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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중일전쟁 당시의 일본군 편성 (2부)

by uesgi2003 2017. 11. 17.


우리가 알 필요없는 일본군 사단의 연혁이 많아서 그걸 걸러내다 보니 중간에 좀 갈팡질팡합니다. 중일전쟁 부분은 이 정도에서 끝내고 이후 태평양전쟁으로 이어갈 것인지는 고민하겠습니다. 


중일전쟁 당시의 일본군 편성 (2부)


일본군은 계속 승전했지만 중국은 너무 방대했다. 본토 깊숙이 들어갈수록 병력이 더 많이 필요했다. 보병비율을 크게 높인 독립혼성여단으로 전투와 수비 양쪽 모두를 해결하려고 했고 징병비율을 높여 19382, 6개 여단을 편성했다.

20세에 입대하는 신병숫자는 거의 변함이 없었던 반면, 육군배치는 193722.9% 170,000명에서 193844.4% 320,000명으로 급증했다. 개혁주의자가 득세했기 때문에 새로 징병된 사단은 이전과 달리 3개 연대로 편성되었다. 그리고 1938년 중반, 4개 사단(근위, 7, 1119)을 제외한 정규사단 모두 해외사령부 휘하로 편성되었다.

 

조선에 주둔 중이던 19사단은 만주국과 조선 부근의 소련국경 남단(조선인이 많이 사는 연해주)을 맡았다. 8개 국경수비대는 대대나 연대규모로 소련과 인접한 국경수비를 책임졌다. 711일에 편성된 23사단은 만주 서부지역에 특화되었다. 19사단은 19387월과 8월에 두만강 부근 하산호Lake Khasan에서 소련군과 전투를 벌여 1,440명의 사상자 피해를 입었다.

결국 이 전투는 외교중재로 끝났는데. 소련군이 만주진출은 고사하고 국경수비 준비에도 역부족이라고 판단하고 중국 남부로 병력을 내려 보냈다.



하산호전투는 1938년 7월 29일~8월 11일, 두만강 하산호수에서 벌어진 전투입니다. 숙청에 불만을 품은 소련군장교가 일본군에게 극비정보를 넘겨줍니다. 소련극동군이 나진항을 노릴 수 있는 고지를 선점해 보강한다는 계획이었고 관동군은 19사단을 투입해 소련군을 몰아냈습니다. 

초반 기습에 성공한 19사단의 75보병연대는 최고사령부은 확전을 염려해 증원요청을 거부합니다. 7월 31일, 소련은 1해안군과 태평양함대 동원령을 내리고 354대의 전차를 집결시킵니다. 

소련군은 일본군이 2주동안 사용한 포탄을 하루에 퍼부을 정도로 압도적인 전력이었지만 손발이 맞지 않았고 전차도 T-26과 같은 경전차로 오히려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원래 견제목적인 전투였기 때문에 일본이 먼저 휴전을 제안했고 소련이 받아들이면서 전투 전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소련군의 보병, 전차, 포화와 공습 모두를 이겨낸 일본군 지휘부는 소련군의 전력에 대해 경시하는 계기가 됩니다. 


 

난징(남경)193712월에 함락되었지만 중국군은 충칭(중경)으로 후퇴하며 포기하지 않았다. 19383, 일본군은 중국 북부와 중앙 대부분을 장악했다. 일본군은 기동력이 좋은 부대로 패주하는 중국군을 추격하며 격파했다.

중국군은 3월부터 다른 전략을 사용했다. 일본군을 맞상대하는 대신에 주력을 그대로 통과시키고는 나중에 길게 노출된 통신과 보급로를 노렸다. 타이얼좡(태아장)에서는 이런 전술로 깊숙이 추격해온 일본군 10사단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중국군은 보급로를 끊고 사방에서 압박했다.

이후 일본군은 매우 신중하게 접근했기 때문에 더 이상 타이얼좡과 같은 전과를 올리기 힘들어졌다.




