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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독일

재미를 더해가는 30년 전쟁 - 고지대 팔츠 전쟁

by uesgi2003 2016. 8. 26.


30년 전쟁도 앞으로 한 두 달은 정리해야 하기 때문에 다음 이야기는 현대로 시간을 앞당겨 수단내전에 대해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원래 복잡한 구성인데다가 식민지 경영의 잔재로 남북으로 갈려 최근까지도 내전을 벌이고 있는 불쌍한 나라죠. 

우리에게는 온 국민의 희망이었던 유전이 수단에게는 남북 분단과 내전의 독이 되었습니다. 



재미를 더해가는 30년 전쟁 - 고지대 팔츠 전쟁

 

프리드리히가 자신의 영지만 지키겠다고 공표했다면 하이델베르크에서 평안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왕국을 되찾으려는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하루는 협상을 이야기하다가 다른 날에는 전쟁을 입에 올렸다. 자신이 모든 것을 버리고 협상에 나설 생각은 없었다.

장인인 영국왕도 중재자를 자처하고 나섰고 그 동안에는 전쟁을 자제하라고 조언했다.

 

개신교동맹은 난감한 상태였다. 헤세카셀Hesse Cassel 변경백Landgrave는 시민의 요구로 스피놀라와 화의했다. 스트라스부르크, 울름과 뉘렘베르크도 굴복했다. 412, 멘츠에서 평화조약을 맺은 동맹은 해체를 결정한 후에 팔츠에서 병력을 철수하기 시작했다. 스피놀라는 514일까지 군사작전을 중단하기로 했다.

프리드리히는 여전히 보헤미아 왕위를 포기하지 않았고 만스펠트에게 지휘를 맡겼다. 그는 연패에도 불구하고 4월 말까지 타보르Tabor와 트르제본Wittingau을 내주지 않았다.

 

다른 국가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영주는 국방을 책임지는 대신에 다른 영지보다 유연한 자치권과 작전권을 인정받았습니다. 보통 변경백이라고 불렀고 후작과 비슷한 지위였습니다.

 

프리드리히가 만스펠트에게 작전을 맡기면서 평화협상은 완전히 사라졌다. 플젠을 점령한 군대는 군수품 지원을 받지 못하자 지켜야 할 거점도시를 오히려 약탈했다. 당시 군대는 규율이 문란했고 용병이 대부분이어서 진영을 순식간에 바꾸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에 약탈과 학살에 가책을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좋은 사업기회로 여겼다.

특히 적대지역에서는 인간성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잔악했다.

 

틸리의 바바리아Bavaria군은 보헤미아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다른 지휘관이 항의하자, 군대는 수녀원이 아니며 필요한 경우 규율을 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만스펠트는 충분한 군자금을 지원받는 틸리와 달랐다. 그는 피아를 가리지 않고 가는 곳마다 약탈로 연명해야 했다. 더 이상 군량을 구하지 못하면 군사작전과 상관없이 다른 지역으로 떠나야했다.

 

5월 말, 개신교동맹군이 해체되면서 여유병력이 만스펠트 진영으로 대거 합류했다. 이제 그는 고지대 팔츠에서 16,000명을 거느리게 되었다. 시민은 끔찍한 고통을 겪었지만 그는 상당한 전력을 갖추게 되었고 더 이상 쫓겨 다니지 않기로 했다.

그는 보헤미아 국경의 거점을 점령한 후에 밤베르크Bamberg와 뷔르츠부르크Wurzburg 주교가 구교연합군에서 군대를 불러들이게 위협했다. 로히텐베르크Leuchtenberg를 공격해 변경백을 포로로 끌고 갔다.

 

바바리아군의 첫 번째 공격은 완전히 실패했고 헝가리의 베슬렌 가블러도 다시 진군하며 황제군을 격파하고 부쿠오이를 죽였다. 상황이 돌변하자 페르디난트는 영국의 중재제안을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만스펠트가 문제였다. 만스펠트는 살아 남기 위해 끊임없이 공격하고 약탈했기 때문에 평화협상을 시작할 수도 없었다.

 

팔츠에서의 전투는 고지대가 아니라 저지대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호레이스 비어Horace Vere(사진 참조)가 영국의용병 연대를 이끌고 도착했다. 프리드리히는 이들에게 지급할 군자금이나 군수품이 없었고 팔츠는 이들을 수용할 여력이 없었다. 스피놀라와의 휴전도 연장되었다.

어쩔 수 없이 부근의 주교영지에 주둔하면서 약탈을 금지시켰지만 구교연합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스피놀라가 브뤼셀로 돌아가면서 스페인군을 맡은 코르도바Cordova는 개신교동맹이 휴전을 깨트렸다고 선포하고는 영국의용병 연대를 상대로 공격에 나섰다.


 

반면에 고지대 팔츠에서는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만스펠트의 약탈을 견디다 못한 도시들이 막시밀리안에게 오히려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고 궁지에 몰린 만스펠트는 황제에게 용병계약을 제안했다. 실제로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1010일 군대를 해산하겠다는 계약을 맺고 황제군을 안심시킨 후에 바로 다음 날에 하이델베르크로 전속력으로 달아났다.

