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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한국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 (8) - 칠천량참패와 조선수군의 궤멸

by uesgi2003 2016. 5. 10.

 

충무공 이순신의 활약, 칠천량전투와 조선수군의 궤멸은 워낙 잘 알려져 있어서 따로 정리하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국내자료가 훨씬 자세한데 일부러 외국인학자의 자료를 인용할 필요가 없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하도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어서 일부러 정리했습니다.

 

새눌당 원내대표였던 원 모시기가 조상인 원균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날뛰기에 그냥 가볍게 비웃고 말았는데 원균의 가묘(도망치다가 죽어서 시체를 못 찾았기 때문에)를 관광지로 홍보하고 경기도문화포털은 원균을 폄하하지 말라는 황당무계한 역사왜곡을 하고 있어서 일부러 칠천량전투를 정리했습니다.


경기도문화포털은 충무공을 신격화하기 위해 원균을 일부러 폄하했다는 무식한 것들의 주장을 그대로 옮기고 있습니다.

 

원균 장군은 비열하고 전쟁에 패하기만 한 장수인가?


https://www.ggcf.or.kr/html/history/hundred_list.asp?ky_seq=3819&read=&flag=READ&seq=&code=K006&page=1&s_key=A&s_value=&s_order=&s_ky_gubun=&s_ky_area2=

 

...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부대와 연합한 뒤에는 옥포·당포· 한산도 등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칠천량 해전의 패배는 참혹 한 것이었지만, 패배는 예상했던 일이 현실화된 것뿐이었다...

 

역사적으로 원균이 이순신보다 훌륭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분명 이순신은 불세출의 영웅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영웅이 성웅일 수는 없고, 한 사람을 성웅화하기 위해 다른 훌륭한 장수가 매도되어서는 안 된다. 역사적으로 이순신은 이순신이고, 원균은 원균일 뿐이기 때문이다.


제가 임진왜란에 대한 역사 세미나를 할 때면 (세계전쟁사 시각에서) 원균에 대해 옹호했었는데 이제는 적나라하게 설명할 생각입니다. 


본문은 외국학자의 자료를 정리한 것으로 오류가 있고 시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임진왜란 (8) - 칠천량참패와 조선수군의 궤멸

 

이제 조선수군이 문제였다. 왜군은 한산도의 조선수군 기지로 접근하지 않고 부산으로 끌어내기로 했다. 719, 이순신을 제거하는데 공을 세운 이중첩자 요지로(가케하시 시치다유)가 경상도 조선군 진영에 다시 나타났다.

왜군이 6주 후인 911일에 전라도로 진군한다는 정보였다. 고니시군이 의령과 진주방면으로, 가토군이 경주 또는 일양방면으로 진군하기 때문에 급히 대처해야 한다고 알렸다. 그리고 쓰시마에서 15만 명의 왜군이 더 오기 때문에 조선수군이 바다에서 봉쇄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김응서는 왜군의 거짓정보일 수 있으나 상당한 근거도 있다고 보고했고 조선조정은 귀중한 정보로 받아들였다. 권율은 원균에게 부산 앞바다로 진출해 왜군의 상륙을 막으라고 명령했고 원균은 왜군의 함정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명령을 거부해 자신이 모함했던 이순신의 뒤를 따라갈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원균은 육군이 먼저 안골포를 공격하면 수군이 달아나는 왜군을 섬멸하겠다고 제안했고 한성의 비변사(무관도 참석하는 의정부 대체기관)는 권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원균의 자질은 심각한 문제가 있었지만 수륙양공은 이순신도 강력하게 요청했기 때문에 원균의 술책으로 볼 수만은 없었다.

 

731, 권율의 압박을 못이긴 원균은 처음으로 거제도 너머로 나갔고 왜군소함대를 만나 약간의 전투를 벌인 후에 바로 돌아왔다. 권율은 원균을 다시 내몰았고 그는 817, 2백 척 이상을 이끌고 부산으로 항해했다.

왜군은 한산도 부근부터 조선수군의 움직임을 알아냈고 부산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원균은 거제도를 돌아 왜군선박 몇 척을 부순 후에 부산 부근까지 접근했다.

 

1597820, 왜군함대 500~1,000척이 대열을 갖추고 원균을 맞이했다. 조선수군은 대규모 결전을 벌일 상태가 아니었다. 긴 항해에 지친 데다가 원균에 대한 반감이 대단했다. 역풍으로 대열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날도 어두워져서 원거리 사격전이 장기인 조선수군에게 불리했다. 이순신이었다면 훗날을 기약했겠지만 원균은 하필이면 모든 것이 불리할 때에 고집을 부렸다. 기다리고 있던 왜군에게 총공격을 명령했다.

왜군은 지난 교훈을 잊지 않고 있었다. 조금씩 물러나며 조선수군을 끌어들이다가 반격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지친 조선수군을 탈진하게 만들었다.

 

조선수군의 기세가 무너지자 왜군함대는 일시에 달려들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30척 정도의 함선에 올라 불태우거나 노획했다. 왜군의 공격을 피한 나머지 함선은 무질서하게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조선수군의 참패는 시작에 불과했다. 가덕도에 다다른 수군은 섬에 올라 물을 구했다. 가덕도에는 상당수의 왜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적이 알아차리기 전에 물을 구해 달아나려고 했는데 왜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필이면 무용으로 이름난) 시마스 요시히로의 3,000명이 공격해왔고 교전 중에 수군 400명이 죽고 다시 여러 척을 잃었다.



