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현과 지민이라는 걸그룹 멤버의 역사지식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공부가 모자랐다고 해도 사과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칠 줄도 알아야겠죠. 어느 트위터 글처럼, 정치인의 비리, 학자의 식민역사관, 생계형 국방비리에 대해서는 만성이 되어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잊어버리면서 아이돌의 역사지식에 대해서는 그 이상으로 분노하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어버이연합과 정운호 사건이 뭔지 가물가물한 사람도 많을 겁니다. 어버이연합은 벌써부터 고소 대행진을 벌이고 있을 정도입니다.
설현과 지민의 모습은 우리의 자화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성하는 이들을 물어뜯기 보다는 우리를 돌이켜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물론 저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 (9) - 남원성과 황석산성전투
칠천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왜군은 이제 전라도로 진출해 막대한 군량을 손에 넣으면 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조선을 합병해 명으로 함께 진격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지역주민이 공격대상이 아니었지만 정유재란에서는 조선남부 장악이 우선이었고 조선군과 의병의 집요한 저항은 그대로 였기 때문에 잔인한 강경책을 동원했다.
히데요시는 남녀노소, 양반과 평민, 승려를 가리지 말고 목을 잘라 본토로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역사에서 목을 취하는 관습은 다반사였다. 왜군은 자른 많은 목을 본토로 보내는 작업이 엄두가 안났지만 히데요시가 전과를 확인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코를 잘라 한군데에 모았다가 보내기로 했다.
전담감사역이 모인 코를 확인하고 개수를 센 후에 소금에 절여 상자에 담은 후에 본토로 보냈다.
왜군은 경상도, 전라도와 충청도에 논밭을 버리고 달아나는 농민을 모두 죽일 것이며, 관리와 일가족을 모두 죽이고, 관리를 숨기는 사람도 모두 죽일 테니 달아나지도 숨기지도 말고 농사에 전념하라는 포고문을 뿌렸다.
북진을 시작한 왜우군은 모리 히데모토의 63,000명, 왜좌군은 우키타 히데이에의 49,600명으로 총병력은 114,900명이었다. 우키타의 좌군이 먼저 남원으로 움직였다. 본대는 경상도 경계까지 간 후에 남원으로 북서진했고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시마즈 요시히로와 하치즈카 이에마사는 부산, 안골포, 가덕도를 거쳐 처음으로 광양만과 섬진강까지 배로 이동했다.
남원에서 10km 떨어진 지점에 상륙했을 때에도 병사들의 체력과 사기는 좋았다. 말을 풀어 부근 풀밭에서 먹이를 먹고 기운을 차리게 했다.
남원에 2만 명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으며 2만명이 더 이동 중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고니시는 증원군이 도착하면 위험하기 때문에 부족한 병력으로 라도 바로 공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진영을 허물고 9월 23일에 남원으로 들어가 우키타군과 합류했다.
5만명의 왜군이 남원성에 접근했는데 보고와 달리 양원의 명군 3천명과 전라병사 이복남의 조선군 1천명,수 천명의 주민이 전부였다. (우리 기록으로는 조명연합군과 주민이 8,000명입니다.)
조명연합군이 보강한 성의 방어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깊은 해자를 파서 그 안에는 가지를 부러 트린 나무토막을 깔았고 성벽은 4미터로 높고 두터웠다. 섣불리 공격했다가는 막대한 손실이 분명했다.
북문 - 시마즈 요시히로, 서문 - 고니시 유키나가, 동문 - 하치스카 이에마사, 남문 - 우키다 히데이에
도착한 당일에 100명의 병사로 수비군의 전력과 사기를 확인한 후에 24일부터 체계적으로 공성전을 시작했다. 요새의 화살세례를 맞아가며 해자 주요 지점을 짚과 흙으로 메웠다. 양원이 주변 민가에 불을 질렀지만 남아있던 잔해는 왜군에게 훌륭한 엄폐물이 되었다.
9월 25일, 추석을 이용해 왜군은 조명연합군에게 항복을 권유했고 양원은 당연히 거부했다. 왜군은 날이 저물었는데도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명군이 동, 서와 남쪽 성문과 성벽을 맡고 조선군이 북쪽을 맡아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우키타와 고니시는 성벽이 가장 높은 남쪽 성문과 성벽의 병력이 가장 적은 것을 알아내고는 부근 논에서 벼를 베어오게 했다. 수비군은 왜군의 기이한 행동을 보고 의아해했다.
26일 한밤중에 왜군은 조총을 맹렬하게 쏘아 연합군이 성벽 밖을 내다보지 못하게 했다. 그 2시간 동안 남쪽 성벽 아래에 짚단을 쌓아 성벽 위까지 올렸는데 뒤늦게 발견한 조명연합군이 불을 붙이려 해도 물기를 머금고 있어서 소용이 없었다.
