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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타

십자가와 초승달의 대격돌, 아르수프 전투 - 본편

by uesgi2003 2011.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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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수프(Arsuf) 전투

사자왕 리차드(Richard the Lionheart)와 살라딘의 성지탈환을 위한 한판

 

3차 십자군 원정대가 시작된 지 3년 만(1191)에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이 아르수프에서 대격돌을 한다. 이 전투 한 번으로 예루살렘 왕국의 운명뿐만 아니라 십자군의 성패도 결정된다. 12세기 중반에 혜성과 같이 나타난 살라앗딘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Salah ad-Din Yusuf ibn-Ayyub, 살라딘)는 정적을 차례로 제압하면서 1174년에 이집트와 다마스커스의 술탄에 올랐다. 적에게는 교활하고 무자비한 그였지만 친구에게는 진솔하고 너그러운 지도자였다. 모래알같았던 무슬림 부족을 하나의 군대로 통합하더니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유럽의 침략자들을 성지에서 몰아낸다는 목표를 공표한다.

 

그림 설명: 리차드가 사라센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고 있다. Philip James de Loutherbourg 그림. 클릭하면 커집니다.

 

살라딘의 지하드는 예루살렘의 기 드 루지앙(Guy de Lusinan) 20,000명에 달하는 십자군을 하틴(다음 편 이야기 참조)에서 몰살시킨 1187 7 4일에 그 목표를 달성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살라딘은 이슬람 개종을 거부한 230명의 기사단을 포함해 많은 포로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상징적인 의미가 큰 십자군의 True Cross (예수가 못박혔던 십자가의 일부분)도 손에 넣었다.

 

그림 설명: 기 드 루지앙은 하틴전투에 예루살렘 왕국의 전병력뿐만 아니라 성스러운 십자가 까지 동원했다. 킹덤오브헤븐의 한 장면

 

전투에서 이긴 살라딘과 30,000명의 이슬람 병사는 쉬지 않고 모래폭풍과 같이 성지를 덮쳐 나아갔다. 난공불락의 요새들은 하틴 전투에 모든 수비병이 동원되었기 때문에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0 2일 십자군 원정의 모든 것이었던 예루살렘이 무슬림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살라딘은, 1099 7 1차 십자군 원정군이 무차별 학살을 했던 것과 달리 최대한의 아량을 베풀었다. 충격적인 소식은 유럽전체를 흔들었고 3차 원정의 계기가 된다. 티레(Tyre)에서 콘라드(Conrad)가 필사의 항전을 거듭하는 동안, 당시 가장 유명한 세 명의 영웅이 십자군 원정을 시작한다. 일명 붉은 수염인 신성로마황제 프레드릭1세 바바로사(Frederick I Babarossa), 프랑스의 필립2세 아우구스투스(Philip II Augustus) 그리고 영국의 사자왕 리차드 1세였다.

 

(우에스기 왈: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처음 점령했을 때에는 무차별적인 학살로 길거리에 피가 흘러넘쳤었다고 한다. 반면에 살라딘은 귀족과 성직자는 적절한 몸값만 치르면 모두 안전한 곳으로 갈 수 있게 허락했고 학살이나 약탈을 금지했다. 심지어 교회도 파괴하지 않는 아량을 베푼다. 전쟁사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보기 힘든 학식, 용맹, 지혜와 인덕을 갖춘 영웅이었다. 킹덤오브헤븐을 감독판으로 꼭 보시길. 좀 엇나가서 그렇지 이 영화만큼 스케일과 고증이 철저한 영화도 없다. 제 십자군 3부작부터 읽고 보면 많은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 설명하고 싶었던 말이 이것이 아닌데.... 예루살렘을 점령한 살라딘은 십자군의 전략 요충지 몇 개에 대한 공략을 뒤로 미룬다. 마음만 먹으면 점령했을 그 몇 개의 요충지를 그냥놔뒀다가 3차 십자군이 상륙해서 심각한 위기에 몰리게 된다.)

