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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독일

재미를 더해가는 30년 전쟁 - 고지대 팔츠 전쟁

by uesgi2003 2016. 9. 19.


오래간만에 30년 전쟁이야기를 정리하니 간신히 붙인 재미도 다 떨어지게 생겼습니다. 저도 이 프리드리히가 저 프리드리히인지 헷갈리기 시작했으니 여러분은 더 그렇겠죠.


한 동안은 30년 전쟁으로만 밀고 나가야겠습니다. 


저지대 팔츠 전투

 

4월 중순이 되자 양쪽 군대가 팔츠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비어Horace Vere는 하이델베르크Heidelberg, 만하임Mannheim과 프랑켄탈Frankenthal을 장악하고 있었고 바덴 변경백 게오르그 프리드리히는 알사스의 만스펠트와 합류했다.

막스밀리안은 비스로흐Wiesloch의 틸리를 잘 막고 있었다. 틸리는 빔펜Wimpfen으로 퇴각해 코르도바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프리드리히는 만스펠트는 다음 목표와 행동에 대해 의견을 모으지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군량이 부족하던 판에 프리드리히군까지 합류하자, 만스펠트는 프리드리히를 버려 두고 일방적으로 길을 떠났다.

프리드리히는 빔펜에서 치명타를 입었다. 56, 틸리와 코르도바는 프리드리히를 붙잡아 철저하게 격파했다. 전투가 끝나자 마자 코르도바는 만스펠트를 바로 쫓아갔다. 만스펠트군은 굶주리고 지쳤기 때문에 가톨릭군에게 저항할 의지가 없었고 바로 알사스로 달아났다.


 

프리드리히는 빔펜에서 전투마차와 대포 등으로 가톨릭군을 맞이해 밀리지 않다가 가톨릭군의 포탄이 탄약창에 떨어지면서 방어막이 무너져 참패했습니다.

프리드리히가 애써 모은 바덴병력 12,000명이 거의 모두 전멸했고 가톨릭군은 16,000명 중 4,000명 정도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전투로 신교측은 궤멸 직전까지 몰렸습니다.



전투가 한창 진행되는 동안 양쪽의 협상단이 브뤼셀에 모였다. 영국대표 리차드 웨스턴Richard Weston은 프리드리히가 아직 빔펜패전을 당하기 전이라 그에게 휴전을 제안했다. 그는 장인에게 독일은 완전히 황폐해졌고 군대는 약탈없이 존재할 수 없다고 편지를 보냈다.

프리드리히는 브뤼셀의 휴전제안에 동의할 준비가 되었지만 이번에는 코르도바와 틸리가 동의하지 않았다. 조만간 크리스티앙의 군대도 격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620, 틸리와 코르도바는 크리스티앙(그림 참조)을 막지는 못했어도 심각한 피해를 입혔고 크리스티앙이 만스펠트와 합류했을 때에는 패잔병 수준이었다.  


 

개신교군의 참패는 상당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프리드리히는 신하를 버리고 달아났고 만스펠트와 크리스티앙은 프리드리히를 데리고 알사스로 도망쳤다. 프리드리히는 알사스에 들어서자 만스펠트와 크리스티앙과의 동맹을 청산해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려고 했다.

프리드리히는 세당Sedan으로 물러난 후에 상황변화를 조용히 관망했다. 얼마 후에 그가 헤이그에 돌아갔을 때에는 30년 전쟁의 주역들이 대거 등장하게 된다.

 

가톨릭군이 전장을 지배하면서 팔츠의 요새도시 공략은 시간문제였다. 916일에는 하이델베르크가 항복했고 118일에는 만하임이 항복했다. 프랑켄탈Frankenthal이 겨우 몇 개월 더 버티다가 스페인군에게 성문을 열었다.

영국의 제임스왕은 브뤼셀협상이 결렬되었는데도 평화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믿었다. 페르디난트와 막시밀리안은 기세를 올리며 밀어붙였고 11월에는 드디어 선거후 자리가 바바리아공 막시밀리안에게 넘어갔다. 막시밀리안은 이제 종신 선거후가 되었다.

궁지에 몰린 프리드리히는 용서를 바라며 선거후 지위를 포기했고 영지만 보존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스페인 대사는 두 가지 모두에 대핸 항의했지만 말에 그쳤다.

 

이제 평화이냐 전쟁이냐는 독일북부 개신교도에게 달렸다. 북부 개신교도가 뜻을 모으고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평화와 전쟁 어느 쪽으로도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행동통일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작센 선거후 요한 게오르크John George는 개신교 움직임과 다른 방향으로 행동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팔츠가 점령되고 보헤미아에서 루터파 성직자가 쫓겨나자 황제편을 들었던 그도 점차 회의감을 느꼈고 팔츠 선거후 자리가 바바리아에게 넘어가자 갈등이 심해졌다.

