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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독일

재미를 더해가는 30년 전쟁 - 저지대 작센과 크리스티앙

by uesgi2003 2016. 9. 24.


이제 독일 내전에서 벗어나 국제전 양상으로 들어가는군요. 일단락했다 싶으면서도 국제전에 등장하는 영웅들을 설명할 생각을 하니 끔찍합니다. 스웨덴의 구스타브 아돌프만 해도 책 한권 분량이 될텐데요.



저지대 작센과 크리스티앙


틸리가 동 프리지아로 진격하자 많은 북부 영주는 완승을 거둔 가톨릭 진영이 과연 협정을 존중할 것인지 염려하기 시작했다. 브라운슈바이크Brunswick(Braunschweig)의 크리스티앙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가톨릭진영이나 황제도 반대진영에 대해 너그러운 약속을 하지 않았다.

크리스티앙은 어쩔 수 없이 개신교도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반대편의 틸리도 중립은 불가능하며 황제에 저항하는 불손한 무리를 공격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확신했다.

만약 이 당시에 어느 한 쪽으로 크게 기울어서 크리스티앙이나 틸리 중 하나가 제거되었다면 독일국민에게는 더 없이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저지대 작센은 상호방어협정을 맺고 있었는데 할베르슈타트Halberstadt(크리스티앙이 주교. 지도 참조)가 위협을 받자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처지에 놓였다. 가톨릭군은 남쪽에 집결하고 있었고 만스펠트는 동 프리지아에서 강력한 메시지를 계속 보내며 베저Wezer강 일대를 점령하겠다고 위협했다.

2, 저지대 작센은 징집에 나서 전쟁을 준비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틸리보다는 만스펠트에 대한 준비가 더 컸다. 황제가 대주교구에 대해 양보를 했다면 저지대 작센 영주는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을텐데 페트디난트는 이전의 협정보다 더 큰 양보를 할 생각이 없었다. 불손한 저항세력을 인정한다고 생각했다.


 

저지대 작센은 황제의 반대편에 섰다. 크리스티앙의 어머니는 아들이 위험에 처하자 다른 아들인브룬스비크-울펜뷔텔 프리드리히 울리히Frederick Ulrich에게 피난처를 마련하고 그 동안 황제와의 평화협상을 벌이라고 종용했다.

크리스티앙은 어머니의 제안을 바로 받아들이고 황제와 협상을 벌였다. 그렇지만 자신의 의지를 절대로 굽힐 생각이 없었다. 중세시대 무훈을 꿈꾸는 젊은 영주가 병력을 모아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병력이 크게 불어났다.

위협을 느낀 저지대 작센은 크리스티앙에게 다른 곳으로 떠나줄 것을 요청했고 그는 확실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 저지대 작센을 맹렬하게 비난한 후에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향했다.

틸리는 그 뒤를 바짝 뒤쫓아 86일에 국경 바로 앞에서 크리스티앙군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양측이 전투를 벌인 슈타트론 Stadtlohn은 네덜란드 국경에서 겨우 8km 떨어진 지역으로 몇 시간만 서둘렀다면 크리스티앙군은 재앙을 모면했을 것입니다.

틸리군 25,000명을 상대한 크리스티앙군 15,000~20,000명은 언덕 위에 자리를 잘 잡았지만 급히 모은 오합지졸이었기 때문에 틸리 기병은 첫 번째 공격에 무너졌습니다. 크리스티앙은 겨우 2~6,000명만 이끌고 국경을 넘었고 나머지 병력은 모두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습니다.

가톨릭군의 처우는 나쁘지 않았는데 호송 중에 달아난 수천 명은 (지금까지 약탈을 당해온) 지역 주민에게 학살당했습니다. 패잔병이 지역 주민에게 학살당하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크리스티앙군이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다고 해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만스펠트는 여전히 동 프리지아를 떠나지 않았고 저지대 작센의 영주들은 개신교의 미래에 대해 걱정했다. 지금 당장은 주교직을 빼앗기지 않더라도 장차 공석이 발생하면 가톨릭 진영이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황제에게 권한이 집중되면 다수는 언제라도 소수가 될 수 있었다.

418, 오스나브뤼크Osnabrück 주교직이 가톨릭에게 넘어갔고 할베르슈타트 주교직도 조만간 그렇게 될 것이 뻔했다. 몇 개의 주교구가 가톨릭으로 넘어가는 것은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있었다. 그 이후가 문제였다. 가톨릭 주교구는 가톨릭군을 불러들이고 만약에 스페인군이 주둔할 경우에는 주변 영지는 언제라도 공격받을 수 있었다.

개신교가 생존해야 영주의 독립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저지대 작센은 황제에게 특사를 보내 주교구를 개신교에게 돌려줄 것을 요청하고 요한 게오르크에게도 지원을 요청했다. 황제는 이전의 협정을 지키겠다고 대답했고 요한 게오르크도 화답했지만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저지대 작센에 균열이 생겼다. 공동방어를 약속했으면서도 병력과 군자금에는 온갖 핑계를 대기 시작했다. 급여를 받지 못한 군대는 적보다 더 위험했다. 저지대 작센연맹은 군대를 그대로 두기 보다는 해산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자 다음 번 전쟁에서 저지대 작센은 무방비 상태가 될 판이었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점령하거나 약탈할 수 있었다. 시민은 영주에게 책임을 요구했고 반대로 영주는 시민에게 책임을 돌렸다.

 

1624년 봄은 소강상태였다. 동 프리지아를 황폐하게 만든 만스펠트는 다시 네덜란드로 들어갔다. 독일에는 가톨릭군만 존재했고 황제와 가톨릭진영은 평화협상보다는 보다 확실한 결론을 원했다.

독일은 외딴 섬나라가 아니었다. 독일은 강대국이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길목이었고 독일의 혼란은 그들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페르디난트가 황제의 입지를 굳힐수록 주변국가의 눈초리는 심상치 않았다.

페르디난트는 군사와 정치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고 불손한 세력을 진압했지만 국민의 마음은 얻지 못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과 황제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렸지만 독일의 절반은 그 뜻을 따르지 않았다.

 

영국도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챨스왕자가 마드리드를 방문해 정략결혼을 제안하고 팔츠를 되찾아주려고 했다. (이전에 설명했듯이) 그의 정략결혼은 실패했고 팔츠 회복도 무산되는 것처럼 보였다.

스페인은 찰스의 바람과 다르게 프리드리히의 아들을 빈에서 교육시켜 가톨릭신자로 만들 생각이었다. 마드리드를 방문할 때와 완전히 다른 입장이 된 찰스는 아버지 제임스왕에게 전쟁을 주장했다.

영국과 스페인의 협상은 완전히 끝났고 영국의회는 팔츠를 회복할 방안에 대해 협의하기 시작했다.

 

영국하원은 독일을 거의 무지했다. 황제와 가톨릭진영의 득세도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펠리페 2세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스페인을 너무 두려워했고 황제에 대해서는 폄하했다. 스페인 바다를 봉쇄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에 몇 천명 정도의 지원군만 파병하면 될 것으로 착각했다.

제임스왕은 하원보다 독일과 스페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황제가 이미 독일을 강력하게 장악하고 있으며 다른 강대국에 조금 뒤떨어지는 정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원은 제임스왕의 의견을 받아들여 군자금이 지나치게 많이 드는 대륙원정군을 포기하기로 했다. 더구나 신성로마제국황제는 영국내정에 일체 간여를 하지 않았다. 하원은 왕의 뜻대로 다른 강대국을 부추겨 참전하게 만들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