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세/러시아

코사크의 역사 - 돈 코사크

by uesgi2003 2016. 8. 1.


20년 전 쯤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코사크족의 분쟁영화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귀한 폴란드 영화 파이어 앤 스워드(소드가 맞는 발음입니다 ㅡ.ㅡ)였는데



복잡한 배경이 얽힌데다가 워낙 가위질(175분 영화이다 보니)을 해서  뭐가 뭔지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죠.


오늘 모처럼 이 배경을 제대로 설명하겠군요. 폴란드의 최전성기에 벌어진 대홍수(스웨덴,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침공을 받은) 당시의 이야기로 폴란드 입장에서 그렸기 때문에 코사크와 타타르 연합군은 악역으로 나옵니다. 


유투브에 전체가 공개되어 있으니까 즐겨보시길.



폴란드의 최정예 윙드 후사르가 나올 때에 여친이었던 안사람에게 '우와! 쟤네들 나왔으니까 잘 봐둬'했다가 창피스러웠던 기억도 나는군요. 


불쌍한 안사람입니다... 남친 그리고 남편의 독특한 취미때문에 별의 별 영화에 다 끌려다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족으로, 자포리자에 정착한 코사크족이 세력확장과 주변 강대국의 영향으로 돈강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코사크의 역사 - 돈 코사크


1648, 보흐단 흐멜니츠키Bohdan Khmelnytsky 헤트만이 반란을 일으켜 1657년까지 계속되면서 코사크족과 연방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졌다. 이전의 반란과 같이 폴란드 귀족에 대한 계급투쟁이었는데 이번에는 크림칸국의 지원을 받아 훨씬 강력한 전력이었다. 크림칸국은 이번 기회에 코사크족을 완충지대로 만들어서 연방의 확장을 막고 싶었다.

코사크족은 주로 보병이었기 때문에 타타르 기병은 더할 수 없는 전력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타타르에게서 기병에 대한 모든 것을 배웠다.


 

모스크바공국(이후 러시아)의 차르도 흐멜니츠키의 반란에 큰 관심을 보였다. 코사크족은 같은 동방정교인데다가 코사크족에 합류한 러시아 농노의 수도 적지 않았다.


 

러시아공국은 이반 4세Ivan the Terrible(이반 뇌제)1547년에 차르와 모스크바 러시아를 자칭하면서 러시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이반 뇌제는 러시아 역사에서 표트르 대제보다 더 위대한 차르로 꼽히기도 합니다. 

 

1654, 페레야슬라브Pereyaslav에서 열린 코사크 총집회Ganeral Cossack Council(Rada, 사진참조)에서 처음으로 러시아와의 연합 움직임이 보였다. 흐멜니츠키는 집회를 소집한 후에 러시아와의 관계를 주제에 올렸다.

1654년 집회는 페레야슬라브 조약에 동의했고 러시아의 군사지원을 받는 대신에 차르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1648년 총집회에서 헤트만으로 선출된 흐멜니츠키는 다른 왕국의 힘을 빌어 자신의 통치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폴란드와 유화관계에 들어선 크림칸국을 견제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우크라이나 국수주의자 후손은 자발적인 노예화라고 비난했다.

어쨌든 이 조약덕분에 차르는 폴란드와의 전쟁에 참전해 1667년까지 폴란드를 압박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코사크족과 러시아가 전부가 아니었다. 17세기 중반은 폴란드 역사에서 대홍수The Deluge라고 불리는 시기로 동과 남에서는 코사크-타타르-모스크바공국 동맹이, 북에서는 스웨덴이, 남쪽의 타트라 산맥Tatra Mountains에서는 농부가 봉기를 일으켰다.

1667년 대홍수가 끝나자 연방의 국토는 황폐해지고 도시와 성이 파괴되고 지방이 독립하면서 폴란드의 국력은 급격하게 쇠락했다.

마침내 평화가 찾아오자 코사크족은 다시 내전과 분쟁으로 내달렸다. 1657, 코사크족 중 친 폴란드파는 이반 비호프스키Ivan Vyhovsky를 헤트만으로 선출한 후에 차르와의 동맹을 거부하고 러시아를 위협했다.

 

나머지 코사크족은 마르틴 푸슈카르Martyn Pushkar를 헤트만으로 선출하고 친폴란드파와 대립했다. 비호프스키가 푸슈카르를 누르고 연방과의 관계를 모색하자 러시아는 대대적인 무력침공을 시작했다. 크림칸국도 러시아의 확장을 막기 위해 참전했다. 비호프스키는 결국 헤트만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코사크족은 친폴란드와 친러시아파가 요새 도시를 나누어 차지하고 몇 년 동안 대립했다.

이렇게 해서 드니에페르강을 중심으로 우안 우크라이나Right Bank Ukraine는 연방에 다시 합류했고 좌안 우크라이나Left Bank Ukraine는 러시아에 합류했다.

