는 사람들은 여전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외국학자의 자료이기 때문에 오류도 있고 시각도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 (4_3) - 한성 탈환

 

봄이 왔다. 그리고 전쟁은 2년차에 접어들었다. 부산에서 평양에 이르는 주요 도시와 마을이 폐허로 변했다. 가족은 흩어졌고 아이를 버렸고 노약자는 죽어갔다. 왜군을 무사히 피한 사람도 죽음은 피하지 못했다. 전쟁으로 추수를 못했기 때문에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다.

왜군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병력이 눈을 구경하기 힘든 규슈, 시코쿠와 혼슈 서부출신이어서 조선의 겨울은 지옥처럼 가혹했다. 배고픔과 향수에 동상까지 덮쳤다. 기독교 신자인 고니시 유키나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몰래 본국의 예수회신부 세스페데스Cespedes를 불렀고 그는 15944월까지 머물면서 이런 기록을 남겼다.

 

조선의 추위는 매우 혹독하고 일본과 비교할 수 없다. 하루 종일 사지가 반쯤 얼어붙어서 아침에 성호를 긋지 못할 정도다. 그렇지만기운을 차리고 추위를 이기고 있다.

기독교 병사는 매우 비참한 상태이며 배고픔, 추위, 병과 다른 고난으로 고통받고있다히데요시가 식량을 보내지만 너무 적은 양만 도착해서 이들을 먹여 살릴 수 없다. 본국의 지원이 너무 적고 그나마도 늦고 있다. 배가 들어온 지가 두 달이 지났고 많은 배를 잃었다.

평화조약을 협상하는 사람들이 대한 매우 부정적이다. 명의 함대와 군이 도착하는 여름까지 일부러 협상을 지연하고 있다고 의심한다.”

 

그 중에서도 한성의 상황이 최악이었다. 53,000명이 주둔한 한성은 길고 좁은 보급로를 통해 남쪽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군량이 거의 바닥났다. 조명연합군이 용산의 창고를 불태우면서 겨우 한 달치 군량만 남았기 때문에 조선인에게서 군량을 징발해야 했다.

전염병도 치명적이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거리의 사체가 부풀어 올랐고 여기에서 시작된 전염병은 허약해진 왜군을 마구 쓰러트렸다. 2진을 따라 조선에 온 승려 제타쿠는 이렇게 기록했다.

 

남자, 여자, 소와 말의 사체가 뒤엉켜 쌓였는데도 아무도 매장하려 들지 않았다. 악취가 하늘까지 치솟았다. 우리는 이런 환경에서 3~4월을 보내야 했다. 기온이 올라가면서 악취로 숨쉬기 힘들어졌다. 많은 병사가 열병에 걸려 쓰러졌고 죽었다.”

 

나고야의 히데요시는 지금의 상황이 불만스러웠다. 그는 의지가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하고 다이묘의 분발을 재촉했다. 15927월에서 15933월로 연기했던 친정에 대해 다시 언급했다. 1593년 초에 두 명의 대리인을 보내 도쿠가와 이에야스, 아사노 나가마사, 가모 우지사토, 마에다 도시이에 등의 대다이묘의 병력 20만 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건너가겠다고 했다.

통보를 받은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에는 모든 다이묘를 서울로 불러 이 문제를 협의했다. 대부분이 추가파병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킨다는 것에 동의했다. 지금도 먹을 군량이 없는데 20만 명의 추가병력은 다 죽자는 소리였다. 모든 다이묘의 이름으로 히데요시의 친정을 말리는 편지를 보냈다.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에서도 군량이 부족해서 추수를 할 수 있는 가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주전파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도 이 편지에 서명했고 가토 기요마사도 불평하며 서명했다. 그리고 남쪽으로의 철수에 대해 협의했다. 한성에 그대로 있다가는 모두 굶어 죽을 판이었고 역시 대부분의 다이묘가 동의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여송에게 협상제의를 했고 벽제관참패로 사기가 크게 떨어진 이여송도 협상을 반기며 남쪽으로 철군하라고 요구했다. 심유경을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이 다행이었다. 심유경을 보내 협상을 재개했다.