 

 

세 영웅 중에서도 리차드가 십자군 원정에 가장 적합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악명높았던 아버지 헨리 2세의 잔인하고 거만한 성격을, 어머니 엘레노어(Eleanor)에게서는 냉정함과 교활함을 동시에 물려받았다. 그는 많은 단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장에서의 과감함과 리더십으로 일반 병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1189 5 11일 프레드릭이 먼저 20,000명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라티스본(Ratisbon)을 떠났지만1190 6 10일 살레프(Saleph) 강을 건너던 중 익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신이 3차 원정군을 축복하지 않는다고 느낀 군대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려서 가신이었던 레오폴드(Duke Leopold of Austria)가 이슬람 항구 아크레(Acre)에 도착했을 때에는 겨우 4,000 명 정도의 병사만이 함께 하고 있었다.

 

그림 설명: 3차 십자군의 이동경로. 클릭하면 커집니다.

 

(우에스기 왈 : 프레드릭은 익사를 했다는 설과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설이 있다. 도강지점이 하반신만 잠기는 깊이였는데 실수로 낙마해서 무거운 갑옷 때문에 일으키지 못하고 익사했다는 것보다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행군하다 몸을 씻기 위해 갑자기 뛰어 들어 심장마비를 일으켰다는 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 2차대전 독일군의 러시아 침공 작전명 바바로사는 프레드릭 왕을 의미한다. 막강한 전투력의 게르만 군이 제대로 도착했다면 3차 원정군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리차드와 필립은 1190 7 4일 베젤라이(Vezelay)를 출발했다. 필립은 650명의 기사, 1,300명의 시종과 말을 거느리고 아크레를 1191 4 20일에 도착한다. 리차드는 8천 명의 병사와 함께 우회로를 택해, 비잔틴 제국과 불화를 일으킨 사이프러스를 빼앗아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기(Guy)에게 준다. 사이프러스는 이후 십자군의 보급창 역할을 하는 동시에 지중해의 전략거점 역할을 한다. 리차드는 뒤늦게 아크레에 도착했지만 바로 공격을 가해 아크레의 성벽을 무너뜨린 후에 자신이 직접 마지막 공격을 이끈다.

 

그림 설명: 함락직전의 아크레 

 

2년 동안 십자군의 공격을 버텨냈던 아크레의 무슬림은 결국 7 12일에 십자군에게 성문을 열었다. 리차드와 필립은 나란히 성벽에 자신의 군기를 세웠는데, 레오폴드도 감히 깃발을 세우려고 하자 리차드는 그 깃발을 빼앗아 성밖으로 던져버린다.

 

(우에스기 왈 : 리차드가 귀국 길에 비엔나에서 피납되는데, 필립 2세의 음모도 한 몫을 했지만 이 행동이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결국 이런 독선적인 행동으로 필립과도 불화를 일으켜 십자군 원정군이 분열하게 된다.)

 

처음부터 목표가 달랐던 필립은 아크레를 탈환한 것을 핑계로 귀국을 하고, 리차드가 3차 원정군을 단독으로 이끌게 된다. 살라딘과의 포로와 True Cross 교환이 수포로 돌아가자 2,700명의 사라센 포로를 학살한다. 1차 십자군 때와 마찬가지로 3차 원정군도 무자비한 학살로 이름을 더럽히게 된다.

 

 

오른쪽 그림 설명: 아크레를 함락시킨 후에 레오폴드가 세운 깃발을 부러뜨려 성밖으로 던지는 리차드. 레오폴드와 같은 인물이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겠지만 귀국길에 오스트리아에서 피납되는 황당한 결과를 가져온다.

클릭하면 많이 커집니다.

 

(우에스기 왈 : 필립은 리차드를 십자군 원정을 떠맡기고 프랑스에 있는 영국 영지들을 탈환해서 왕권을 강화시킬 속셈이 있었다. 어릴 때에는 필립과 리차드가 동성애였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우호적이었지만, 서로 왕이 된 후에는 끊임없는 견제와 충돌을 벌이게 된다.)


