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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한국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 (10) - 명군의 반격과 조선인 노예

by uesgi2003 2016. 5. 17.


아직도 아이돌 아이들의 실수(?) 또는 무지(?)에 대해 달려드는 사람들이 많군요. 연예인은 쥐잡듯이 온 커뮤니티를 뒤집어 놓으며 비난을 퍼부으면서 정작 중요한 일에는 관심도 없거나 오히려 아이돌 아이들보다 훨씬 심각한 무지를 드러냅니다.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 시리즈는 외국학자의 자료를 정리한 이야기로 오류가 있을 수 있고 시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 (10) - 명군의 반격과 조선인 노예


왜군이 한성으로 순식간에 접근하자 모든 사람이 짐을 싸서 피난하기 시작했고 조정도 피난을 입에 올렸다. 세자 광해를 함경도로 보내 왕가의 미래를 보호하는 동시에 민병을 모아 왜군에 맞서자는 의견이 대세를 이뤘고 한성방어에 대해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선조도 피난을 육로와 해로 여부에 대해서만 고민했을 뿐이다.

참패한 명군은 한성 이남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중상을 입은 양원은 104일에 한성에 실려 들어왔고 그 뒤에는 겨우 100명만이 따라왔다. 선조는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리며 노고에 감사했다. 명패잔병은 다시 압록강을 건너 귀국했지만 참패의 책임을 지고 사형당했다.

전주를 버리고 달아난 진우충은 100대를 맞은 후에 소환되었다. 

 

명총병관 마귀는 임진왜란 당시의 이여송처럼 얼어붙었다. 8월 중순에 1,000명을 이끌고 한성에 들어왔다가 공주로 내려가 왜군을 맞을 생각이었지만 양원군의 전멸소식을 듣고는 생각을 바꿨다. 상관 양호에게 조선을 포기하고 모든 병력을 압록강 너머에 배치시켜 본토를 방어하자고 주장했다.

원정군 총사령관 양호는 남원참패 보고를 받고는 평양에서 한성으로 달려가 사태를 수습했다. 마귀와 다른 지휘관의 한심스러운 태도를 질책한 후에 증원군과 패잔병 8,000명을 모아 경기도로 보내 한성에 접근하는 왜군을 요격하라고 마귀를 내보냈다.

양호는 정보누설을 염려해 조선군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마귀의 기병과 보병군은 현재의 평택 부근인 직산에 숨어들었다. 좁은 협로를 선택해 병력을 셋으로 나눠 둘은 좌우측에 나머지 하나는 길가에 매복시켰다.

명군에게는 다행히도 구로다 나가마사의 5,000명 중 선봉대가 접근했다. 1016일 오전에 명군이 구로다군을 습격했다. 왜군측 자료를 보면 대규모 명군을 발견하고는 본대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 달려들었다는 반대 기록을 남겼다.



구로다 나가마사는 군사형에 가까운 무장으로 많이 부담스러운 투구를 애용했습니다. 그의 초상화는 뭔가 억울한 표정이 특징입니다.



그가 애용했던 또 다른 투구인데, 보통 이런 경우 실전에서는 간편한 투구를 착용했습니다. 


어느 쪽이 먼저 전투를 시작했든, 초전은 왜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총성을 듣고 구로다의 본대가 달려오면서 팽팽한 균형이 깨지지 않으면서 날이 저물 때까지 계속 되었다. 명군은 양호가 워낙 단호했기 때문에 물러나지 않고 오늘 왜군의 기세로 보아 내일도 죽기살기로 싸울 것 같다. 우리도 그래야 한다며 전의를 다졌다.


 

새벽부터 전투가 재개되었고 왜군은 학익진으로 명군을 좌우측에서 포위해 명군을 압도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조총에 놀란 명군은 차츰 화살, 경포와 화승총으로 구로다군을 밀어냈다. 양호가 한성에서 보낸 기병 2,000기가 때마침 도착해 균형을 완전히 깨트렸고 마귀군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왜군을 남쪽으로 완전히 밀어냈다.

직산전투에서 왜군은 5~6백 명을 잃고 명군도 비슷한 숫자를 잃었다.

 

왜군이 잃은 6백 명은 전체 병력에 비해 큰 피해가 아니었지만 명군의 피해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명군의 결전덕분에 왜군은 직산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북진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남쪽으로 내려가며 지나는 곳마다 학살과 파괴로 큰 피해를 입혔다.

조명연합군은 후퇴하는 왜군을 추격하기에 아직 병력이 크게 모자랐다. 왜군은 계속 불어나는 명군을 상대하기 보다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주요 거점에 병력을 배치하며 명군을 대비했지만 다가오는 겨울과 군수품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완전히 궤멸된 줄로만 알았던 이순신과 조선수군이 명량에서 왜군의 진출을 틀어막았기 때문에 황해로 병력과 군수품을 수송하는 길도 막혔다. 결국 남쪽으로 다시 후퇴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왜군의 기세가 꺾인 것은 아니었다. 남원성의 피해는 고작 100명에 불과했고 직산에서도 600명을 잃었을 뿐이고 명량에서는 31척 손실이 전부였다. 오히려 조명연합군 8,000명을 죽이고 수 만명의 일반인을 학살하며 임진왜란 못지 않은 피해를 입혔다.