면담으로 의견을 강력하게 개진하기로 했지만 황제를 상대로 참전할 생각은 거의 없었다.

 

틸리군의 진격만 문제였다면 양쪽의 전쟁은 쉽게 끝날 수도 있었다. 페르디난트와 막시밀리안도 개신교와의 협정을 존중할 생각이었고 프리드리히는 팔츠영지에 대한 권리를 회복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만스펠트와 크리스티앙이 여전히 문젯거리로 남았다 프리드리히가 7월에 그들을 해임시켰는데도 여전히 전쟁을 그만 둘 생각이 없었다. 알사스에서 군량을 모두 소진한 두 사람은 가톨릭군의 추격을 피해 로렌느Lorraine로 들어가 다시 약탈을 하며 생존을 이어갔다.

당연히 프랑스는 급히 군대를 국경으로 파견했다. 활로가 모두 막힌 데다가 반란직전까지 몰리자크리스티앙은 라인강 하류Lower Rhine로 다시 피신했다. 다행히 네덜란드공화국Dutch Republic3개월 동안 지낼 수 있는 곳을 마련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로렌느의 현재 위치입니다. 국경지대에서 약탈하며 누비는 개신교군을 프랑스가 그대로 둘 리가 없죠.

 

네덜란드는 1621년에 스페인군과의 휴전을 끝낸 후에 상황이 좋지 않았다. 겨울에 율리에르Juliers가 스피놀라Spinola에게 항복했고 이제 베르헌옵좀Bergen-op-Zoom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함락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만스펠트는 네덜란드의 지원요청이 더없이 반가웠지만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통과해야 했다. 828, 그는 진로를 가로막고 있는 코르도바를 발견했다. 설상가상으로 2개 연대가 이미 반란을 일으키고 급여를 지급하지 않으면 전장에 나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만스펠트는 역시 노련했다. 반란연대로 말을 달려 싸우지 말고 그냥 전열에만 서 있으라고 부탁한 후에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코르도바에게 돌격해 들어갔다. 크리스티앙도 왼팔의 총상에도 불구하고 기병대 선두에 서서 돌격을 이끌었다. 그는 세 번이나 말을 바꿔 탔다.



만스펠트와 크리스티앙은 하늘의 손길과 같은 네덜란드 요청을 받았습니다만, 베르헌옵좀으로 가려면 스페인이 지배하는 벨기에 지역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양쪽 모두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만스펠트는 활로를 뚫었고 네덜란드로 향할 수 있었다. 크리스티앙은 왼팔을 절단했다. 그는 트럼펫을 불어 신음소리를 감추게 한 후에 수술을 받았다. 그는 자른 팔이 적을 처리해줄걸세라고 말했다. 스페인군에게 빼앗은 은으로 동전을 만들고 Altera restat(한니발이 자마전투에서 남긴 말로 뒤에 남긴 것이라는 뜻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을 새겼다.




벨기에 플뢰뤼스Fleurus에서 벌어진 전투는 본문의 설명과 달리 일방적인 전투였습니다. 일부 병력이 반란을 일으킨데다가 쫓겨다니던 개신교군이 기다리고 있던 스페인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기병이 6,000명으로 가톨릭군의 2,000명에 비해 압도적이었지만 테르시오 밀집대형을 뚫을 수 없었고 14,000명 병력 중에 5,000명을 잃었습니다. 가톨릭군은 겨우 1,200명을 잃었습니다. 

격전을 벌인 스페인군은 네덜란드로 달아나는 개신교군을 추격하지 못했고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스피놀라가 포위망을 풀면서 베르헌옵좀은 구원받았다. 그렇지만 만스펠트군의 무질서한 행태는 규율이 잡힌 네덜란드군과 어울리지 않았다. 만스펠트를 채용한 영주는 초대를 후회하기 마련이었다.

11, 그는 다시 해임되었고 뮌스터Münster로 가서 미래를 도모하려고 했지만 가톨릭 주둔군의 전력이 너무 막강했다. 동프리지아East Friesland로 발길을 돌렸다. 이곳은 아직 전쟁의 참화가 미치지 않은 곳이어서 약탈한 것이 많았고 가톨릭군의 공격을 쉽게 막아낼 수 있었다.

만스펠트는 이곳에서 약탈한 군량과 자금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 머물렀다



만스펠트와 크리스티앙이 얼마나 골치덩어리였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종횡무진하며 피아를 가리지 않고 피해를 입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