틸리는 그 뒤를 맹추격했지만 만스펠트는 싸울 생각이 없었다, 하이델베르크를 지나 알사스로 들어가 아그노Hagenau를 점령하고 거점으로 삼았다.


 

겨울이 오기 전에 양측은 휴전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만스펠트가 문제였다. 그의 군대가 가만히 있어야 양측이 조용히 협상테이블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중재역을 맡은 영국 제임스왕은 영국이 그 돈을 대겠다고 했지만 하원의 격렬한 반대 때문에 자금을 모으지 못했다. 결국 스페인에게 구원의 손길을 요청했다. 그는 아들 웨일즈공과 공주 인판타Infanta의 정략결혼으로 당시 최강국이었던 스페인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었다. 유럽전역에 발목을 잡힌 스페인도 확전은 피하고 싶었다. 중남미에서 유입된 엄청난 부도 모두 탕진한 상태였다.

1621년에 네덜란드와의 12년 휴전이 만료되고 각지에서 봉기가 시작되면 스피놀라의 군대를 더 이상 지원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백만 두카트의 막대한 군자금을 집어 삼키고 있는 독일전쟁을 서둘러 봉합해야 했다.




스페인 매치Spain Match로 알려진 웨일즈공 찰스와 인판타 산타아나 공주의 혼담은 결국 해프닝으로 끝났습니다. 

결혼계약협상이 지지부진하자 찰스는 직접 스페인으로 건너가 담판을 지으려고 했지만 스페인 왕가의 푸대접을 받았습니다. 스페인은 혼담을 끌면서 영국의 파병을 막을 생각이었고 무엇보다 공주는 (스페인자체가 그랬듯이) 완강한 구교신자였기 때문에 찰스와의 결혼을 결사반대했습니다. 

빈손으로 돌아온 찰스는 스페인과의 전쟁을 주장하며 프랑스 공주와 결혼했습니다. 스페인과 영국은 종교때문에 가까워지고 싶어도 가까워질 수가 없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작 문제는 구교연합이었다. 구교연합은 제국정부를 장악했고 이제는 강력한 군사력까지 보유했다. 이런 상황에서 개신교동맹이 순순히 평화협상에 응할 리가 없었다.

스페인은 제임스에게 막대한 신부지참금을 제안했다. 그리고 막시밀리안에게 선거후 직위를 주는 것은 또다른 전쟁을 부를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극구 반대했다. 프리드리히 아들을 빈으로 데려와 교육시켜 구교신자로 만든 후에 팔츠를 넘긴다는 속내는 숨겼다.

그렇지만 프리드리히는 자질이 부족하고 완고한데다가 스페인 못지않게 신앙심이 깊었기 때문에 아들을 절대로 빈의 예수회로 보낼 생각이 없었다.

 

스페인령 네덜란드 수도인 브뤼셀에서 첫 번째 평화협상이 열렸다. 먼저 휴전을 맺은 후에 영구적인 평화를 모색하자는 의견이었지만 프리드리히는 천마디의 말보다 한줌의 군대를 더 믿었다.

그는 힘에만 의존하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고 평화와 질서를 원하는 시민을 외면했기 때문에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독일북부 귀족도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보헤미아 왕위를 받지 않고 다른 귀족이 독일 개신교 전쟁을 이끌게 했다면 프리드리히의 형편은 훨씬 나았을 것이다.

 

프리드리히는 교훈을 얻지 못했다. 1619년에 그랬던 것처럼 1622년에도 병사의 숫자만 생각했고 그의 관점으로 보면 상황은 크게 호전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만스펠트의 병력이 전부가 아니었다. 독일 남부의 바덴 두를라흐Baden-Durlach 변경백이 프리드리히 편을 들었다. 북부에서는 브라운슈바이크Brunswick의 크리스티안이 팔츠를 도우려 오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악명이 높다는 것이 큰 문젯거리였다.

 

1621년 여름, 크리스티안은 병력을 모으고 파더보른Paderborn 주교영지로 쳐들어갔다. 이 지역은 구교주교가 강제로 개종했기 때문에 신교도가 대부분이었고 순수한 열정의 지도자였다면 큰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크리스티안은 군자금을 모아야 했기 때문에 구교와 신교도 상관없이 마구 약탈했다. 심지어 대성당의 은제성물까지도 녹여서 은화를 만들어냈다. 귀중품이 없는 마을은 모두 불태웠다. 충분한 자금과 식량을 마련한 크리스티안은 그제서야 약탈을 멈추고 만스펠트를 향해 남진했다.


 

이 당시, 이런 수준의 지휘관이 개신교연합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었다. 만스펠트는 휴전과 상관없이 전쟁비용을 받아낼 때까지 알사스를 약탈할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바덴, 브라운슈바이크, 만스펠트의 세 군대가 협력했다면 틸리와 코르도바 병력은 수세에 몰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틸리는 중앙을 차지하고 있었고 군자금을 지원받고 있어서 약탈할 필요가 없었고 사기도 높았다.

그리고 그는 무정부와 악을 몰아내고 질서와 종교를 되찾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