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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 (7) - 정유재란 발발
사신단은 하루라도 빨리 일본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다. 그들이 나고야에서 뱃길이 순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히데요시도 생각을 바꿨다. 명제국과 사이가 틀어져야 좋을 것이 없었다.
사신단에게 선물을 주며 명제국의 제의를 받아들이겠지만 조선과는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조선이 명제국과의 관계를 훼방놓았고 두 왕자를 석방했는데도 하급관리를 보내 모욕했다고 주장했다.
히데요시가 정유재란을 결정했는데도 아무런 것도 모르고 있던 황신은 선조의 명령을 완수하지 못한 것을 염려했다. 양방형에게 한성으로 그대로 돌아 가느니 죽는 편이 낫다고 한탄했다. 양방형은 “너는 히데요시에게서 답장을 받지 못했소. 누가 더 참담한 심정이겠소?”라고 대꾸했다.
양방형은 임무를 완수한 것처럼 속이고 북경으로 귀환했다. 히데요시가 봉신국을 감사하게 받아들였다고 보고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답장이 없었고 답례품도 양방형이 구입한 것으로 밝혀졌다. 더구나 선조가 왜군의 재침에 대해 원군을 다시 요청해왔다.
양방형은 사실을 자백했고 심유경은 조선으로 달아나 왜군에 투항할 생각이었지만 붙잡혀서 처형되었다. 가족은 모두 노비가 되었다. 명 황실은 대군을 일으켜 히데요시의 무례를 징벌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우세하던 주화파도 목소리를 낮췄다. 만력제는 주화파를 대거 숙청하며 책임을 물었다.
히데요시는 조선을 재침하기로 결정했다. 대군을 다시 조선남부에 내려놓기 전에 가장 큰 걸림돌을 해결해야 했다. 바로 이순신과 조선수군이었다. 조선수군을 궤멸시켜야 서해로 병력과 군량을 수송할 수 있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이중간첩, 서인과 원균의 탐욕, 선조의 무능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며 너무나도 손쉽게 이순신을 조선의 감옥으로 몰아넣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전쟁영웅 이순신은 일반병사로 권율의 진영에서 복무했고 어머니를 잃는 슬픔까지 겪어야 했다.
요즘은 백의종군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고 있죠.
임진왜란은 실제로 명제국이 목표였고 조선은 통로에 불과했는데 1597년 정유재란도 여전히 명제국 심지어 그 너머의 기독교국가를 언급하는 허풍을 부렸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조선남부가 목표였고 좀 더 보수적이고 현실적인 계획을 세웠다.
히데요시는 한성진격은 금지시키고 경상, 전라, 충청도 일대를 황폐하게 만들라고 명령했다. 정유재란은 히데요시의 자존심 회복이 가장 큰 목표였다. 명제국은 자신을 신하취급했고 조선도 동급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을 재침공해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동시에 겨우 4살 밖에 안된 히데요리의 입지도 다져 놓을 필요가 있었다.
명과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왜군은 병력을 본토로 철수시키고 부산 부근에 20,390명만 주둔시켰다. 벽제관 승전의 주인공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노환으로 사망했고 양아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부산의 10,390명을 지휘했다. 타치바나 무네토라의 5,000명이 안골포항 부근에, 다카하시 사부로의 3,000명이 울산부근에 고바야카와 히데카네(다카카게의 형제)의 1,000명이 낙동강 부근에 주둔하면서 교두보를 방어하고 있었다.
1597년 3월 19일, 히데요시는 121,100명을 동원했다. 56,700명은 규슈, 24,400명은 시코쿠, 40,000명은 혼슈 서부병력으로 조선주둔 병력과 합치면 141,490명으로 임진왜란의 병력 159,800명과 비슷한 숫자였다.
그렇지만 전력은 이전보다 훨씬 막강했다. 상당수 병사와 다이묘가 조선을 잘 알고 있었고 이전의 파죽지세는 잊어버렸다.
히데요시의 조카(당시 15살) 고바야카와 히데아키가 총사령관이었다. 처가쪽 출신으로 히데요시의 양아들에서 아들이 없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양아들이 되었다. 임진왜란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23살)와 모리 히데모토(18살)가 참모로 임명되었고 구로다 요시타카(구로다 나가마사의 아버지, 50살)가 고문역할을 맡았다.
정유재란이 아니라 임진왜란 출정장면입니다.
왜군은 원래 다이묘의 독립작전권이 존중되었기 때문에 사령부는 큰 의미가 없었고 히데요시의 명령을 전달하는 역할 정도에 그쳤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어린 사령관이 더 적합했다. 그리고 첫번째 원정에서 악전고투를 치뤘기 때문에 다이묘들 사이에서도 생존을 위해 협력하는 분위기가 자리잡았다.
1597년 3월 1일, 가토 기요마사가 10,000명을 이끌고 상륙했고 한성으로 전령을 보내 히데요시의 경고를 전달했다. 그리고 경상도 일대에도 저항하거나 도주하지 말라는 경고를 했다.
이튿날에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7,000명이 도착했다. 안골포항으로 진출해 그 동안 방치해둔 성을 보수했다. 그는 수군지원 명령도 받았기 때문에 도도 다카토라, 가토 요시아키, 구루시마 미치후사,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협력하기로 했다.
이어 시마즈 요시히로, 구로다 나가마사, 모리 요시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등이 도착했고 모리 히데모토는 30,000명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다.
가토 기요마사의 조선원정도인데 19~20세기에 그려진 그림이라 고증은 엉망입니다.
