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군 포로가 판 대전차호를 본 적이 있다. 전차호 안에는 아군의 시체가 있었는데 중노동 중에 쓰러지면 그 자리에서 죽어갔다. 물론 우리 대전차호도 소련군 포로의 시체가 가득했다.
헬만의 부츠 뒷굽이 내 뒤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을 보니 상황을 파악하는 모양이었다. 그의 저주 섞인 목소리는 갑자기 비명으로 변했다. ‘통신병! 뭘 본 거야? 적군이 우리 앞에 있잖아!’ 쿠르트가 못 볼 만도 했다. 우리의 관측창은 진흙과 얼음으로 덮여 있는 데다가 차체 MG34의 조준경은 원래 잘 안보였다.
쿠르트는 대놓고 툴툴거리며 웅크리고 MG34를 양 옆으로 길게 발사했다.
갑자기 털모자와 누빈 상의를 입은 적군 하나가 20m 떨어진 구덩이의 짚 덮개를 던지며 몸을 내밀었다. 순식간에 전방의 지면에 구멍이 숭숭 뚫리면서 적군이 까마귀떼처럼 나타나 기관총탄을 피하며 다가왔다.
T-34보다 더 무서운 놈들이었다. 적군 대전차병은 타이거를 상대하기 위해 살아가는 놈들이었다. 지뢰, 흡착폭탄과 몰로토브Molotov 칵테일(화염병)을 전차 엔진데크에 던졌다. 피해를 감수하며 엔진데크에 불을 지르면 연료통까지 번져 우리 목숨도 끝날 판이었다.
쿠르트는 최대한 적군의 접근을 막았고 좌측의 타이거도 최대한 주포를 내려 동축 기관총으로 지면을 제압했다.
T-34가 보병 뒤로 나타나 우리에게 포격을 했다. 포탑과 전면장갑이 포탄 때문에 크게 흔들렸다. 다행스럽게도 그 중 한 발이 우리를 도와주었다. 차체를 맞고 튕긴 포탄이 지뢰를 들고 뛰어오던 보병 하나의 머리를 날리고 그 뒤의 병사 상체를 꿰뚫었다.
그들은 잠시 우리쪽으로 뛰어오다가 쓰러졌다. 지연신관이 달린 지뢰가 폭발했고 시신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우리 포수가 2발을 쏘아 운전병 관측창을 관통하고 좌측 궤도를 날려 보냈다. 전차에서 연기가 새어 나오자 다시 주포를 낮추고 동축기관총으로 보병을 상대했다. 다른 타이거도 마찬가지였다.
내 옆의 못생긴 쿠르트는 탄창이 빌 때까지 기관총을 퍼붓고는 탄창용량에 대해 스판다우Spandau 무기창의 엉터리 설계에 대해 욕했다. 이번에도 어머니에 대한 욕설이었다.
오른쪽에서 튀어 나온 보병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었고 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 보통 전차는 폭탄을 든 보병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엔진그릴이 워낙 약하기 때문에 무척 위험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헬만의 명령에 따라 기어를 전속력으로 올리고 회전시켜 오른쪽에서 다가오는 적들을 향했다. 그들을 궤도로 뭉개는데도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타이거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살아남은 3명이 달아나려고 했지만 차체 아래로 사라졌다. 쿠르트의 기관총이 좌우의 보병을 마무리 지었다. 이렇게 우리는 제국을 위해 러시아 한 구석을 청소했다.
전차를 대전차호 앞에 세웠다. 좌측의 타이거 주변에도 기관총에 맞아 죽거나 깔려 죽은 시체가 널려 있었다. 그 전차는 포신을 올려 다시 적 벙커를 조준했다.
피투성이가 된 시체 하나가 기어가더니 아군 전차에게 폭탄을 던졌다. 쿠르트가 그 놈을 쏘아 쓰러트렸고 만약을 위해 다른 시체에도 모조리 총탄을 먹였다. 그렇지만 그 놈이 던지 작은 폭탄은 큰 피해를 주었다. 아군 전차의 엔진데크에서 오렌지색 섬광이 터졌다. 값싼 석유병 하나와 충격신관 하나로 만든 몰로토브 폭탄이 타이거 마이바흐Maybach 엔진 아래의 가솔린에 불을 붙였다.
엔진 그릴 하나가 하늘로 치솟았다. 포탑 뒷부분의 둥근 해치가 열리고 장전수가 소화기를 내밀었지만 제대로 동작하지 않았다. 그는 소화기를 던져버렸고 다른 해치가 열리며 승무원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탈출한 5명 중에 4명은 바로 적군의 총탄에 쓰러졌다. 다른 한 명은 불이 치솟는 그릴로 쓰러져 화염 속에 사라졌다.
어느 놈이 쏜 총탄인지를 확인했다. 대전차호 끝에 주저 앉아 있던 T-34였다. 한 놈이 포탑 뒤에 웅크린 채로 기관단총을 조준하고 있었다. 전차 밖에서도 우리를 괴롭힐 생각이었다. 쿠르트가 기관총으로 그 놈을 전차 밖으로 떨어트렸다.
갑자기 신선한 바람이 쏟아져 들어왔다. 헬만이 큐폴라 해치를 열고는 ‘불타고 있는 타이거에게 가보자’고 명령했다. 나는 이유를 묻지 않고 20m를 다가갔다. 모두 죽은 것은 아니었다. 엔진데크에 떨어진 승무원은 몸에 불이 붙은 채로 아직 살아 있었다. 큐폴라에서 총성이 연이어 들렸다. 헬만이 그의 고통을 끝내 주었다.