중요 전략거점인 아크레를 정복한 십자군은 약간의 시간만 지체한 후에 1191 8 22일에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원정길에 나선다. 하틴전투에서 교훈을 얻은 리차드는 절대로 서두르지 않고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는 놀라운 면을 보여준다. 그는 무리한 진군을 하지 않고, 이른 아침에 행진을 시작해서 뜨거운 태양을 피하면서 하루에 겨우 17km만 전진했다. 숙영지도 반드시 물 근처를 택했으며 데리고 왔던 함대도 해안을 따라 함께 이동시켜 보급을 하는 동시에 부상자를 실어날랐다. 대열은 안에서 밖의 순서로 보병, 기사, 보병이 밀집대형을 이루게 했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사막은 모래함정, 가시, 파리, 모기와 각종 독충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었다. 십자군은 독충을 쫓기 위해 밤마다 시끄러운 소음을 냈기 때문에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 없었다. 더욱이 도강을 할 때마다 악어 떼에게 말을 많이 잃었다. 군대에는 창녀와 잡역부가 따라다니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리차드는 극소수만 빼고 모두 아크레에 두고 왔기 때문에 병사들의 불만이 컸다. 살라딘의 기록관은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 무슬림군이 보병과 기사들을 유인해 서로 떼어놓기 위해 사방에서 끊임없이 화살을 쏘아댔다. 그렇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기사들은 놀라울 정도로 냉정을 유지했고 조금도 서두르지 않고 계속 진군을 했다. 십자군의 함대는 해안을 따라 숙영지까지 나란히 항해를 했다.”

 

 

 

기사들은 무거운 장비를 짊어진 보병들을 위해 서두르지 않았다. 전투가 없을 때에는 보병들이 보급품과 텐트를 짊어졌다.

살라딘은 옛 로마도로에 군대를 비스듬히 배치해서 어느 방향에서나 공격하려 했지만, 리차드는 현명하게 해안을 따라 진군을 했기 때문에 양쪽의 대군이 나란히 진군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살라딘은 낮에는 대열을 이탈한 병사들을 노리고 밤에는 누비안(Nubian) 경기병이 십자군의 병영을 습격하는 소극적인 전략을 썼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공격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8 30일에는 십자군의 후위를 맡았던 휴(Hugh, Duke of Burgundy)가 공격에 휩싸여 전멸할 위기에 휩싸이기도 했는데, 리차드가 직접 전투를 지휘해서 위기에 벗어났다.

 

그림 설명: 아크레 공략과 예루살렘 원정을 자세하게 정리한 지도. 두 그림 모두 클릭하면 커지니까 꼭 확인하기 바랍니다. 차마 이것까지 번역과 뽀샵정리 작업은 요청하지 말아주시길.  지도는 한 눈에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니까 꼭 확인해주기 바랍니다. 모든 지도 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살라딘은 말라리아에 걸렸는데도 불구하고 몸을 돌보기 보다는 하틴전투와 같은 최후 의 전장터를 선택해 십자군을 몰아내는데 열정을 쏟았다. 그는 십자군의 진격 예정지를 신중하게 검토한 후에 아르수프 지역을 최후의 일전을 치를 곳으로 선택했다. 우익은 아르수프 숲에, 좌익은 아르수프의 유적지에 배치시켰다. 그는 패한 척 후퇴해서 십자군을 유인한 후에 신속한 공격으로 차례로 분쇄할 계획이었다. 언덕 때문에 사라센의 회군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바다에서 고원까지 3km 이상의 공간이 있어서 기사가 돌격하기 힘들기 때문에 최고의 장소였던 것이다. 하틴과 같이 원하는 전장터에서 함정을 파고 기다린 것이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리차드였다. 기 드 루지앙과는 차원이 다른 전사왕이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살라딘은 리차드가 이미 아르수프를 정찰을 하고 그 지역에 대해 미리 파악해두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리차드도 아르수프에서 살라딘을 궤멸시킬 생각이었다. 9 7일 해가 뜨자 마자 말에 올라탄 리차드는 전군에게 전투준비할 것을 명령한다. 그 동안 무슬림의 공격에도 반격을 못했던 십자군은 전투가 벌어지기만을 기다릴 정도였다. 리차드는 최전위에 성전 기사단을 세우고, 기와 노르만군을 그 다음에, 최후위에는 프랑스군과 성요한 기사단을 배치시켰다. 헨리(Henry, Count of Champagne)은 언덕의 정찰을 맡았고, 버건디 공작이 대열을 앞뒤로 오가면 흐트러지는 것을 막았다. 노르만군이 살라딘의 캠프에서도 볼 수 있는 정도로 큰 왕의 깃발을 가지고 있었다. 여느 때와 같이 맑고 뜨거운 날이었다.

