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멀다 하고 연예인의 사건사고가 연이어지고 있군요. 미술계가 다 한통속이든 모르는 놈이 바보이든 ‘관행’이라는 변명과 쉴드는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미술계의 관행을 이해하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의 비난이라고 일축하면, 대필은 문학과 학계의 관행입니다. 접대와 청탁은 사회의 관행입니다. 스폰서는 연예계의 관행입니다. 저임금과 폭언은 비정규직 고용주의 관행입니다. 지연학연은 우리나라의 관행입니다.
관행이라는 말로 대충 떼우려고 하지 맙시다. 조 모씨는 말할 것도 없고 진 모씨도 그런 소리를 하니 입진보라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 (11) - 울산성전투
조명연합군의 공격을 가장 먼저 받을 가토 기요마사는 아사노 유키나가에게 울산부근 도산島山에 성을 쌓도록 했다. 워낙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조선인 포로뿐만 아니라 본토에서 농부까지 실어왔고 중노동에 시달려 쓰러지면 피아를 가리지 않고 목을 베었다. 일본인 농부 중에는 굶주려 죽는 사람도 나왔을 정도로 군량이 부족했다.
최대 15미터 높이의 내성이 완성되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외성을 쌓아올렸지만 조명연합군이 한 발 앞섰다.
울산왜성은 50m 높이의 도산에 지어 산성이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태화강변이어서 한쪽 면은 강물과 닿았다고 합니다.
양호의 명령에 따라 마귀는 명군을 이끌고 11월 23일에 왜군이 떠난 전주에 들어갔고 남원도 무혈입성했다. 왜군은 두 곳을 비우기 전에 대학살과 파괴를 벌여 사체가 산처럼 쌓였고 단 한 채의 가옥도 남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마귀는 더 다가가면 위험하다는 판단으로 남원에서 멈췄다가 주변 병력을 모아 북쪽 20km 지점에 진영을 차리고 추가병력과 군수품을 기다렸다. 명군의 태세는 신속했다. 이미 12월 초에 4만 명의 병력이 한성에 들어와 총 병력은 6만 명에 달했다. 병부상서 형개도 한성에 들어와 몇 개월 동안 명군의 작전을 감독했다.
한성에 집결한 명군은 12월 중순에 남진을 시작했다. 양호는 한성을 나서면서 선조를 초대해 함께 말을 타고 몇 km를 가다가 남문을 벗어나자 마자 갑자기 질주했다. 선조는 가까스로 한강까지 따라갔는데 양호는 선조에게 전쟁에 관해 참견하지 말라는 경고를 주려고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한 것이었다.
마귀도 남원을 나서 경주로 들어가 1598년 1월 26일에 경주의 동로군과 합류했고 여기에 권율의 조선군 1만 명이 더해지면서 병력은 5만 명까지 불어났다.
3일 후인 1월 29일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연합군은 유인후퇴로 왜군 수비대를 끌어내 5백 명을 죽였고 나머지는 도산의 왜성으로 달아났다. 울산을 탈환한 연합군은 왜성을 둘러쌌는데 새벽에 날이 밝자 케이넨의 기록대로 “수를 셀 수 없는 군대가 성을 포위했고 그 수가 얼마나 많던지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까지 뒤덮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연합군의 공격보고를 받고 서생포에서 배를 타고 와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왜성에 숨어들었다. 가토는 성을 둘러보던 중에 성문 3개 중 하나가 문만 걸쳐 놓은 것을 발견했다. 연합군도 이곳으로 밀고 들어갔다. 왜군은 왜성을 포기하고 내성으로 밀려 들어갔는데, 외성의 군량창고를 챙기지 못했다. 내성의 문을 걸어 잠그고 연합군이 외성을 뒤지는 동안 시간을 벌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연합군은 막대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계속 달려들었다. 왜군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50명 심지어 100명이 성벽에 밧줄을 걸고 잡아당겨서 무너트리려고 했다. 우리가 측면에서 사격을 퍼부어 50명 중에 5~10명만 남았는데도 끝까지 매달리며 잡아당겼다. 정말 용감한 전사라고 칭찬할 만 했다.”
다른 한 편에서는 성벽 위에 포탄을 날렸는데 가토의 호위무사가 포탄에 맞아 허리 위가 날아가는 일도 있었다. 케이넨의 기록을 다시 보면
“명병사가 벽에 매달려서 넘어오고 있었다. 그들이 난입하자 료신이 내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축일이군요. 이런 날에 죽으면 분명히 천당에 갈 것입니다. 그는 기분 좋게 웃었고 내게 큰 힘을 주었다… 그렇지만 죽을 날이 아직 멀었거나 일본의 운명이 다하지 않았던 것일까? 명군이 물러갔다.”
연합군의 피해가 늘어나자 내성공격을 중단하고 대포로 성벽을 두들겼다. 그렇지만 별 소용이 없었고 얼마 후에는 그나마도 포기하면서 첫날 전투가 끝났다.
후방에 머물렀던 양호와 마귀가 2월 1일에 현장에 도착했고 상황을 살핀 후에 공성전보다는 포위로 왜군을 고사시키기로 했다. 이 결정에 따라 태화강의 접근로도 차단해 보급로를 끊었다. 도산왜성은 이미 군량이 바닥나고 있었기 때문에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왜군은 군마를 죽여 식량삼았고 그 후에는 풀뿌리를 찾다가 오래 전에 버린 잿더미를 뒤지며 불탄 쌀가루를 먹었다. 심지어 죽은 동료의 인육을 먹기도 했다. 식수는 더욱 심각한 상태였다.