마츠우우라 시게노부라는 무장을 선두로 수 천명의 왜군이 성벽을 타고 넘어왔고 필사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원정기를 쓴 오코치 히데모토도 성안으로 뛰어들었다. 두 사람의 목을 벤 후에 본토를 향해 감사의 합장을 했다. 그리고는 코를 베어 종이에 싼 후에 갑옷 안에 넣었다. 말을 탄 세번째 사람의 옆구리를 찔러 쓰러트렸는데 말을 달리더니 쓰러졌고 다른 무장이 달려들어 목을 베었다. 오코치는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며 자신의 전공이라고 주장했다.
양원은 왜군이 성안으로 밀려들어오자 3백명만 데리고 서쪽 성문의 왜군을 뚫고 달아났다. 양원은 조총을 두 번 맞고 쓰러졌고 100명이 그를 호위하며 빠져나가 전주로 달아났다. 전주에는 아무도 없었다.
전주의 진우충은 지원요청을 무시한 것도 모자라 제2 방어선을 버리고 이미 한성으로 달아난 상태였다. 양원도 한성으로 계속 달아났다.
남원을 지키던 이복남을 포함해 수비군이 전멸했다. 왜군은 전투가 끝나자 코를 베며 전공을 챙겼다. 오코치의 기록에 따르면 남원에서 3,726개의 코를 모았는데 고니시군이 879개로 가장 많았다. 다이묘가 코를 모아 코검사역에게 보냈고 절차에 따라 본토로 다시 보내졌다.
일본 교토 도요토미 히데요시 신사 부근에 있는 귀무덤입니다. 코무덤인데 이름만 귀무덤으로 바꾸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의 왜우군은 화왕산성(지도 참조)으로 진격했다. 여기는 유명한 홍의장군 곽재우가 지키고 있었고 산세나 수비군의 기세를 보아 만만치 않음을 느끼고 우회해서 돌아가기로 했다.
다음에 만난 7,000 높이의 황석산의 산성은 우회할 수 없었다.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접어드는 교통요충지로 반드시 점령해야 했다. 조선은 왜군의 재침에 대비하 많은 산성을 보강했고 무기와 군수품을 모으고 지역관리에게 수비를 맡겼다.
황석산성의 수비는 안음현감 곽준이 맡았고 그는 두 아들, 사위와 몇 백명의 민병을 이끌고 산성에 들어갔다. 함양군수 조종도는 가족을 데리고, 김해부사 백사림도 산성으로 들어갔다.
백사림만이 군경력이 있었고 왜군이 몰려들자 모든 사람이 그에게 의지했지만 단단히 배신당했다. 백사림은 대부분이 일반인인 7,000명으로 27,000명의 왜군을 상대하게 되자 가족을 뒤로 데려가 성벽 아래로 내려 보내고 자신은 나무를 타고 사라졌다.
의지하던 지휘관이 사라지자 수비군은 한 번에 무너졌다. 나베시마가 서쪽, 구로다가 동쪽, 가토가 남쪽을 포위하자 수비군은 곽준에게 몰려가서 나가게 해달라고 간청했고 곽준은 거절했다. 그는 왜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이곳에서 내가 죽겠다고 대답했다.
9월 26일, 왜군은 황석산성을 공격했고 하루가 지나기 전에 함락시켰다. 대부분의 민병은 성벽 밖으로 뛰어 달아났고 곽준과 수 백명의 민병만이 성벽을 지켰다. 곽은 마지막 공격에 전사했고 두 아들도 아버지의 시신을 끌어 안고 죽었다.
성안에서는 353명의 조선인이 죽었고 성밖의 계곡에서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조종도와 가족 그리고 곽준의 사위도 계곡에서 발견되었다. 곽준의 딸은 아버지의 전사를 알고는 목매달아 죽었다.
좌군이 이미 남원을 점령한 것을 안 왜우군은 북쪽 50km에 있는 전주로 향했다. 명군은 이미 전주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왜우군은 30일에 전주로 무혈입성했다. 남원성을 점령한 좌군 선봉대가 합류하자 해안으로 서진하고 금산으로 북동진하면서 넓게 포진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충청도의 요충지 공주를 점령했고 가토 기요마사는 청주를 점령했다. 구로다 나가마사는 북쪽 깊숙이 경기도까지 진출했다.
10월 초가 되자 왜군은 히데요시가 바라던 조선남부를 완전히 차지한 것처럼 보였다. 5년전과 비슷한 지역을 차지했지만 문제는 조선인의 그칠 줄 모르는 저항이었다. 모두 죽이라는 히데요시의 명령도 있었고 우키타 히데이에의 강력한 포고도 있었기 때문에 전지역에 걸쳐서 잔인한 학살이 끊이지 않았다.
매일 많은 사람이 죽어갔고 수백, 수천 개의 코가 소금에 절여졌고 다음과 같이 상세한 기록은 현재까지 보관되고 있다.
깃카와 히로이에공에게
코의 총 개수는 480개로 확인됨.
하야카와 나가마사
1597년 9월 1일(음력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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