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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러시아

코사크의 역사 - 흐멜니츠키 봉기 (2부)

by uesgi2003 2016. 8. 11.


흐멜니츠키의 이후 이야기까지 정리하고 싶었는데 너무 늘어져서 짧게 정리하고 대신에 폴란드 윙드 후사르 사진과 그림을 대거 인용하겠습니다. 


폴란드 최절정기의 상징이라 많은 자료가 있습니다. 



코사크의 역사 - 흐멜니츠키 봉기 (2부)


710, 보훈은 폴란드군이 배후를 막은 것을 알고는 장교회의를 열었다. 민병에게는 알리지 않고 플리아시브카강에 3개의 다리를 놓고 배후를 뚫을 병력을 보냈다. 코사크군은 적과 민병이 지켜보는 가운데 충분한 공간을 확보했다.

다리가 놓이고 코사크기병이 대거 몰려가는 것을 본 민병은 자신들만 낙오된다고 착각했다. 공포에 질린 수천 명의 민병이 다리로 몰려들었고 수십 명이 밟혀죽었다. 진영에 남아 있던 보훈이 몰려가는 민병을 막아 세워보려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폴란드군은 모든 병력을 전진시켰다. 반면에 배후를 막고 있던 폴란드기병은 마구 강을 건너는 병력을 전면공격이라고 착각하고 배후를 열어주었다. 뒤늦게 민병의 탈주라는 것을 알고는 병력을 모아 달아나는 민병을 공격했고 수백 명을 죽였다.

폴란드 본대는 반란군 요새 안으로 들어가 눈에 보이는 사람을 모두 죽였다. 왕의 전리품은 상당했는데 그 중에는 흐멜니츠키의 개인물건과 깃발, 오스만 술탄과 러시아 차르와 주고 받은 서신, 코사크족의 귀중품도 있었다.




폴란드군이 노획한 흐멜니츠키의 깃발. 다시 스웨덴군이 노획해서 지금은 스웨덴 박물관에 있습니다. 

 

타타르 칸은 상당한 몸값을 받은 후에 흐멜니츠키와 수행원을 석방했다. 풀려난 흐멜니츠키는 급히 본대로 달려갔지만 베레스테츠코Berestechko전투에서 모든 병력이 궤멸된 것을 알았다.

1651928, 흐멜니츠키는 연방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등록코사크군을 절반인 20,000명까지 줄이고 흐멜니츠키가 장악했던 영토를 다시 내주어 1/4로 줄어들었다.

베레스테츠코전투에서 양쪽이 입은 피해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폴란드군 피해는 대략 1,500명이며 폴란드 주장에 따르면 반란군 피해는 40,000명에 달했다. 사상자 대부분은 711일 폴란드군의 요새 난입에서 발생했다. 그 중에 여성, 아이와 인부로 비전투원이 상당수 있었다. 낮게 잡아도 20,000명의 반란군이 전사해 폴란드군이 일방적인 대승을 거뒀다.

 

1652, 폴란드와 코사크족의 분쟁이 다시 시작되었고 16541월에는 러시아가 코사크족 진영에 참전했다. 그렇지만 폴란드와 러시아 모두 전면전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1655년 말이 되자 양쪽 모두 병력을 거뒀다.

1657727, 흐멜니츠키가 병사하자 코사크족은 러시아의 간섭을 막아내지 못했다. 100년 후인 1764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여제는 공식적으로 코사크국을 없애고 우크라이나 독립의지를 꺾었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에 소련이 해체되면서 독립했지만 최근에는 다시 러시아의 간섭과 합병의도가 강해지고 있다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우크라이나의 건국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러시아는 그와 차르의 협정을 러시아에 대한 복종으로 왜곡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코사크족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되기 때문에 폴란드 윙드 후사르에 대한 자료를 대거 소개하겠습니다. 별다른 설명은 없으니까 그냥 가볍게 즐기시면 됩니다. 윙드 후사르의 갑옷과 무장이 이렇게 다양한 것은 저도 처음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