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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러시아

코사크의 역사 - 흐멜니츠키 봉기 (1부)

by uesgi2003 2016. 8. 9.


이번 이야기부터는 코사크족 헤트만과 역사의 주요 장면을 자세하게 설명할 예정입니다. 중간에 신성로마제국의 수렁을 다시 한 번 걸어볼 생각입니다만.


그리고 코사크족의 독립투쟁은 관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용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폴란드, 러시아와 오스만제국의 역사관으로는 반란이지만 우크라이나 역사관으로는 봉기와 저항입니다. 

반대로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세력확장이겠지만 군소 지역민족의 경우에는 침탈과 만행이었습니다. 용어가 약간 혼란스러운 경우 유연하게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코사크의 역사 - 흐멜니츠키 봉기


1651년 중반, 흐멜니츠키 반란은 3년차에 접어들었다. 16481, 폴란드 귀족을 상대로 지역 코사크족이 일으킨 작은 반란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대한 전역적인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보흐단 흐멜니츠키Bohdan Khmelnytsky가 반란을 이끌었는데, 그는 우크라이나의 소귀족, 코사크 장교, 헤트만Hetman(코사크족 야전사령관)으로 연방에서도 상당히 높은 계급이었다.



키에프에 입성한 흐멜니츠키입니다. 코사크족 헤트만의 그림은 종교색이 무척 강한데 코사크족이 동방정교 신앙이었고 종교의 힘을 빌어 저항이나 확장의 정당성을 강변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반란과 거의 동시에 폴란드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Wladyslaw IV Vasa가 후계자없이 세상을 떠나 연방은 구심점을 잃었다. 폴란드 의회는 164811월에 이복동생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자John II Casimir Vasa를 왕으로 추대했고 반란군은 대승을 거두고 있었다.



대홍수 시기에 분에 넘치는 왕위에 올라 온갖 고생을 다하다가 프랑스에서 수도원장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반란군은 16498, 즈보리프Zboriv전투(그림 참조)에서 폴란드군에게 승리를 거둔 후에 유리한 조약을 받아냈다. 폴란드는 조약에 따라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에서 군대와 관청을 철수시켰고 우크라이나 절반이 코사크족의 자치지역이 되었다.

흐멜니츠키는 코사크족의 행정조직을 구성하고 러시아와도 협상을 시작했다. 크림칸국, 헝가리, 오스만제국과도 자치보호국 지위에 대해 협상했다. 코사크족은 승전으로 자치권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폴란드는 보복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얀은 서유럽식으로 훈련시킨 30,000명을 준비했고 1651년 봄에 크라스네Krasne를 공격해 10,000명에 달하는 코사크 수비대와 민간인을 죽였다. 얀은 본격적인 원정을 위해 귀족의 군대도 불러 들였다. 봉건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폴란드는 각 지역의 귀족이 병력을 모아 무장시켰다.

16515, 폴란드왕은 우크라이나 서부의 부그Bug강변에 있는 소칼Sokal에 들어섰다. 예수회 추기경 경력에 네덜란드 그림을 광적으로 수집하던 얀은 야전사령관 재능은 조금도 없었다. 지휘관이 무기력하다 보니 폴란드군도 반란군의 규모나 위치를 모른 채로 주둔지에 그대로 머무르고 있었다.



얀의 수집품 중 하나인데 황당하게도 농민이 귀족을 몰아내는 그림입니다.

 

얀의 무기력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은 왕권을 더욱 허약하게 만들었다. 폴란드는 전통적으로 귀족이 중앙정부에 반발하며 자신의 권리와 특권을 지켜 권력의 균형을 맞췄다. 이런 말까지 노골적으로 떠돌었다. “왕이 즉위는 해도 통치는 하지 않는다.”

왕을 선출할 권리를 가졌던 10% 정도의 귀족은 막대한 영지를 보유했다. 이들은 중기병과 포병까지 거느리고 원정에 동참했다.

소칼에 모인 폴란드군은 총 120,000명에 달했다. 그렇지만 실제 전투병력은 왕실군 30,000, 귀족병력 30,000명과 독일용병 15,000명이 전부였다. 불필요한 수행원까지 대거 모이면서 막대한 양의 식량을 소비했다. 왕실군은 스웨덴 방식으로 조직된 보병으로 2/3은 소총병이었고 1/3은 창병이었다.