우키타, 고니시, 이시다 등의 다이묘는 히데요시를 자극시키지 않도록 거짓 보고를 했다. 명이 벽제관에서 참패한 후에 협상을 제의했고 명을 안심시키기 위해 병력을 남쪽으로 잠시 철수시킨다고 보고했다. 히데요시는 전쟁에서 여전히 이기고 있고 명이 조만간 머리를 조아릴 것으로 믿었다.

 

선조와 조선대신은 왜와 명의 협상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이여송이 벽제관참패(조선에는 승리로 거짓 통보) 후에 전투를 피하고 있는 것도 분위기로만 짐작하고 있었다. 그저 이여송이 기운을 차리고 다시 남쪽으로 진격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선조는 좌수사 이순신에게 명군에 쫓겨 본국으로 달아나는 왜군을 바다에서 섬멸하라는 명령을 보낼 정도로 사정에 어두웠다.

명령을 받은 이순신은 이옥기와 원균의 병력을 합쳐 가덕도 부근까지 진출해서 명군에 쫓겨 달아날 왜군을 기다렸다. 웅천에서 10척을 부수자, 왜군은 아예 바다로 나오지않았고 경상도 초유사 김성일에게 합동작전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하자 승병과 의병을 활용해 웅천을 공격했다.

이여송이 평양으로 되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데다가 (군량보급을 위한)농사를 지어야 할 시기였기 때문에 53일 조선수군은 다음을 기약하고 되돌아갔다.



안동에 있는 김성일 기념관입니다. 그는 히데요시에 대해 심각한 오판을 했고 성웅에 대해서도 반대를 했을 정도로 눈이 어두웠습니다만, 전쟁이 나자 병력을 모으고 의병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1차 진주성 전투에서도 물러서지 않았고 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병사했습니다.

그가 사용하던 철퇴의 모형이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명원정군의 총사령관인 송응창은 랴오둥에서 이여송의 퇴각을 나무라며 남진을 계속하라고 명령했다. 그렇지만 명제국 황실은 주전파와 주화파가 갈렸고 이여송도 그런 배경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송응창의 명령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협상을 이어가기로 했다.

영의정 류성룡은 이런 저런 정보를 듣고 이여송의 생각을 알게 되었고 두 사람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 58일에 심유경이 서울로 떠나기 전에 류승룡이 먼저 파주의 권율진영으로 향했다. 도중에 명군 부대를 만났고 협상이 시작되니 조선군은 전투를 벌이지 말라는 포고문을 보고 몹시 화를 냈다. 부대 지휘관은 황제깃발에 절을 하라고 명령했지만 류성룡은 한성의 왜군의 절을 받을 깃발에 절할 수 없다며 계속 거부하다가 말을 타고 현장을 떠났다.

이튿날 류성룡은 개성에 있는 이여송에게 찾아가 사과를 하려고 했다. 이여송은 성문을 열어주지 않아 류성룡은 몇 시간 동안 비를 맞으며 기다리다가 사과를 하고 갈등을 잠시 봉합하는듯 했다.



류성룡은 임진/정유전쟁에서 온갖 고생을 다했는데도 모함을 받아 탄핵되었고 다시는 왕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역사는 돌고 또 도는 법입니다. 이 초상화는 20세기에 그려진 표준초상화입니다. 

 

류성룡이 다시 조선군 진양으로 가기 위해 말을 달리자 명군기병대가 길을 가로 막으며 영의정이 맞는지를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말고삐를 붙잡아 방향을 돌리고는 채찍으로 때리며 물러가라! 북쪽으로 되돌아가라!”고 소리질렀다.

개성으로 돌아온 류성룡은 심유경이 임진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배를 숨겼다는 고발을 당해 심한 매지를 당할 뻔 했다. 다행히도 처형을 받기 전에 임진강의 배가 그대로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무고한 이여송의 부관이 거꾸로 처벌을 받고 기절했다.