타이얼좡전투는 중국의 스탈린그라드로 부르기도 합니다. 시가전에 돌입한 일본군은 오히려 압도적인 중국군에게 포위되었고 중국군은 일본군에 비해 큰 피해를 입었지만 처음으로 승전을 거둬 전국의 항일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온몸에 수류탄을 두른 병사가 일본군 전차에 자살공격을 감행할 정도였습니다.

 

중국군에게 쾌승을 거둬 중국북부를 받아낸다는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다. 이제는 일본이 중국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로 결정했다. 중국군의 보급은 대부분 중국남부를 거쳐 유입되었다. 193810, 새로 편성된 21(5, 18104사단)이 남부를 공격해 광저우(광주)를 점령했다.

중국군은 항복하지 않았고 일본군은 더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1939년 초, 10개 사단을 완전히 새로 편성하기로 결정했다. 2 7일에 5개 사단(32, 34~37사단), 325일에는 33사단을, 630일에 마지막 4개 사단(38, 39, 40, 41사단)을 편성했다.

새로 편성된 사단은 모두 보병 3개 연대, 포병연대, 기병 또는 정찰연대, 공병연대, 수송연대, 통신대대 등을 갖췄다.

 

1939년 중반, 중국점령지 수비를 위해 10개 사단을 더 편성했고 이 병력으로 중국군을 상대할 수 있다고 오판했다.

19395, 소련의 지원을 받은 몽골기병이 만주 남서쪽 외곽의 노몬한(할힌골)Nomonhan마을에 나타났다. 이 지역을 담당하던 23사단은 격퇴명령을 받고 초반에는 전세가 유리하게 돌아갔다. 일주일 후에는 전세가 완전히 반전되어 64보병연대가 포위되어 큰 피해를 입었다.

71, 사단전체가 투입되었고 34 전차연대와 7사단 일부도 동원되었다. 8, 소련은 전차와 야포를 대거 동원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 일본군을 궤멸시켰다. 일본군은 17,000명의 사상자 피해를 입었다. 9월 중반에 휴전이 되었지만 이제 만주는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1939년 5월 11일~9월 15일까지 벌어진 노몬한(할힌골)전투는 몽골기병 80명 정도가 말먹이를 찾아 월경하면서 황당하게 확전된 전투입니다. 만주국기병이 이들을 몰아내자 몽골군은 다시 대대적인 보복을 해왔고 23보병사단 정찰연대가 대응하면서 본격전인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몽골과 상호조약을 맺은 소련군이 참전하면서 정찰연대는 궤멸됩니다. 

본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관동군은 정예 7사단을 투입하면서 전면전으로 확전되었고 공중전까지 벌어져 양쪽 모두 200대가 넘는 항공기를 잃기도 했습니다. 



소련군 피해가 더 컸지만 일본군은 40,000명 중 절반이상을 잃었고 무모하게 확전시킨 관동군과 육군의 기세가 꺾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북방으로 진출하려던 육군의 계획 대신에 남방으로 진출하는 해군의 계획이 채택됩니다. 그리고 일본은 2차대전 내내 국경을 넘지 않고 소련과의 전쟁을 피합니다.

소련도 독일이 침공할 당시에 극동전선에 1,000,000명이 넘는 병력을 배치시켜 두었고 일본이 국경을 넘지 않은 것을 천운으로 여겼습니다. 소련의 명장 주코프가 첫번째 승리한 전장이 바로 노몬한입니다.


 

노모한전투에서 앞으로의 전투는 기계화와 중무장이라는 교훈을 얻을 만도 했는데 지휘부는 오히려 병사의 투지를 문제로 꼽았다. 1939년 한해 동안, 10개 사단을 본국으로 불러들여 평시편제로 낮췄다. 20사단은 조선으로 복귀해 마찬가지로 평시편제가 되었다. 101, 106, 108, 109114사단은 해체되었다.