우리에게는 원흉이지만 일본전국시대에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의 전설적인 무용을 자랑한 다이묘였습니다.


 

무장의 자존심이 무척 강했다고 합니다. 사천전투에서 4만의 조명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는데 다른 다이묘의 지원제안을 거절하고 7천명으로 막아냈습니다, 영지내 반란으로 고전하면서도 가토 기요마사의 응원을 거절했고 세키가하라전투에서는 패전이 확정되자 겨우 1,500명으로 이에야스의 대군을 뚫고 달아나는 전설을 남겼습니다. 


충무공이 전사하신 노량해전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원한 원흉입니다. 검은 원 안에 열십자를 그린 문장을 사용했습니다.  



조선에서 가져간 맷돌이 아직도 전시되어 있다는군요.

 

조선수군은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해협으로 달아났다. 칠천량은 너무 좁아서 원거리 전투를 벌이는 조선수군에게는 무척 위험한 곳이었는데도 원균은 일주일 동안 꼼짝하지 않고 여기에 머물렀다.

고성에 있던 권율은 원균의 패전과 무기력함을 꾸짖으며 매를 때렸고 원균은 오히려 기함에 처박혀서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 (기록에 따라 원균이 곤장을 맞은 시기가 다릅니다. 한 달 전에 맞았다는 기록도 있고 이 시기에 맞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조선수군은 27일까지 가장 위험한 곳에서 지휘관도 없이 경계도 제대로 세우지 않고 머물렀다.


 

왜군은 처음 겪는 작은 승리에 만족하지 않았다. 조선수군이 물러가자 도도 다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시마즈 도요히사, 가토 요시아키에 고니시 유키나가까지 합세해 칠천량에 주저 앉은 적을 공격하려 나섰다.

시마즈 요시히로도 가덕도의 병력 중 2,000명을 거제도로 날라 해안에서 조선수군을 노렸다. 조선수군은 절대절명의 위기가 코앞인데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원균은 술로 시간을 보냈고 패배한 부대의 병력이나 함선을 점검하지 않았다. 근처 해안의 어부나 농부에게서 정보를 구하지도 않았다.

 

828일 새벽에 왜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500척의 함선은 어둠 속에서 조선수군에게 접근했고 총공격을 알리는 3발의 포성이 터지자 조선함대에 달려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전의를 잃은 조선수군은 야전을 제대로 치룬 경험도 없어서 바로 무너졌다.

왜군은 차례로 판옥선에 올라 조선병사를 베어 넘기고 불질렀다. 거제도로 피한 함선도 기다리고 있던 왜군의 공격을 받았고 조선병사는 물로 뛰어 들어 목숨을 건지려고 했다. 몇 척이 남쪽으로 달아나 큰 바다로 나가려 했지만 왜군은 그대로 두지 않았다. 나베시마 카쓰시게는 불타는 조선함선을 벚꽃보다 더 화려하다고 기록했다.



몇 년 전에 한바탕 코미디 논쟁을 불렀던 조선전역해전도(칠천량해전)입니다. 1900년도 초 그림이라는 말 한마디면 끝날텐데 무의미한 고증논쟁을 벌이고 심지어 국내자료를 뜯어 고치려고까지 했었죠. 


수군이 사용하지 않던 무기도 등장하고 심지어 불랑기포 거치대는 왜군식입니다. 그냥 재미로 보면 되는데 하나만은 정확합니다. 왜군이 근접해서 등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이 틀 때가 되자 조선함대는 거의 모두 전멸했고 원균도 죽었다. 기함을 버리고 뭍에 올랐는데 너무 늙어서 다른 병사를 따라가지 못했고 소나무밑에서 목이 잘렸다는 증언이 있지만 실제 최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수군의 또 다른 영웅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이억기도 전사했다. 그는 왜군에게 목을 내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바다로 뛰어들었다고 알려졌다. 충청도수군절도사 최호도 전사했다.

지휘관급에서는 경상우도수군절도사 배설만이 살아남았다. 그는 조선수군이 위험한 곳에서 그대로 있자 원균에게 대피할 것을 권하다가 12척을 미리 해협 끝부분에 숨겨두었다가 왜군이 공격해오자 달아났다. 목숨을 건진 배설은 한산도 기지를 불태우고 기지의 남은 인력을 모두 내보낸 후에 12척을 이끌고 서쪽 멀리 달아났다.

 

도도 다카토라는 60척을 격파한 최고수훈을 세웠고 시마즈 도요히사는 160척을 주장했지만 부근에 있던 작은 어선을 모두 합친 숫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나라의 경사로 기뻐한 반면에 한성은 바로 비변사를 소집해 대책마련을 서둘렀다. 선조는 한산도 수군기지 방어에 집중해야 했소. 도원수권율이 수군통제사를 너무 몰아세웠소라는 황당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잘못된 일을 바로 잡아야 했고 이순신의 절도사 복귀를 명령하는 전령이 남쪽으로 급하게 달려갔다.

 

830, 권율은 이순신을 찾아가서 앞으로의 일에 대해 협의했다. 두 사람 모두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에 전라도로 진격하는 왜군을 막을 방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순신은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방어상태를 직접 보고 대책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이순신은 왕복 700km, 30일이 걸리는 길을 떠났고 도중에 경상도, 전라도와 충청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한다는 어명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