 

고니시와 다른 다이묘는 한성을 비우고 부산으로 철수해도 좋다는 히데요시의 허락을 받았다. 명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제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58, 심유경이 개성에서 한성으로 향했고 파주의 조선군 진영을 들러 도원수 김명원을 만났다. 그는 왜군이 평양에서도 우리를 속이고 달아났는데 이번에도 그러지 말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소?”라며 불만을 표시했다. 그만큼 이여송과 심유경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한성에 들어간 심유경은 용산의 군량이 모두 불타서 왜군이 절박한 상황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강경했다. “명은 40만의 대군으로 너희를 사방에서 칠 것이다. 한성에 그대로 있으면 모두 도살당할 것이다. 조선왕자와 관리를 풀어주고 남쪽으로 군대를 물리면 목숨을 건질 수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왜군도 명이 전투보다 협상을 선택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고니시는 명의 협상약조를 받아야 철군하겠다고 대답했다. 심유경말고 황제의 대리인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어차피 처음부터 양쪽 모두 본국과 상관없이 거짓협상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고 이여송은 부관 중에 그럴 듯하게 생긴 두 사람을 뽑아 심유경과 함께 다시 돌려보냈다. 심유경은 두 사람을 황제의 대리인으로 소개하며 전권을 받았다고 거짓말했다.

고니시도 10일 후인 519일에 병력을 물릴 것이며 남쪽에 도착하면 왕자 두 사람을 석방하겠다고 거짓약속했다. 가토 기요마사도 아닌 히데요시의 허락을 받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가짜 황제대리인은 나고야로 건너가 히데요시와 종전협상을 벌이기로 했다.

 

명과 왜는 서로의 거짓약속에 매우 만족했다. 심유경은 왜를 조선과 같은 봉신국으로 인정할 것이라고 큰소리쳤고 고니시도 히데요시가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심유경은 경상도, 전라도와 충청도를 왜가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소리까지 지껄였다. 왜군을 한성에서 하루빨리 떠나게 하려고 온갖 장담을 늘어놓았다.

고니시는 사실여부가 중요하지 않았다. 허황된 약속일수록 히데요시가 종전에 합의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물론 조선은 이런 내용을 전혀 알지 못했다.

 

519, 한성의 성문이 열리며 53,000명의 왜군이 부교를 건넜고 뒤에 남은 부교는 명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모두 부쉈다. 이번에는 평양성에서 물러나던 비참한 모습이 아니었다. 군악대가 흥겨운 음악을 연주했고 조선인 포로를 대거 동반해 행진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이여송은 한성에서 불과 하루 거리에 있으면서도 군대를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조선군에게도 공격금지 명령을 내렸다. 왜가 조선국과 같은 봉신국이 될 것이기 때문에 공격하면 안된다고 했다.

류성룡과 김명원은 분노를 터트렸다. “우리가 평화를 원했다면 지금까지 기다리지 않았소. 왜군은 동래, 상주, 평양에서 매번 편지를 보내 협상을 원했지만 거부했소. 우리 모두가 죽을지라도 협상으로 모욕당하지 않을 것이오.”

명 장군 중 하나가 소리 질렀다. “황제의 명령이다! 감히 불복하는가?”

 

520, 조명연합군은 폐허가 된 한성에 입성했다. 선조가 달아나자 화가 난 조선인이 불을 지른데다가 1년 동안 왜군이 점령하며 온갖 약탈을 자행했었다. 영의정 류성룡은 명군과 한성에 들어서자 백여명의 백성만 보았다. 마치 귀신처럼 얼굴빛이 어두웠다. 날이 워낙 더워서 길가의 시체가 썩고 있었고 코를 막지 않고는 지날 수 없을 정도였다고 기록했다.

왕궁 3곳도 폐허가 되었다. 주춧돌과 외벽 일부만 남은 경복궁은 왜군이 막사와 마구간으로 사용했었다. 류성룡은 불탄 종묘를 보고 몹시 슬퍼했다. 선정릉도 파헤쳐졌다. 왜군이 선종, 중종과 정현황후의 무덤을 파고 시신을 불태웠다.

이상하게도 남성 시신 한 구만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나이 먹은 관료와 어의를 불러 중종이 맞는 지를 확인했고 오랜 기록을 다시 뒤져 보았는데 중종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아마도 왜군이 조선을 모욕하려고 일반 시신을 가져다 놓은 것으로 보였다.