 

흐멜니츠키는 약 150,000명을 모았다. 핵심전력은 15,000명의 등록코사크와 25,000명의 자포리자 코사크족이었다. 그 외에 10,000명의 온갖 코사크족이 병력을 보탰고 러시아의 돈 코사크족도 몇백 명의 병력을 상징으로 파병했다.

등록코사크군은 대부분 기병이었지만 자포리자 코사크족은 절대 다수가 보병이었다. 폴란드 기병의 명성이 워낙 대단했기 때문에 흐멜니츠키는 오스만 술탄 메흐메드 4Mehmed IV에게 봉신국인 크림칸국의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크림칸국 이슬람 3세 지라이Islam III Giray30,000명의 타타르 기병과 오스만 기병 5,000명을 데리고 합류했다. 나머지 병력은 도시와 농촌의 시민병으로 농기구나 몽둥이를 든 사람도 있었다. 이런 잡병은 나날이 숫자가 늘어났지만 전력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폴란드군은 20문의 야전포를 가진 반면에 코사크족은 48문의 수비용 대형포를 가지고 있었다. 폴란드 야전포는 소구경이었어도 포병의 실력이 훨씬 뛰어났고 공수양면에서 모두 사용할 수 있었다. 원정 후반부에는 대형포를 더 배치했기 때문에 포병전력은 폴란드군이 우월했다.

소카이의 폴란드대군은 벌써부터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주변은 늪과 숲으로 가로 막혀 있었는데 병력이 계속 도착하면서 주변이 황폐해졌고 이질 등의 병이 급속하게 퍼졌다.

그런데도 왕은 서부 지역의 귀족병력을 기다리느라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식량과 전염병은 참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결국 614, 동쪽으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상당수의 귀족은 명령을 무시하고 나머지 병력을 기다린 후 620일에 왕실군의 뒤를 따랐다.

강을 넘은 폴란드군은 동쪽 강변에 거대한 주둔지를 마련했고 문란한 상황은 소칼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왕의 명령을 무시한 귀족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 주둔지를 따로 세웠고 위생문제는 다시 폴란드군을 크게 괴롭혔다.

628, 코사크와 타타르 부대가 탐색전을 벌이며 왕의 주둔지를 정찰했다. 이튿날에는 10,000명의 기병이 맞붙어 양쪽 모두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630, 1m 앞도 안보이는 안개속에서 양쪽이 대치했다. 북서와 북동쪽은 스티르Styr강과 플리아시브카Pliashivka강으로, 남서쪽은 숲으로 막혀 있었다. 남동쪽은 평원으로 뚫려 있는 전장이었다.



흐멜니츠키는 코사크와 농민군을 이끌고 플리아시브카의 서쪽 강변 낮은 언덕에 자리잡았고 타타르와 오스만군은 왼쪽 언덕에 자리잡았다. 이슬람 지라이는 평소 관습처럼 거대한 텐트를 쳤다.

폴란드군은 안개너머로 코사크족의 전통적인 굴랴 고로드Gulya를 세우는 소리를 들었다. 굴랴 고로드는 마차를 묶은 이동형 요새였다.



 

얀은 전장으로 향하기 전에 스티르강의 다리를 불태워 적이 달아나지 못하게 했다. 병력은 3군데로 분산배치했다. 북쪽군은 왕실과 귀족의 기병, 독일보병과 귀족민병을, 남쪽군은 귀족병력과 민병을, 중앙에는 얀 자신이 외국용병, 근위병, 포병과 함께 섰다.

보병은 독일식으로 소총병과 창병이 격자대형으로 섰고 그 사이 공백에 기병이 배치되었다.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아서 양쪽 모두 몇 시간 후의 전투를 기다리며 조용히 대기했다.

 

얀은 안개가 걷히자 북쪽군에게 코사크 마차요새를 총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코사크군은 소총사격으로 대응했지만 포격의 도움을 받은 중장갑 폴란드 기병을 막지 못했고 마차요새는 순식간에 뚫렸다. 그렇지만 더 이상 위기가 번지기 전에 타타르 기병이 도착했다.

타타르 기병의 공격을 받은 북쪽군이 코사크 진영에서 밀려났고 독일보병이 급히 투입되어 타타르군을 다시 밀어냈다. 지라이는 양측면으로 기병을 계속 투입했지만 더 이상 압박하지는 못했다.