헬만이 ‘저기 건널 곳이 있다. T-34가 사용하던 통로다. 운전병 대전차호 직전까지 가면 보일거다’라고 말했다.
대전차호 중간에 좁은 통로가 있었다. 타이거 한 대가 간신히 지날 수 있는 흙길이었는데 충분히 무게를 견딜 것 같았다. 실제로 우리에게 달려든 T-34 12대도 이 통로를 사용했다. 이 통로를 통해 마지막 목표인 벙커까지 갈 수 있었다.
쿠르트는 ‘이대로 그냥 모스크바까지 달리면 되겠네’라고 나를 놀렸다. 헬만이 가로채며 ‘아니다. 지뢰가 있어가 폭탄이 매설되어 있을 수 있다. 적군이 우리의 통과를 기다리다가 날려버릴 수도 있다’고 주의를 주었고 쿠르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대전차호는 현대전에서도 유용한 방어시설입니다.
헬만은 포수에게 ‘포를 낮춰 고폭탄으로 통로를 쏴봐’라고 명령했다.
‘길을 쏘라고요?’
‘그래’
88mm 주포의 포구를 아래로 낮추자 내 앞에 엄청난 포신이 보였다. 잠시 후에 포가 울부짖었다. 포연 때문에 아무 것도 안보이다가 잠시 후에 통로 전체가 완전히 날아갔다. 맙소사. 통로가 모두 날아갔다.
분명히 통로 아래에 화약이 매설되어 있었고 우리의 고폭탄이 그것을 건드렸다. 사방으로 암석과 돌조각을 날리며 통로 전체가 하늘로 치솟았다. 차체도 크게 흔들렸다. 흙더미가 관측창을 덮었고 머리 위에서는 자갈이 포탑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내 짐작이 맞았군. 이제 저 구덩이를 올라가도록,’
‘아무 것도 안보입니다.’
‘자네? 아니면 전차가?’
‘관측창이 전부 흙투성이입니다.’
‘나가서 청소하게. 빨리. 그리고 전방 상황도 함께 파악하도록. 파우스트Faust. 건너갈 수 있는지.’
해치를 열고 차체 위로 나갔다. 찬공기와 폭발냄새가 바로 내 얼굴을 때렸다. 주변을 돌아보았는데 경악스러웠다. 사방에 러시아군 시체가 널려 있었다. 통로는 완전히 파괴되어 자갈과 흙더미로 변했다. 그 너머의 벙커는 슈투카의 폭격을 맞고 연기를 뿜고 있었다.
내부로 들어간 후에 해치를 쾅 닫았다.
‘건널 수 있겠나?’
‘너무 깊습니다. 공병이 와서 메우거나 가교를 설치해야 합니다.’
‘아니야. 건너가야 하네. 지금 건너야 해. 보스도 없고 우리가 선도 전차다.’
‘처박힐 겁니다.’
‘그럼 저 T-34를 사용하세. 전차호 끝에 있는 T-34 말이야. 저 놈을 이용하세.’
내가 주저하자 헬만은 군화발로 내 어깨를 강하게 찼다. 그는 포탑 밖에 머리를 내민 채로 쿠르트나 나를 차곤 했다.
‘그렇게 해. 파우스트. 저 T-34를 전차호로 밀어 넣어.’
불타는 타이거의 승무원을 쏘았던 전차였다. 트랙이 날아가고 부비트랩 폭발로 엉망이 되었지만 전차호 구멍을 메우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전우가 뒤에서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실수하면 안되었다.
600마력의 타이거로는 진흙 위에서 T-34를 밀어내기에 힘이 부쳤다. 1단으로 바꾸고 다시 밀어 붙였다. 내 눈 앞을 가득 채운 전차가 조금씩 밀려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T-34의 전면 해치가 열리더니 피투성이가 된 얼굴이 나왔다. 계속 눈을 깜박이며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나는 계속 전차를 밀어냈고 겨우 4m 밖에 안 떨어진 그 놈은 그제서야 밖으로 나오려고 몸부림을 쳤다. T-34가 전차호로 굴러 떨어지자 비명을 질렀다. T-34는 후미부터 떨어져서 완전히 뒤집어졌다.
‘좋아.’ 헬만은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을 했다. ‘이제 저 전차를 발판으로 전차호를 건너가자. 파우스트.’
경험이 많은 쿠르트는 차체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T-34는 바닥 3m만 메웠기 때문에 타이거가 구덩이로 곤두박질쳤다. 나는 핸들이 전부였기 때문에 충격으로 이빨이 하나 부러졌다. T-34의 바닥에 올라선 타이거는 트랜스미션 오일을 내게 뿌려가며 반대편으로 올라갔다.
나는 피와 이빨을 내뱉고 있는 힘껏 타이거를 밀어붙였다. 쿠르트는 ‘훌륭해. 이 실력이면 전차감사관감이야’라고 칭찬했다.
헬만은 ‘아군이 우리 뒤를 따라 건너오고 있다. 2대, 이제 3대가 오고 있군. 운전병. 움직이도록. 사격판이 되지 말고. 쥐소굴을 청소할 차례야’라고 말했다.
근처의 벙커 잔해로 접근했다. 지붕이 무너져 내린 안에는 부서진 대전차포가 나뒹굴고 있었다. 가까이 가자 내부에서 소화기 섬광이 반짝이더니 장갑판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 발이 관측경에 긴 상처를 냈다.
포수는 재빨리 88mm를 내려 고폭탄 3발을 내부에 쏘았다. 벙커 벽면이 무너졌고 안에 있던 적은 어머니 러시아Mother Russia를 위해 저 세상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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