회사와 집 근처여서 많이 갔던 선정릉입니다. 이제는 기억이 가물 가물합니다만. 

 

한성은 사람이 살 수 없었다. 쌀 한 가마가 말 한 필 가격에 거래되었고 하수구를 뒤져 음식물 쓰레기를 주어 먹어 연명했다. 심지어 인육도 먹었고 술취한 명병사가 토한 것을 먹는 모습도 보였다.

류성룡이 곡식을 급하게 풀었지만 너무 늦은 상태였다. 전염병이 돌아 그렇지 않아도 쇠약한 사람들을 마구 쓰러트렸다. 거리에 시체가 넘치자 광희문(일명 수구문) 밖에 시체를 모았는데 성벽 위로 3m까지 쌓였다고 한다.

 

류성룡은 급히 북쪽으로 말을 몰아 이여송에게 왜군추격을 간청했다. 한성에 저지른 짓을 보복하고 싶었다. 이여송은 왜군이 한강에서 배를 모두 없앴기 때문에 도강할 수 없다며 변명했다.

왜군을 추격하겠다는 약속만 하면 배를 찾아보겠소.”

류성룡은 한강 주변을 수소문해 80척의 배를 찾아냈고 1만 명의 명군이 드디어 한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런데 강을 건너던 이여백(이여송의 동생, 중군 지휘관)이 갑자기 발이 아파서 휴식을 취해야 한다며 되돌아갔다. 지휘관이 발길을 돌리자 이미 강을 건넜던 명군도 북쪽으로 되돌아갔다. 이여송은 처음부터 왜군과 전투를 벌일 생각이 없었다.

남쪽 강변에 홀로 남게 된 류성룡은 분노를 참아야 했다.

 

왜군 총사령관 우키타 히데이어가 비운 남별궁을 이여송이 차지했고 남별궁에는 매일같이 장군과 관료가 나타나 추격을 간청했다. 권율은 조선군만이라도 추격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이여송은 심지어 조선군의 단독출격을 막기 위해 류성룡이 모은 배를 없앴다.

결국 왜군이 한성을 비우고 20일 후인 6월이 되어서야 평양에 있던 송응창이 이여송에게 추격을 명령했다. 조선은 송응창의 명령도 술책에 불과하다고 의심했지만 송응창은 이여송과 달리 강경했고 이여송의 한심한 행태를 알고 명령을 내리는 데에 20일은 족히 걸렸다.

 

이여송은 명령에 따라 병력을 모아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향했다. 여전히 왜군과의 전투를 피하려고 온갖 핑계를 대며 속도를 늦췄다. 왜군이 조령을 막고 대구에 집결했다는 보고를 받자 유정 등의 병력을 보내고 자신은 충주로 후퇴했다.

명군 별동대는 조령을 우회하고 대구 부근에서 전초전을 벌였다. 명군은 병력이 부족했고 왜군은 명군과의 격전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고 왜군이 다시 남쪽으로 발길을 돌리자 이여송도 추격을 취소했다.

 

15936월 중순, 왜군은 조선 남해안에 도착했다. 군량이 다 떨어졌기 때문에 주변을 약탈해야 했고 부대가 최대한 거리를 벌려서 주둔해야 했다. 부산을 기점으로 17개의 요새가 만들어졌다. 서산포에는 가토 기요마사, 웅천에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들어갔다.

조명연합군은 의령과 창녕에 주둔하며 왜군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왜군이 바다를 건너 달아날 줄 알았는데 청천벽력과 같은 보고가 들어왔다. 왜군이 요새 부근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조선군의 실망은 대단했다. 왜군은 최소한 연말까지는 그대로 있을 작정이었고 이미 요새에 틀어박혀서 바다로 몰아낼 수도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대치는 이후 4년을 갔다.



공성과 농성의 달인인 왜군이라 조명연합군은 안타깝게도 단 한 명의 다이묘도 붙잡지 못하고 놓칩니다. 특히 죽음직전까지 몰아 넣었던 가토 기요마사를 놓친 것은 너무나도 아쉽지만 그 놈이 살아 돌아가 주군이자 삼촌인 히데요시 가문을 몰락시키는데 큰 힘을 보탰으니 새옹지마로 위안삼아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