가토는 방어의 마지막 보루인 조총병에게 군량을 우선 배급했고 나머지는 알아서 생존하게 내버려두었다. 오코치 히데모토의 기록에 따르면 누군가 성벽에 몰래 다가와 물 한잔에 은화 15개를 요구했다고 한다. 이렇게 물을 구한 병사의 오줌을 다른 병사가 받아 마셨다.
그리고 혹독한 겨울추위가 닥쳤다. 2월 3일, 기온이 크게 떨어지며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리던 왜군은 동상으로 손발을 잃고 얼어 죽어갔다. 손과 발이 얼어붙어 부풀어 오르다가 터지며 체액이 흘러나왔고 공성전이 끝났을 때에는 많은 병사가 손가락과 발가락이 없는 상태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왜군은 물과 식량을 찾아 성밖을 빠져나왔고 연합군은 놓치지 않고 붙잡거나 죽였다. 일부는 성밖의 시체를 뒤지며 식량을 찾다가 죽었고 일부는 개울이나 우물까지 나갔다가 기다리고 있던 연합군의 매복을 만났다. 우물 근처에서 한 번에 100명을 잡은 적도 있었는데 바로 항복하며 오히려 반겼다고 한다.
붙잡힌 포로의 말에 따르면 왜군은 전투를 벌일 병력이 1만 명에서 1천 명으로 줄어들었다고 했다. 가토군은 이제 포위망을 뚫을 수도 그대로 버틸 수도 없는 지경이었고 외부의 구원만이 유일한 살길이었다.
내성 안에서 죽어가는 왜군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포위된 순간부터 다른 왜군부대가 도산의 아군을 도우려 했다. 태화강으로 소규모 병력이 접근했다가 대포세례를 맞고 달아났고 그 후에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순천에서 2천 명을 데리고 태화강에서 시위를 벌이며 연합군을 압박했다.
구로다 나가마사도 양산의 병력을 보탰고 하치스카 이에마사, 우키타 히데이에와 모리 히데모토로 각각 병력을 보냈지만 아직은 연합군을 뒤에서 공격할 정도는 아니었다. 근처 언덕에 깃발을 꽂고 고립된 가토군에게 응원을 보내고 연합군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양호는 점점 불안해졌다. 구원군을 물리치고 왜성을 점령하더라도 막대한 피해는 피할 수 없었고 자신이 가장 바라지 않는 결과였다. 그렇다고 포위를 계속 할 수도 없는 것이, 왜군뿐만 아니라 연합군도 겨울추위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5만 명의 병력을 먹여 살릴 군량이 부족했다. 특히 군마가 먹을 목초가 턱없이 부족해서 공성전 첫 주에 1,000마리를 잃었다.
입장이 난처해진 양호는 도산왜성을 한 번에 함락시키지 못하면 경주로 물러나기로 했다. 2월 19일, 조명연합군은 마지막 총공격을 퍼부었고 가토의 조총병 선택은 제대로 적중했다.
다른 병사들은 창과 칼을 들 힘조차 없었던 반면에 조총병은 온전한 상태였고 다가오는 연합군에게 납탄을 날리며 큰 피해를 입혔다. 양호는 3시간 동안 공격을 이어가다가 500명 이상이 성벽 아래에서 쓰러지자 공격을 중단시켰다.
조명연합군의 후퇴는 지리멸렬했고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다. 명군이 진영을 부수는 동안 왜군이 공격한다는 헛소문이 퍼졌고 그렇지 않아도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이 무분별하게 경주방면으로 달아났다.
근처에 있던 왜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추격에 나서 많은 병사를 쓰러트렸고 그 중 대부분은 조선군이었다.
부근의 조선군은 후퇴결정에 대해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했다. 그들은 멀리 명군 진영의 소란과 화재, 남겨진 부상병의 절규를 들으며 당황하다가 왜군의 공격을 받아 궤멸하면서 달아났다.
경주에 들어온 연합군은 참담한 상태였다. 3주의 포위 끝에 수를 알 수 없는 병사를 잃었다. 양호를 옹호하는 기록은 1,800명을 잃었다고 했고 양호는 비난하는 기록은 10,000명을 주장했다. 최소한 수천 명이 죽고 부상자도 그보다 적지 않은 것은 분명했다.
양호는 이전의 명군 지휘관과 똑 같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왜군이 매우 끈질겼으며 조선군은 믿을 수 없었고 겨울은 대규모 작전에 맞지 않았다는 구차한 변명이었다.
그는 병사를 마귀와 권율에게 맡기고 2월 말에 한성으로 들어간 후에 다시는 전방에 돌아오지 않았다.
도산왜성의 왜군의 피해는 대단했다. 10,000명의 병력 중 1,000명도 안되는 숫자만이 살아남았는데 전투보다는 아사와 질병이 훨씬 많았다. 그렇지만 왜군에게 있어서 도산전투는 승전이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몇 배가 많은 연합군을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비슷한 피해를 입혔다.
도산전투는 지휘관의 역량과 조총병의 전력이 관건이었다. 아사나 유키나가는 전투 후에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가이에서 조선으로 병력을 보낼 때에 최대한 많은 조총을 보내주십시오. 다른 무기는 필요없습니다. 사무라이도 총을 지참하라는 엄명을 내려주십시오.”
보통 무장계급은 조총사용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칼과 활을 선호했는데 도산전투 후에는 무장에게도 조총사용을 권장했다.
양호가 경질된 후에 그의 사로병진책으로 왜군을 전방위 압박합니다만 큰 효과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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