임진왜란과 완전히 다른 전략이었다. 한성을 향해 달려가지 않고 남해안 일대에 진영을 단단히 굳히고 전라도와 경상도 북부로 확장해 나갔다. 이번에는 조선남부 점령이 목표였다.
그리고 군량보급 문제도 있었다. 14만 명의 식량을 본토에서 계속 실어나를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군량은 조선에서 구해야 했고 추수가 시작되는 9월까지 곡창지대를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한성보다 조선의 곡창지대 전라도가 최우선 목표가 되었다.
조선도 귀중한 휴식기동안 왜군의 재침에 대비했다. 남부에 산성을 새로 쌓고 성을 보수했다. 왜군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어도 드디어 화승총을 도입했고 대포와 화차도 대량으로 생산했다.
그렇지만 왜군의 재침을 막아 내기에는 너무나도 허약했다. 임진왜란 당시에 전국의 절반이 황폐해져 군대양성은 고사하고 사람을 찾기도 힘들었다. 농사지을 사람도 부족한 판에 공사와 징병은 다 죽자는 소리였다.
어쩔 수 없이 얼마 안되는 정규군은 한성 부근에 집결했고 다른 지역은 의병에게 맡겼다. 그리고 공사는 승병을 동원했다. 유교에 밀려 천대받았던 불교를 제대로 대우하겠다는 약속정도로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조정의 부담도 거의 없었다.
마지막으로 명군을 믿는 마음도 있었다.
가토 기요마사의 전령이 도착하자 비변사는 왜군과 협상할 수 없다며 서신을 받지 않았고 권율이 소백산의 조령고개에 진을 쳤다. 1592년에는 가장 중요한 길목인 이곳을 황당할 정도로 무기력하게 내주었지만 이번에는 요새를 만들고 상당한 병력을 대기시켰다. 그렇지만 왜군은 조령을 노리지 않아서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선조는 명황실로 다급한 구원요청을 계속 보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만력제는 히데요시의 불손한 태도에 이미 분노했고 군사행동으로 징벌할 생각이었다. 왜군의 재침을 예상했기 때문에 선조의 요청이 왔을 때에는 이미 원정군을 준비하고 있던 상태였다.
병부상서 형개가 랴오둥에 사령부를 차리고 양호에게 원정군 지휘를 맡겼다. 양호 밑의 마귀가 이여송을 대신해 실제 원정군 지휘를 맡았고 유정, 해생, 진린 등이 참전했다. 유정은 임진왜란에 이어 다시 원정군을 지휘했다.
이여송은 정유재란 에서는 별 역할을 못하다가 1598년에 몽골족과의 전투에서 불미스러운 행동을 벌이다가 죽었다고 하며 후손은 죽거나 조선에 망명해 조선과의 깊은 인연이 계속되었다.
명황실의 기세와 달리 원정군 마련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임진왜란 당시에 이미 국고가 바닥나서 태업 중이던 만력제가 미친 듯이 일해야 했을 정도였다. 은광개발과 중과세로 심각한 저항을 일으켰다.
명제국은 조선말고도 북동부 국경의 여진족Jurchen과 누르하치도 문젯거리였다. 기병 3~4만 명과 보병 4~5만 명이 국경을 위협했기 때문에 랴오둥 군대를 그대로 조선으로 이동시킬 수도 없었다.
일단 상징적인 숫자의 병력만 랴오둥에서 이동시키고 제국전체에서 나머지 병력을 긁어 모으기로 했다. 이여송의 좌군으로 1593년에 조선에 왔던 양원이 가장 먼저 전투에 투입되었고 2,000km 밖에 있던 유정이 가장 마지막으로 합류했다. 1597년 말에는 명수군도 처음으로 참전했다.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과 청의 기반을 마련한 누르하치(청명제)입니다.
형개가 생각했던 10만 명에는 못 미쳤지만 1593년 당시보다는 훨씬 강력한 병력을 조선에 투입할 수 있었다. 중국기록을 보면 38,000명이 우선 투입되었고 몇 개월에 걸쳐서 16,000명이 차례로 투입되었고 21,000명의 수군도 합류했다. 명의 2차 지원군은 약 75,000명까지 늘어났다.
양원은 6월 말에 3,000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한성으로 직행했다 선조는 반갑게 맞이하며 사례했고 양원은 다시 남부로 떠나면서 “놈들이 오면 맞아 싸울 것이오”라고 결의를 보였다. 황실의 엄중한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1차 지원군과 같은 우유부단한 모습은 없었다.
명군이 속속 입성하자, 자신감을 얻은 선조는 히데요시에게 서신을 보냈다. 명과 비교해서 왜국은 하나의 작은 섬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결과는 처참할 것이며 이미 하늘이 지진으로 그 뜻을 알려주었다는 내용이었다. 벌써 60살인데 몇 년을 더 살겠다고 전쟁을 벌이냐며 꾸짖었다.
양원은 이 서신이 부산으로 향하는 동안 명군이 1595년까지 전초기지로 사용했던 남원성에 들어섰다. 왜군이 돌아오면서 명군도 이곳을 최전방으로 삼아 막을 생각이었다. 남원성은 제대로 수리되어 있었지만 조선군은 부근의 산성으로 옮겨줄 것을 간청했다. 남원성에서는 대군을 막아내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양원은 요청을 무시하고 성곽을 높이고 해자를 깊게 파며 남원성을 크게 보강했다. 얼마 안 있어 진우충이 2,000명을 데리고 50km 떨어진 전주성에 들어갔다. 왜군이 남원성을 우회하거나 함락 시키면 전주성이 그 다음 방어선이었다. 전주성 부근에도 조선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역사에는 스포일러가 없으니까... 남원성전투는 안타깝게도 패전하고 전라도는 유린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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