 

오전 9시에 군악대의 요란한 연주를 신호로 사라센이 먼저 공격을 시작했다. 십자군의 대열을 무너뜨리지 못하자 후위로 공격방향을 돌려 성요한 기사단에 맹렬한 공격을 퍼붓는다. 베두인과 누비안 기병들이 일파 이파 차례로 화살과 투창을 던지며 공격을 퍼붓고는 사라지는 전략을 사용했다. 십자군도 석궁병이 맞대응을 하기는 했지만 대부분 묵묵하게 대열을 지키며 공격을 받아냈다. 양측이 가까워질 때에는 수 천명의 병사가 생존을 위한 육박전을 펼쳤다.

 

태양이 머리 위로 올라와도 십자군은 본격적인 반격을 하지 않았다. 리차드의 전략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살라딘의 유인에 넘어가지 않고 대열을 유지해서 무슬림군을 지치게 만든 후에 단 한 번의 대반격으로 궤멸시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십자군은 그 때까지 뜨거운 태양아래에서 목도 못 축이고 무슬림의 공격을 요령껏 막아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병사들의 불만은 폭발지경이 되었다. 더구나 무슬림의 화살을 피할 수 없는 말들이 계속 쓰러져서 더 이상 시간을 끌다가는 십자군 공격의 핵인 기사의 돌격이 어려워질 것이다.

 

 

십자군의 전위대가 아르수프의 정원에 진입한 정오에, 너무 심한 피해를 입은 성요한 십자군의 석궁병은 대열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처지면서 밀집대형이 무너졌고, 무슬림은 그 틈을 노리고 밀고 들어왔다. 위기가 다가오자 프라 가니에르 (Fra’ Garnier de Nablus, 성요한 기사단의 지휘관) “전하, 적에게 반격을 가하지 못한다면 비겁한 불명예만 짊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군마도 모두 잃게 됩니다. 왜 계속 당해야만 합니까?”라고 애원했다. 리차드는 기사단장이여, 생각이 있으니 참아주기 바랍니다라고 냉정하게 거절했다. 대답을 들은 기사단의 볼드윈(Baldwin of Carron)성 게오르기우스를 위하여라며 무슬림대군에 혼자서 돌격해 들어갔다. 지휘관의 돌격을 본 기사단은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며 따랐고 프랑스군도 그 뒤를 따랐다.

기사단에게는 천만다행으로, 살라딘은 십자군의 소극적인 대응에 방심을 하고 말에서 내려 궁병들의 사격을 지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사단의 갑작스런 반격에 제대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기사단과 프랑스군의 전멸을 두고 볼 수 없었던 리차드는 전군의 반격을 알리는 나팔을 불게 했고, 참고 참았던 십자군의 분노가 일시에 무슬림을 행해 폭발했다. 일시에 터진 십자군의 공격은 무슬림 진영을 2km나 뒤로 밀어낼 정도였다.

 