1687, 흐멜니츠키가 죽은 지 30년 만에 이반 마제파Ivan Mazepa가 선출되면서 내전이 종식되었다. 마제파는 강력한 지도력으로 러시아측 코사크족도 통합했는데 1708년에 차르를 배반하고 스웨덴왕을 지원했다가 반역자로 러시아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연방이 붕괴되면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아직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봉신국인) 크림칸국의 각축장이 되었다.

17세기 말, 결국 크림칸국도 힘을 다했고 오스만이 직접 1684년에 러시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전쟁을 벌였다. 오스만은 헝가리, 보스니아, 크로아티아와 몰도바를 상실했고 크림칸국은 조약에 따라 더 이상 기독교 국가에서 노예사냥을 벌이지 못하게 되었다.

크림칸국의 수입은 약탈과 노예사냥이 절대적이었는데, 조약으로 금지되자 급격하게 몰락했다. 그 여파로 러시아와 크림칸국 사이의 완충지대였던 코사크족도 가치가 사라졌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우크라이나는 국경이 아닌 내륙이 되었고 18세기 말이 되자 크림칸국과 우안 우크라이나도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었다.

칸국의 타타르족은 우크라이나 중심에서 밀려났다가 러시아 제국이 동과 남으로 계속 확장하자 오스만 제국으로 사라졌다.

이 시점부터는 코사크족의 역사는 러시아의 역사와 함께 했다. 러시아 제국은 시베리아, 동부 스텝과 코카서스를 합병하는 첨병으로 코사크족을 이용했다. 코사크족은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방에서 러시아 제국으로 주인을 바꾼 꼴이 되었다.

 

그렇지만 새로 점령하거나 확장한 국경지역에 정착하고 세금을 면제받고 군대를 조직할 권리는 그대로 인정받았다. 대신에 군사전문 집단으로 국경선을 방어하고 차르가 소환하면 즉시 달려가는 의무도 그대로였다.

코사크족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전재군주 차르에게 절대충성하는 정체성 혼란이 생겼다. 그리고코사크족의 중심은 돈Don강 계곡으로 이동했다. 아조프Azov해로 흘러 드는 돈강 하류 계곡은 서부 스텝의 끝이었고 크림칸국의 영토였었다.

칸국이 몰락하면서 국경지대는 무인지경이 되었고 코사크족과 도망친 농노가 드니에페르강 계곡에 정착했던 것처럼 돈강 계곡으로 밀려들었다. 그리고 돈강 하구를 막는 오스만의 아자크Azak 요새도시를 비롯해 아조프해 연안의 오스만 도시를 약탈했다.

 

코사크족은 1574, 1593, 1620, 1626년에 아자크를 공격했다가 실패했고 다시 1647년에 자포리자 코사크족의 도움을 받아 함락시켰지만 1642년에 다시 내주고 말았다. 1696, 코사크족과 표트르 대제의 군대가 아자크를 점령했는데 다시 한 번 오스만 제국에 내주어야 했다.


 

표트르 대제는 폴타바 전투에서 스웨덴 카를 12세의 막강한 군대를 궤멸시킨 후에 (잠시 조용히 지내던) 오스만 제국을 얕잡아 보았다가 러시아 역사, 더 나아가 세계역사가 뒤바뀔 뻔 한 참패를 당했습니다. 휴전대가로 아자크를 다시 내주었습니다.

푸르트Pruth 전투는 여러 해프닝이 벌어졌습니다. 표트르 대제가 자랑하던 유럽식 군대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반대로 오스만의 정예 예니체리는 또 다시 반역의 기미를 보였습니다. 오스만에 망명 중이던 카를 12세는 자존심 때문에 참전하지 않았다가 뒤늦게 달려가서 대반전의 기회를 날렸습니다.  


http://blog.daum.net/uesgi2003/49 에 자세한 이야기를 정리해두었습니다.

 

이런 관계에도 불구하고 코사크족은 차르에 절대적으로 충성하지 않았고 자치권을 행사했다. 1650년대에 스웨덴과의 전쟁이 벌어지고 1660년대에 중앙 러시아에 대대적인 기아가 발생하자 많은 피난민이 돈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스웨덴과의 전투에서 계속 참패하면서 병력이 모자랐고 위기에 몰린 러시아는 대대적인 징병을 실시했습니다.)

코사크족은 피난민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차르의 군대가 이들을 송환하려고 오면 막아 섰다. 스테판 라진Stepan Razin을 중심으로 돈과 볼가강 계곡은 반란의 불길로 가득 찼다. 결국 차르의 군대가 반란을 진압했고 일설에 따르면 10만 명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농노체포로 시작된 1707~1708년의 불라빈Bulavin의 반란도 성공하지 못했지만  돈 코사크족의 독립의지가 여전한 것을 알려주는 사건이었다.



코사크족이 러시아 귀족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아래는 돈 코사크족의 확장 지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