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이야기는 잠시 앞으로 시간을 돌려 코사크족의 시베리아 탐험과 합병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러시아 남부에 있던 코사크족이 시베리아까지 누비며 러시아에게 큰 부를 안겨주었던 역사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특히 그것도 지원을 받은 정교한 원정이 아니라 도망치다가 생존을 위해 벌인, 원래 계획에 없었던 탐험이라는 점이 무척 재미있습니다.
코사크의 역사 - 예르마크의 시베리아 탐험(1부)
헤트만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Yermak Timofeyevich와 코사크족의 시베리아 탐험은 정교한 계획이나 원대한 이상이라기 보다는 우연과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결과였다. 그들은 이반뇌제와의 협정을 깨트린 후에 보복을 피해 달아났고 러시아군의 추격을 피해 미지의 땅인 북쪽으로 향했다. 예르마크의 탐험은 페루를 정복한 피사로Pizarro와 맞먹는 행운과 보물을 러시아에게 안겼다.
실제 모습이 아니고 유럽인의 시각으로 그린 예르마크입니다.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를 빼닮았습니다.
예르마크는 러시아 최고의 영웅 중 한 명이기때문에 많은 곳에 동상이 있다고 하는군요.
시베리아는 지구에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육지의 1/4 크기이고 러시아 현재 영토의 77%에 이른다. 15세기 후반까지 시베리아는 유럽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세계였다. 국경지대의 야만족은 노브고로드Novgorod대공국에게 귀금속과 털가죽을 공물로 바쳤다.
정의에 따른 시베리아의 크기입니다. 정치 행정구역의 시베리아는 적색입니다. 역사상 최대의 전장이었던 동부전선도 시베리아 서쪽의, 상대적으로 작은 지역의 전투였습니다.
이반뇌제가 카잔Kazan을 1556년에 정복하고 군대를 해산시키기 직전에, 이아디게르Iadiger라는 시베리아 귀족은 노브고로드대공국에게 바치던 연공을 새주인에게 바치지 않기로 했다. 막대한 양의 공물이 사라지자 차르는 제국 동쪽 미지의 땅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중에 예르마크가 시베리아 지역을 헌납하자 이반뇌제는 적극적인 탐험지원을 하는데 오히려 악수가 됩니다.)
비아트카Viatka 북쪽에는 타타르 혈통의 스트로가노프Stroganov 가문이 몇 세대에 걸쳐 소금과 광물을 생산하고 있었다. 그들은 상인가문이었지만 모스크바공국이 오지의 자치권을 인정한 덕분에 영주와 같은 권력을 누렸다. 법을 집행하고 사병을 거느려 시베리아 족장과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1558년, 아나키에비치Anakievitch 스트로가노프는 타타르족을 막을 요새를 짓겠다며 이반뇌제에게 카마Kama 지역의 땅을 더 요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1579년에는 640명의 코사크족이 갑자기 이 지역에 나타나 스트로가노프 사병고용을 요청했다.
이반 콜초Ivan Koltso와 예르마크이 이끄는 무리였다. 예르마크의 이름은 이때부터 무훈 시의 주인공으로 남아 러시아민족의 도전정신을 상징하게 되었다. 그들의 전설적인 무훈이 실제인지 아니면 과장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역사상 최대의 탐험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대략 이 지역입니다.
스트로가노프는 갑자기 나타난 코사크족을 값진 털가죽과 귀금속 창고 근처에 그대로 두고 싶지 않았고 국경너머의 원주민 부족을 상대로 미지의 땅을 탐색하라고 지시했다. 오랜 동안 스트로가노프가 원주민의 귀금속을 약탈해왔기 때문에 귀금속은 어렵겠지만 털가죽과 상아는 쉽게 노획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코사크족은 그렇지 않아도 이반뇌제의 추격대를 두려워하던 참이어서 이 제안을 반갑게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예르마크의 기대와 달리 시베리아 탐색은 차라리 원주민과의 전투가 더 쉬웠다. 그래서 예르마크는 위대한 군지휘관이 아닌 위대한 탐험가로 더 알려져 있다.
처음 마주친 원주민은 무장을 갖춘 코사크족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보굴Vogul과 오스티아크Ostiak족은 가족 단위로 숲 깊숙한 곳에서 살았으며 체격도 작고 겁이 많고 주변 부족과 평화롭게 지냈다. 사냥이 주업인 이들은 밍크나 수달의 진귀한 털가죽을 둘렀고 유일한 무장이 활과 화살이었다.