그림 설명: 아크레 공략을 진두지휘하는 리차드. 그는 모든 전투에서 항상 앞서 지휘하고 직접 전투에 참가했다. 프랑스 원정에서도 선두에 섰다가 화살을 맞고 숨진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무자파르(Muzaffar al-Din Gokbori)는 패주하는 병사들을 모아서 십자군 진영에 홀로 남겨진 궁병을 노리려고 했지만 리차드가 십자군의 대열을 정비한 후에 다시 전군돌격을 명령해 무슬림군을 곳곳으로 패주시켰다. 항상 그랬듯이, 리차드는 가장 앞에 서서 무슬림 병사를 직접 베어넘기며 십자군의 사기를 높였다. “그때 왕께서는 눈에 보이는 무슬림을 베어넘기셨다. 그리고 왕이 계신 곳에서는 한 놈도 달아나지 못하고 그의 칼 아래 쓰러졌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림 설명: 패주하는 무슬림군을 추격하는 십자군. 위기를 벗어난 대역전극이었지만 리차드는 냉정하게 추격을 중단시켜 매복함정에 빠지는 것을 경계한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무자파르가 패주하는 병사들을 모으려고 애를 쓰고 있을 때, 살라딘의 조카 타키 알딘(Taqi al-Din)은 살라딘의 친위부대 700명을 이끌고 십자군의 좌익을 공격해왔다. 그의 공격으로 승패가 뒤바뀔 수도 있었기 때문에 리차드는 다시 한 번 병사들을 정비해서 마지막 공격을 가했다. 거의 붕괴직전이었던 무슬림군은 마지막 공격으로 완전히 무너져내렸고 패잔병들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어떤 병사는 나무들 사이에 몸을 숨겼지만 석궁병의 표적이 될 뿐이었다. 리차드는 살라딘의 캠프에 깃발을 세우고 더 이상 깊숙이 추격하지 못하게 했다.

 

 

십자군은 이 전투에서 7백 명의 병사를 잃은 반면에 무슬림은 32명의 에미르(총독) 7천명 이상의 병사를 잃는 참패를 했다. 아르수프에서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지만, 살라딘은 패잔병을 수습해서 십자군을 다시 견제하기 시작했다. 살라딘의 군대를 배후에 두고 예루살렘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리차드는 자파(Jaffa)로 진격해 전략거점으로 삼았다. 그렇지만 곧 매서운 겨울이 닥쳐왔기 때문에 예루살렘 공격은 무기한 연기될 수 밖에 없었다. 물리적인 기준에서 보면 아르수프에서의 전투결과는 무슬림을 재기불능까지는 몰고 가지 못했지만, 심리적인 면에서는 살라딘과 무슬림이 리차드와 십자군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또한 하틴전투 후에 땅에 떨어진 십자군의 사기를 회복하는 동시에 살라딘의 전설을 깨뜨리는 효과도 얻었다. (우에스기 왈 : 살라딘은 몇 번의 전투에서 온갖 지혜를 다해 리차드에게 맞섰지만 패전을 계속하자, 초토화 전략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리차드와의 전면충돌을 피한다.)

 

살라딘은 자신이 판 함정이 거꾸로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리차드는 기와는 차원이 다른 지휘관이었으며 위기를 기회로 바꿀 능력과 의지가 있었다. 살라딘이 무슬림군을 다시 하나로 결집시켰지만 도주하는 병사가 생겼고 숨죽이고 있었던 정적은 반역을 꾀하는 일까지 일어나 자신의 입지가 위협을 받기 시작한다. 아르수프 전투 후에 살라딘은 자신의 병사들을 믿지 않게 되었고, 리차드가 이끄는 십자군과는 야전에서의 정면대결을 피하게 되었다.

리차드는 자파를 요새화하는 동안살라딘에게 휴전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특히 살라딘의 형제 알 아딜(al-Adil)과 자신의 여동생 조안의 결혼을 제안하기도 했다. 리차드는 10 11일에 예루살렘으로 다시 진격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살라딘이 예루살렘의 방어를 두텁게 하고 이집트에서 지원군을 불러들였다. 십자군은 12 25일 예루살렘에서 20km 떨어진 지역까지 진출했지만 폭풍우를 만나 모든 길이 진흙탕으로 변하고 보급품이 썩는 난처한 지경이 된다. 예루살렘의 살라딘과 이집트 원군 사이에 갇히고 싶지 않은 리차드는 결국 자파로 다시 후퇴한다.

(우에스기 왈: 형으로서의 리차드는 든든한 배경이겠지만, 오빠로서의 리차드는 해도 너무 한다. 여동생 조안을 이슬람에서도 팔아먹으려 하더니 프랑스 원정에서도 또 한 번 팔아먹으려고 한다. 아무리 정략결혼이 판을 치던 시대였다고 해도...)