히데요시는 조선정복보다는 조선에 참혹한 피해를 입혀 자신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었기 때문에 왜군의 후퇴를 명령했다. 참전한 대부분의 다이묘도 히데요시의 자존심 회복을 위해 자신과 병사의 목숨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명량해전은 전사에서도 독보적인 전설입니다. 영화 명량이 재해석을 가장한 환타지 영화로 감독이 많이도 망쳐놓았죠. 그 감독의 영화는 이제 안볼 생각입니다. 

 

임진왜란과 달리 이번에는 남원부터 명군과 전투를 벌였고 명군이 북쪽에 10만 명 정도가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겨울과 군수품 부족에 시달리는 판에 넓게 배치한 병력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명군의 쉬운 목표물이 될 수 있었다.

결국 부산 부근의 주둔지로 후퇴하기로 했다. 후퇴하는 동안에도 학살과 코수집은 잊지 않았다. 깃카와 히로이에군은 926(음력 기준) 하루에만 10,040개의 코를 전과로 인정받았다.

 

왜군은 죽은 자의 코뿐만 아니라 산 사람도 챙겼다. 가토 기요마사군과 함께 했던 승려 게이넨은 이런 기록을 남겼다.

본토에서 건너온 많은 상인 중에 노예상인도 있었고 부대를 따라다니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들였다. 목을 밧줄로 이어 앞장 서게 했고 걷지 못하는 사람은 지팡이나 몽둥이로 매질해서 강제로 걷게 했다.

이들이 바로 지옥의 죄인을 처벌하는 악마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포로 중 일부는 남해안 축성에 동원되었다. 탈진해서 쓰러지거나 어디에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면 목을 베었고 5만 명 이상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규슈와 시코쿠 수용소에 얼마 동안 수용되었다가 다이묘 영지에서 농부, 노동자, 장인으로 일한 사람이 많았는데 그 경우에는 약간 자유로웠다.

운 나쁜 사람은 노예로 팔렸고 조선땅을 다시 밟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살기 위해 일본사회와 동화될 수 밖에 없었다.

 

그 중에서도 도자기 장인 포로는 대단한 전리품이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후에 원시적인 일본 도자기 산업은 크게 발전한 반면에 조선은 크게 위축되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츠마로 17명 이상의 장인을 보냈고 모리 히데모토도 야마구치 부근에 조선 도자기 장인을 정착시켰다.

호소카와 가문은 참전하지 않았는데도 조선 장인을 구하는데 성공했다. 호사카와 영지의 장인은 수십 번에 걸쳐 탈출을 시도했을 정도로 조선 장인포로는 기술이전에 소극적이었는데도 사츠마, 가라츠, 아가노, 하기, 아리타의 자기가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그래서 히데요시의 조선원정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요즘 인기있는 사나다 마루에서도 센리큐가 히데요시에게 다도를 가르쳐 주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조선의 자기는 대단한 가치를 가졌습니다. 전국시대 인물의 무용담에는 조선자기와 관련된 것이 꽤 많습니다. 

 

나가사키에서 포르투갈이나 이탈리아 노예상에게 팔린 사람도 많았다. 마카오와 인도 심지어 유럽까지 끌려갔다. 피렌체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Francesco Carletti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다양한 연령의 남성, 여성, 소년과 소녀가 아주 낮은 가격에 노예로 팔리고 있었다.” 그도 은 440g에 불과한 비용을 지불하고 5명을 사들였다. 인도에서 4명을 풀어주고 다른 한 명은 로마까지 데려가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래서 지금도 이탈리아 남쪽 끝의 알비Albi의 칼라브리아Clabria 마을에는 안토니오 코레아의 후손이 코레아라는 성을 사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DNA 테스트에서 코레아 가문은 아시아 민족의 혈통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세계여행 기록을 남겼고 루벤의 초상화 인물과도 연결이 되었습니다만



코레아 성은 쿠리아라는 성에서 유래되었고 루벤스의 그림도 조선인이 아니라는 주장이 훨씬 강합니다. 

 

왜군은 남해안으로 후퇴한 후에 기존의 성채를 보수하고 새로 올리는데 전력을 다했다. 1593년에 부산을 중심으로 지었던 것보다 훨씬 확장해서 이번에는 울산에서 순천까지 약 250km의 방어선을 만들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방어선의 서쪽 끝인 순천에 들어갔고 소 요시토시는 동쪽 30km 떨어진 남해를 맡았다. 시마스 요시히로와 아들 다다츠네는 사천에 원래 있던 성을 보강하고 남쪽에 다시 성을 쌓았다. 다치바나 무네시게는 고성을, 야나가와 츠나노부는 거제에, 나베시마 나오시게는 창원과 죽도에, 모리 히데모토와 우키타 히데이에의 4만 명은 부산에 들어갔다. 구로다 나가마사는 서생포 부근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