예르마크는 개울을 건너고 나무를 베어 넘기며 길이 없는 숲을 조금씩 헤쳐 나갔다. 장애물을 치우며 여름 내내 고생했던 예르마크는 겨울 숙영지를 찾아 스트로가노프에게 다시 돌아갔다. 스트로가노프는 되돌아 온 코사크족이 반가울 리가 없었다. 다시 한 번 미지의 땅을 탐색할 것을 주장했다.
예르마크는 겨울내내 코사크족의 규율을 바로 잡았다. 탈영시도나 명령불복종은 엄격한 처벌을 받았다. 신성모독은 중죄로 다스렸다. 두 번째 탐험에는 성 니콜라스의 성상과 2명의 신부를 앞세워 일요일과 성축일에는 미사를 올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소구경 포로 무장했다. 스트로가노프에게서 받은 화약의 품질이 안 좋아서 소리와 연기만 무성했는데 오히려 원주민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두번째 여름탐험에서는 첫번째에 비해 거의 나가지 못했다. 예르마크는 돌아가지 않고 카Ka강변에서 겨울을 보내기로 했다. 혹독한 추위에 고생했지만 봄이 오면 투라Toura강을 따라 바로 나아갈 수 있었다.
자연을 넘어서자 이제부터는 타타르 부족이 뒤를 따르며 공격해왔다. 1580년 여름은 적대적인 원주민 부족과의 치열한 탐색전으로 지나갔다.
세번째 겨울은 지금의 투먼Tioumen 부근의 작은 마을에서 보냈다. 이 지역의 타타르 부족은 상당한 곡식, 양과 소떼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식량걱정은 없었다.
봄이 되자 3년만에 처음으로 숫자와 무장 면에서 강력한 적을 만났다. 타타르 6개 부족이 보굴과 오스티아크족까지 불러 모아 코사크족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니에페프르강의 급류에 익숙한 코사크족은 보트를 만들어서 투라강 하류를 내려갔다.
타타르족은 코사크족이 지나는 길목마다 병력을 보내 막았고 코사크 일부는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예르마크는 급류를 거슬러 올라갈 수 없다고 설명했고 다른 사람도 미지의 땅으로 계속 나갈 수 밖에 없다고 동의했다.
타타르족이 바위에 통나무를 쇠사슬로 묶어 함정을 만들고 이들을 기다렸다. 장애물을 발견한 부하들은 귀중한 보트를 버리고 타타르족을 피해 크게 돌아가자고 소리쳤다. 예르마크는 통나무를 잘라 코사크옷을 입히고 창을 꽂은 후에 타타르족 쪽으로 몰아갔다. 타타르족은 어둠 속에서 보트가 접근하는 것을 보고는 화살을 퍼부었다. 빈 보트를 발견하고 당황하는 순간에 나체의 코사크족이 뒤에서 이들을 공격했다.
오브Ob강 부근의 작은 마을에 징기스칸 군대가 숨겨둔 귀중품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예르마크는 몽골군이 러시아의 수도원과 교회에서 약탈한 보물을 되찾자고 말했다. 중무장한 코사크족에게는 손쉬운 상대였고 스트로가보프가 말했던 대로 오지 곳곳에는 보물과 귀중품이 숨겨져 있었다.
타타르족은 달아나면서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불질렀다. 예르마크는 다시 그럴듯한 핑계를 생각해냈다. 동방정교의 40일짜리 금식기간을 내세우고 고난은 당연하다고 설득했다. 그리고 저 너머에서 약탈을 기다리는 타타르 도시로 가자고 말했다.
오브강에서 우랄산맥에 이르는 지역은 당시 티무르칸의 후손인 칼미크Kalmouck왕자 코우트줌Koutzum이 다스리고 있었다. 수도 이시르Ishir는 목책과 해자로 둘러 쌓여 있었고 유럽에서는 시비르Sibir라고 불렀다. 여기에서 시베리아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현재의 토볼스크Tobolsk에서 과거의 지배자와 미래의 지배자가 격돌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예르마크의 탐험을 기려 북극 최초의 쇄빙선에 예르마크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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