 

얀은 전투의 초점을 우익으로 옮기고 타타르군에게 포격을 가하며 보병을 전진시켰다. 독일보병이 천천히 전진하자 타타르군도 소형포 두 문을 계속 발사했다. 여러 발이 얀 근처에 떨어지도 했다.

장교 한 명이 언덕 뒤의 칸 깃발을 발견했고 폴란드 포대는 그 지점을 맹포격했다. 폴란드 포병의 실력은 훌륭했기 때문에 칸의 형제인 아무라트Amurat가 중상을 입었다.

설상가상으로 폴란드 기병이 다가와 총격을 가했고 결국 칸은 사정거리밖으로 텐트를 옮기기로 했다. 칸의 깃발이 사라진 것을 본 타타르 기병은 칸이 후퇴했다고 착각하고 말머리를 돌렸고 후퇴는 패주로 번졌다. 일부가 막아 서며 반전시키려 했지만 추격에 나선 폴란드기병에게 전멸당했다.


 

타타르군은 귀중한 군수품과 부상병을 모두 버린 채로 플리아시브카를 따라 남서쪽으로 계속 달아났다. 만약 우익에 있던 귀족기병이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추격에 동참했다면 타타르군은 완전히 궤멸되었을 것이다. 귀족기병의 뒤늦은 판단 덕분에 타타르군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폴란드 경기병은 밤에도 뒤를 추격하며 많은 패잔병을 쓰러트렸다. 타타르군은 20km를 내려가 강을 건넌 후에 다리를 불태웠고 아무런 죄도 없는 코진Kozyn을 불태우고 주민을 학살하며 화를 풀었다.

흐멜니츠키가 급히 달려와 지라이에게 전장으로 돌아가 달라고 간청했지만 칸의 분노는 풀리지 않았다. 폴란드군은 타타르군만 전력을 다해 공격했기 때문에 서로 내통했다고 믿었다. 흐멜니츠키와 수행원을 인질로 붙잡고 계속 후퇴했다.


  

폴란드군은 타타르군이 달아나고 어둠이 내리자 코사크 마차요새를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다. 코사크군은 밤새 마차를 강 근처로 옮겼다. 운 좋게 피해 달아난 곳이 방어하기 좋은 곳이었다. 양 측면이 소택지이고 뒤는 강이어서 폴란드군이 공격할 전면에만 대구경 포를 배치했다. 코사크군과 민병은 급히 참호를 파고 흙 방벽을 세웠다.

71일 오전, 흐멜니츠키가 사라졌다는 소문이 퍼졌다. 코사크군과 민병은 전우애가 전혀 없었고 특히 코사크군은 민병을 혐오했다. 흐멜니츠키가 두 병력 사이를 조율했는데 이제 그가 사라지자 서로에 대한 비난과 욕설이 난무했다.

 

반대편에 있던 폴란드군 지휘관은 수중에 있는 경포로는 코사크군의 방어선을 뚫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며칠 후에 대구경포를 가져왔고 낮에는 포격전을 벌이다가 밤에는 탐색전을 벌였다.

민병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섰다. 그들은 코사크군 필론 드잘랄리이Filon Dzhalalii에게 결전, 후퇴, 협상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했다. 드잘랄리이는 흐멜니츠키가 언제 돌아올 지를 몰라 결정을 미뤘다. 민병은 며칠이 더 지나자 하나 둘씩 진영을 빠져나갔다.

 

76, 코사크군은 왕에게 서로 물러나자고 제안했다. 얀은 코사크군이 먼저 모든 무기와 깃발을 버리고 흐멜니츠키가 항복할 때까지 대령들을 인질로 내놓고 등록코사크군의 숫자를 크게 줄이라고 요구했다가 거절당했다. 78, 폴란드군은 다시 포격을 시작했다.

79, 드잘랄리이의 우유부단한 지휘를 견디지 못한 코사크군 장교들이 이반 보훈Ivan Bohun을 지휘관으로 선출한 후에 다시 왕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폴란드군은 아예 사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란군의 의지가 눈에 보이기 약해지고 조만간 후퇴할 기색이 보이자, 얀은 플리아시브카 너머로 2,000기를 보내 코사크군의 퇴로를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