 

리차드는 1192 6 11일에 베이트 누바(Beit Nuba)로 돌아가서 예루살렘으로 가던 카라반을 공격해 모두 죽인다. 살라딘과의 지리한 전투와 급박한 국내사정에 의욕이 없어진 리차드는 7 4일에 베이루트까지 물러난다. 살라딘이 자파로 이동하자 자파함락을 걱정한 리차드가 함락되기 직전에 도착해 석궁병과 창병을 성벽 뒤에 배치해 살라딘의 기병을 막아낸다. 리차드가 무모하게도 앙상하게 마른 말을 타고 혼자 앞으로 나가 일대일 대결을 부르짖었으나 살라딘은 휘하 장수들의 대응을 자제시키고 왕이 그런 몰골로 싸운다는 것은 말이 안되다라며 좋은 말을 한 마리 선물로 건네준다.

 

나중에 리차드가 열병에 쓰러지자, 살라딘은 고원지대에서 가져온 눈과 과일을 보내 도움을 주기까지 한다. 두 영웅은 대치상태를 계속 이어갔지만, 살라딘의 정치적인 입지가 계속 약화되고 있었고 리차드는 필립 2세가 프랑스에 있는 자신의 영지를 노리고 있다는 두통거리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결국 9 2일에 3년간의 휴전(람레조약, treaty of Ramleh)을 하고 무슬림의 예루살렘 통치를 인정하는 대신에 십자군의 영토를 공격하지 않으며 그리스도교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한다. 많은 기사들이 휴전을 이용해 이득을 취했지만 리차드는 자신의 계획대로 예루살렘을 탈환하지 못한 것을 크게 자책한다.

1192 10 9, 리차드는 팔레스타인을 떠나지만 귀국 길에 배가 난파되어 기사단의 일원으로 가장하고 오스트리아를 통해 귀국하는 우회길을 택한다. 비엔나의 여인숙에서 그의 정체가 탄로나, 아크레에서의 모욕을 잊지 않고 있던 레오폴드 공작이 그를 억류한다. 레오폴드는 그를 신성로마제국 헨리 6세 황제에게 인도했고, 영국령이던 양주제국이 막대한 몸값을 치른 후에야 풀려난다.

리차드는 다시는 성지로 되돌아오지 못하고 나머지 길지 않은 여생을 프랑스 원정에서 보낸다. 3차 십자군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은 리차드였지만, 강력한 적을 상대로 끈질긴 인내심을 보여 성지를 지켜낸 것은 살라딘이었다.

 

Military History Mark L. Evans의 기사를 번역한 내용입니다.

 

당시뿐만 아니라 이후 몇 백년 동안 무슬림과 살라딘은 악마의 존재였습니다.

그림 설명: Christofono Altissimo가 살라딘의 터번을 악마의 뿔로 묘사한 유화.

클릭하면 커집니다.

그림 설명: 최근에는 살라딘에 대한 재조명으로 이런 멋진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클릭하면 커집니다.

 

 

 

 

 

 

 

 

 

 

 

 

 

 

그림 설명: 너무 멋진 모습의 살라딘이어서 압축없이 올립니다. 영화 킹덤오브헤븐에서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인들을 그대로 풀어주겠다고 약속한 후에 발리앙이 예루살렘이 무슨 의미이냐고 묻습니다. 

살라딘: Nothing (그러고는 망토를 펄럭이며 걸어간다)

살라딘: (갑자기 돌아서더니, 두 주먹을 마주치면서) Or Everything (그러고는 씩 웃는다)

 

평소 살라딘에 호감을 가지고 있는 우에스기는 영화관에서 이 모습을 봤을 때 거의 울뻔했습니다.

아니 안사람 몰래 울었죠. 너무 멋있어서요. 그리고 미국에서 반이슬람 감정이 대단한 때에 이런 영화를 만든 스콧 영감이 대단해서요.

 

 

p.s. 제가 워낙 좋아하는 살라딘의 이야기라 그림 자료를 많이 준비했는데 절반도 못 실었습니다. 보충 편에 보충 자료로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