중국의 일본군 전력은 100만 명으로 계속 유지되었다. 독립지원부대는 6개 기관총대대, 2개 전차연대, 12개 경전차중대, 7개 박격포대대, 4개 독립산악포연대, 2개 중포 여단과 연대 각각, 2개 대공포연대, 6개 공병연대로 국제기준으로 볼 때에 큰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점령지대가 워낙 방대해서 대부분의 부대는 수비임무에 치중했다. 할힌골 참패 후에 기존 사단의 4번째 보병연대를 떼어내 신규 4개사단을 관동군에 배치해 전력을 회복시켰다. 다른 사단도 보병연대를 떼어내 필요한 사단을 새로 편성했다.

 

일본 본토의 편제도 속도를 높였다. 19406, 황실근위대는 근위사단과 근위여단으로 분리되었다. 1939년 말이 되자, 전쟁상은 1942년까지 본국 병력을 65개 사단으로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중국원정군을 줄여야 했는데 반대로 중국원정군은 오히려 증파를 요청해 전쟁상의 계획을 무력화시켰다.

대신에 대대적으로 편제개편이 진행되었다. 전시사단은 임시편제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동원령에는 포함되지 않는 병력이었다. 기존 17대 사단만으로는 앞으로 다가올 전쟁에 대비할 수 없었다. 새 동원령은 정규군 사단을 AB로 구분했다.

전쟁전 정규사단과 23, 24, 25, 28사단이 A사단으로 분류되었다. B사단은 해외파병된 기존의 7개 지역에서 새로 편성된 사단이었다. 그리고 정규사단을 본토와 만주로 순환시키던 것도 관동군의 확대에 따라 중단되었다. 101, 106, 108, 109114사단을 소환해 해체시키고 B사단으로 재편성했다. B사단이 본토 지역을 책임지게 되었고 1940710, 54~57 4개 사단이 야전사단으로 편제되었다. 계속해서 51사단이 편성되었고 해체된 사단병력 중 B사단으로 편성되지 않은 병력은 독립보병집단으로 편성되었다.

할힌골패전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놀랍게도 19407월이 되어서야 대전차부대를 처음으로 편성했는데 그것도 겨우 5개 대대 수준이었다. 그리고 1936170,000명이던 징집병력이 1938320,000명으로 늘었는데도 정예병력은 정규사단으로 보내고 전시사단은 거꾸로 그저 그런 병력으로 보충했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다시 북쪽으로 시선이 돌려졌다. 일본군은 할힌골전투로 소련군을 더 이상 얕잡아 보지 않았지만 독일군이 초반 엄청난 성공을 거두자 손쉽게 만주 북부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또 다시 오판했다.

절호의 찬스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한 관동군은 1941년 여름 동안 400,000명의 병력을 700,000명으로 늘렸다. 증원된 병력은 전투원은 얼마 되지 않고 대부분 병참과 통신부대였다. 관동군사령부는 711, 대전차대대 5, 중포연대 4, 대공포대대 12, 굉장히 잡다한 수송, 통신, 의료부대를 만주로 증파했다.

81, 두번째 증파명령이 떨어졌고 5157사단, 3기병여단, 독립산악포연대 2, Heavy포연대 3, Medium포연대 8, 박격포대대 3, 대공포대대 5개와 상당한 지원부대를 보강했다. 88, 관동군사령부는 중국의 78전차연대를 만주로 이동시켰다.

 

2차대전 이전에 이루어진 마지막 보강이었고 관동군은 최대전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관동군은 이제 22A사단 중 절반, 2B사단과 1개 전시사단을 보유했다. 그렇지만 89, 일본군은 다시 남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후부터 관동군은 육군의 보충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 원인은 간단했다.

726, 미국은 일본자산을 동결시켰고 81일에는 석유수출을 금지시켰다. 다른 유럽국가가 그 뒤를 따르자 일본은 중국과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할 것인지 아니면 전쟁인지 고민해야 했다. 96, 일본정부는 전쟁계획 수립을 승인했다.

111, 마지막 외교협상안으로 중국을 그대로 점령하겠다고 제안했고 미국은 당연히 이 제안을 거부하면서 개전이 결정되었다.